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과 예술음악의 만남
-계층·세대의 벽을 허무는 '열린음악회'
이장직 / 음악평론가, 중앙일보 음악전문기자
최근 KBS 제1TV에서 매주 일요일 저녁 인기리에 방영되는 '열린 음악회'를 놓고 공방전이 한창이다. 객석 7월호에 실린 평론가 탁계석씨와 PD 김경식씨가 벌이는 지상논쟁을 보면서 자못 흥미있다 싶으면서도 논쟁의 초점이 어딘가 모르게 흐려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 프로그램의 등장으로 성악가와 대중가수가 한 무대에 서고 심지어는 함께 노래를 부르는 일이 어색하지 않게 되어 버렸다. 탁씨는 기고문에서 "이 프로의 강점인 대중적 흡인력이 클래식 음악계에 독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클래식을 많이 접해보지 않은 청중들이 '열린음악회'를 클래식 음악의 전부로 착각하기 쉬우며 관중들이 아무때나 박수를 치는데 익숙해져 때로는 연주중에 박수를 치는 경우도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 프로의 여파로 지난 20년간 지방 무대에 올려졌던 가곡 공연의 객석이 텅 비는 경우고 최근 빈발하고 있으며 기업 주최의 클래식 공연에도 가요를 포함시키자는 요구까지 늘고 있다고 지적했다.
논쟁은 지난 1993년 5월부터 방송된 '열린 음악회'가 폭넓은 시청자를 확보하는데 성공했지만 일부 음악인들의 반발이 거세 존폐여부를 들먹일 정도까지 되어 버렸다.
사실 '열린 음악회'의 가장 큰 희생자는 KBS홀 자체이다. '열린 음악회'의 여파로 KBS홀에서 개최되는 클래식 공연은 청중들이 아예 무료인 줄로 착각하고 오는 경우가 많으며 객석에서도 '열린 음악회'의 경우처럼 껌을 씹거나 음식물을 먹다가 버리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열린 음악회' 논쟁을 보면서 나는 부메랑 효과라는 말이 떠오른다. 성악의 대중화라는 이름으로 성악가들의 TV 출연이 러시를 이루면서 몇몇 사람은 대중가수 못지않은 스타급으로 격상되었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성악인들은 이 프로그램의 간접적인 피해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스타급 성악가로 성장하지 못한 일부 음악인들의 피해의식도 여기에 숨어있다고 봐야 옳다. 경우를 바꾸어 놓고 생각해 보면 더욱 확실하다.
'열린음악회'는 그 제목이 말해 주듯 닫힌 음악회가 아니다. 클래식과 팝이라는 허구의 2분법으로부터 열려 있으며, 실내음악과 실외음악의 두터운 벽을 허물고 있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국회 앞마당이든, 대학 캠퍼스든 가리지 않는다. 연주자와 청중 사이의 벽도 과감히 허물고 있다. 출연자와 객석의 청중이 스스럼없이 대화도 나누고, 미리 배부된 악보를 가지고 참석자들이 모두 노래를 부른다. 바로 이러한 요소들이 '열린 음악회'가 인기있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
'열린 음악회'는 투투, 룰라, 서태지 류의 신세대 레게·랩음악이 안방극장과 가요계를 장악하고 있는 흐름을 거스르듯 복고풍의 흘러간 가요, 팝, 외국 민요, 가곡, 동요에서 오페라 아리아까지 대중의 정서를 사로잡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가요 무대'에 이어 TV 음악 프로그램 중 장수 프로그램이 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가요 무대가 주로 40~60대 성인층의 향수를 달래 준다면 '열린 음악회'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함께 즐길 수 있는 폭넓은 시청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의 성공 비결은 지금까지 클래식과 팝, 성인가요와 신세대 가요 사이에 존재하던 벽을 허물고 '중간층 음악'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일반 10대의 가요에는 충족감을 못 느끼고 본격 클래식에는 접근이 어려운 대중의 평균적 문화수준을 적절히 겨냥했다는 분석이다.
대흥기획이 1993년 11월에 발표한 '한국인 취미활동 분석' 자료에 의하면 최근 한국인의 취미활동 경험이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는데, 음악회는 1992년의 15%에서 26%로 증가했다. 영화관람이 52%에서 62%로 증가한데 비해 훨씬 높은 증가율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렇게 급격히 증가된 음악회 수요가 중간층 음악에 대한 폭발적인 요구로 이어진 것이다.
'열린 음악회'의 선곡에서는 그간 방송에서 찾아보기 힘들었던 중간층 음악의 부활이 뚜렷이 나타난다. 클래식 중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이탈리아 민요(오 나의 태양, 돌아오라 소렌토로, 푸니쿨리 푸니쿨라 등)를 주로 편성하여 일반 연주회장에서 자주 열리는 '가곡과 아리아의 밤'보다 한 단계 밑 수준을 유지하며, 팝가수와 성악가가 한 자리에 서는 것이 '열린 음악회'에서는 매우 당연한 일처럼 여겨질 정도로 빈번한 크로스오버가 있어 왔다.
가요의 경우 KBS가 제작하여 박인수, 이동원이 부른「향수」가 그 기폭제 역할을 한 셈이다(박인수 교수는 MBC 10대 가수 가요제에서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가곡의 경우도「보리밭」「그리운 금강산」,「뱃노래」등 신작 가곡보다는 유행가 못지않는 대중성을 띤 곡들 위주로 되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음악도 가볍게 듣고 즐기려는 소프트 붐을 반영한 것이다. 또한 현악기군이 한층 보강된 KBS 관현악단의 연주 수준도 한몫을 해냈다. 테이프를 틀어놓고 입만 맞추는 가수들의 노래에 식상한 시청자들에게 현장이나 녹화중계를 통한 생음악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열린 음악회' 덕분에 30~40대들이 청소년 시절에 즐겨 불렀던 노래들이 리바이벌되고 있다. '가요무대'에 출연하기에는 아직 쑥스러운 그래서 '가요무대'와 신세대 프로그램 사이에서 설 땅을 잃었던 송창식, 윤형주, 최진희, 남궁옥분 등이 오랜만에 화면에 모습을 비치게 되었다.
한편 신세대 가수들도 옛노래를 리바이벌하는 등 복고풍이 일고 있다. 이승환이 편곡해 다시 부른 최희준의「하숙생」, 그룹 데이지가 리바이벌한 현인의「신라의 달밤」015B가 다시 부른 조용필의「단발머리」, 인공위성이 다시 부른「노란 샤스 입은 사나이」,「울릉도 트위스트」등이 그것이다.
서로 다른 리듬과 수준의 음악 장르들이 팝스 오케스트라 특유의 편곡으로 동질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열린 음악회'의 매력이다.
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한 서태룡(동아대), 김경식(연세대) PD등 음대 출신 연출자를 투입함으로써 적어도 '악보쯤은 볼 수 있는' 연출이 가능해졌다. 독창적인 편곡이 가미되면서 테이프를 틀면서 부르는 가창력이 없는 가수들은 이 무대에 도저히 설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열린 음악회'는 가창력이 있는 가수와 없는 가수를 구분해 주는 좋은 무대인 것이다.
그간 가족 음악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다가 폐지된 '주부 가요 열창',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당신의 노래방' 등의 부동층 팬을 모두 흡수한 것으로 분석된다.
방청객들에게 악보를 나누어 주고 함께 부르는 싱어롱 순서는 '당신의 노래방'의 시청자들을 흡수했다고 볼 수 있다.
주부 가요열창이나 노래방의 대중적인 확산의 여파로 최근에는 백화점이나 문화센터에서 노래 부르기 강좌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최근 미국에서는 40~50대 성인층에서 뒤늦게 피아노와 기타를 배우려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는 외신보도를 접한 적도 있다). 일주일 중 가장 모임이 많기로 유명한 금요일 저녁 KBS 2FM에서는 어떻게 하면 참석자들의 시선을 끌 수 있는 노래를 부를 수 있는지를 상세하게 가르쳐 주기도 한다.
순수음악의 대중화, 대중음악과 예술음악의 만남이라는 최근의 경향은 '열린 음악회'로 요약된다. 이 프로그램은 계층간, 세대간의 위화감을 극복함으로써 더 나아가 국민화합에도 기여하고 있다.
듣는 음악회에서 부르는 음악회, 보는 음악회로 변모하고 있는 '열린 음악회'는 본격 연주공간에서 열린 무료 음악회의 대표격이다. 그러나 무료 음악회라고 해서 쉬운 소품만 연주하려는 발상은 위험하다. 점점 대중의 음악적 수준을 끌어 올리는 방향으로 발전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