무대디자인의 새로운 개념을 정립시킨 사람
-무대미술가 신선희
서연호 / 연극평론가, 고려대 교수
작품<연산>의 무대
서 : 오늘 이 자리에 모시게 돼서 기쁩니다. 완전히 다 관극하지는 못했습니다만 신선희씨가 만든 무대는 저 나름으로 열심히 보아온 편입니다. 첫 무대부터 주목을 끄는 의욕과 감각이 대단한 디자이너로구나 생각했었습니다. 우선 이번 「연산」(1995. 6. 17~7.5)작업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볼까요.
신 : 이윤택시가 희곡을 쓰기 전부터 이야기를 조금씩 해주었습니다. 연산을 자신에 비유하고, 그 인간성을 자유인, 개척자, 운명의 완성자, 모성의 갈구자 등으로 설명하더군요. 1막을 쓰는데 한달 걸렸습니다. 희곡이 얼른 나오지 않아서 진전이 잘 안되더군요. 전체적으로 여성적인 요소를 원하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래서 대밭과 낡은 집을 설정했습니다. 대밭은 혼령의 세계, 신령한 공간으로서 신화의 세계이고, 그 앞은 피폐한 공간, 덧없는 삶의 공간으로서의 현실 세계를 배치했습니다.
서 : 무대가 굉장히 좋았다는 느낌을 말씀드립니다. 한마디로 다양한 표현을 가능하게 하고 함축할 수 있는 표현주의적인 무대였습니다. 오랜 기억 속에 사라진 세계가 현실로 되살아나고, 산자와 죽은자들이 공존하고, 낡은 공간 가운데서 강력한 삶의 힘이 용솟음치는 그런 무대, 장치를 바꾸지 않고서도 변화 있게 사용할 수 있는 기능이 높은 무대였습니다.
신 : 애초에는 낡은 연못 위에 집을 띄우려고 생각했었습니다. 거미줄도 치고, 대밭도 깊어 보이게 하고, 그러나 공간이 좁아서 겨우 왕의 침상을 연못에 빠뜨리고, 대밭은 조명으로 깊이를 보완하는 정도가 되고 말았죠. 무대에 관한 이러한 이미지를 이윤택씨와 이야기해 가면서 2막 이후가 씌어진 겁니다. 서로 시간에 쫓기면서 사실은 희곡과 무대가 거의 동시에 만들어진 셈입니다.
서 : 이윤택씨의 욕심은 지나침이 많았다는 느낌입니다. 연산을 중심으로 하는 그 시대와 그 사람들의 행위와 의식을, 다시 말하자면 내면적인 진실된 삶을 무대의 이미지와 분위기에 알맞게 이끌어내면 그만이었다고 보는데, 그 위에다 현실적인 정치적 발언이나 풍자를 의도적으로 더 넣으려고 시도함으로써 오히려 덧칠, 군더더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애초의 극 본질 자체가 그런 이미지를 다 지니고 있었거든요.
신 : 세트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시간성이라고 생각합니다. 세트의 생명은 연극이 시작되어서 1, 2초에 불과합니다. 관객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연극의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고 나면, 세트가 거기 있다는 것을 다시 의식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초혼의 세계, 기억의 시간 속으로 관객을 초대해 주면 그만입니다. 세트에도 혼을 불어놓고 시간을 불어넣어야 합니다. 그 이후에 세트가 여러 가지 이상한 조작 때문에 스스로의 존재를 관객들에게 드러내면, 관객들은 연극에서 다시 걸어나오게 되죠. 세트가 연극을 방해한다는 말입니다. 의욕이 넘치는 이윤택씨와 작업하면서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제 입장에서 노력하기는 했습니다.
서 : 이번 세트는 정말로 시간성과 그 층위를 느끼게 해주었습니다. 의희한 단청 속에 옛날의 영화가 보이고, 무너진 연못에는 비극이 꿈틀거리고, 대숲에서는 돌아간 조상들이 되살아 나오고, 그 장엄한 스케일이며 그 섬세한 색채감이며 대단한 장인의 솜씨로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화제를 바꾸어서 언제 미국에서 귀국하셨습니까?
신 : 1983년 봄으로, 국내 첫무대는 연극제에 출품된 오태석 작. 김우옥 연출, 유덕형 조명의 「자전거」였습니다.
무대 미술가가 되기까지
서 : 평소에 궁금하게 여겼던 것은 어떻게 해서 신선희가 무대미술가가 되었을까 하는 점입니다. 국내 대학에서는 무엇을 전공하셨습니까?
신 :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했습니다. 아버지(新相默 ,작고)는 익산 분이시고 어머니(朴今玉)는 평양 분이십니다. 남도와 북도의 기질을 물려받았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님이 예술에 대한 이해가 높으시고 아울러 예능을 손수 배우셔서 저에게도 직접 가르쳐 주셨기 때문에 저는 어릴 때부터 전통 춤이나 북을 집에서 터득할 수 있었습니다. 무대는 3살 때 처음 서 보았는데, 선친이 군인(지리산 서남지구 전투사령관)이셨기에 남원, 전주, 제주도 등지를 다니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6학년 때 서울사대부국에 혼자 전학 와서 경기여중고를 다녔고 나중에 선친이 퇴직하신 후에 서울에서 가족들이 함께 살게 됐습니다.
서 : 중고교 시절에는 이른바 공부벌레였겠군요.
신 : 그렇지 않습니다. 자랑이 아니라 2등도 해보지 않았지만, 부모님께 배운 대로 독서와 연극관람, 영화감상, 그림그리기 등을 학교공부와 함께 병행했습니다. 중 3때 모의고사를 앞두고 시민회관(세종문화회관)에 무용을 보러간 적도 있습니다. 바하의 프렐류드에 맞추어 호세 리몽(미국 모던 댄스가, 작고) 이 춤을 추는데 저는 그 순간 무대를 발견했습니다. 빈 무대였는데 '이것이 우주의 축소공간이다'라고 무릎을 쳤죠. 제가 조숙했었나 봅니다. 그때부터 무대미술을 꿈꾸었지요.
서 : 그렇다면 영문과보다는 미술과로 진학했어야 하지 않습니까?
신 : 저는 미대를 가고 싶어 했습니다. 선친은 서울법대를 나와 외교관이 되고 나서 네 마음대로 글을 쓰는 문학가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모윤숙 여사보다 더 훌륭한 "한국 최초의 해방된 여성이 되라"는 것이고, "작품을 통해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은혜를 갚으라"는 거였습니다. 어머니가 중개자로 나섰습니다. 수줍음 잘 타고 조용한 성품인데다 크리스찬이니까 이대 영문과에 진학해서 영어를 공부한 다음에 유학 가서는 제 마음대로 공부하는 것이 어떠냐는 것이었지요.
서 : 미국에서는 어느 학교에서 공부하셨습니까?
신 : 1968년에 하와이대학 연극과 대학원 석사과정에 입학하였는데 한국에서 연극을 전공하지 않았으므로 학부강의까지 많이 이수해야 했습니다. 연기, 인형극, 댄스 등 다방면을 했지만 디자이너 교수에게 크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1975년에 뉴욕으로 갔습니다 지금 제 모교는 은사님의 실명으로 폐교되고 말았습니다만, 미국 무대 디자인의 터전을 놓아준 폴라코프 스튜디오 Polakov Studio, The Studio and Form of Stage Design 입니다. 은사님 폴라코프(유태인, 75세)를 비롯해서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이 지도했고, 기본과정은 3년인데 저는 5년을 다녔습니다. 고급 디지인반 시절부터는 선생님의 소개로 밖에서 일해가면서 공부했고, 그후 귀국 때까지는 프리랜서로서 많은 작품을 디자인했습니다. 미국에서의 데뷔작은 로비의 「동물원 이야기」입니다. 기성인으로 활약하면서도 녹슬지 않기 위해 2년간은 57번가에 있는 The Art Student League 에 다니면서 자기 수련을 쌓았습니다.
귀국 이후의 작품활동
서 : 미국에서 상당한 위치를 확보했는데 귀국한 동기는 무엇이었습니까?
신 : 아버지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왔는데, 말씀이 "그만큼 성숙했으면 조국에 봉사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한 마디로 "네"라고 대답했어요. 사실 오랫동안 미국에서 활동하다보니 제 정신적 성장도 멈추는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가방 하나만 들고 즉시 귀국하고 말았죠.
서 : 다시 1983년의 「자전거」 이야기로 되돌아가서, 연극사에 남을 만한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시간과 의식의 변화에 따라서 주인공이 둥그런 무대를 빙빙 돌아가면서 행동하던 장면이 눈에 선합니다.
신 : 제 집안도 정치와 관련된 국면이 많아서 「자전거」 를 제작하면서 굉장히 흥분했었습니다. 의도대로 잘 안됐습니다만, 인민군들이 동산을 불태우는 장면만이 아니라, 뒷동산에 소나무 숲을 만들어 놓고 그것도 불지르는 것으로 계획했습니다. 우리에게 소나무가 얼마나 신령한 대상입니까, 예산도 부족하고 일손도 부족하고 애로가 많았습니다. 이학순씨가 그 당시의 제 첫 제자입니다. 연출자가 애초에 '길'을 연상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주인공이 길을 가면서 변화하는 시간, 시간에 따른 의식의 변화, 그리고 시간의 반복, 그런 가운데서 어떤 원형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세트를 고안해내게 된 것이죠. 저는 세트에서 '토운(어조)'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슬픈 얼굴, 혹은 담담한 표정, 혹은 성난 표정 등 어떤 식으로 말하는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정서와 분위기라고도 할 수 있죠. 세트는 그 이상 설명하면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서 : 그 이외 작품으로 기억되는 작품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신 : 1986년에 만든 「비옹사옹」 입니다.
서 : 국립극단이 했지만 무대는 문예회관 대극장이었죠. 이강백씨가 대본을 만들고 이승규씨가 연출한 작품인데 특히 설화적 분위기가 떠오릅니다.
신 : 작품의 세계에 대하여 이승규씨가 이야기를 자상하게 많이 해 주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으면 아이디어가 막 떠올라요. 매우 훌륭한 연출가라고 생각합니다. 세트는 동양화의 여백 같은 빈공간을 하나하나 이야기와 삶의 현장으로 살려가는 방식입니다. 삶의 싸이클 같은 원형성을 드러내도록 했죠. 아침에 해가 뜨고 한낮이 되고 다시 달이 솟아오르고, 마치 페이지를 넘기듯이 민화와 같은 색상의 세트들이 지나가고 그와 더불어 극이 진행됩니다. 얼룩진 당사주 책의 이미지를 연상했습니다. 실제로 달맞이꽃이 피고 해바라기가 피는 모습도 계획했고, 컨베어에 세트와 사람들을 실어서 차례로 무대를 들락거리면서 극이 진행되는 계획도 세웠습니다만, 준비가 잘 되지는 못했습니다.
서 : 주옥 같은 작품이었다고 기억됩니다. 설화적인 세트와 삶의 원형성이 잘 조화된 연극이었죠. 그다음에는 어떤 극이 떠오르십니까?
신 : 1989년에 동숭아트센터 소극장 개관기념이었던 이병훈 연출의 「꼽추왕국」 입니다. 제가 해 본 유일한 서양극 무대입니다. 저는 미국에서 공부했기에 서양에 관한 지식과 감각이 풍부한데도 웬일인지 번역극은 잘 되지 않아요. 오히려 어릴 때 기억밖에 없지만 우리 정서가 친근하게 마음에 들어옵니다.
서 : 색채가 무척 강렬했다는 인상이 떠오릅니다.
신 : 모두 18장면으로 된, 희곡이 워낙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살기 위해서 살인을 해야 하는 피의 충동이랄까 생명의 충동이랄까 하는 이미지를 표현해 보았습니다. 살아있는 살결의 이미지를 드러내기 위해 원래는 명주천을 쓰고 거기에 빨간 피가 배어 나오는 방식을 해 보고 싶었지만 세트비 1백만 원으로 감히 엄두도 못 내는 재료라서 명주 대신 광목을 사용했습니다. 벽과 바닥이 만나는 곳에서부터 피가 터져 나오듯이 칠을 했지요. 계단도 일부러 높여서 젊은이들이 도전하는 이미지를 높였습니다. 무대는 기능하는 공간만이 아니라 배우들이 도전하는 공간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서 : 다음에 기억나는 작품은 무엇입니까?
신 : 1991년 호암 아트홀에서 한 「길 떠나는 가족」입니다.
서 : 연극제에 출품되어 문예회관 대극장에서 공연되었고, 대상작이 되어서 그 상금으로 미국공연을 했고, 그리고 나서 다시 손질해서 호암에서 공연한 작품이군요.
신 : 이중섭의 생애를 화가에 초점을 맞추느냐 인간에 초점을 맞추느냐로 고심했지만, 확실한 답은 얻지 못했습니다. 문예회관에서 공연했을 때의 비디오를 보면서 많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꿈을 꾸는데 이중섭이 자기 그림을 모두 불태우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모든 것을 불태운 사람. 지금은 재밖에 안 남은 좌절한 화가, 그러나 생애를 아주 아름답게 살다간 사람, 순수하게 살다간 사람이라는 점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무대에 흰색을 많이 쓰고 그 위에 '그림'들을 프로젝션하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이중섭을 아주 좋아하는 화가 백미혜씨가 독일에서 와서 직접 그려 주었죠. 그분이 그린 슬라이드, 원화 슬라이드, 6.25의 사진, 그의 고향인 황금빛의 원산 앞바다 등을 계속해서 비추면서 극이 진행되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모든 영상들이 사라지고 어린아이들의 뼈다귀만 남는 것으로 계획했습니다만, 조명의 처리가 제대로 해주지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참 보람을 느낀 작업이었습니다.
서 ; 지난해 봄 인천시립극단에서 했던 「낸시 차여사 고향에 오다」는 어떻게 만들어진 겁니까?
신 : 애초에는 이념적인 연극을 전제로 해서 구상을 했었습니다. 이승규씨 말씀이 그런 서구적인 것은 후일 하기로 하고, 우선은 재미있고 여기 경인지방의 현에 맞는 무대를 만들자고 했어요. 연습에 몇일 참여하면서 그 공간배치와 움직임과 이미지에 맞는 세트를 현장에서 모두 구상하게 된 겁니다. 가난한 것은 아름답다는 의미를 살리고자 세심하게 배려했습니다.
서 : 무대 디자이너로서의 자세에 대해 결론적인 말씀을 남겨 주십시오.
신 : 꽃이 소리없이 피듯이, 창조정신을 가지고 지속적으로 작업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스템 이전에 예술정신, 진실을 추구하겠다는 치열한 정신이 우선해야 합니다. 예술적 충동이 있다 하더라도, 삶과 분리된 연극이 아니라, 삶의 정신적 가치를 존중하는 정직한 접근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무대는 물론, 의상, 소품까지도 제 손으로 해보고 싶습니다.
서 : 오늘 말씀 여러 가지고 감사합니다. 앞으로 더욱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