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문학의 오늘과 내일
이태동 / 문학평론가
지금 우리는 지난해로 신문학(新文學) 50년을 보내고 다가오는 21세기를 바라보면서 금년을 '문학의 해'로 정하고 민족문화의 근본이 되는 한국문학의 새로운 도약을 위한 동기를 마련하려는 의욕을 보이고 있다. 문학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잘 모르겠지만, 문학은 민족정서의 바탕이 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주의깊게 읽어보면 그 나라의 문화수준과 국민의식을 알 수 있다고 한다. 만일 언어예술인 문학이 없었다고 하면, 국민의 거친 정서에 대한 '감정교육'은 무엇으로 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희랍시대에는 시인을 두고 신의 영감을 받은 사람으로 존경했고, 영국 사람들은 셰익스피어를 인도와도 바꿀 수 없다고 말했다. 현 단계에서 우리 문학의 좌표가 무엇이며 그것이 세계문학 속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또 그것의 현실과 이상을 함께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것도 뜻있는 일이라 하겠다.
만일 우리가 구비문학(口碑文學)의 역사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문학은 우리 민족의 기원과 더불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 문학적 현실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것은 여러 비평가들에 의해 이미 밝힌 것처럼 신문학 이후의 문학사이다.
비교문학 이론에서 주장하고 있는 바와 같이 문학의 흐름도 '비교우위'에서 이루어진다고 한다. 만일 어느 나라의 문학이 다른 나라의 그것보다 우위에 있으면, 그것이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는 것이다. 신문학은 비록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것이지만, 서구문학의 충격을 받고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신문학이 처음 일어날 당시의 우리나라는 쇄국정책으로 말미암아 시대에 뒤떨어진 결과 일제 식민지적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 결과 당시 우리 문학의 중심된 관심은 이광수 문학에서 볼 수 있듯이 식민지적인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계몽주의적인 것이었다. 그 이후 임화를 중심으로 한 카프문학과 김동리를 중심으로 한 자연주의문학내지 상징주의문학이 일어나서 시대적인 배경으로 첨예한 갈등관계를 가졌다.
그 후 한국문학이 의식적인 면에 있어서 소피스티케이트한 현대문학으로 발전하게 된 것은 동족상잔의 6·25전쟁이라는 충격적인 경험 대문이다. 제1차대전과 제2차대전이 서구문학에 크나큰 영향을 주었듯이 6·25전쟁은 한국 작가들에게 무서운 충격을 주어서 실존주의적인 색채가 짙은 전후문학의 시대를 가져왔다. 최인훈, 서기원, 강신재, 손창섭, 그리고 김승옥 등의 문학도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일어났다. 해방 이전부터 작품활동을 해온 김동리, 황순원 등도 6·25의 충격으로 그들의 작품에 많은 변모를 보였다. 6·25의 경험과 분단현실, 그리고 뒤이어 찾아 온 산업화로 인해 빚어진 이데올로기적인 갈등은 박경리, 선우휘, 황석영, 박완서 등을 중심으로 리얼리즘의 꽃을 피우게 했다. 70년대와 8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군들 가운데 이청준과 이문열은 리얼리즘 문학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역사적 리얼리스트들과 다른 상징주의적 색채를 띠면서 우리문학의 폭을 확대시켰으나, 6·25의 상처와 분단민족의 갈등이 그들 문학의 저변에 깊이 깔려 있다. 문학은 그것이 탄생한 시대적인 경험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현상은 당연한 것이고 피할 수 없는 당위였다.
8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 소련을 비롯한 동구권이 무너지고 한국사회가 민주화가 되어감에 따라 오늘날 씌어지고 있는 문학작품들은 이데올로기적인 갈등에서 벗어나서 환경문제를 비롯하여 자연과 인간, 그리고 존재문제 등을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요즘에 활발하게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들의 작품들 또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동안 불행한 시대를 지나오면서 지나치게 억압적인 사회환경과 첨예한 이념적인 갈등 때문에 몇몇 작가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작가들은 지나치게 경직된 리얼리즘적인 작품을 써야만 된다는 강박관념에 쫓겨왔다. 사실 80년대까지만 해도 분단현실의 사회상황을 다루는 작품을 쓰지 못하면 의식있는 비평가들의 관심을 끌 수 없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최근 젊은 작가들이 쓰는 많은 작품들이 너무나 상업적으로 흐르면서 감각적이고 허무적인 경향을 보이는 것 또한 그렇게 바람직한 것으로만 평가할 수 없다. 리얼리즘정신은 허위적인 환상이 아니라 현실에 바탕을 둔 인간의 위엄과 존엄성은 물론 건강한 역사의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문학의 도덕성을 생각하는 작가라면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만 할 사항이자 소설의 미학이다. 문제가 있다면 오늘날 인간이 처해 있는 복잡하고 다양한 상황을 리얼리즘적인 방식만으로는 만족스럽게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리얼리즘문학은 사회와 역사문제에 너무나 깊이 천착하고 있기 때문에 개인적인 삶과 운명, 그리고 낭만적인 꿈 등을 표현하는 일을 경시하거나 가볍게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그래서 오늘날 앞서가는 전위적인 서구작가들은 아직 완전히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리얼리즘과 자연주의, 그리고 환상과 우화(寓話) 등을 혼용해서 새로운 형태로 표현하는 방법을 창안해서 실험적으로 대담하게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우리의 작가들이 리얼리즘의 형태든지 혹은 자연주의 몇 상징주의적인 형태든지 또는 다른 어떤 문학적 형태로 취하든지간에 세계에 내놓아서 손색이 없는 작품을 쓰는 일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은 한국문학 작품이 세계시장에 내놓을 수 없을 만큼 저급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작품도 단편일 경우에는 서구의 그 어느 작품과도 비견할 수 있을 만큼 훌륭한 작품들이 많다. 또 적지 않은 수의 장편들도 그것대로의 특색을 지니고서 한국문학사와 사회사 속에서 그것들이 해야만 하는 문학적인 기능을 다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한국 작품들을 우물의 벽을 넘어 세계문학 속에 고전으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부딪히게 되면 회의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소설인 경우 단편과 중편이 제한된 좁은 소설공간 때문에 서양의 고전적인 작품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확보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서양에서는 우리와 달리 단편은 생의 일면만을 그린다고 생각해서 그렇게 중요시하지 않고 인간이 지닌 운명적인 생의 길이를 충분히 담아낼 수 있는 한 권 분량의 장편을 중심으로 문학적인 가치를 가늠한다. 우리나라의 작가들도 적지 않게 장편을 썼지만, 그들은 적당한 분량의 장편보다는 대하(大河)소설을 썼고 지금도 쓰고 있다. 대하소설은 중국과 일본에서 많이 씌여지는 형태로서 결국 탁월한 소설미학을 지닌 서구의 고전적인 소설형식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숨김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우리 문학작품들이 안고 있는 또 하나의 문제점은 우리 문학작품이 세계성을 지닌 보편적 주제를 폭넓고 심도있게 다루는 데 있어서 취약한 면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 시대의 어느 작가 할 것 없이 일제와 6·25동란, 군사독제, 또는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되는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이념적인 문제를 평면적으로 다루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나 한국 현대사에 나타난 이러한 문제는 우리들에게는 대단히 절실하고 중요한 문제이지만, 세계인에 속하는 외국인의 눈에는 그렇게 크게 보이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한국 작가들은 우리의 비극적인 상황을 배경으로 설정한다고 하더라도 인간과 삶, 그리고 신의 존재문제 등과 같이 보편성 있는 주제를 밀도 짙게 다루어야만 하겠다. 다시 말해, 세계를 놀라게 할만한 정신적인 가치추구와 철학이 우리나라 작품들 가운데에서는 빈곤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을 극복해야만 하겠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써는 물론 우리의 문학적 능력을 세계문단과 시장에서 알림과 동시에 실험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주장이 그동안 적지 않게 대두되었다.
그래서 80년대부터 한국문화예술진흥원과 문화체육부, 그리고 최근에 와서 대산재단 등의 지원으로 번역되어 발간된 한국 문학작품집이 1백 권을 넘어서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번역된 우리 작품들이 세계 문단에 별다른 충격을 주지 못하고 지극히 제한된 부수만이 한국학을 연구하는 사람들 중심으로 읽힐 정도이다. 그래도 이문열의 작품이 프랑스와 영국 등에서 비교적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은 그의 문학이 역사와 이데올로기보다 그것에 저항하는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를 그의 흡입력있는 문장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그래서 우루과이 라운드가 실시되는 정보화 시대에 한국문학이 지구촌에서 살아남으려면 그들이 쓴 작품이 세계적으로 많이 읽힐 수 잇는 고전(古典)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흔들림없는 좌표를 설정하기 위해 우리의 특수한 경험을 보편적인 것으로 승화시켜야만 하겠다.
근자에 와서 몇몇 한국 작가들은 그들의 문학적인 주제를 해외에서 구하는 경우가 빈번히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러한 추구에 잘못이 있을 수 없다. 세계인의 관심을 끌 수 있고 주목을 받을 수 있는 주제의 발견과 그것의 성공적인 형상화는 반드시 국외에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다'라는 괴테의 말을 믿는다면, 우리문학에 깃들어 있는 예술적인 가치와 철학을 세계적 주제로 만들 수 있는 가능성은 결코 없지 않다. 일본의 노(能) 극에 사용하고 있는 가면(假面)의 미학은 일찍 노벨상을 받은 아일랜드의 위대한 민족시인 예이츠에 의해 발견되어 그의 극예술과 시문학을 통해서 세계적인 것으로 승화되었다. 영국의 유명한 작가 E. M. 포스터도 인도의 신비주의에서 탁월한 주제를 발견하고 「인도로 가는 길」등과 같은 탁월한 문학작품을 썼다.
그렇다면 한국의 작가들도 독특한 한국정신 및 한국미학을 세련된 현대화 작업을 통해서 세계적인 것으로 보편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서구 사람들은 동양정신의 신비주의에 대해 우리만큼 모르기 때문에, 그것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해서 보편화시킨다면, 그들의 주목을 충분히 끌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작가들의 감수성이나 미적 능력, 그리고 역사의식이 대단히 뛰어난 것이라고 말하지만, 상상력을 통해 그것을 수준 높은 작품으로 형상화시키거나 구체화시키는 데는 아직까지 부족해서 우리들보다 앞서가는 나라의 문학적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문학적인 과제를 성취시키기 위해서는 외국의 문학작품의 충격을 쉴 사이 없이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사색과 훈련을 통해서 창조적인 탑을 쌓아야만 한다. 과거에도 그러했겠지만, 국제화시대의 문화교류는 타국(他國)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국(自國)을 위한 것이고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영상매체 앞에 입상(立像)처럼 앉아 자기 자신을 수동적인 인간으로 퇴화시키는 무기력한 젊은이들이나 상업적인 목적만을 위해 정신적인 가치가 전혀 없는 감각적인 소설을 읽고 진부한 내용의 글을 쉴 사이 없이 쓰는 의식없는 작가들에게 결코 한국문학의 장래를 맡길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성을 지닌 고전(古典)으로 남을 수 있는 작품을 쓸 수 있는 작업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생에 대한 남다른 통찰력과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의지로서 자기의 삶과 문학에 처절하게 대결하는 작가에게만 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