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속에 남을 문학의 세계화 되어야…
정종화 / 고려대교수
세계화라는 용어의 역사적 의미
1995년을 압도한 유행어가 있다면 그것은 단연 '세계화'라는 용어일 것이다. 유행어란 대부분의 경우 신문이나 방송 같은 대중 매체가 한 개인의 기지에 찬 발언이나 인기있는 연속극 속의 시사적인 논평에서 한 구절을 따서 그 어휘 내지 문장이 갖는 상황적 효용성을 반복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그 용어가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애용되는 현상을 유발하게 된다. 따라서 유행이란 다분히 시사적인 것으로 역사 속에서 흘러가는 여러 상황이 특정한 단어나 문구나 그밖의 여러 표현 양식(예컨대 의상)에 의해 상징되는 현상이다. 유행이란 문자 그대로 물결처럼 흘러가는 것으로 그 특성은 시류적인 것이며 한시적인 것이다.
필자는 '세계화'라는 유행어가 시류적인 것이며 한시적인 것인가 하는 문제부터 먼저 짚어봄으로써 우리 문학의 '세계화' 문제를 검토해 보고자 한다. 수출의 '세계화', 교육의 '세계화', 금융시장의 '세계화', 의식구조의 '세계화', 문학의 '세계화' 등등, 우리 사회의 전 분야에서 모든 것을 '세계화'와 연관지어 생각하는 현상은 '세계화'라는 단어가 분명히 유행어로 정착한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정치가나, 토크쇼 사회자나, 좌담회의 사회자와 토론 참석자나, 신문의 칼럼 기고자나, 그밖의 유명인사들이 한결같이 그들의 연설과 논평과 재담과 덕담에서 '세계화'를 언급하고 있어 1995년의 우리 사회는 '세계화'에 의하여 지배되었다고 결론지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유행어의 저자가 방송이나 언론매체가 아니고 정부를 운영하는 책임자라는 사실과 이 유행어가 인도네시아의 보고르 궁전에서 창안된 이후 우리나라의 장래를 짐지고 나갈 이념과 국가의 정책으로 채택되어 있다는 점에사 한시적인 유행어와 근본적으로 다른 면을 지니고 있다. 즉 '세계화'라는 용어는 그 창출 경위부터 시사적 유행성의 범주에서 만들어진 말이 아니라 한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출발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지금 유행하고 있는 '비자금', '통치자금', '토사구팽', '탱크주의' 같은 용어는 그 시효성이 지나면 자연히 역사의 흐름에 묻혀 사라지고 말지만 '세계화'가 이들 한시적 유행어와 다를 수 있는 점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하나의 중요한 사건으로 남아 역사적 용어로 발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전통사회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그러나 이제는 지워질 수 없이 국어사전에 기재되어 있는 단어들, 예컨대 '인권', '민주화', '유신', '과학정신', '계몽주의', '사실주의', '역사주의', '구조주의', '실존주의' , '마르크시즘' 등등 수많은 단어들은 모두 유행어에서 역사적 단어로 살아남은 것들이다.
'세계화'가 역사적 어휘로 발전되는 데는 이 어휘가 뜻하는 바의 이념이 어느만큼 성공적으로 성과를 거두느냐는 사실에 달려 있다. 만약 '세계화'라는 정택이 한 정권이 지속되는 짧은 기간동안에만 유효한, 잘 포장된 내용없는 통치이념이라면 그것은 그 정권이 끝나는 순간에 역사의 도도한 물결 속에서 꺼져버릴 유행어의 운명을 맛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세계화'가 우리 사회의 모든 분야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려 선진국의 대열에 당당히 자리를 잡게 하는 일체의 정책을 의미한다면,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 알찬 결실을 맺게 된다면, '세계화'는 분명히 유행어의 초라한 운명을 넘어서서 한 정권의 눈부신 업접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의 발전의 한 단면을 상징하는 용어로 역사의 대열에 자랑스런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문학의 '세계화'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세계화' 정책은 아직 뚜렷한 가시화 현상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어휘가 밖으로 뜻하는 대로 우리 정부의 시책이 국제화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인지, 만약 '세계화'가 국제화를 의미한다면 실제 그 내용이 어쩔 수 없이 정치적 데탕트 정책을 추구하고 국제무역의 험난한 경쟁 속에서 최선을 기울였던 그 전 정권과 어떻게 구별되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해명이 보급되지 못하고 있다. '세계화'에 대한 이해의 부족은 정부 당국이 이 어휘의 영역을 segyehwa 라고 발표한 반면 대부분의 외국 언론들은 globalization 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사실에서 더욱 촉진되고 있는 실정이다.
다행히 필자는 '세계화'의 창안자 김영삼 대통령 자신이 어느 모임에서 그 어휘의 뜻을 국제적 경쟁에서 일등을 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바를 텔레비전 생방송에서 들은 바 있다.
그렇다면 '세계화'의 의미란 다분히 무역관계를 전제로 한 국제경쟁을 시발점으로 하여 우리의 국력을 기르는 것이며 그 국력의 발전이 어느 분야에서나 폐쇄적이고 쇄국적인 차원을 넘어서 개방적이며 공개적이며 신축적이며 외부 지향적임을 뜻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속에는 끝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비판하여 내실을 기해야 하는 노력이 전제되고 있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러한 각고만이 치열한 격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발전을 약속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문학에서 '세계화'는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우리 문학의 '세계화'란 실제 어떤 것인가? 지금 우리 문단에서는 노벨상에 대한 열기가 '세계화'와 맞물려 '세계화'는 곧 노벨상 수상이라는 이상한 등식마저 형성되어 있다. 국제경쟁에서 일등을 하는 것이 '세계화'라면, 그리고 노벨상 수상 작가가 곧 세계문학의 정상이라면, 이러한 열기나 흥분이나 염원이 틀린 것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문학의 위상을 스웨덴과 세계 여러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수반되는 준비작업을 진행하여야 할 것이다. 훌륭한 작품을 선정하여 외국어로 번역하고 번역된 직품을 해당국의 유수한 출판사에서 출판하는 작업의 정비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런한 여건을 위하여 일류 번역팀을 확보하고 또 다음 세대의 번역진을
양성하는 일도 대단히 급한 업무이다.
가장 큰 아쉬움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출판사를 확보하는 일
이러한 학국문학의 '세계화'는 실제 매우 활발하게 진행되어 있다. 정부의 지원금에 힘입어 많은 작품이 영어, 불어, 독일어 등으로 번역되었으며, 이중 해당 국가의 출판사에서 간행된 건수도 여러 권 된다. 물론 이것이 상대적으로 일본이나 중국에 비하여 수가 많은 것이 아니며 번역의 질도 보다 더 향상되어야 할 여지와 아쉬움을 안고 있다. 그러나 가장 큰 아쉬움은 세계적으로 유수한 출판사를 확보하는 일이다. 그 나라에서 권위를 인정받는 출판사를 통하여 책을 출판한다는 것은 자동적으로 권위있는 잡지와 신문이 서평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서평은 독자의 개발과 시장확대를 보장받는 일일 뿐만 아니라 우리 문학을 거의 알지 못하는 그 나라의 전문인과 지도층 인사들에게 바른 인식을 심어주는 황금의 기회이기도 하다. 아직도 우리 나라에 대한 외국의 이해는 오해가 아니면 백지 상태여서 우리가 국내에서 알고 있는 해당 국가에 대한 지식과 견주어 보면 엄청난 불균형이 이루어져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불균형을 시정하기 위하여 정부나 기타 기관에서 홍보책자를 발간한 경우가 과거에 없지 않았다. 홍보용 책자는 읽는 사람에게 편견부터 유발하거나 아예 쓰레기통속으로 던지는 그래서 반감을 더욱 촉발하는 결과만 만들 수 있는 확률이 더 많기 쉽다(북한이 김일성 전집을 뿌리다가 역효과를 낸 현상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우리 문학은 홍보가 필요하다. 훌륭한 작품이 번역 출간되고 예리한 서평이 우리 문학의 질을 정확히 알려주고 그래서 다음 작품에 대한 기대를 심어주는 자연스러운 절차를 밟는 과정이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냥 포기할 것이 아니라 그 차선책을 강구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다. 이에 대한 하나의 대안으로 필자는 정부가 산하기관이 아닌 대행기구로 하여금 우리 문학을 소개하는 계간지를 발간할 것을 제안하고 싶다. 작품의 번역과 아울러 긴 서평이나 우리 문학의 특색을 소개하고 해설하는 전문지를 계간지나 격 계간지로 발행하여 해외에 배부하는 방법을 정부는 고려해 볼 것을 제안하는 것이다.
이 차제에 본인은 우리 문학작품을 출판하는 출판사의 선정에 좀 더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여 출판과 동시에 출판사가 없어지거나 우리가 주는 지원금으로 책을 출판했다는 명분만 세우는 영세 무명 출판사는 지원 대상에서 제외해야 할 것도 제안하고 싶다. 물론 이것도 번역료를 위한 번역만 하고 지원 기관의 창고 속에서 아예 출판되는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것보다는 나은 일일는지 모른다. 필자는 국민의 세금으로 번역을 업적보고 건수로 발표하는 사고방식은 서서히 지양하는 단계가 왔음을 이 기회에 강조하는 바이다.
아직 우리 문학에 대한 인식이 권위있는 유명 출판사의 문턱을 낮추지 못한 실정에서 꼭 저명한 출판사만 고집한다는 사실이 어떤 면에서는 현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고답적 순수파의 여린 목소리로 들릴지 모른다. 어디서든지 나와 우리 것을 조금씩이나마 알리는 것이 현실적 태도라고 주장을 할 수도 있다. 이러한 태도가 지금의 우리 실정을 정확히 파악하는 진단이라는 주장 앞에서 필자는 목소리를 높여 권위있는 출판사에 의한 출판만을 주장할 수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면 세계 시장에서 일등과 이등을 다투는 '세계화'는 우리 문학에는 아직 적용될 수 없다는 논리적 결론에 이르게 된다.
훌륭한 번역 넘어서는 원작의 예술적 향기가 중요
많은 사람들이 '세계화' 과업에서 유독 문학만이 뒤떨어진 상황을 번역의 부진성에 원인을 돌리고 있다. 번역 자체가 원작을 대표하는 해외시장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번역의 중요성은 백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원작의 힘을 호소하는데 번역의 역할은 절대적인 것이다. 원작의 훌륭한 문학성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섬세하고 민감한 번역자의 창조력이 절대로 필요하며 원작의 토속적 묘미를 재생해서 목표 언어로서도 출중한 문체를 창출해내는 언어적 재능도 빼어나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원문에 대한 정확한 이해의 부족과 원작자의 창조력에 도전하는 창의력의 결핍과 번역어의 구사에서 세련되지 못한 문체 등이 전통 깊은 출판사의 환영을 얻어내지 못하는 현실을 우리는 안타깝게 생각할 수밖에 없다. 번역자의 재질이 원작자의 재능에 뒤져서는 안되는 명제 앞에서 출판의 출구에 대한 대안도 없이 번역과 번역 지원금만을 등식화시키는 소위 '한국학 전문인'에 의한 번역 작업이 창고 채우기나 원작 판권 지우기로 연결되는 현실도 애석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반드시 번역만 좋으면 노벨상이 호박 구르듯이 떨어져 오리라는 생각도 떨쳐버려야 할 명제이다. 번역이란 어디까지나 원작이라는 테두리 속에서만 재생된다는 진리를 생각하면, 원작이 지니고 있는 예술성이 어느 만큼 강한지를 원작자는 번역의 잘못을 탓하기에 앞서 스스로 반성해 보는 미덕도 갖추는 겸허한 정신이 필요한 것이다. 영국의 대문호 토마스 하디가 그의 세기의 명작 「테스」에서 암시하듯 미인이란 아무리 자신의 아름다움을 감추려해도 어쩔 수 없이 새어나온다는 진리가 번역의 경우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특정한 풀이나 꽃 속에 들어 있는 향내를 감출 수 없듯이 훌륭한 원작 속에 배어 있는 예술적 향기도 서투른 번역이 죽일 수는 없는 것이다. 오히려 원작을 파기하여 번역이 반역이 되는 것을 작자는 경계해야 할 것이다.
우리 문학은 최남선과 이광수 같은 소년 문사들이 서구 문학에 심취하여 새로운 문학전통을 시작한 지 백년도 아직 안된다. 우리 현대문학의 모태가 된 서구문학의 역사에 비하면 전통이 그렇게 긴 편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많은 천재 시인과 소설가를 배출해 낸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였다.
노벨상의 심사를 위시하여 많은 예술작품에 대한 평가와 판단은 종종 주관적 기준에 의하여 내려진다는 사실을 우리는 결코 잊지 말고 느긋하게 우리 문학의 '세계화'에 대처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대처 방안은 내실을 기하며 보다 더 훌륭한 작품을 계속 생산해내는 장인정신의 순수성을 명예와 상업성에 침식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계화'에 따르는 국제교류 상호원칙성 잊지 말아야
또 하나 내실의 길은 '세계화'의 본질을 포괄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세계화'의 한 면만을 보고 있는 중대한 실책을 범하고 있다. '세계화'가 국제무대에서 우리 것을 일등으로 만드는 작업으로만 인식하고 있어 국제적 교류에 따르는 상호성의 원칙을 잊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물품을 해외 시장에서 많이 팔려면 상품의 질도 좋아야 하겠지만 우리쪽 시장도 개방되어야 하는 원칙을 우리는 잊고 있다.
우리 물건의 질은 상대적으로 외제를 의식한 경쟁과 정비례된다. 우리 자동차 시장이 그러하며 컴퓨터 같은 첨단산업의 발전도 국제적 교류와 경쟁에서 그 원동력을 찾고 있는 것이다.
우리 현대문학이 오늘의 수준으로 오르게 된 밑바닥에는 최남선과 이광수 같은 선구자들이 우리의 문학시장에 외제 문학을 수입했던 과감한 혁명정신이 깔려 있다. 다행히 그 당시 문학의 내국시장이 살벌한 저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많은 추종자들을 얻게 되어 짧은 기간 안에 그들의 교류 목표를 성공시킬 수 있었다. 그들이 수입한 외제품은 우리의 문학적 감수성에 새로운 양상을 창조하여 우리 문학의 전통을 보다 풍요롭고 다양하게 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던 것이다. 국수적 입장에서 정책이라는 보호막을 치고 오직 중국적인 것만으로 고수하던 긴긴 역사에 비하면 오늘의 외부지향적 '세계화'는 우리 근대문학의 두 선구자들에 엄청난 빚을 지고 있음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다.
왜래 문화의 유입은 어쩔 수 없이 순종과 적자 대신에 잡종과 사생아를 만들게 마련이다. 지금 우리의 개방된 문화시장은 청소년층에 정신적 혼미와 반 전통적 사고를 촉발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같은 '세계화'시대에는 국수주의라는 연약한 방패로 자국시장을 보호할 수는 없다. 이런 시점에서 우리는 '세계화'에 필연적으로 부수되는 내국시장의 개방과 거기에 따르는 혼돈을 바로 보고 이에 대한 처방을 국익 차원에서 검토하여야 할 것이다. 또 우리 것을 대외 시장에 수출하려면 내국 시장의 수지계산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개방이 국민주의의 와해와 문화적 식민지주의로 발전되는 위험이 기우라는 사실을 명심하여 우리의 문화적 '세계화'를 보다 넓고 긴 안목으로 대처해야 할 것을 결론으로 강조해두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