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연금술사 정지용
강진호 / 문학평론가
1.
정지용의 고향인 옥천은 충청북도 대전에서 40분쯤 떨어진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대전까지 두 시간 거리이니, 시인의 생가가 있는 옥천 구읍에 당도하려면 서울에서 넉넉히 3시간은 달려야 한다.
충북에는 정지용의 고향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국 문학사에 길이 빛날 많은 작가들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음성의 이무영, 진천의 조명희, 괴산의 홍명희, 청원의 김기진, 보은의 오장환 등이 그들이다. 그들 중 몇몇은 80년대 후반, 90년대에 와서야 빛을 볼 수 있었다. 분단과 이념의 그늘에 가려 한동안 실종 상태에 있었던 이들은 한때 이름뿐만 아니라, 고향까지도 박탈당하는 설움을 맛보아야 했다.
고향이 때늦게나마 그들을 기억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 몇 년에 이르러서니 격세지감을 여기서도 느낄 수 있다.
옥천(沃川)은 한때 포도의 명산지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제는 그보다는 정지용의 고향으로 기억하고 찾는 이의 발길이 잦다. 해마다 그의 생일인 5월 15일을 전후로 그를 기념하는 문학행사가 8년째 치뤄지고 있으며, 그때마다 그의 시를 아끼고 사랑하는 국내외의 많은 문인들이 이 옥천 땅에 발을 들여 놓는다. 어떤 이는 옥천의 기차역에「향수」의 시인 정지용의 고향이라고 커다랗게 써붙여야 하고, 플랫폼에는「향수」가 대형 입간판으로 서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만큼 정지용을 높이 생각하고, 명시「향수」를 아끼고 지용을 낳은 고향을 남다르게 여기는 것이다. 담배나 포도같은 농산물만이 고장을 대표하는 특산물은 아니며, 그 고을이 낳은 위대한 작가 역시 고장의 성가를 높이는 명산물인 것이다. 작가의 생가를 보존하고 기념관을 세우고, 유적지를 만들어 그 고장이 낳은 문호를 길이길이 자랑스러워하는 문화를, 외국처럼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발견할 수 있기를 꿈꾸어 본다.
옥천읍은 의외로 번성한 도회지였다. 지도 한 장에 길눈을 의탁하고 온 초행객이라면 다소 어리둥절할 정도로 마을 곳곳에는 규모있는 건물과 사람들로 붐볐다. 옥천 신읍(新邑)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자리잡고 있는 옥천문화원, 여성회관, 도서관, 관성회관 등이 마치 대도시의 문화거리를 연상시켜 준다.
시인이 태어난 곳을 가려면 이곳 신읍에서 동쪽으로 쭉뻗은 국도를 따라 3킬로미터쯤 내려가야 한다. 그곳이 옥천 구읍(舊邑)으로 알려진 한적한 농가마을로, 진입로에는 '지용로'라는 바윗돌이 놓여 있어 길을 알려 주고 있다. '지용로' 바윗돌을 마주 보았을 때 , 저만치 뒤편에 놓인 하얀 색 건물이 시선을 가로막는다. 정사각형의 운동장과 그 끄트머리에 놓인 일자형의 산뜻한 3층 건물이 바로 죽향(竹香)국민학교다. 지용이 다녔던 그 옥천공립보통학교의 현재 모습인 셈이다. 방학 중이라 휑뎅그레하니 빈 교정은 흐린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다소 을씨년스런 느낌을 준다. 운동장 맞은편에 반듯하게 가로놓인 흰색 3층 건물은 연전에 새로 지어진 것이고, 그 오른편 가장자리에 자리한 고색 창연한 목조건물이 바로 옛날 지용이 수업을 받던 보통학교 건물이다. 이 건물은 6·25 때 폭격을 맞아 불타 버렸는데, 후에 옛모습을 그대로 복원한 것으로 지금은 유치원으로 쓰여지고 있었다.
지용은 이 학교 4회 졸업생으로, 그때 졸업한 학생수는 약 16명 정도였다고 한다. 1914년 이곳에서 보통학교를 마치고(입학년도는 1910년) 4년 뒤인 1918년 휘문고등학교에 진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담벼락을 따라 아담하게 조성된 화단 한 구석에 '육영수 여사 휘호탑'이 세워져 있어 필자는 잠시 의아했다. 옥천이 육여사의 고향이고, 정지용 생가에서 5분 거리로 떨어진 곳에 육영수 여사의 생가가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옥천이 이만큼 번성하게 된 것은 어쩌면 여기에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죽향초등학교 담을 돌아 나가면, 이제 옥천 구읍의 소박한 전경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이 바로 지용이 태어나 유년 시절을 보냈던 곳이다.
2.
사람들은 대개 10세 이전에 친숙하던 풍경에 평생을 이끌린다고 한다. 고향은 한 사람이 이 세상으로 얼굴을 내밀었던 때 처음 접하는 세계이자 환경이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모자가 탯줄로 이어져 있듯이, 고향은 성인이 되어서도 그의 잠재의식 속에 남아 있는 무의식의 탯줄과도 같은 존재이다. 그러기에 고향을 떠난 이들은 본능적으로 고향을 그리워한다. '귀향', '낙향'과 같은 말들이 우리에게 남다른 감회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우리에게 내재된 고향의식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명절 때가 되어 연출되는 '귀향'을 위한 민족 대이동의 장관은 우리네만의 진귀한 풍속이자 문화인 것이다.
유년 시절에 어떤 풍경과 세계를 접하는가에 따라 그의 정서의 원형이 결정된다고 가정해 볼 때, 그가 어떤 고향을 갖고 있는가는 주목할 만한 대상이 된다. 특히 작가의 경우, 그가 바닷가에서 자랐는지, 농촌에서 자랐는지에 따라 작품의 경향 및 문체가 달라지는 것을 볼수 있다. 이태준의 고향인 용담 마을은 그의 무의식에서 걸어나와 소설의 무대로 형상화되었으며, 오영수의 일광(日光) 앞바다는 작품에서 서민들의 애환어린 삶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다. 지용에게도 '고향'은 각별한 의미를 갖고 있다. 지용 초기시의 대부분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노래한 시들이며, 유명한「향수」도 옥천 고향을 배경으로 쓰여졌다. 말하자면 지용에게 있어서 고향은 상상력과 그리움의 원천인 셈이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아 꿈엔들 잊힐 리야. -「향수」1연-
박인수와 이동원의 노래로 익숙해진 「향수」에 담긴 1920년대의 농가마을은 현재 많은 변화를 겪고 있다. 저만치 촌락의 한 귀퉁이에서 아파트 공사가 진행되어 토속 냄새 물씬나는 '시의 현장'을 차츰 퇴색시키고 있다. 지용이 '참아 꿈엔들 잊힐 리야'라고 그리워했던 곳은 이제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닌' 낯선 곳이 되어 버렸다.
구읍 사거리에서 조금 안쪽으로 들어가면 옥천읍 하계리 40의 1번지 생가터와 만나게 된다. 1백50평 남짓한 크기의 부지에 놓여 있던 옛집은 작년에 철거되고, 이제는 조그만 생가 표지석만이 휑뎅그레 남아 있다. 이 부지는 작년에 '정지용 생가복원 추진위원회'가 정지용 시를 새긴 도자기, 티셔츠, 손수건을 제작, 판매 한 수익금과 군 지원금을 합쳐서 군 명으로 매입한 것이다 맞은편에 1960년대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읍내 이발관'의 소박한 정경이 시골의 흔적을 대신해 주고 있으나, 생가터 바로 옆에 3층짜리 현대식 벽돌 건물이 '노래연습실'과 '양념통닭' 간판을 내걸고 시야를 우뚝 가로막아 영 생경스럽기 짝이 없다. 빈 터의 썰렁한 모습은 그 그늘에 가려 더욱 적막감을 자아낸다. 한때 미루나무 한 그루가 대문 옆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던 모양이나 베어져 버리고 말았으며, 마당 가운데 뚜껑이 덮인 우물만이 옛 자취를 남겨 놓고 있다. 작년에 헐렸던 집도 이전에 살던 주인이 많이 개축해서 원래의 생가 모습과는 달랐다고 한다. 아무튼 그 집은 대학을 마치고 모교인 휘문중학교 교사로 취임하여 서울로 이사할 때까지 지용이 자신의 문패를 붙여 두고 살았던 곳이다.
최근 목축업을 하던 주인 정태웅씨가 사업 실패로 집이 경매에 넘어갈 위기에 놓이자, 옥천문화원과 지역 주민, 문학단체가 '정지용 생가 복원위원회'를 결성하여 복원 사업을 서둘렀고, 우여곡절 끝에 작년 5월 지용제 때 '정비식(整備式)'을 마친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복원위원회는 생가가 복원되면 정지용 문학기념관으로 활용하거나, 5분 거리에 방치되어 있는 육영수 여사의 생가까지 포함하여 지역 문화공원으로 조성한다는 장기적인 사업계획을 구상하고 있다.
문화원이나 복원위 차원으로 사업을 추진해 나가기엔 부족하고, 도 차원, 국가 차원의 지원과 격려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관계자의 말이고 보면 '생가 복원'은 시일을 두고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지용이 시에서 노래한 '옛 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아직도 옛 정취를 간직한 채 생가터 옆을 감싸고 휘돈다. 개천의 양 옆으로는 옛 자취가 남아 있는 촌가들이 늘어 서 있다. 개천 밑 시멘트 축대 밑으로, 개울물이 얕게 흐르고 주변에 신문지 같은 쓰레기들이 젖은 채 널려 있다. 개울물에 발 담그고, 물장구 치는 어린 개구쟁이 모습이 떠오를 법하건만, 아무래도 옛 모습은 퇴색해 버린 것이 사실이다. 옛 사진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런지.
청석교(靑石橋) 다리 위에 서면 개천 양쪽으로 줄지어 늘어선 시골의 가옥들과 넓지 않은 들판, 마을을 둘러싼 산자락이 한눈에 들어온다. 마을 앞에 펼쳐진 벌판은 그리 넓을 것이 없건만, 시인의 동심어린 세계안에서 꽤나 넓은 들, 높은 산으로 인식되었을 법하다.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같이 출렁대는 검은 귀밑머리'의 누이와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해살을 등에 지고 이삭을 줍고 있는 농가의 풍경, 밤이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가 꼭 말이 달리는 소리처럼 몰아치고 또 흐릿한 호롱불 아래 가족들이 한 방에 모여 도란도란거리는 정경, 방구들 한켠에는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모습을 한 장의 풍경사진처럼 간지하고 간 내방객의 혼탁한 눈으로 볼 때, 그곳은 옛물이 가신 평범한 농가 마을로만 여겨질 뿐이다. 지용은 문명의 때를 타지 않은 원초적인 자연을 노래했지만, 이제 그 자연은 밀려드는 문명과 거센 개발의 물결 앞에서 차츰 무력해질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1902년 지용은 사방 산자락으로 둘러싸인 이 산촌에서 한약상을 경영하던 아버지 정태국씨와 어머니 하동 정씨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정지용이 태어날 때 그의 어머니는 연못에서 용이 하늘로 날아 오르는 태몽을 꾸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의 아명이 한때 '지룡(池龍)'이었다고. 부친은 한약상을 경영하면서 어느 정도 부를 축적했으나, 어느 해 갑자기 밀어닥친 홍수로 가옥이 몽땅 유실된 이후 가세가 기울어져 넉넉치 못한 가정을 꾸렸다고 한다. 그래서 지용은 보통학교를 마치고도 상급학교로 진학을 못하고 있다가, 워낙 재기가 승했던 까닭에 친지들의 권유로 서울 휘문고보에 진학했다는 것이다. 당시 농촌에서는 웬 만큼 부유한 가정이 아니고서는 자녀를 유학시키기 힘들었으니, 결국 옥천 실개천은 용 한 마리를 길러내어 세상에 내보낸 셈이 되었고, 옥천 마을은 두고두고 자랑거리 하나를 간직하게 된 것이다.
지용은 가난하게 자랐지만 이 마을을 둘러싼 산수를 통해서 아름다움과 꿈을 길렀다. '흙에서 자란' 시인의 마음은 늘 유년기의 아름다운 꿈으로 가득차 있었고, 고향에서 얻은 원초적 이미지들을 조형하여 아름답고 빼어난 시들을 빚어냈다. 그리고 이렇게 빚어진 시들은 당대에 이미 '우리말의 비밀을 알고 말을 휘잡아 조종하는데 놀라운 천재를 가진 시인' (이양하)이라는 찬탄을 받기에 이른 것이다. 한 시인이 '천재시인' , '우수한 감각의 시인'이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당대에 얻는다는 것이 얼마나 드문 일인가.
3.
중학 1학년 때, 누런 종이에 인쇄된 정지용의 시집을 처음 접한 것이 계기가 되어 문학평론가의 길에 들어섰다고 토로하는 유종호 같은 이는 정지용을 '한국시는 우리말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체득한 한국 현대시의 아버지' , '한국시의 근대적 세련미를 완성시킨 시인'이라고 평가한다. 지용은 소박한 우리나라 기층 어휘를 활용하고 새롭고 개성적인 시세계를 빚어냄으로써 모국어 발전에 대한 큰 기여를 한 작가라는 것이다.
일찍이 시인 김정환은. 자신의 감정을 시로써 표현해낼 수 있는 이는 백만 명중의 하나라고 갈파한 바 있다. 수천명의 시인이 있고, 시집이 있으되, '시다운 시'를 발견할 수 없음에 대한 그 나름의 자조를 바탕에 깔고 한 이야기라고 여겨지는데, 지용은 타고난 감정과 아울러, 그것을 예리한 지성으로써 절제할 줄 아는 '언어 조탁에 있어 천부적인 시인'으로 길이 기억되고 있으니, 시인으로서 최고의 평가를 받고 있는 셈이다.
지용의 천재성이 서서히 두각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휘문고보 시절부터였다. 조숙한 지용은 1학년 때 문학을 좋아하는 친구들을 모아 '요람(搖籃)' 동인을 결성할 만큼 문학에 정열적이었다고 한다.
학업성적도 뛰어나고, 시적 재능 또한 선망의 대상이 될 만큼 두드러져서 훗날 휘문학교 교주 민영휘의 지원을 받아 동경 유학의 길을 떠나기도 하였다. 이후 50평생을 통해 20여 년을 휘문고보에서 보낼 만큼 휘문고보와의 인연은 남다른 것이 되고 말았다.
소설의 이태준과 함께 30년대 시단의 거두로 꼽히고 있는 지용이나, 그의 시적 출발을 30년대가 아니라 20년대로 봐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명작 '향수'가 태어난 해가 1923년이고 그의 나이 22살 때였다. 「향수」에서 볼 수 있듯이 초기시의 세계는 고향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 소박한 촌민들의 생활감정을 담고 있다. 그러나 바다를 건너는 유학 경험은 이러한 초기 시세계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그의 빼어난 「바다」연작시편들이 그 와중에서 나왔다.
미억닢새 향기한 바위틈에
진달래꽃빛 조개가 해耔살 쪼이고,
청제비 제날개애 미끄러져 도-네
유리판 같은 하늘에
바다는 - 속속 드리 보이오.
청대耔닢처럼 푸른
바다
봄
-「바다 6」2연-
바다에 육체감의 맛을 입히는 이러한 탁월한 이미지즘의 기법은 그 전대에 볼 수 없었던 묘사력이어서 당대 시단에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의 '바다'에 매료된 이로는 지용의 시를 번역하여 펜PEN 번역문학상까지 받은 서강대의 키스터 신부가 있다. 그는 지용이 20세기 문학을 대표하는 예이츠, 엘리어트, 프루스트, 파운드, 릴케, 발레리 못지 않게 뛰어난 시인이라고 평하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지영 시는 「향수」, 「백록담」처럼 향토적 서정과 자연의 세계를 담은 동양시 계열의 작품과 「바다」와 같이 모더니즘이나 도회적 감각을 살린 작품들로 나누어진다. 또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지용은 많은 종교시편들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불사조」,「나무」등은 이 계열을 대표하는 시들이다. 이 시를 통해서 지용은 비애나 고통에 쌓인 인간의 회한과 성신(聖神)에의 귀의를 노래한다. 이후 지용은 「장수산」1·2, 「백록담」등 '산'을 제재로 한 많은 시들을 발표하여 안정되고 정밀한 평화의 세계를 노래하였으며, 심오한 시적 달관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의 작품들은 어느 의미에서 '최초로 시의 품위를 갖춘' 시들로 평가되어 국민학교 국어 교과서에까지 실리는 등 일찌감치 '고전'으로 평가를 받았고, 지용 이후의 시인들 중, 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고까지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시가 '월북작가'라는 누명을 쓰고 한동안 교과서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문학교과서에 등장한 것은 1988년 해금 이후였다.
4.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지용이 6·25때 월북한 시인으로 오인되어, 38년간이나 묶여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그간 많은 논란이 있었다. 유족들의 증언과 당시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지용은 월북한 것이 아니라 강제 납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방과 함께 이화여전 교수로 부임했던 지용은 1948년부터 직장을 그만 두고 녹번동에 집을 마련하여 서예로 소일하다가 6·25 전쟁의 발발과 함께 비극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는데, 정지용의 장남 우관씨는 지용의 마지막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1950년 7월, 낯익은 청년들이 와서 세상이 뒤바뀌는데 얼굴을 안 내밀면 봉변을 당한다고 말하자 아버님은 집에서 입던 모시적삼차림 그대로 '문안에 잠깐 다녀오마'하고 나선 것이 마지막 이별이 되어 버렸다." 8·15에서 6·25에 이어지는 그 민족 수난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그 운신의 폭이 자유로울 수 있었던 이가 과연 몇몇이던가.
1930년대 지용은 카프와는 입장을 달리했던, 순수문학 지향의 문학단체 '구인회'의 핵심 성원이었다. 사실 구인회가 순수문학의 방향으로 가는 데는 정지용의 역할이 컸다고 한다. 당시 정지용은 「가톨릭 청년」지의 편집에 관여했기 때문에 카프파들의 공격도 많이 받았다. 그는 그러한 카프파들의 공격에 대해 '천주교의 역사는 맑스주의의 그것과 비교도 안된다'는 반박론을 펴기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반맑스주의자였던 지용이 사변의 와중에서 가족을 놔두고 자진월북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용납되지 않는다. '강제납북'이 '자진월북'으로 둔갑하고, 남과 북으로 길이 엇갈린 이후 생사조차 알 길 없는 안타까운 이들은 또 얼마나 많았던가.
지용이 행방불명된 이후 그가 처형되었다느니, 폭사(暴死)했다느니 하는 설이 분분했지만, 결국 사망년대조차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태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분단과 이념 대립이 낳은 또 하나의 비극인 셈이다. 지용의 유족(부인 송재숙 여사는 1971년에 사망)과 원로문인들, 학계가 중심이 되어 '복권'을 위한 진정서를 정부관계 요로에 제출한 것이 지난 1982년이다. 그러고도 6년이 지나서야 그의 시는 감금상태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그동안「향수」, 「백록담」,「바다」와 같은 한국 근대문학사에서 떼어놓을수 없는 명편이 수록된 그의 시집은 출판이 번번이 무산되고, 그 조판 지형을 창고에서 묵히는 수난의 세월을 겪어야 했다.
지용이 해금되던 해에 그를 기리기 위해서 '지용회'가 발족되었다. 문학인 애호가 모임으로는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결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문단 비문단을 막론하고 '정지용 시인을 아끼고 지용 시를 사랑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지용 회원이 될 수 있게 문호를 개방하여 처음 54명이었던 회원 숫자가 지금은 7백여 명이 넘는다고 한다. 해방 후 지용과 같이 이화여대에 재직한 인연을 갖고 있는 방용구씨가 초대회장을 맡고 각 분야의 예술인들이 참여하여 바로 그 해에 첫 지용제를 개최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해나가고 있다. 김희갑 작곡의 그 유명한 「향수」도 지용회가 모금음악회를 열 때 「향수」의 작곡을 의뢰하면서 태어나 곡이다.
옥천 신읍내 관성기념관 뒤뜰에 정지용 시비가 제막된 것이 지난 1989년. 그 역사적인 시비 제막식에는 박두진, 김남조 등 낯익은 시인들이 눈에 띄었다. 한국 문단의 정신적 대부인 지용 시인으로부터 한 번씩 시의 세례를 받았음직한 문학인들이다. 그날 박두진은 제1회 지용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는데 청록파로 일컬어지는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은 모두 지용이 「문장」지 심사위원으로 있을 때 그의 추천을 받아 등단한 이들이다. 그의 시를 접하고 감성의 눈을 뜬 이도 적룧은 터. 그들에게 지용은 '차마 그 이름 잊힐 수 없는' 영원한 시인인 것이다. 이제 해마다 5월이 되면 이곳에는 지용문학의 축제가 연례행사로 열린다. 문화회관에서는 어린 학생들을 모아 지용문예상 백일장을 열고, 서울에서는 시인들과 지용회원들이 내려가 지용의 명시를 낭송하고 그를 기린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서울의 세종문화회관 못지 않은 위용을 자랑하는 관성문화회관이 이런 대규모 행사 때나 한시적으로 빛을 발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릇은 근사하게 만들어져 있으되, 그 속에 담겨 있어야 할 향토문화는 아직 충분히 여물지 못한 것인지….
5.
야산을 깎아서 조그만 공원처럼 꾸며 놓은 관성회관 뒤뜰로 돌아가면, 정지용의 시「향수」가 적힌 시비를 볼 수 있다. 시가 적인 빗돌은 옥천문화원 원장인 박호근씨가 특별히 속리산의 산수유려한 곳에서 골라, 옮겨온 것이라고 한다.
시비 왼편으로 조금만 돌아가면 지용동상이 자리하고 있다. 두루마기 자락에 안경을 걸친 풍모. 선비로서의 견결함과 시인으로서의 섬세한 분위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청동 조각상은 사진에서 볼 수 있는 생전의 모습을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
지용은 생전에 워낙 기억력이 좋아 자신이 작품을 모두 외우고 있었고 친구들과 어울려 술에 취하면 셰익스피어 작품을 줄줄이 암송하기도 했다.
또한 머리 속에서 완전히 시상을 정리한 다음 마지막 순간에 책상에 앉아 단번에 원고지에 옮기는 것이 그의 시작(時作) 방식이었다. 천재시인의 한 면모를 느끼게 해주는 구절이다.
'어른처럼 분별 있고 침중한가 하면, 어린애처럼 천진하고 재재바른' 성품을 가진 이였다는 것이 생전에 그를 지켜 본 교우들의 증언이다.
명랑하고 경쾌하고 낙천가였으나, 마음속으로는 이름 모를 비애와 고독을 숙명으로 품고 있는 고독과 비애, 그리고 신앙의 시인, 50년 전란의 와중에서 실종된 이후 이제 그는 40여 년 만에야 겨우 고향 땅에 돌아와 이곳에 안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지용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옥천읍 하계리의 고향주민 또한 자발적으로 '실개천 지용회'를 조직하는 등, 한때 잊혀졌던 고향의 큰 별을 현실 속에서 다시 빛내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옥천은 이제 옛시인의 마을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