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200호 특집. 21세기의 문화예술 전망. 미술

테크놀로지 아트와 뉴미디어 아트




조광석 / 미술평론가, 조형예술학 박사

하나의 이론적 체계에 맞추어지지 않는 미술양식

요즈음 우리가 흔히 접하게 되는 미술양식의 다양성은 비연속적이며, 어떤 하나의 이론적 체계에 맞추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 지식의 축적이 계속 이루어짐에 따라 인간은 자신의 무한한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한 가지 사실에 정체하지 않으려 하고 계속적인 변화를 추구하면서 일어나는 현상이라 보겠다. 또한 우리의 보편적인 역사관에서도 잘 나타난다. 현대를 역사적 과정의 일부로 볼 때 가속화 과정으로 보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이상은 열려져 있다고 생각하며, 현재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를 항상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미래에 대한 이상이 미술에서는 전통적인 가치 체계의 해체가 계속적으로 일어나게 되고, 주관주의적 미술 형식이 점점 깊어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전통적인 미술 체계인 회화와 조각의 분류가 모호해지고 작가들의 손에 의한 제작의 기능적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

마찬가지로 작가는 눈에 보이는 것을 모방하는 현실의 재생보다 외관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더욱 깊은 의미를 추구한다. 따라서 미술 작품은 재료를 다루는 손재주에 의한 기교적 형식보다는 작가의 주관적 사유 형식에 의존하게 된다. 이러한 주관주의는 오늘날 새롭게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이는 주변의 자연물에 의미를 부여하여 인격화시키는 토템신앙의 종교적 제의물이나 원시 미술의 유물에서도 출현하고 있으며, 가깝게 상징주의 회화에서는 인간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삶과 죽음에 관한 심리적 갈등을 상징화시키고 있다. 물론 예술 자체가 갖는 의미 구조는 상징 체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모든 예술은 주관적이며 상징적이라 하겠다.

작가들은 우리의 현실 세계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들의 시각에서는 사회적 현존과 작품을 통해서 이상적으로 요구하는 것 사이에 나타나는 불일치와 작가 자신의 모습에서 보편적 인간들이 소외되고 있다고 느낀다. 따라서 실제 삶의 요소들을 재구성하여 정신적인 공허함을 제시하고 현재 우리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작품을 제작하게 된다.

요즈음 작가들이 일상적인 삶의 도구들을 그들의 작품에 사용하는 경우가 빈번함에서 나타나듯이 현실의 파편들을 통해서 현대 기술문명의 공허함을 상징적으로 해체시키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미술에서 작가들의 현대기술문명에 대한 해석은 또 다른 새로운 미술을 낳게 되고 과거의 미술에 대해 진부한 것으로 치부하면서 흔히 부정적인 비판을 담게된다.

21세기의 예술은 어떤 형식이 될 것인가?

그렇다면 21세기의 예술은 구체적으로 어떤 형식이 될 것인가?

그것은 사실상 현실의 복잡함을 볼 때 울퉁불퉁한 표면위에 공을 떨어뜨렸을 때와 같이 새로운 미술은 예측하기 어려운 점이 될 것이다. 그렇게 미래의 미술 전체를 예상하기는 어려울지라도 어떤 한쪽 방향으로 튀어 오를 가능성을 예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현재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현상 중에 최첨단 테크놀로지를 미술의 기법으로 도입하는 점과 전자적 통신 기기에 의해 매개되는 뉴미디어의 의사 소통방식이 미술에 사용되는 경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미술의 기법은 변화되지만 그 본질적인 의미구조 형식은 앞서와 같은 원시 미술이나 상징주의 미술에서 나타나듯이 인간의 본성에 접근하려 시도한다.

사실상 근래의 미술작품들은 현실의 파편들을 시각적으로 집합시킴으로써 사실적 구성 형식을 지향하지만 결국 외면적 사실성보다는 내면에 감추고 있는 상징화에 의한 의미구조가 추상화만큼 임시적이다. 그러나 미술의 현대적인 동향은 순수 무의식, 내면의 감정까지 작품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추상미술과는 다른 시도로서 보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구체적 사실로부터의 해방을 주장하면서 인간 감성과 내면의 세계로 접근하려 했던 추상미술과는 다르게, 새로운 미술에서는 이 시대에 나타나는 질서의 원리, 통제의 원리를 가시화시키며 현실을 다시 보려는 작품들이 되면서 앞서 있었던 미술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낸다. 이러한 미술 작품에서 나타나는 실제적 가치라고 말하는 것조차도 내면으로 끌어들이며 다시 조합하여 작품을 현실의 이상화에 더욱 더 호소하게된다.

벤야민의「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나 맥루한의 「구텐베르크의 은하계」에서는 이미 새로운 시대의 예술을 시사하고 있다. 20년대의 벤야민이 예견했던 영화예술의 출현은 예술감상의 태도의 변화와 대중예술의 확산을 이루어냈고, 60년대 맥루한이 예상했던 전자오락의 발명은 오락의 단순한 변화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사고 구조마저 변화시켰고 오락의 조성 방법이 예술작품에 도입되게 된다. 그러한 사진기술의 확산과 전자오락의 구조가 미술 안으로 들어오게 됨에 따라 비디오 아트와 컴퓨터 아트에서 실현되는 자극적이며, 촉각적 조형성이 작품의 외적 요소로 등장하게 되며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게 된다.

몇 년 전부터 우리는 미술관에서 텔레비전 모니터와 컴퓨터에 의한 전자기기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이러한 전자기기가 화랑에 등장하게 된 것은 이미 50년대 말 백남준에 의해 최초로 시도되면서 초기에는 전위예술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는 단순히 진공관과 전자회로에 의한 재료적인 측면의 전환뿐만 아니라 이제까지 미술작품에서는 제한된 영역이었던 시간성과 장소적인 제약이 해체되고, 작품의 복제성이 강화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테크놀로지 아트와 뉴미디어 아트는 지금까지의 미술의 한계를 서서히 벗어나고 있으며 지난해의 중요한 국내외 전시에서 그 실례를 찾아볼 수가 있다.

지난해「인간과 기계」(테그놀로지 아트·동아갤러리)나 광주 비엔날레의 부대 행사로 열렸던 ‘인포 아트Infoart’국내에서 보여준 테크놀로지 아트의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난 12월부터 금년 2월 18일까지 프랑스에서 열리고 있는 제3회 리옹 비엔날레도‘미술관 새로운 테크닉의 만남’을 주제로 다루면서 비디오 아트와 테크놀로지로 제작되는 작품이 이 전시의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주관주의 미술과 다른 관심 갖게 하는 테크놀로지 예술

새로운 테크놀로지 예술은 우리의 실생활의 사물들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물감이나 흙, 나무, 돌, 청동 같은 전통적 재료와 다르기 때문에 앞에서 거론되었던 주관주의 미술과는 다른 관심을 갖게 하고 있다. 더구나 중요한 점은 과거의 미술과 비교했을 때 넓은 폭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 광주 비엔날레의‘인포 아트’전이 대중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전자오락에 흥미를 끌듯이 새로운 전자 작품에 관심을 쏟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테크놀로지 예술은 과거의 미술과는 다르게 시각적 효과가 높다는 것과 이제 우리 생활에 필수품처럼 자리잡은 비디오 시스템이나, 컴퓨터 작동 효과가 관람객들에게 익숙해 있었기 때문이라 본다.

그리고 이러한 전자기기에 의한 작품들은 작품과 대중과의 접촉에 의한 감응 효과를 사용하여 대중들의 눈에는 오락적 요소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상의 세계나 공상과학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던 전자시대를 비로소 접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인위적으로 창조된 세계에서 조화롭고 낙관적인 새로운 세계를 예상하듯이, 대중들은 그러한 전자 예술에서 새로운 세상을 보듯이 접근하는 것이다. 이미지의 통제, 조작, 변환 또는 임의의 선택으로 나타나는 전자 현상들은 단선적인 과거의 미술 작품의 인상과 확실히 다르게, 쉽게 그리고 오락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고정적인 구조물로서의 작품이 사라지고 관객과 반응하는 전자 회로는 언뜻 관객을 작품의 주체자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우리는 1984년 1월1일 백남준이 시도했었던「오웰의 1984」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1984년 1월 1일 뉴욕·파리·서울을 연결하며 시도되었던 영상 이미지의 인공위성 중계와 연주회는 이제는 아마 세인의 머리 속에서 사려져 버린 작품이 되었을지 모르겠다. 물론 필자 자신도 그의 작품에서 그 당시 특별한 감흥을 갖지 못했었다. 일반적인 텔레비전 모니터에서도 볼 수 있었던 비디오 영상이 인공위성으로 중계되는 정도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그러한 미술의 효능과 가능성을 확인하는 때가 된 것이다.

집집마다 설치된 개인 컴퓨터의 수상기에서는 각자가 선호하는 세게 여러 곳의 정보를 수용할 수가 있고, 미술 작품 자체도 이러한 정보화가 가능한 형태로 변형되고 있다. 이러한 미술 작품의 변화는 많은 사람의 관심을 집중시킬 것이며 이는 작품 체계에서 미술개념의 변화뿐만 아니라 사회적 가치에서도 개인적 취향의 변호를 초래할 것이다. 현재의 이와 같은 많은 전자기기의 미술 작품에로의 도입은 고도의 정보사회에서 새로운 경제 체제에 의한 개인적 예술 지배의 힘이 무너짐이 암시되고 있다. 이는 예술작품이 특정 개인에 의해 소비되고 소유되는 경제 구조가 사라지고 다수에 의한 공동소유의 형식이 되며 그것은 일종의 소통 체계화가 될 것이다.

대중의 전자 미디어 예술에 대한 관심과 호응은 그렇게 긍정적인 면만 지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작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현재 우리가 흔히 접하게 되는 대중성과 관련지어 진다. 그것은 우리 사회에 보편화되어진 대중문화현상이라 볼 수 있으며, ‘인포 아트’와 같은 전시회에 대한 관심은 상당히 표피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며 문화의 대중화에 따른 유행적인 성향도 암시되고 있다.

우리는 계몽주의적 사유의 발전과 보편적인 이성의 관점에서 이러한 새로운 미술을 볼 때 대중의 작품의 이해도에 대한 기대는 확언할 수가 없다. 새로운 예술, 전자미디어에 의한 조형예술은 자체적으로 이미 이중 삼중의 암시체계를 내포함으로써, 현실적으로 많은 대중이 이러한 작품의 내면 구조를 해석해 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한 작품들에서는 오늘날 부상하는 전자적 기기들의 물적생산의 효율성이 표면적으로 과시되기 때문에 그 외의 효과는 쉽게 인식되지 않는다. 사회 발달에 따른 생산 양식의 변증법적 발전개념은 현대사회에서 새로운 미디어의 출현을 이루지만 새로운 시대의 출현과 함께 새로운 미술에 대한 수용태도는 불투명하다고 본다. 그것은 과거예술에서 나타나는 순진한 내면적 갈등을 찾으려 했던 미술보다 더욱 감상하기 어려운 기호체계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한 단면이 백남준의 또 다른 작품들에 대한 이해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백남준의 작품은 외적 형상들, 즉 자동차나, 사람의 모양을 묘사하는 로보트, 탑, 건물 등등, 전동적인 조형예술의 모방 형식을 차용하면서 구체적인 사물들을 묘사하고, 일차적인 시각으로는 외면상의 단순하고 유치한 재현처럼 보인다. 그의 작품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은 전기, 전자기기들을 통해 암시되는 내적 미의식을 보기보다는 조형적 외형을 쉽게 찾아내고 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텔레비전 모니터로 구성된 로보트나 장난스러운 어린아이들의 블록 쌓기 또는 텔레비전 모니터 쌓기와 같은 우스꽝스러운 놀이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는 전통적 재료의 대치 현상과 함께 미술을 통한 이중적 암시를 느끼게 한다. 백남준의 작품에서 질료적인 면은 새로운 재료의 등장에 따른 테크놀로지화의 도입이며, 질적인 면은 문화의 대중화 현상과 상업화에 적응하는 예술의 단면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벤야민과 맥루한의 예언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다. 영화에서 비디오까지의 기술의 변화에 따른 시각예술의 표현 가능성은 확대되었고, 그 가능성이 대중으로 확산됨에 따라 시각예술의 가능성은 점점 생산과 소비의 그 영역을 넓혀 가게 된다.

만약 이와 같이 현재의 전자 미디어의 발전이 계속된다면, 시간성·공간성이 확산됨에 따라 우리의 현실적 사고의 폭도 넓어질 것이고, 그에 따라 미술의 개념도 확산되리라 예상할 수 있다. 즉 과거미술의 협소한 조형적 한계가 재료 자체를 다루던 질료적인 제한을 벗어나고 다른 장르의 방법을 차용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전통적인 전시 개념도 변화되어 좁은 전시장을 벗어나 서로 다른 공간에서 시공적인 제한을 초월하게 될 것이다.

산업사회 이데올로기 대변하게 될 새로운 예술체계

새로운 미술언어 형태는 사회적 관계망과 그 속에 구성되는 주체와 객체 모두를 변모시킬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의 확산에 따른 새로운 예술 체계의 등장은 결국 미술작품이 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를 대변하게 된다.

특히 텔레비전 매체에 의한 대중 예술의 확산과 함께 자본주의 소비 사회와 맞물려 새로운 예술 개념을 등장시키고, 그것은 단순히 재료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소재에 대한 변화를 갖고 왔다. 이러한 뉴미디어 미술에서 나타나듯이 정보양식이 도입되고 전자적으로 매개된 커뮤니케이션의 언어적 특성을 도입하여 작품의 내용은 정보양식이나 구조 자체가 될 것이며, 작품은 현대사회의 발전개념을 수용할 것이다.

이와 같은 미술 작품에서의 주제가 변화되는 것을 보드리야르는「시뮬라시옹」에서 현실적인 모델이 사라지고 인위적 대상이 나타난다고 강조한다. 과거의 회화는 현실의 대상이 나타난다고 강조한다. 과거의 회화는 현실의 대상과 재현의 관계로 해석됨으로써 모방의 원리를 수용할 수 있지만, 현대 미술에서 그리고자 하는 대상인 구체적 사물이 사라지게 되면서 본질적으로 실재와 상상 세계의 다름 자체가 없어지게 됨을 의미한다. 미술작품이 모방하던 현실적 모텔이 사라짐은 우리가 자연이라 부를 수 있는 본래의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되고 미술이 상징하던 주체 또한 사라지게 된다.

테크놀로지 아트와 뉴미디어 아트의 출현은 엄밀히 말해 작품 주제의 현실적인 한계라고 하겠다. 미술 자체에서 해결될 수 없는 주제의 한계는 스스로의 독특함의 한계를 나타내게 된다. 독특한 스타일의 종말, 다른 장르와의 구별의 종말을 구하게 된다. 옛날 주체 중심의 낡은 아노미로부터의 해방은 불안으로부터의 해방일 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느낌으로부터 해방을 의미하지만, 결과적으로 정서의 퇴조를 의미하며 모더니즘적 주제들에서 나타나는 지속과 기억의 애가적 신비가 사라지고 우리의 일상생활, 심리적 경험들은 퇴조 현상으로 성격지어 진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은 표면적으로 어떤 기준에서 일탈하면서 테크놀로지 아트와 뉴미디어 아트는 어떤 새로운 특색 있는 것으로 규정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