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200호 특집. 21세기의 문화예술 전망. 영화
21세기 최후의 테크놀로지 : VR
하재봉 / 시인, 영화평론가
VR이 미래적 삶에 미치는 영향
미래 대중문화의 흐름을 예측하는 것은, 신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다. 대중들처럼 변하기 쉬운 속성을 가지고 있는 것도 없다. 우리 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대중문화, 가요와 영화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예측한다는 것은, 다시 말하자면 미래의 우리들 삶의 변화된 모습을 예측하는 길이기도 하다. 그 단서를 우리는, 지금 현재의 삶에서 찾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불확실한 만큼 모험에 가득차 있지만, 그러나 비가시적 영역을 예측가능한 범위 안으로 끌어들인다는 점에서 분명히 가치있는 일이다.
21세기 우리 인간의 삶을 결정적으로 지배하는 힘은, VR(VIRTUAL REALITY, 가상현실)에 있다. VR은 현재,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오락게임 정도로 사용되거나, 아니면 일상생활에서 가볍게 응용되고 있지만, 미래의 우리들 삶은 VR의 지배하에 있게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VR은 지금까지 인간의 삶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알아왔던 것을 가능케 해준다. 우리는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상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VR 테크놀로지의 발달은, 초기에는 게임이나 오락의 영역에서 다루어졌으며, 실생활의 영역으로 그리고 예술의 영역으로 점차 범위를 확대해 나가고 있다.
VR 연구가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80년대 이후, NASA(미항공우주국)의 에임즈 연구센터 맥그리비 박사 팀에 의해서인데, 행성에 있는 토양성분, 바위, 크기, 광물종류 등을 알 수 있는 3차원 시뮬레이터를 개발함으로써 VR 연구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그후 기획 단계에 있는 자신의 건축물 안을 건축가가 직접 걸어다니면서 바라볼 수 있는 VR모델이 고안되었는데,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의 로비에트 박사에 의해 만들어진 이 모델은, VR 기술을 한 차원 높게 발전시킨 것이었다. VR의 무궁한 가능성을 감지한 과학자들과 기업가들은, 현재 여러 가지 방향에서 연구를 진행시켜 나가고 있는데, 일본의 도쿄공업대학 연구팀은 컴퓨터가 만들어낸 가공의 실체에 대한 촉각실험을 통행 VR 속에서 우리가 촉각까지 느낄 수 있는 단계로 VR 기술을 발전시켜나가고 있다.
VR이 우리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을 것이라는 예측은, 그것이 지금까지 출현한 테크놀로지와는 달리,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 가상의 세계인지 그 지평선을 뒤흔들어 놓음으로써, 인간 존재에 대한 본질적 의문을 제기한다는 데 있다. 마약이나 환각제처럼 일시적 환상에 우리를 몰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존재 자체에 대한 본질적 질문이 VR 테크놀로지의 발달과 더불어 심각한 VR증후군 현상을 낳을 것이다.
VR을 응용한 영화들
인간의 영화적 상상력은 위대한 것이어서, 이미 영화에서는 VR을 응용한 작품들이 많이 만들어졌다. 브렛 레오나르 감독의「론머맨」이 준 충격은 VR중에서도 그것이 사이버 섹스를 다루었다는 점에 있다. 가상현실 공간 안에서 인간의 직접적인 신체 접촉없이 섹스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우리의 삶을 혁명적으로 바꿔놓기에 충분한 일이 될 것이다. 인간이 타인과 육체적으로 가장 가까이 갈 수 있는 섹스행위를, 직접 접촉없이 가능하게 한다면, 그것은 단지 본능적인 것뿐만 아니라 의식의 대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영화「론머맨」은, 스테판 킹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것으로서, 제프 브리지스와 레이비드 워너가 주연했는데, 컴퓨터 그래픽을 응용하여 가상의 세계를 다룬 스티븐 리스버그 감독의 액션영화「트론」이 나온 지 10년이 안되어 만들어졌다. 기계문명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의 삶을 기계공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최초의 영상작업「트론」은 디즈니사에서 제작한 것으로서, 스티븐 스필버그나 조지 루카스 등 영상천재들에 의해 만들어진 SFX 영화들과는 달리,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직접 영화 속에 활용해서 미래 기계시대에 변화하는 인간의 삶의 모습을 진지하게 그린 최초의 영화이다.
「론머맨」은「트론」의 연장선상에서 좀더 진보된 테크놀로지를 바탕으로, 과학문명이 제공하는 허구적 삶을 충격적으로 해부하고 있다. 낮잠을 즐기다가 나비가 된 꿈을 꾸고 깨어난 정자가, 자신이 원래 나비였는데 잠깐 인간의 꿈을 꾼 것인지 아니면 인간이었는데 나비의 꿈을 꾼 것인지 혼돈하는 호접몽 고사처럼, VR은 삶의 경계를 뒤흔들어 놓는다. VR 이야말로 20세기 인류문명이 최후로 발명해낸 테크놀로지이면서 21세기의 미래적 삶을 방향짓는 중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다.
가상현실 공간에서도 현실과 똑같은 체험을 할 수 있다면, 아니 현실에서는 어려운 것까지 체험할 수 있다면 고통스러운 현실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가상현실 공간 안에서 촉감까지 느끼는 단계로 기술이 발전했다는 것은 사이버 섹스의 실현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상처받을 위험을 무릅쓰고 실제 인간과 접촉하며 섹스를 하려고 할 것인가. 더구나 가상현실 공간 안에서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에 따라 얼마든지 원하는 상대와 만날 수도 있다는 것까지 생각해 보면, 사이버 섹스는 마약보다 무서운 힘으로 우리를 유혹할 것이다.
현실은 오히려 우리의 발목을 잡으며 진흙구덩이 속으로 끌고 갈 때, 우리는 가상현실 속에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의 도움을 받으며 역동적으로 변화해 나갈 수 있다.
자, 이제 우리는 가상현실 체험기를 머리에 착용하고 손에 특수글러브를 끼고서 현실을 벗어나 자신이 원하는 공간 속으로 이동해간다. 현실 속에서 지내는 시간보다 가상현실 공간 속에서 지내는 시간이 훨씬 압도할 때 도대체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는 것인가. 우리는 고통스러운 현실보다는 안락한 가상현실 공간 안에서 머물고 싶어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때 우리는 과연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VR은 예술 분야에서도 혁명적인 변화를 초래할 것으로 예측된다. 아마도 21세기의 모든 문화 현상은 VR에서 시작할 것이다. 미래의 우리 삶은, 가상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그것을 어떻게 자신의 삶에 응용하느냐에 따라 결정적으로 변화할 것이 틀림없다. 미학적으로 잘 다듬어진 영화는 아니지만, 브렛 레오나르 감독의「론머맨」그리고 그 이후에 만들어진「하이드 어웨이」같은 작품들은, 컴퓨터 시뮬레이션 영상을 통해 미래적 삶의 단초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충격을 준다.
이러한 가상현실 체험은 이후 영화에서 적극적으로 활동되었다. 대표적인 작품들로는, 데미무어와 마이클 더글라스가 주연한, 직장 내 여자상사가 남자 부하직원을 성폭행하려 한다는 줄거리로 흥미를 끌었던「폭로」, 뛰어난 순수미술 작가인 로버트 롱고가 영화감독으로 데뷔하면서 만든 키아누리브스 주연의「코드명 J」같은 작품을 들 수 있다. 이런 영화들은 많은 부분을 VR에 의존하고 있다. 그리고 부분적으로 사이버 섹스를 다루고 있는 영화로는 실베스타 스텔론 주연의「데몰리션 맨」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컴퓨터 애니메이션 영화‘토이 스토리’영화가 등장한 지 이제 겨우 101년이 된다. 영화는 초창기 무성영화와 흑백필름 시절을 거쳐, 지금의 유성영화 컬러필름 시대로 발전해 왔다. 문학이나 연극, 미술 등 다른 장르의 예술보다도 특히, 영화예술은 테크놀로지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제작과정, 그리고 관객과 만나는 방법 등이 모두 테크놀로지에 의존해 있기 때문이다. 최근 국내에서도 개봉된 월트 디즈니사 제작의〈토이 스토리〉는 미래 영상예술을 예측하는 좋은 단서가 될 수 있다.
「토이 스토리」에는 배우가 없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사람은 모두 컴퓨터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인공배우일 뿐이다. 「토이 스토리」는 영화 전체가 순수한 컴퓨터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영화이다. 「토이 스토리」는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세계 최초로 디지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설립한 픽스사와 손을 잡고 만들었는데, 「미녀와 야수」에서 선보였던 CAPS(컴퓨터 애니메이션 프로덕션 시스템)기술을 훨씬 발전시킨 것이다. 기존 애니메이터들의 예술적 감각과 이 작품의 제작을 위해 개발된 소프트웨어의 정교함이 접목되면서 완성된 「토이 스토리」는 6살짜리 장난꾸러기 앤디와, 앤디가 가장 아끼는 카우보이 인형 우디 사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영화는, 만화영화와는 다른 3차원적 입체감과 깊이를 가진 컴퓨터 영화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21세기 영화에는 진짜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영화 속에서까지 인간의 모습을 컴퓨터로 만들어서 제작되고 있는 것이다. 배우들의 출연료를 컴퓨터에게 주어야 할 상황이 왔다는 말이다.
특히「토이 스토리」에 나오는 모든 세트, 등장인물, 개개의 영화장면 등은 컴퓨터 안에 저장되어 있으므로 언제든지 컴퓨터로 불러내어 변형시키거나 재활용할 수 있다. 이 컴퓨터에 저장된 자료를 가지고 영화의 속편은 물론, 장난감 등 팬시용품을 손쉽게 만들 수도 있고, 곧바로 CD-ROM으로 제작할 수도 있으며, 극장용 스크린을 거치지 않고 컴퓨터 모니터로 볼 수도 있는 소프트웨어를 만들 수도 있다. 「토이 스토리」의 감독 존 래스터는 80년대 최초의 컴퓨터 활용 영화「트론」의 제작에 깊이 관여한 사람이다. 그는 역시 컴퓨터 데몬스트레이션용 애니메이션 영화「Tin Toy」로 1988년 오스카상을 수상했었다. 「토이 스토리」는 곧 CD-ROM으로 제작 발매될 예정이다.
이제 영화산업의 대명사인 헐리우드는 실리우드로 바꿔져하고 있다. 즉 헐리우드와 미국 화학의 본고장인 실리콘 벨리를 합성한 실리우드야말로 미래 영화에 있어서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21세기의 영화 속에서는 VR이 차지하는 비중도 늘어날 것이지만, VR 자체에 의해 만들어지는 영화들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토이 스토리」의 테크놀로지가 발전해서, 실제 인간이 등장하지 않는, 컴퓨터 합성을 통해 과거에 등장했던 인물들의 여러 가지 모습이 합성된 제3의 배우가 등장하는, 그런 컴퓨터 영화들도 만들어질 것이다.
미래의 영상예술
20세기말에 등장한 포스트모던 문화는, 각 장르간의 엄숙한 경계를 허물면서 우리 의식의 지평을 확대시켜 나갔다. 주로 청각적 매체에 의존하는 가요와 시각적 매체에 의존하는 영화는 그러나 미래에는 시청각적 영역을 공유하면서 상호보완하며 발전해 나갈 것이다. MTV의 성공과 뮤지컬 영화의 성공은 그것을 증명해 준다.
미래의 영상예술은 지금처럼 영화나 비디오, TV, 컴퓨터 등에 의해 독립적으로 움직이지는 않는다. 모든 영상매체는 상호호환성을 갖고 연결되면서도 각각 그들이 갖는 독립성을 유지하게 될 것이다. 그것들이 상호 연관되어 놀라운 세계로 확대되는 순간, 거대한 정보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것이다. 따라서 미래 정보화사회의 핵심은, 컴퓨터가 아니고 통신이다.
컴퓨터는 그것이 각 개인의 책상 위에 놓여 있을 때는, 사용자의 개인적 영역에 국한되어 있지만, 그것이 통신을 통해 다른 컴퓨터와 연결되는 순간, 거대한 정보의 유통을 가능케 하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분류하여 재생산 할 수 있는 공룡으로 변신하게된다.
문화와 예술은 인간의 삶을 토대로 해서 형성되는 것이다. 미래적 삶의 단초가 VR에 있고, 거대한 정보 네트워크 속에 우리들 삶이 노출되어 있다면, 21세기의 대중문화, 예술 역시 그 연장선장에서 이루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