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의 현장을 찾아서

혼신의 정열로만 나오는 색, 漆

-강원도 지방의 옻칠과 전통칠기




이장섭 / 한국문화정책개발원 책임연구원

전통칠기는 옻칠로 완성된다. 그래서 옻칠과 전통칠기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전통칠기하면 우리는 흔히 나전칠기를 떠올린다. 그만큼 많이 알려진 탓이다. 칠보다는 나전으로만 일반인에게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나전칠기도 장식의 효과인 나전 그 자체로는 완성되지 못한다. 칠기에서 칠의 중요성이 여기에 있다. 즉 칠없는 나전은 성립이 되지 않지만 나전없는 칠은 가능하다는 것이다. 모든 전통칠기는 칠로써 미적 마무리가 된다는 점에서 칠의 가치가 있다. 한편 칠로 시작하여 칠로써 완성되는 칠기가 바로 낙랑칠기라는 것이다. 칠로써 장식을 하고 색을 내서 완성되는 전통칠기이다.

전통칠기는 크게 네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가장 많이 알려진 나전칠기, 낙랑칠기, 목칠기 그리고 협저칠기가 그것이다. 나전칠기는 조개와 소라껍질을 톱으로 '줄음질'을 하거나 칼이나 가위로 '끊음질'을 해서 문양을 만든다. 낙랑칠기는 그것이 낙랑군시대의 발굴유물에서 발견되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이는 옻칠로써 문양을 만들고 색을 낸 칠기이다. 고려시대 이후 나전칠기가 크게 번성하면서 낙랑칠기의 생명이 끊어졌다고 하지만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목칠기는 나무의 결을 그대로 살려 문양을 만드는 칠기이다. 협저칠기 또는 건칠기는 나무에 모시나 삼베를 겹겹이 칠과 함께 쌓아 붙여서 만드는 칠기로 항아리나 그릇을 만드는 데 주로 사용된다.

현재 전통칠기의 지정 무형문화재는 나전칠기 부문에만 한정되어 있다. 전통칠기에서의 칠의 가치는 아직 그 중요성이 덜 인식된 듯하다. 옻칠은 그 생산 및 정제, 그리고 칠하는 장인으로 구분된다. 강원도 원주지방은 전래로 옻 생산지로 유명하고, 이곳에 '낙랑칠기', 곧 채화칠기 또는 칠화칠기의 장인인 양유전 선생이 터를 내리고 있다. 채화나 칠화칠기라는 명칭은 낙랑칠기라 할 때 단지 발굴유물만을 지칭하는 것 같아 붙여진 새로운 이름이다.

전통칠기 중에서 양선생이 칠화칠기 부문에 평생을 투자하게 된 연유는 그의 스승이신 김봉룡(金奉龍, 지정무형문화재, 1994년 작고)선생과의 만남에서 시작된다. 경남 충무가 고향인 양선생은 60년대말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고등학교 2년을 중퇴하고 '밥벌이를 하고자' 나전칠기업에 발을 들여 놓았다. 당시만 해도 충무는 나전칠기 생산에 종사하는 소규모 업체가 많은 곳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영세업체에서는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이 쉽지 않았고, 해서 부산, 여수, 목포, 광주, 서울 등의 여러 나전칠기업체를 이곳 저곳 옮겨다녔다. 군복무를 마치던 해인 1974년에 현재 제2의 고향으로 뿌리를 내린 이곳 원주에 정착하였다. 원주로의 이주는 전통칠기의 장인인 김봉룡 선생의 문하에서 본격적인 칠기수업을 작심하고 비롯된 결정이었다. 은사이신 김봉룡 선생은 일제시대 이래 칠기제작에서 카슈칠이 보편화되고 그것이 소위 '장사'에 여러 가지 장점이 많지만 평생의 작업을 옻칠만 고집하신 분이었다. 이 문하에서 양선생은 본격적으로 옻칠의 수업을 받게 되었으니 칠화칠기의 장인으로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출발이 바로 여기다.

김봉룡 선생께 입문한 이래 처음에는 옻칠의 기본만을 전수받았는데 근 삼 년 동안은 옻이 올라서 바깥출입을 못할 정도였다. 옻오르는 것이 삼 년만 견디면 사라진다는 말에 그 고통을 참고 지낸 세월이었다고 양선생은 회고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선생의 성실성을 눈여겨 보신 스승은 1년여가 지나자 낙랑칠기의 비법을 찾아보라는 숙제를 주신 것이다. 그로부터 여러 문헌을 찾아 공부하는 한편 스스로 색을 개발하고, 작품을 만들기를 어언 20여 년, 이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경지에 이르렀으나 지금도 양선생은 "선생님이 주신 숙제를 푸는 마음으로"칠화칠기의 재현에 정열을 불태우고 있다.

칠화칠기는 시작과 마무리가 모두 옻칠로 이뤄진다. 칠공정의 약 70% 정도는 옻나무에서 바로 받아낸 옻을 말하는 '생칠'로 하는 작업이고 나머지는 생칠을 가공한 '정제칠'을 사용한다. 생칠의 경우 원주지방에서 생산되는 자연옻을 사용하지만 정제칠은 전부 일본에서 수입한다.

옻나무는 중앙아시아 고원지대가 원산지로 알려져 있고 중국과 우리나라에도 분포되어 있다. 신라시대의 고분에서 옻칠한 관이 발굴된 것이 가장 오래된 옻칠의 증거물이다. 옻나무는 전래로 칠기의 주재료인 옻칠뿐 아니라 민간에서 여러 용도로 활용되었다.

약용으로는 여러 가지에 효용이 있음이 이미 본초강목과 동의보감 등에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노년기에 머리가 검어지고 주름살이 없어진다고 하여 불노초의 하나로 여겨졌는가 하면, 여성에게는 통경, 경도불순, 냉에 유효하다고 하고, 체하거나 제대로 못 먹은 아이의 손다리 꼬일 때 먹이고 구충제로도 이용되었다. 요즘까지 이어지는 특수식의 하나인 옻닭은 옻의 강장효과를 인정한 것이다.

과거 우물가에 옻나무를 심으면 벌레가 꼬이지 않았다고 하고 장 담글 때 옻나무 가지를 넣으면 벌레가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닭장 주변에 옻나무를 심으면 닭이 유행병에 걸리지 않는다든가 병든 닭은 옻나무에 걸어두면 낫는 다는 속설이 있다. 노루와 사슴이 옻나무풀을 즐겨 먹는다는 것은 옻의 신비성을 얘기하려는 것이리라.

원주지방은 전래로 명성이 자자한 옻생산지답게 현재도 국내 생산량의 90% 이상을 생산한다. 일제 때 식민지 관청은 이곳에 옻나무 단지를 조성하여 옻칠을 채취, 그들 나라로 가져갔다. 광복 후 거의 사라지는 듯하였다가 우리의 전통을 다시 생각할만한 여유가 생겨난 근자에 와서야 이곳에서도 다시 원주 전통 옻생산에 관심이 일고 있다.

5년 전에는 '원주군 옻생산조합'이 결성되어 과거 옻나무 생산지의 명예를 되찾고자 노력하고 있다. 농어촌 대체작물 육성이라는 정부시책과도 맞아서 원주군에서 묘목과 비료비용을 지원하였다. 현재는 묘목을 심고 가꾸는 자원조성 단계에 있지만 산업사회에서 옻의 미래는 밝고 그래서 조합원의 장래도 희망적이라고 김봉렬 조합장은 전한다.

옻나무에서 바로 받아낸 생칠을 정제하는 과정은 몇 가지 공정을 거친다. 생칠에서 수분과 불순물을 제거한 맑은 옻을 '주압칠'이라 한다. 이 주압칠에 여러 가지 자연 안료를 배합하면 다양한 색의 옻칠재료가 된다. 예컨대 주압칠에 철분을 가미하면 검은색이 나타난다. 일순 단순해 보이는 이 정제칠 제조는 아직 우리 나라에서 만들지 못하고 소비량 전부를 일본에서 수입하여 사용한다.

정제칠의 국내생산은 원주에서 정균이란 분이 시도한 바 있었다. '원도공예'라는 공장을 횡성농공 단지에 80년대 후반에 설립하여 정제칠 제조를 했었으나 기술개발에 대한 투자의 한계와 판로개척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여 파산하고 말았다. 개인적인 의지로 해결하지 못할 부분에서 실패를 본 것이다. 정제칠의 수요량을 전부 일본에서 수입해야 하는 실정은 옻칠로 완성되는 여러 전통칠기의 경쟁력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정제칠의 의미는 그 가격에서 분명해진다. 국내 생산 생칠이 1관에 70만 원 정도라면 수입된 정제칠은 300만 원을 호가한다. 정제칠 제조에 사회적 관심이 시급한 이유는 전통칠기에서 전통성의 고수와 창작을 위해 필수적인 옻의 정제 없이는 옻 생산도 기대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생칠만으로는 전통칠기의 한정된 부분에서만 전통성을 찾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아가 국내에 정제공장만 제대로 가동되면 옻 생산도 자동적으로 증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조합의 초기 옻칠 생산품은 일본으로 수출도 하고 국내 시판도 하였으나 중국한 등장 이후 가격 경쟁에서 뒤져 지금은 생산량이 남아 있는 실정이다. 국내생산에 비해 1/6정도밖에 되지 않는 중국산의 가격에 원인이 있다. 물론 질에서는 엄청난 차이를 보인다. 조합의 조사분석 결과 중국산은 냄새가 날 뿐 아니라 건조도 잘 되지 않아 칠재료로써는 적합치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고 한다. 하지만 이 문제는 다른 전통상품에서도 마찬가지로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에 값싼 중국산의 유입에 대한 전반적인 대응문제도 논의되어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산업사회에서 옻칠은 단지 전통칠기의 재료로서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다. 산업용 도료로써의 옻칠은 외국에서 실용화 단계에 도달해 있는 실정이다. 옻칠의 내열성, 내구성, 높은 경도와 강도, 높은 발화점 따위의 특성은 이미 입증되었다. 일본의 '화신'이라는 도료회사에서는 옻칠연구부서를 따로 두어, 옻의 과학적 분석으로 우주산업, 항공기와 선박, 무기부속품의 도색재료로 이용하고 있다. 다른 어떤 도료보다 완벽에 가까운 옻칠의 우수성이 인정된 것이다.

이 점은 이미 옻칠된 신라고분의 목관이 거의 원형상태로 발굴되어 옻칠의 영구적 내구성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기업이나 학계가 옻칠에 관심조차 없는 동안 외국에서는 옻칠의 우수성을 첨단산업화로 전환시키고 있다. 우리나라의 옻칠 소비량이 연간 2톤인데 비해 일본은 200톤이 넘는다. 옻칠의 현대화로의 기술개발은 우선 정제기술에 관건이 있다. 앞서 본 바와 같이 한 개인의 의지와 노력에 의한 정제공장의 시도가 무산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러한 양상은 약용으로써 옻의 가능성에 대한 관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김봉렬 조합장은 약용으로서의 옻의 개발 문제도 자신이 경영하는 한약방에서 외로이 개발중에 있다고 한다. 일본에서는 옻드링크제가 시판되고 있는 실정이다.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책상에서만 이뤄지고 있지는 않은지 되돌아 보아야 한다. 이러한 관심이 행정과 연관된다면 현장의 소리를 알고자 찾아 다니는 행정일 때 탁상공론에서 벗어날 수 있다. 특히 문화에 관한 한 이 명제는 더욱 절실하다.

'전통을 지키기 위한 전통고수가 아니라 그것을 모태로 오늘날 산업사회에 활용될 수 있도록 개발할 때 그 전통은 더욱 빛을 말한다'는 양선생의 고언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가 전통이 사라져간다고 아쉬워하는 동안 우리의 전통은 우리 눈 앞에서 사위어지고 만다. 전통은 고정불변의 것이 아니라 그 기능적인 맥락이 오늘날 사회생활에서 적합하게 전승될 때 고유의 문화로서 가치를 가진다. 생활문화와 관련된 전통은 더욱 그러하다. 박제되어 보존된 전통은 과거의 유물이거나 잔존물로 간주될 뿐이다. 전통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와 혁신으로 세대를 이어 전승되는 것이다 그래서 전통을 논할 때 우리는 우리 문화의 고유한 '원형'에만 집착하는 아집을 버려야 한다. 그것은 문화를 이데올로기화시킬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다.

옻칠을 사용해야 하는 나전칠기와 칠화칠기를 포함한 전통칠기에서의 또다른 문제는 가짜 옻칠의 문제이다. 이는 전통칠기의 전승문제(특히 칠작업)와 옻생산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옻칠의 최대 '적'은 캬슈칠이다. 옻칠을 가장한 가짜 전통칠기의 대표적인 수법이 캬슈칠을 사용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몇 공정에 걸친 까다로운 칠작업이 간단한 캬슈칠로 대신되고 마지막에 옻칠을 슬쩍하여 옻칠 칠기로 둔갑하는 것이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열대 나무열매 즙을 화학처리하여 가공한 합성도료인 캬슈칠의 가격이 옻칠의 1/80 정도이고, 칠작업에서 전문성을 요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일 현재 서울의 유명 전통칠기 판매장의 제품들이 선전대로 전부 옻칠제품이라면 원주에서 생산되는 옻칠이 남아돌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의 견해이다.

옻칠로 만들어진 작품은 세월이 지날수록 그 색이 더욱 선명하게 살아난다. 그것은 건조 후에 칠의 생명이 존재한다. 캬슈나 페인트 같은 다른 칠은 건조 후 탈색되는 것이 보통인데 옻칠은 발색하여 색의 생명력을 지속한다. 습기를 흡수하고 공기 등 여타 물질과 합성하여 화학반응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전통칠기가 빛을 발하기 위해선 이 본래의 장점을 지속시킬 수 있는 제도가 절실하다.

채화칠기는 현재 응접테이블, 사주함 또는 보석함과 같은 함종류, 문갑, 화장대, 기타 현대사회의 주거생활에 적합한 물목을 대상으로 제조된다. 칠화칠기의 목재는 홍송과 춘양목의 고재가 주로 쓰인다. 고재(古材)는 옛집을 헐고서 나오는 고목을 말하며, 과거의 기와한옥이나 일제 때 만들어진 일본식 집에서 수집하며 이를 전문으로 하는 종사자가 따로 있다. 말하자면 50년 이상 자연상태에서 잘 건조된 나무를 재료로 하는 것이다 . 양선생에 따르면 이러한 고재의 수급은 지금은 큰 어려움이 없다고 한다. 칠기의 수요가 많지도 않을뿐더러 대량생산하는 품목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생되던 춘양목은 일제 때 남벌되어 거의 멸종상태에 이르렀으나 최근에 정부에서 보호수중으로 지정한 이후 울진, 삼척 일대에 어느 정도 생장되고 있기에 다음 세대에는 칠기의 목재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칠호칠기는 대개 다음의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① 목공일은 목공(소목)에게 의뢰하는데 약 6개월의 기간이 소요된다. 소목은 나무문양을 살려 목기장을 짜는 경우 지정문화재로 인정받고 있다.

② 밑칠 : 생칠로 하는 1차 도장으로 이것은 초보수준의 칠을 하는 사람이 담당할 수 있다. 이후 삼베를 바르고(환다) 토분과 생칠로써 베눈을 메우고 다시 그 위에 목탄분과 쌀풀을 생칠과 함께 섞어 만든 '탄회' 바르기를 한다.

③ 초벌, 재벌 칠 : 토분과 생칠로 도장하는 '사비'를 2차에 걸쳐 하고 검정이나 색칠로써 초벌, 재벌칠을 한다.

④ 중칠, 상칠 : 색칠을 하기 전단계에 칠, 연마, 수정에 걸친 중칠, 상칠을 한 다음 건조시킨다.

⑤ 화공: 밑그림과 칠그림을 그린 후 칠화의 작업이 시작된다

⑥ 마무리칠 : 완전 건조 후 네 번에 걸친 '섭칠(덧칠)'과 광내기로 작품이 완성된다. 이 작업은 칠전문가만이 가능하다.

양선생의 작품은 알음알음으로 유통되는 것 외에는 없는 실정이다. 칠화칠기가 대량생산될 성질의 것도 아니고 또한 일상적인 소비제품도 아니기 때문이다. 80년대 후반까지는 여러 응모전에 출품하여 수 차례 입상한 바 있으나 그 이후 출품은 하지 않는다. 작년에는 미국 뉴욕의 BAI 갤러리에서 초대전시회 요청을 받았으나 운송료, 작품보험금 등이 없어 포기한 바 있다.

작품이라 명하는 것은 이것이 단순한 기술적 제작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정렬없이는 완성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분야의 소위 '쟁이'가 되는 것은 몇 년의 노력으로도 불가능한 일이다. 5년 정도 칠작업을 익히면 '칠을 조금 아는 경지에 이르고' 10년이 넘어야 '제대로 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20년이 넘게 칠화칠기에 종사하고 있는 양선생도 "아직 선생님이 주신 숙제를 못풀고 있다"고 스스로 겸손한 평가를 내린다. 하나의 작품을 제작하는 기간도 한 장인의 혼신의 정열을 담았을 경우 몇 년의 세월이 요구된다. 예술함과 같은 소품도 1년여가 소요되고 장롱과 같은 경우는 칠화작업까지 4~5년이 걸린다. 따라서 칠화칠기의 예술성과 고급성은 작품의 제작과정에 이미 담보되어 있다 하겠다.

무엇보다 아쉬운 것은 이러한 일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아 모든 일을 양선생 혼자서 해야 하는 어려움이다. 옻칠로 새로운 색을 내는 일에서 작품의 현대적 디자인 구상까지 모두가 외로운 혼자만의 일이다. 이 업에 전념할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보니 제자를 기를 엄도는 아예 내지도 못하고 있다. 이 시대의 젊은이들의 생활가치가 육체적인 고통을 수반하는 수작업으로 이뤄지는 칠기업을 배척할 뿐 아니라 그러한 노력에 대한 대가는 전무한 시정이기 때문이다. 관심있는 젊은이도 배우러 왔다가 그냥 가는 실정이다. 한마디로 '선생이라는 사람이 제대로 먹지도 못하는" 것을 보았을 때 주저앉아 일을 배울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다는 것이다.

생계보장도 되지 않는 이 현실에서 이 소위 '전통의 계승' 에 뛰어들 사람도 찾기 힘들뿐더러 그것을 권유한다는 것도 쉽지 않다.

연전 한 독지가의 배려를 몇 차례나 거절하다가 뿌리칠 수 없는 지경에서 받아들인 현재의 집은 가족의 생활과 그의 작업장을 겸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집을 내놓아야 할 지경에 이를 만큼 어려운 상황에 봉착해 있다. "이제 집을 팔 생각입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결단 속에는 칠화칠기 작품 제작을 계속하고자는 장인의 의지와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마저 포기할 수밖에 없음을 함께 담고 있다.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전통장인의 가치를 높이 인정하는 데는 인색하지 않은 반면, 장인의 생계는 방치된 현실이 비단 이 부문에서만 보여지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이 연재에서 여러 차례 확인한 바 있다.

청허심(淸虛心)!

작품이 보관된 거실 한 벽에 걸린 액자 속의 이 말만이 옻칠과 함께 한 양선생의 인생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마음을 맑게 비우지 못하면 이 어려운 환경 속에서 전통의 맥을 잇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칠화칠기의 장래와 후진양성에 확고한 희망을 가진다. "나는 밥을 먹기 위해 일을 배웠지만 앞으로는 인생을 걸 수 있는 시대가 올거라고 기대한다."고 선생은 말한다. 왜냐하면 고려 이래 생명이 끊겨진 칠화칠기의 재현이 선생의 몫이고 그것을 꽃피울 세대는 그의 제자들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옻칠에 대한 그의 생각은 칠 이상의 것이다. '옻칠은 단순한 도색으로서의 칠이 아니다. 혼신의 정열과 애정을 가져야만 색이 나오는 예술인 것이다. 그것은 마치 자연과 더불어 사는 것과 같이 쟁이의 정신적 합일로써 완성된다"는 것이 양선생의 철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