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화예술의 현장 / 미술

포스트모더니즘과 예술개념의 종말

-경계의 와해




김원방 / 미술평론가

포스트모더니즘 문화와 예술의 가장 중요한 특징을 요약하는 핵심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경계의 와해'이다.

원래 이 경계의 와해는 롤랑 바르트나 쟈크 데리다, 폴 드만 등의 후기 구조주의자들과 해체론자들에 의해 개시된 문제였다. 이러한 경계라는 문제가 포스트모더니즘의 담론 중심부에 수용된 이후 우리는 문화 전반에 걸쳐 경계라는 용어의 홍수를 경험하고 있다. 작년 10월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아방가르드 및 플럭서스 미술전시회의 제목은 '경계를 넘어서' 였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지난번에 케르테스의 기획으로 열린 휘트니비엔날레의 포괄적인 주제 역시 마찬가지로, 이 전시 역시 종래의 시각적 기준과 미술사적 담론의 경계를 완전히 무시하는 듯한 새로운 '뒤죽박죽'식의 도발적이고 종잡기 힘든 방식의 전시개념으로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이번 한국에서 열릴 예정인 광주비엔날레의 주제 역시 '경계를 넘어서'라고 한다. '경계를 넘어서'라는, 실로 아무리 퍼 올려도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중대한 이 주제가 갑자기 한국땅에서 광적인 물량공세를 통해 행사화될 때 그러한 급작스런 콜라주가 이루는 풍경이 어떤 것이 될지 궁금하지만, 이 글에서 간략히 접근해보고자 하는 바는 그러한 '탈경계화'라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명제가 극단적으로 심화될 때 예술개념에 필연적으로 수반될 수 있는 새로운 진화의 양상에 대한 것이다.

예술과 실재의 만남은 불가능인가

포스트모던 예술에 있어 '경계의 와해'는 다음과 같이 예술 내적인 면과 예술 외적인 면, 즉 자신의 안과 밖을 향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는 측면이다. 우선 자신의 내적 경계들의 와해란 다름아닌 예술과 예술, 장르와 장르, 스타일과 스타일 사이의 경계가 무너지고 교류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차용이나 혼성모방적 양상, 미국마술의 중요한 이슈거리인 다문화주의, 페미니즘 같은 것들은 바로 이러한 예술 내적인 경계의 무너짐의 양상일 것이다. 반면 내가 주목하고 싶은 바는 이러한 여러 가지 경계들의 무너짐이 지향하는 좀더 근원적이고도 궁극적인 지점이다. 그것은 바로 예술과 실재('삶'이나 '현실', '일상' 등의 개념으로서의) 사이의 관계이다. 일반적으로 아방가르드적 예술들의 일관된 특징이라면, 예술을 그 인위적이고 자족적인 틀로부터 해방시키고, 실제의 삶의 영역으로 확산시키는 것, 그리하여 삶 그 자체의 직접적인 양상을 예술을 통해 드러냄으로써 예술에 어떤 '진실성'을 도입하려 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이 제기되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선 그러한 '예술과 실재의 만남'이란 것(즉 예술과 실재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그럼으로써 예술을 더욱 실재적으로 만들기)이 과연 성공한 것인가의 여부, 그리고 하나의 교과서적 질문으로서 그러한 아방가르드적 예술 전통의 일관된 강령이 포스트모노더니즘 문화와 예술 속에서도 지속되고 있는가의 여부이다.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나는 그러한 아방가르드 미술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으며 나아가 그러한 '실재/재현'의 대립 속에서 파악되는 변증법적 예술개념이란 오늘날 고도로 정보화되고 기호화된 매체문화 속에서의 예술과 사고의 풍속도를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보기에 예술이 리얼리티와 합하거나 그것을 도입함으로써 더욱 진실하게 될 수 있다는 믿음은 그 자체가 허위이며 불가능한 시도일 뿐이다.

이러한 회의를 통해 여기서 내가 말하려 하는 바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우선 '실재세계로의 확산'이나 '일상의 도입'같이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에 있어서도 여전히 유행하고 있는 개념들은 실은 아방가르드적 미학의 청산해야 될 잔재일지도 모른다는 점, 그리고 오늘날 '경계를 넘어서'라는 포스트모더니즘적 명제를 받아들이고 그러한 관점 속에서 현재는 물론 나아가 모더니즘예술과 과거의 모든 지나간 역사들을 이러한 확장된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 의거하여 역으로 소급하여 뒤집어 읽고 반추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자에게 있어서는 종래의 '예술'이란 개념이 아직도 너무나 구태의연해 보일 뿐이며 이를 대체할 새로운 예술개념이나 정의 같은 것이 요구된다는 점이다.

예술이 왜 실재와의 화합에 실패하였는가, 그리고 그러한 논리적 딜레마의 질곡으로부터 자유로운 또는 새로운 예술개념의 양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여기서는 단지 앙또냉 아르또의 연극이론과 이에 대한 해체론적인 이해를 예로 듦으로써 복잡한 답변의 실마리를 풀어보도록 하자.

예술은 실재를 저당잡히는 위선적 경계의 파괴

앙또냉 아르또의 극이론은 포스트모던 연극의 중요한 원형으로 간주되기도 하는데, 그의 연극이 지향하는 바는 연극으로부터 '연극의 텍스트가 지니는 권위'를 제거해내는 데 있었다. 연극은 자신만이 내적으로 지니고 있는 색깔, 광선, 동작, 제스처, 공간 등과 같은 연극언어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아르또에게 있어 연극의 적은 텍스트이다. 비록 대사는 아주 제거되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의 왜곡과 함정이 최대한 배제되도록 한정되며 그럼으로써 마음으로 직접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원초적인 연극이 가능하게 된다. 즉 연극은 문학적인 연극으로부터 벗어나게 되며 언어는 더욱더 물리적인 방식에 의존하게 된다. 쟈끄 데리다는 아르또의 연극이 '언어중심주의 logocentrism'-즉 모든 사고를 언어를 통해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방식으로' 재현할 수 있다고 보는-에 대항하는 처절한 투쟁이라고 논평한다. 그리하여 무대는 이제는 더 이상 '현재'의 반복으로 작동하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르또의 연극은 퍼포먼스적인 것이 되며 이것은 일종의 '강력한 파괴행위'이다.

데리다는 그러나 이러한 아르또의 잔혹연극이 사실상 불가능함을 지적한다. 극의 어떠한 행위가 아무리 임의적인 것 같고 전혀 필수조건이 붙어있지 않은 것 같아도, 그 행위는 극이라는 사실 때문에 항상 어느 정도는 재현과 반복을 포함한다. 데리다에 의하면, 아르또는 잔혹연극이 단순한 '현존'(오직 연극성만으로 이루어지는)의 순수성 내에서는 시작도 끝도 없다는 사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텍스트적 읽기'라고 하는 '제2의 창조의 시간'과의 힘의 갈등 속에 연루됨으로써 피할 수 없이 재현의 울타리 안에 포섭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이 점은 연극이 아무리 극단적으로 퍼포먼스화하여 자신의 연극적 경계를 허문다 해도 결국은 연극으로 남게 된다는 숙명적 딜레마이다. 나아가 예술은 자신이 아무리 자신으로부터 이미 주어진 '초월적인 예술개념의 재현주의적 틀'을 벗어버리고, 모든 실재와의 경계를 허문다해도 그것은 여전히 예술이라는 재현적 틀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으로 확장하여 이해할 수 있다.

연극이론가인 허버트 블라우 Herbert Blau 역시 이러한 포스트모던 극의 해체적 실천에 내포된 딜레마에 주목하는 이론가이다. 그에 의하면 우리는 소위 '원시문화'에서 보이는 열린 구조와 퍼포먼스적 현재성들을 추구함으로써 '재현의 밖'에 위치한다고 추정되는 퍼포먼스들조차도 실은 그 울타리 내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쉽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재현적 모방에 대한 반동으로서 모든 허위와 조작을 추방하고자 한 퍼포먼스들은 그러한 욕망 때문에 오히려 허위에 의한 시간의 붕괴, 거짓된 꾸밈의 지수를 대폭 증가시켰을 뿐이라는 것이다.

텍스트, 저자, 연출자의 권위에 대한 명백한 전복행위들과 함께 퍼포먼스적 즉각성에 대한 극의 권리주장들은 항상 연극적 장치에 의해 무효화되거나 억제된다. 왜냐하면 극의 장치는 재빨리 외관을 무력화시키고 퍼포먼스가 발생하는 전복의 공간 주위에서 스스로 정리를 하기 때문이다. 블라우 역시 데리다를 이어 어떠한 퍼포먼스도 진정 혼자의 힘으로는 자율적인 공간-즉각적, 현재적, 실재적인-을 열 수 없다는 숙명, 그러한 재현의 불가피성을 이야기하려는 것이다. 역사 밖으로 나아가려는 행위는 그 자체가 이미 역사적 행위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모든 탈 예술적 퍼포먼스는 단지 그것이 지니는 다원적 양상 때문에 순간적으로만 '있는 그대로의 열린 구조와 현재성'을 지니는 듯이 보일 뿐이다. 그것은 자신의 직접성을 고정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어떤 특권적 순간도 지속적으로 확보할 수 없는 것이다.

아르또, 포스트모던극 그리고 이에 대한 해체적 이해로부터 분명히 유추되는 바는 이러한 것이다. 오늘날 포스트모던 예술이 아무리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실재와 일상의 가변적 세계와 직접 교류한다고 해도 그것은 결국 '실재를 새롭게 저당잡히는 행위', '예술의 집을 한없이 확장하여 더 많은 바깥세계를 자신의 공간 내부에 포섭하려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숙명, 그러한 경계의 경계에 관한 것이다. 나는 이러한 관점들이 예술의 숙명적 부도덕성이나, 위선성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고 본다. 오히려 예술은 자신에게 부당하게 주어진 딜레마를 통해,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 바라보아질 수 있는 또다른 차원을, 그리고 실재가 직면하고 있는 새로운 운명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데리다나 블라우의 관점은 극단적으로는 실재를 하나의 포착할 수 없는 '부재의 심연'으로 보게 하는 관점이다. 실재의 세계를 포착하려는 행위는 필연적으로 그것을 '재현'하거나 '가상화'하는 행위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경계를 넘어서 가상으로의 예술

'경계를 넘어서'라는 퍼포먼스적 명제가 예술의 한 기본원칙으로서 극단을 이룰 때, 예술의 집이 모든 실재의 공간을 완전히 포괄하게 되는 공상적 단계에 이를 때, 그것은 결국 모든 삶, 세계, 실재가 예술의 영역 안으로 흡수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곧 '실재의 가상화'를 의미한다.

실재의 가상화란 다름아닌 '고전적 실재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동시에 그의 지속적 반영물로서의 '예술의 종말' 필연적으로 의미하게 된다는 보드리야르적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상황은 바로 온 영토에 완전히 일치할 만큼 확장되어버린 '보르헤스(Borghes)의 지도'와도 같은 상황이다.

즉 경계를 넘어서 한없이 자신의 외부를 삼켜 나가는 오늘의 예술은 궁극적으로 자신의 소멸, 또는 새로운 차원으로서의 전이를 예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술이란 개념은 그것이 가장 팽창한 순간 무효화되고 대신 새로운 예술개념, 보드리야드적 '초사실 hyper-real'에 대응하면서 합류하는 일종의 '초예술 hyper-art'의 개념과 같은 것이 스스로 자리잡게 될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종래의 '실재를 반영하는' 예술이 아님은 물론, 실재와 예술의 중간을 달린다든가, 양자 모두라든가 하는 식의 어떤 변증법적 설명도 제대로 그 뜻을 드러내지 못한다. 최소한 그것은 참조물없는 '가상'이나 나아가 '환상'의 개념을 지향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