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문학의 해. 매체와 문학

시청각시대의 문학의 운명




박덕규 / 문학평론가

문학의 위기와 시청각 문화

문학 위기론이 난무한다. 어떤 이유에서건 문학이 인문학적 소통의 중심에서 소멸될지도 모른다는 그런 위기감이 우리들 사이에 팽배해 있다.

절대로 문학은 소멸되지 않을 것이라고 낙관론을 펴는 사람들조차도 적어도 당장 문학작품이 안 읽히고 안 팔리는 대신에 영화나 CD , 텔레비전 같은 것이 갈수록 위력을 발휘할 것이라는 예측만큼은 아주 쉽게 해내고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우리는 이미 오래 전에 문학의 위기를 감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기계 복제 시대를 맞아 한 편의 문학 작품이 대중을 선도하는 예술품이 됨으로써 과거보다 더 호황을 누릴 수 있었는가 하면, 곧 이어 영화산업, 오디오산업 등의 등장과 발달이 때로는 문학작품의 확산이나 변동과 결부되면서 점점 더 크게 위세를 떨쳐 왔음을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문학은 다양한 인쇄매체(책 문화)를 통해 영상문화 따위의 대중성에 결코 뒤지지 않게 대중이 향수할 문화적 거점을 확보하고 있었고, 때에 따라서는 대중문화에 맞서는 고급문화의 중심에 서서 오히려 그 시대를 지배하는 정신을 창출하기도 했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가 쉽게 말하는 문학 위기론이 그저 영상산업의 위력에 문자문화가 위축되고 있는 현실만을 지적하는 정도에 머문다면 이미 문학의 현실을 제대로 파악한 게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다면 오늘날 거론되는 문학위기론의 실상은 무엇인가. 오늘날은 다양한 대중적 매체 속에서도 원작의 창작성이 온존할 수 있었던 시대와는 달리, 작품이 대중에게 유통되는 과정 속에서 그 창작성이 와해될 가능성이 증폭된 시대이다. 컴퓨터의 발달은 이 시대에서 대표적으로 주목되는 현상이다.

컴퓨터의 발달이 무한한 정보의 유통을 가능하게 했다는 말은 곧 컴퓨터로 인해 그 정보의 생산과 소비의 양이 무한하게 늘어났다는 말일 뿐 아니라 그 정보 생산의 기획에서부터 소비 단계에 이르기까지의 전과정을 관리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게 되었다는 말이기도 하다(이 글은 특히 1995 문화의 달 토론회 「뉴미디어 시대의 문화정책과제」<문화체육부 한국문화정책개발원>의 문학분과 토론자로 나가 얻은 지식을 토대로 씌어졌다. 당시 발제 「뉴미디어 시대의 문학진흥정책」(강대희)에서는 '컴퓨터 기술의 발달로 생산 공정 자체에 계획이나 기획의 즉각적인 수정과 변경, 첨가 등이 가능해졌고, 상품의 수요나 공급, 배분 등에 관한 복잡한 개선들이 쉽사리 처리될 수 있게 되어 상품의 생산과 소비 전 공정에 대한 주도면밀한 관리가 가능해' 진 이 시대를 전자 복제시대로 명명하고 있었다.) 즉 컴퓨터 문화는 예술품의 창작성까지도 하나의 관리 대상으로 삼게 되고 이에 따라 종래에 진리의 창조자로 군림해 있던 창작자 또한 창작품의 유텅 소비되는 시스템의 요구에 의해 마땅히 조절되어야 하는 주문생산자의 자리에 서게 된다. 게다가 이 컴퓨터는 정보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즉각적으로 잇기 위해 다양한 시청각적인 장르를 원용하게 되는 바, 이를테면 영화나 음악, 그래픽 등을 내용으로 하는 영상문화, 오디오문화는 그 대표적인 장르이고, 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문자를 표현 매개로 하는 문학은 크게 소외되는 장르일 수밖에 없게 된다. 컴퓨터가 주도하는 이러한 시대를 생산 형태를 기준해서 전자 복제 시대로, 소통 매개를 기준해서 시청각 문화 시대로 명명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으며, 당연히 그 용어들은 각각 문학이 호황을 누리던 기계 복제 시대, 문자문화 시대에 대응하는 말로 자리해 있다. 그렇다면 문자를 매개로 하는 문학이 시청각을 매개로 하는 예술 장르에 비해서 더욱 심각하게 창작성의 와해라는 위기를 실감할 수밖에 없는 셈이다.

문학과 시청각 매체와의 만남

이같은 시청각 문화 시대라 해서 문자 문화가 날로 쇠퇴하는 것만은 물론 아니다. 시청각 문화 시대에 유포되는 대량 정보는 여전히 상당 부분 문자를 매개로 표현되고 소통될 뿐만 아니라, 그 창작성이 엄청난 교환 가치로 전환되는 일도 자조 목도되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문학 작품을 모태로 한 영상문화의 대량소비는 괄목할 만하다.

또는 시청각 매체를 이용한 상품 선전에 힘입어 문학의 직접적인 대량소비도 쉽게 볼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든 종래에 진리의 창조자의 자리에서 존중받던 창작성이 특별히 옹호되는 사례는 없다고 봐야 옳다. 정보의 즉각적인 소비를 날로 지향해 가는 대중들을 위해 우리의 창작성은 얼마든지 가공되고 변질되고 와해될 수 있다. 이를테면 문학에서 대중문학이 득세한다거나, 무슨무슨 문학상이라는 귄위를 이용한다거나, 대량광고에 힘입는다거나 하는 현상 자체가 이미 그 작품의 고유한 품성이 존중되는 시대가 아님을 입증해 준다. 이에 따라 문학 장르 중에서도 대중성과 관련이 깊은 소설 쪽에 비해 시 장르가 시의 왕국으로 불리우는 우리나라에서조차도 더 이상 폭넓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고 있는 일이며, 나아가 그러면서도 오히려 시든 소설이든 작품 생산량은 한없이 많아지는 일등도 좋은 사례가 된다. 좀더 깊이 있는 예로, 기존의 작품들을 복제하거나 혼성시키는 기법 즉 패스티쉬pastishe나 시뮬레이션simulation 따위가 문학에서 하나의 특징적인 사조로 인정되는 분위기도 창작성이 와해되고 있는 작금의 문학 위기 현상을 증명해 준다고 하겠다.

이런만큼 가장 주되게는 문자문화 시대에서 창출되던 문학, 즉 자기 성찰을 겪게 하는 독서대상으로서의 문학은 이제 날로 소외된 길을 걸어야 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인류가 오래도록 자랑해마지 않던 그런 문학, '인문학적 성찰'을 유도하는 문학은 이제 스스로 파기해야 마땅하고, 대중을 향해 대중을 위해 즉각적인 소비를 목적으로하는 문학작품을 양산하는 일을 우리의 본분으로 삼아야 할 것인가?

여기서 이러한 질문에 우리는 당장 답해버릴 수도 있다. 가령, 그러한 빛나는 문학은 참으로 아쉽게도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파기될 것임에 틀림이 없고, 시청각 문화의 다양한 유형속으로 편입되고 있는 극도로 소비지향적인 문학만이 그나마 득세할 시대가 되리라고. 그러나 만약에 그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 하더라도 인류가 이성과 감성의 총체로 발명해 낸 문학의 원형만큼은 어디엔가 어떤 변화된 형태로든 살아남아 있지 않겠느냐는 믿음만큼은 쉽사리 버릴 수는 없을 것이다. 마치 그것은, 그 옛날 인류가 예술의 기원으로 삼던 춤이라는 가장 원시적인 예술장르가 이성이 지배하던 이 시대, 나아가 가상현실이 지배하는 이 시대에 이르러서도 그 원형이 굳건히 전승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사정이 이러하다면, 표면적으로 문화를 선도하는 시청각 매체 속에서도 문학이 그 원형을 더욱 완전하게 지키고 어쩌면 창조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근거도 마련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기대를 품어봄직도 하다.

실제로 기존 문학의 개념에서 존중되던 문학성을 시청각 매체를 이용해 대중에 가 닿게 하려는 움직임이 다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가령, '하이텔 문학관' 처럼 특정 PC통신 회사에서 특별하게 운영하고 있는 기성 문학 작품 게재란이나 일부 정보회사들이 상업화하려고 애쓰고 있는 전자출판 같은 것이 좋은 예가 되겠다. 이 경우 문자문화 시대의 책의 기능을 그들 전자 통신이 감행해 주고 있는 셈이다. 이들의 노력에는 진정으로 인간의 삶을 반성케 하는 문학 작품에 대한 배려가 배여 있기도 하지만, 이를테면 그들은 문학이라는 고급 문화를 내용물로 하는 문화 유통 산업을 하고 잇는 셈이다. 대중음악이 번성한 이 시대에 오히려 클래식 음악의 보급이 확장되고 있는 현상에 비추어 대중 지향적인 문학작품이 득세할 이 시대에도 이처럼 고급한 문학은 고고한 자리를 점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실은 문제가 뭐냐 하면, 문학 작품은 클래식 음악처럼 새로운 연주자에 의해 되풀이 연주되는 가운데 새로운 가치가 창조되는 양식으로 자리잡혀 있지 않다는 것이다. 문학은 다른 예술 장르의 예술 행위,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 드라마를 무대화하는 연극이나 승무를 추는 춤, 베토벤을 연주하는 음악 등등에 비추어 보면 거의 새로운 것만을 추구하고 취급하는 장르에 해당된다. 그 점에서는 대중가요나 영화 등의 창조성에 견줄 만한데, 당연하게도 그것들과는 절대로 대중적인 면을 한께 저울질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이미 자명해져 있다. 그러니 전자 출판과 같은 매체적 탈출구가 있다 하더라도 문학에 가해지는 본질적 위협은 거의 감소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PC통신이나 전자 북을 매개로 하는 문학이 대중의 기호에 맞춘 주문 생산품의 단계로만 이해될 때 스스로 시청각 문화에의 종속을 서두르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 것이란 사실을 인식하고, 보다 광범위하게 이를 활용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인류의 오래고 많은 문학적 자산의 디베이스dbase화를 기초로 한 '문학 정보 센터' 개념으로 전자 출판 형태를 취할 수 있겠다(앞에서 설명한 토론회에 참석한 한 토론자(허병두)의 질의문에는 '민족의 훌륭한 문학 작품들을 파일로 보관하여 일정 절차만 밟으면 전송받을 수 있게' 하는 등의 일을 수행해 주는 '문학 정보 센터' 개념이 설정되어 있었다). 실로 인류에겐 너무나 많은 문학 작품들이 있다. 아마도 그 방대하고 위대한 문학 작품들이 현실의 삶에서도 소중한 유산임에 분명하다면, 지금까지의 책문화에서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그것을 집적해서 검색하고 향수할 길을 열어 놓을 수 있는 시대가 바로 이 전자 복제 시대인 셈이다.

문학적 인식의 전환

그러나 여전히 숙제는 많이 남아 있다. 남아 전하는 문학 작품은 그렇듯 '문학 정보 센터'나 전자 도서관 또는 전자 출판 형태로 살아남을 수 있지만 오늘날 생산되는, 그 권위를 당장은 인정할 수 없는 작품들은 어떻게 다양한 시청각적 생산물들과의 경쟁에서 살아 남을 수 있을까? 사실은 오늘을 살아가는 문학인들에게는 바로 이것이야말로 절대절명의 주제로 부각되어 있다. 시청각 문화에 걸맞는 대중지향적인 문학을 양산하라는 끝없는 주문속에서 우리의 문학가들이 살아남을 방도는 무엇인가?

사실을 말하면 우리의 작가들은 이 문제에 대해 실제적으로 크게 시달리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즉, 문화적 대전환기, 매체의 대변혁기를 겪고 있는 이 현실을 직시하고 고민한 흔적이 그들 작품들에서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지신의 작품이 책으로 발표될 것인가, 시청각 매체에 제공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당장 염두에 둘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작품의 본질이 유통 문화 환경으로 인해 훼손되고 변질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정도는 염두에 두어야 하지 않을까. 그리하여 유통 환경, 문화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작품의 본질이 견지되는 탄력적인 방법을 동원해야 할 게 아닌가. 이 말은 지금 인류가 처한 시대가 어떤 시대인지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작가가 진정한 작가일 수 있다는 교훈이기도 하다. 농경 사회에서난 어울릴 미문체, 반공 시대에서 빛을 발했을 법한 계몽주의, 또는 변화에 대한 성찰을 거치지 않는 소위 신세대풍, 과거로 신화로 미래로 80년대로 가는 과정에서 현실은 고스란히 삭제해 버리는 탈현실적인 유행 따위가 여전히 그들 작품을 이끌고 있다고 한다면 이건 여간 안타까운 퇴행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존중해 주고 보호해주어야 할 순수한 문학 정신은 진정 있겠지만, 그 정신이 이 시대에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인지 아닌지를 고민하지 않는 안이한 태도는 반드시 불식되어야 한다. 이점 문학인들의 문화에 대한 인식 전환이 크게 요구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문학 연구자들의 인식 전환도 중요하다. 무엇보다 오늘날의 문학이 이미 생산부터 소비까지의 문화 환경 전반으로부터 전면적인 영향 아래 놓인다는 점을 직시한다면 문학 연구는 문학 그 자체에 대한 연구일 뿐 아니라 문학환경 연구 즉 문화연구로 나아가야 할 것으로 보인다(앞에서 소개된 발제문에서는 '문학 인구에서 문화 인구로'라는 소주제가 개진되어 있었다). 특히 우리 문학에서는 지속적인 대중화 시대에 돌입해 있으면서도 대중의 반응이 문학 연구 대상으로 함께 놓인 적이 거의 없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 시점에서는 최근 계간 문예지 「상상」에 의해 촉발된, 문학의 대중성 문제와 관련된 일련의 논쟁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바로 이 논쟁이 문학 연구에서 문학 소비 문제를 중심에 둔 일종의 문화 연구의 일면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소비지향적인 대중문화에 편입될 수 없다고 자존심을 내세우는 문학이 정작 그 대중들을 고급문화의 자리로 끌어오려는 노력마저 업신여기는 명분론적 풍토가, 비논리가 우리 문학계에 남아 있다. 상아탑의 귄위가 자주 상업주의에 이용되는 현실을 알고도 전혀 그 현실에 무감각한 문한 연구에 만족하는 비평가와 문학 교수들의 인식의 전환이 중요한 때이다.

마지막으로 문학 행정가나, 각종 문화재단, 문화단체에서의 인식전환도 크게 요구되는 실정이다. 앞서 '문학 정보 센터'개념을 말한 바 있지만, 학교 교육, 공공도서관 같은 공적 기관이나 제도에 있어서 문학이 시청각문화 시대에도 훌륭한 문화 자산으로 보급되고 정착될 길을 능동적으로 열어 주어야 한다. 이미 권위를 인정받은 작품들도 부지런히 시청각 문화에 젖은 대중들 사이에서 향수될 수 있는 길을 열어부저야 한다.

예를 들어 근작 소설들의 영상화를 행한 '단편소설 영화제' 나 '원작소설과 함께 보는 영화'등 문학과 시청각 문화가 결합되는 대회나 시설 등을 시행 또는 설비함으로써 오늘날 발표되는 문학 작품을 현실의 문화로 호흡하도록 하는 방법도 있을 것으로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