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경(設經) 제작의 단절
―법사 김재길씨의 설경 제작
이장섭 / 한국문화정책개발원 책임연구원
'설경(說經)'은 충청도 지방의 무속의례에 사용되는 무구의 하나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주술적인 성격을 지닌 의례장소의 장엄구(裝嚴具)로서 한지를 칼로 오려 만들고 굿을 하는 굿당에 설치한다. 특히 정신질환자를 치료하는 '미친 굿'을 할 때 귀신을 유인하여 협박하기도 하고 그 안에 가두는 기능도 한다. 이 것이 충청도 지방의 굿에 한정된 것은 이 지역의 무속이 다른 지역의 그것과 구분되는 특성에 기인한다.
전래의 무속은 지역적으로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무속인을 지칭하는 이름이 지역에 따라 심방, 단골, 무당, 박수 등 다양했고, 무속인이 되는 과정을 기준으로 전승무와 세습무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래서대개 무당하면 한강을 기준으로 중·북부지역의 강신무계와 남부지역의 세습무계로 크게 양대분한다. 무속 행위도 지역적 다양성을 가졌다. 별신굿과 같은 대동굿이 있는가 하면 푸닥거리나 살풀이가 있고, 점을 보는가 하면 경을 읽기도 한다. 이러한 행위는 과거 무속인이 가졌던 다양한 기능과 연관된다. 그러나 사회구조의 변화에 따라 어떤 기능은 사라지거나 변화되는가 하면 특정한 기능은 더욱 강화되기도 한다. 예컨대 점복과 같은 기능은 오늘날 성행하고, 의사로서의 기능은 거의 사라진다.
신내림을 받아 성무한 강신무와 누대로 무업을 하는 선대로부터 이어받은 세습무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 무당이 충청도지방의 법사(經쟁이, 독경쟁이)이다. 또한 이들은 '선굿'이 아닌 '앉은굿'으로 무속의례를 행한다. 설경은 이 앉은굿을 하는 굿당에, 정확히 말하면 굿상 주위에 설치하는 것이다.
법사는 학습을 통해서 경읽는 법을 배운다 그들의 직능은 주로 '안택굿'과 '미친굿'을 행하고, 성무(成巫) 과정에서 여기에 필요한 다양한 경을 배워야 한다. 안택굿은 음력 정월이나 시월에 가내에 무사태평을 빌고 조상을 축원하는 굿으로 독경은 장소에 따라 안방의 성주경, 부엌의 조왕경, 장광(장독대)의 당산경, 조상축원의 조상경 등이 있다. 미친굿은 옥추경(玉樞經), 천지팔양경(天地八陽經), 기문경(奇門經), 옥갑경(玉匣經)의 사대경문(四大經文)을 반복해서 읽으면서 진행된다. 법사는 또한 일반 가정의 통과의례시 일정한 역할을 가지기도 했었다. 예컨대 작명, 택일, 묘자리를 보는 일 등이 그것이다. 50년대 이전까지 충청도지역에서 독경은 성행했었고 70년대까지도 볼 수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설경을 굿당에 치고 경을 읽는 모습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지난 2∼30년이래 중부지방의 '선굿'이 충청도, 특히 대전지방에도 보편화되어 앉은굿보다 선호되는 경향을 보이기 때문이다.
설경을 만드는 일에 대전지방에서 누구보다 잘 알려진 분이 김재길(金在吉 76) 법사이다. 지금은 더 이상 설경 제작에 종사하지는 않으나 과거의 설경제작 기예만은 자타가 인정한다. 그래서 제자 4명과 올해 국가에서 지정하는 '기능전승자 지원사업'의 종이공예 부문 전승자 지정을 신청한 상태이다. 현재 설경의 유일한 고객은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대전의 신석봉(60) 법사이다. 그는 안택굿 무형문화재이고 최근까지 '대한승공경신연합회' 대전지부 회장을 지냈다. 현대는 무업뿐 아니라 대전에 '안택굿 학원'을 설립하여 충청도 지역 '앉은굿'의 전통을 전승하는 사업도 실시한다.
김재길 선생의 무업의 길은 어려서부터 시작된다. 어머니가 일찍 병에 걸린 탓이 그는 11살 나던 해부터 산 기도를 따라 다녔고, 이것이 소위 성무과정의 출발이 된 것이다. 본격적인 무업의 길은 결혼한 후이고, 이때부터 여러 산을 다니며 기도를 드리고 독경하는 여러 선생들에게 경 읽는 법 등 무업의 수업을 닦게 된다. 처음 산으로 기도하러 간 행선지는 금강산이었다. 당시 이곳에는 골짜기 곳곳에 산기도를 하는 사람과 '도(道)꾼'이라고 불렸던 도를 닦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김선생은 기억한다. 금강산을 찾을 당시 기도하는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곳이 금강산의 남창도, 북창도였는데, 김선생은 북창도에서 2년을 못 채우고 장티푸스에 걸려 하산했다. 그후 다시 경상도 안동의 학아산이라는 곳에서 2년을 보냈고, 그곳에서 나온 후 계룡산 신도안에서 해방을 맞았다.
이러한 과정을 거친 후 대전에서 독경하는 일로 접어들었고, 한두 명이 병치료 후 효과를 보자 용하다는 소문이 나서 본업으로 삼게 되었다. 대전에서는 무업을 하면서 주기적으로 계룡산에 기도를 하러 다녔다. 어느 날 꿈에 '8년만 다니고 그만 다니라'는 계시가 있어 '8년후 주는 것이 아닌가'하였더니, 70년대말 계룡산 신도안이 완전히 철거되어 그곳은 더 이상 기도하는 사람의 '성지'로서의 명예를 강제로 잃게 되었다.
그후 지금의 거주지인 인천으로 이주하였다. 하지만 그는 지금도 매월 음력 초하룻날 계룡산에 기도하러 다닌다. 예전의 자리는 아니지만 동학사쪽 계룡산에 기도하는 자리(굿당)를 마련하여, 현대 거주지에서 결성된 '계룡산 친목 기도회' 회원들 50여 명과 함께 다닌다. 현 거주지인 인천에 오게 된 배경도 그의 본업과 무관하지 않다. 대전에서 무업을 하면서 사업에 손을 대었다가 실패를 본 후, 우연히 이곳에서 '미친 사람을 고치게 된' 것이 정착하는 계기가 된다. 과거 대전에서처럼 경읽는 무업은 더이상 하지 않고 부적을 쓰거나, 작명, 택일, 묘자리 보는 일 등 다양한 일을 하고 있다.
독경하는 굿의 필수품인 설경은 경읽는 굿상 주위에 걸어둔다. 굿상은 안택굿과 미친굿이 서로 다르다. 안택굿은 상은 조상의례 때의 제사상하고 같았는데, 지금은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아마도 선굿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앉은굿으로 하는 안택굿은 사라졌지만, 그것은 선굿의 재수굿과 유사한 형태로 변모되어 현재까지도 지속되기 때문이다.
미친굿 상은 비교적 조촐하다. 떡, 삼색실과 그리고 포를 놓는다. 이 상은 첫날에 쓰는 것이고 다음 날에는 3단, 5단, 7단 그리고 9단의 상을 경우에 따라 차린다. 3단상이라 하면 소반을 3개, 2개, 1개의 순으로 마치 피라미드형으로 쌓아 올리는 것을 말한다. 각 소반에는 백지를 깔로 한 움큼의 쌀을 뿌리고, 그 위에 정화수 사람을 올린다. 맨 꼭대기에 있는 마지막 상에는 쌀을 담은 주발을 놓고 그 위에 신장(神將)이나 폐포를 꽂아둔다. 폐포는 둘둘 말은 명주 위에 종이꼬깔을 씌우고 몸통에는 '구천응원뇌성보화천존(九天應元雷聲普化天尊)'이란 명문을 써넣는다. 현대의학의 보편화로 미친굿의 실제적인 의미는 사라진 반면, 전통문화의 한 부분으로 재현 양상으로 다시 나타난다. 예컨대 1994년 대전 EXPO행사에 참여한 것이 그 예이다.
설경은 소설경과 대설경으로 구분된다. 소설경은 하루굿 정도에서 사용하고(때로는 하루 굿 정도는 설경을 하지 않는다). 대설경은 사흘 이상의 큰굿에서 쓴다. 대설경은 매우 커서 굿당의 크기에 따라서 8장 또는 12장 이상의 설경을 건다. 대설경은 보통 접설경(또는 대철망)으로 만들어 귀신을 이중으로 둘러싼다는 뜻을 부여한다. 마치 철망과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다.
법사가 주로 칼을 사용하여 한지를 오려 만드는 설경제작은 손이 부르틀 정도로 힘든 작업이다. 대설경 8짝 정도를 만드는데, 대개 하루나 이틀 정도가 꼬박 걸린다. 따라서 예전에 미친굿을 준비할 때에 설경을 준비하는 법사를 '설경법사'라 하고 굿의 과정에는 다른 법사에 비하여 비교적 편한 일을 맡겼다. 재료를 쓰는 한지는 과거 전주지방에서 가져왔고, 김선생이 사용하는 칼은 지금까지 두 개째이다. 일제시대 때부터 사용하던 일제 칼은 그간 닳아서 버리고, 현재 사용하는 접을 수 있는 칼을 양키시장에서 구입한 미국산이다.
설경은 굿상을 차리는 방의 양쪽에 못을 박아서 실을 잇고 여기에 걸어서 설치한다. 설경 윗부분과 천장 사이에는 여러 신장(神將)들의 위목(位目)을 걸기도 하고, 설경과 설경 사이의 틈새에도 간패(間牌)라 하여 여기에도 신장의 위목을 건다.
한 장의 설경은 대개 다음과 같은 세부분으로 구성된다. 이는 설경의 뒷면에 서로 다른 색종이를 넣어 구분하는데 위로부터 붉은색, 노란색, 푸른색 순이다. 맨 윗부분은 네 분의 관(冠)을 쓴 보살을 법당의 보좌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고, 그 아래에는 투창(透窓) 기법으로 나타낸 여러 무늬를 배치한다. 두 번째 부분은 정사각형의 한지 안에 역시 투창기법에 의해 동심원으로 동일한 문양을 배치하고, 각 모서리에는 다른 무늬를 구성한다. 법사에 따라서는 축(祝)이나 복(福) 등 길상(吉祥)의 한자를 넣기도 한다. 또한 국화, 연화 등의 상서로운 꽃을 보기 좋으라고 넣는다. 때로는 동자(童子)나 애기보살들을 설경 가장자리에 적당히 배치하는데, 이는 미친굿에서는 하지 않고 안택이나 재수굿을 할 때 쓴다. 세 번째 부분도 여러 무늬를 투창기법으로 표현하는데, 특히 이 부분은 철망(鐵網)이라 하여 귀신을 그 안에 잡아 가둔다는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물론 설경을 설치할 때, 위의 세 부분으로 일정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법사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의 설경을 여러 방법으로 설치할 수 있다. 그러나 어느 경우이든 보살모습은 반듯이 들어가야 한다.
굿상 바로 앞 한가운데에는 백마신장(白馬神將) 위목(位目)을 방천장에 매달아 방바닥에 이르도록 수직으로 매단다. 이 위목은 창호지를 1/3로 오려서, 여기에 한 줄로 위목을 죽 붙여서 내려쓴다. 위목은 반드시 주사(朱砂)나 붉은 글씨로 써야 한다. 제대로 격식을 갖추어 준비하려면 주사를 써야 하나,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대개 붉은색 물감으로 대치한다.
위와 같이 설경을 설치한 굿상에서 하는 앉은굿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전지역 무당의 거의 대다수가 하였으나, 그 수가 현재는 전체 무당의 1/10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 대신 중부지방 강신무의 선굿이 이 지역에 보편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만신이라는 호칭이 일반화된 점이나, 만신과 법사가 공동작업을 하게 된 경우가 그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선굿의 영향만이 아니라 법사의 재생산구조와 사회 문화적 환경의 변화에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법사의 학습과정인 독경수업이 과거에 비해 용이하지 않았고, 도시화로 인하여 안택굿의 수요가 줄어들 뿐 아니라 의학 보급으로 '미친굿'의 용도가 거의 사라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충청도 앉은굿의 설경은 서서히 그 존재가치를 잃고 있다. 이제 그것은 생활 속의 굿판이 아니라 박물관의 전시장에서만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동시에 무업도 '장사'로 변모해 간다는 것이다. "우리는 예전에 정성으로 했지만, 요즘 사람들은(법사지칭) 돈밖에 모른다"고 김선생은 개탄한다. 김선생이 독경을 배울 적에 스승들은 "너 일한 대가만 받고, 욕심을 부리지 마라"고 배웠다. 당시는 안택굿 한 번에 쌀 한 말을 받았고, 미친굿은 경우나 사정에 따라 받았다고 한다.
무속은 우리 민족의 원초적 종교행위로 간주되고, 많은 학자들이 그것을 우리 민족의 뿌리에서 역사적 기원을 찾으려 한다. 이러한 전통은 시대적 굴곡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이어져 우리 종교생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무속은 조선조이래 제도적 탄압을 받아왔지만, 그 뿌리는 민간에서 뿐 아니라 궁중까지, 특히 여성층에게 연연히 전승되어 왔다. 일제 강점 시대에는 '미신타파'라 하여 금지정책이 시행되었다. 굿하는 소리만 나면 단속을 하여 손으로만 비는 굿을 하기도 하였다. 해방후의 혼란기가 지나고 유신정권 때에도 '미신타파'의 정책은 지속되었다. 이 시기 적석단 등의 촌락사회의 많은 공동체적 신앙대상이 파괴된 것은 익히 알려진 일이다. 김선생의 말을 빌자면 "맘놓고 하기는 전두환 때부터"라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적 의도에 대한 문화의 변동과정을 엿볼 수 있다. 정치적 권력에 의한 단속강도의 정도에 따라 무속의 외형적 양상의 변화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믿음은 쉽사리 변하지 않고 있다. 예컨대 김선생이 현재 거주하는 곳에서 형성된'계룡산 친목 기도회'는 흡사 과거 전라도지방의 '단골권'을 연상케 한다. 과거 단골권이 촌락사회에서 공간적 경계로 형성된 무속의 공동체라면, 김선생이 주도하는 이 기도회는 공간적 한정보다 대도시에서 사회적으로 조건 주워진, 즉 무속적 믿음이 있는 사람들만의 모임이다.
또한 외래종교의 전래과정에서 부분적으로 우리 민족의 이 원초적 무속성을 습합하여 정착한 사실이 여러 면에서 검증된다. 우리 민족에 있어서 무속의 중요성이 어떠했다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뒷받침이나 하듯 현재 우리 사회의 무속적 행위가 과거에 비해 크게 위축된 양상을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부분적으로는 더욱 왕성한 면을 나타낸다. 예컨대 점복적 신앙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 사회에 만연되어 있다. 과거 무속의 영향을 비교적 많이 받은 노년층뿐만이 아니다. '까페점'이나 '컴퓨터점' 등은 젊은 세대에서 나타나는 무속적 신앙이다. 그것은 오늘날까지 현대인의 종교생활에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른 무속의 다양한 변화는 있었으나 그 종교성만은 잃지 않고 있는 것이다.
비록 무속이 체계적인 형태를 갖춘 종교는 아닐지라도, 초자연적 존재와 효과에 대한 믿음이라는 문화과학의 정의에서 말하는 종교적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에게 지속적으로 전승되는 종교현상임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인간사회에서 설명할 수 없는 영역을 설명해 주고, 현재와 미래의 불확실성을 제거하는 심리적 안정 측면에서 그러하다. 무속의 사제인 무당은 무속적 종교의례를 수행하면서 영적 메시지의 전달자로서, 의술자로서, 점복자로서, 주술자로서 종교적 기능을 담당해왔고, 현재까지도 그 영향력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남아있다.
한편 무속적 행위가 현대사회에서 전통문화의 하나로 인식되면서 위와는 다른 변화의 과정을 거치고 있다. 전통사회와 같은 무속인의 신분에 대한 규정도 없어졌을 뿐더러 별신굿과 같은 무속행위가 더 이상 과거의 기능은 가지지 못하지만, 이제 민족의 전통문화의 하나로 변화된 시대에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고, 그것을 전승하는 이는 국가가 '무형문화재'로 지정 보호하는 인간문화재가 되는 시대이다. 따라서 그 들이 보유한 무속적 행위는 무대에 올려지는 공연물로 변화되기도 한다.
문화는 변화한다. 변화되지 않는 문화요소를 우리는 전통문화라 한다. 그러나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져오는 문화의 가치는 동일한 것은 아니다. 지금 전통문화라고 하는 문화요소들이 우리 조상들 시대부터 현대까지 전승되고 있지만, 그것이 가지는 문화적 위상은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동해안 별신굿이나 서해안 별신굿이 실제로 더 이상 풍어를 기원하거나, 고기잡이배의 안전을 기원하지 않을뿐더러 예전처럼 바닷가에서 거행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서울 한복판 놀이마당이나 TV에서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옛날의 모습대로 무가의 사제들이 그것을 담당한다. 말하자면 과거의 사회적 맥락이나 기능은 존재하지 않지만 옛날의 굿 형태는 지속되고, 우리는 그것을 전통문화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