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논단

문학과 사회의 변천

-김남천의「대하」에서 마광수의「즐거운 사라」까지




이상갑 / 고려대 강사

문학과 정치와의 긴장관계

문학은 문화, 예술 분야 중에서 사회의 변천에 가장 예민한 촉수를 갖고 있어야만 한다. 모든 예술 갈래 중에서도 특히 문학은 작품의 생산 배경이 되는 당대의 모습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학은 언어를 표현 수단으로 하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사상성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그만큼 문학이 언어를 통해 독자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크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정보화로 인해 시청각 예술이 문학을 압도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피상적인 관찰일 수 있다. 인간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것 못지 않게 독서하면서 사색하고 따져보는 논리적 사고 작용을 도외시할 수 없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90년대 중반에 들어선 오늘날에도 판매 금지되는 작품은 여전히 존재한다. 여기에는 판금되는 작품이 독자들에게 널리 읽혀지든 그렇지 않든 간에 해당 작품이 독자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이 전제되어 있다.

‘판매금지’라는 용어는 문학과 정치와의 긴장관계를 아주 첨예하게 드러낸다. 역사적으로 볼 때 ‘분서갱유’사건이 그 단적인 예다. 배창섭의 서지연구(「조선시대 금서의 서지적 연구」, 경북대 도서관학 석사학위논문, 1993. 6)에 의하면 국내에서 조선시대 이전에 판금된 서적 수가 최치원의「예언서」와 김부식의「삼국사기」를 포함한 8종, 조선시대 전기가 김종직의「김종직문집」을 위시한 26종, 조선시대 후기가 박세당의「사서사변록」을 위시하여 도합 71종으로 나타난다. 여기에서 우리는 혼란스럽고 변화가 많은 시대일수록 금서가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내용을 보면, 지리·도참 및 예언의 내용을 담은 것, 언문으로 기록한 것으로 양반의 한자문화에 반하는 것, 유교 이외의 종교나 이단에 관한 것, 문화정책의 일환인 문체반정에 위반되는 것, 기타 사회의 기강을 문란케 하는 위조된 내용을 담은 것(위조족보의 경우)등이 대표적이다. 즉 금서는 집권층의 정책과 사상, 종교적 측면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그러나 정치가 문학을 압도해서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문학이 정치상황을 완전히 벗어날 수도 없는 일이다. 당대의 정치상황이 모순될 때 문학은 오직 작가의 상상력을 통해 일정 정도 모순된 현실을 넘어설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비판의 강도가 강할 때는 예외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시대에는 문학이 정치의 몫을 감당하기도 한다. 우리의 일제 강점기 프로문학이 그러하다. 수없이 삭제된 문장들과 복자(覆字)들, 1931년 동북사변 이후 치안유지법의 강화와 함께 일어난 신간회의 해체와 프로문학에 대한 2차례에 걸친 검거 선풍 등이 그 당시의 상황을 잘 말해 준다. 일제의 탄압과 엄격한 검열체제 아래 작가의 상상력은 위축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저항의 강도는 엄청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해방 이전의 상황을 범박하게‘나라찾기’에 초점을 둔다면, 민족주의 문학 계열과 계급주의 문학 계열은 모두 넓은 의미의‘저항문학’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월북 작가, 작품들

1987년 10·19 조치의 결과를 담은 1988년 한국 출판연감에 의하면 해금 도서 431종, 유보 도서 38종, 미해금 도서 181종으로 되어 있다. 정치, 사회, 경제 분야는 대부분 이념 서적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해금 도서 중 문학, 예술 분야 서적은 김지하의 시집「타는 목마름으로」(창작과비평사, 1982)와「오적」(동광출판사, 1985), 님웨일즈의「아리랑」(동녘, 1984), 김학동의「정지용연구」(민음사, 1985)가 눈에 띈다. 그런데 유보 도서는 넓은 의미에서 미해금 도서로 볼 수 있기 때문에 월북 작가의 작품 중 유보된 도서가 주목된다. 홍벽초의「임꺽정」(9권), 김남천의「맥」과「대하」, 정지용의「백록담」과「정지용시집」, 김기림의「기상도」, 임화의「현해탄」, 이용악의「오랑캐꽃」과「분수령」, 안회남의「불」, 오장환의「헌사」와「성벽」, 이용악의「낡은 집」과「분수령」, 이기영의「고향」(상·하), 한설야의「탑」, 이찬의「분향」, 이태준의「화관」, 박태원의「천변풍경」,「금은탑」,「소설가 구보씨의 일일」등이다.

월북 또는 재북 작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된 것은 1978년 3월13일 국토통일원이 국회에 자료를 제출한 시기와 맞물려 있다. 그러나 이 자료에 의하면 월북 문인과 그들 작품에 대한 언급은 민족사적 전통성을 확립하는데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상당히 제한적인 것이었다. 즉 논의 대상이 되는 작품은 해당 문인의 월북 이전의 사상성(계급사상)이 없으면서 근대 문학성에 뚜렷이 기여한 바가 있어야 하며, 문학사 연구의 목적에 국한하되 그 내용이 반공법 또는 국가보안법, 사회안정법에 저촉되지 않아야 한다. 특히 문학사 연구에 한정한다는 언급과 함께, 월북 또는 재북 작가라도 지금은 생존하지 않는 작가여야 한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물론 연구 성과물을 상품으로 판매할 수도 없다. 이후 1987년 10월19일 조치는‘6. 29 항복선언’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우리 국민의 역사 의식의 성숙과 맞물려 있다. 그리고 이미 대학을 중심으로 월북 작가와 작품에 대한 논의가 상당히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도 무시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 결과 총 650종의 금서 중 431종이 해금되고 38종이 유보되었다. 이를 통해 볼 때 10·19조치는 월북, 재북 문인에 대한 논의의 전면적인 해금이었고, 연구 성과물의 발표와 판매를 허용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 첫 케이스가 김학동의「정지용 연구」였다. 그후 1988년 3·31조치에서는 10·19조치에서 유보된 정지용, 김기림의 작품이 해금된다. 이는 해방기 두 작가의 활동을 좌우합작 노선으로 수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1988년 7·19조치에 오면 이기영, 한설야 등 5명을 제외한 월북, 재북 문인에 대한 전면적인 해금이 이루어진다. 이 조치는 월북 후 북한 체제에 적극 동조한 작가가 아닌 이상, 그들의 해방 전의 모든 활동을‘나라찾기’라는 저항 문학의 범주 속에서 수용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해당 작가들이‘북한문학사에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가 해금의 한 가지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는 사실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기영, 한설야의 작품이 해금된 작가의 작품 성격과 큰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볼 때, 미해금의 주된 근거는 해당 작가의 월북 후의 행적이라 할 수 있다. 이기영은 북한 문단의 원로로 문학예술총동맹 위원장을 지냈다. 이에 반해 해금된 김남천은 남로당의 숙청과 관련하여 임화와 함께 처형당하였다. 이상의 관점에서 김남천의「대하」와 한설야의「탑」을 비교 분석해 보자.

-김남천의「대하」

김남천의「대하」는‘가족사 소설’이라는 작가 자신의 이론적인 작업의 산물이다. 김남천은 자신의 작품「대하」가 단순히‘작가 자신의 기억을 이용한다는 편의적인 생각과 작가 자신을 되돌아보는 회고 정신’이 아니라 연대의 정신임을 강조한다. 즉 작가는 과거를 현재의 관심사와의 관련성에서 검토하고 있다. 「대하」는 박리균, 성균네의 몰락과, 치부를 통해 성장하는 박성권의 대조를 통해 근대화되어 가는 농촌 현실을 형상화하고 있다. 성권은 아전의 후손인 중인계급의 후손으로 돈의 위력을 누구보다도 확신하고 있으며, 언젠가는 문벌이나 가문이 자기의 돈 앞에 굴복할 것을 믿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돈 때문에‘박참봉’이라는 직함을 얻고 만족하는 것을 볼 때, 아직도 봉건사상에 젖어 있다. 특히 그는 맏아들 결혼식 날 동학도인 처남 최관술이 금테로 만든 개화경(안경), 목이 긴 구두, 개화장(지팡이)을 지닌 모습을 보고 갓 대신 신식 모자인 국자보시를 썼다고 못마땅해한다.

「대하」는 성권의 인물 형상화에 못지 않게 주인공 형걸의 의식 성장과정에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바로 여기에 작가의 의도가 깔려 있다고 하겠다. 형걸은 형인 형준이가 점점 타락해 가는 것과 대조적으로 어른 못지 않게 성숙미를 보이며 적극적인 인물로 형상화되고 있다. 형준은 스스로 선택한 서당에서 한문과 집안을 잘 다스려 나가는 데 꼭 필요한 것들만 배운다. 그러나 특별히 하는 일없이 결국에는 삼십육계, 도박, 투전, 잡기에 빠지고 만다. 반면 형걸은 성질도 거칠고 짓궂으며, 키도 형제 중에서 제일 크다. 그런데 형걸이 서자라는 사실은 그의 의식 형성과정에 깊은 관련이 있으며, 작가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 김남천은 일제 강점기 전 기간 동안 뿌리깊이 잠재해 있는 봉건성의 폐해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가 당대 작가들에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김남천은 뿌리 깊은 봉건성에 대한 천착에서 반봉건의 과제인 근대성을 문제삼고 있으며, 근대성에 대한 천착도 없이 섣불리 근대를 넘어서는 사회체제에 대해서는 주저하고 있다. 이 점은 형걸을 서자로 설정한 이유에서 잘 나타난다. 즉 김남천이 형걸을 서자로 설정한 이유는 형걸에게 가해지는 봉건성의 폐해를 작가가 자신의 이념을 등장인물에게 직접 투사하지 않고, 등장인물이 스스로 극복해 나가는 자각적인 측면을 형상화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아울러「대하」는 다양한 등장인물들을 통해 근대화되어 가는 시대의 변화상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칠성네의 식료품 가게, 일본인 나까니시네의 잡화상, 김용구네의 과자점, 기타 몇 개의 포목점을 비롯하여 측량기수가 드나들 정도로 마을은 변해간다. 특히 칠성이 사온 자전거와 나까니시네가 사온 각종 진기한 물건들을 둘러싸고 전개되는 이야기는 개화기의 풍속도를 여실히 보여준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 중앙으로 난 신작로를 통해 원산이나 평양 방면으로 왕래하며 활발한 경제 활동을 하고 있고, 마을에도 상당수의 평양 외지의 사람들이 들어와 살고 있다. 평원도로로 상징되는 근대화의 방향성은 형걸이 장차 나아갈 방향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특히 형걸이 문우성 교사로부터 배운 내용은 신분이나 적서차별 철폐, 비복 해방, 미신 타파, 조혼사상 폐지, 생활습속 개량 등이다. 그러나‘문우성-형식’간의 관계에서 드러나듯, 「대하」는 흔히 말하는 카프문학 작품의 도식성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고 있다. 위에서 필자가‘주저하고’있다는 용어를 쓴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한설야의「탑」

한설야의「탑」은 김남천의「대하」와 여러 모로 대비된다. 이 작품은 작가가 카프 해산 이후인 1930년대 후반의 시점에서도 이전에 지녔던 강한 이념성을 일관되게 유지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이 점에서 볼 때「탑」은「대하」와 동궤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 「탑」은 일러 전쟁 직후를 시간 배경으로 한 작가의 자전적인 작품으로, 큰 뜻을 품고 가출한 청년의 서울 생활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 우길은 계집종인 게섬의 불행한 죽음을 목도하고 나서부터 집에서 마음이 떠났음을 고백하고 있다. 그후 우길은 여동생 이순의 혼인 문제를 둘러싸고 아버지와 결정적으로 대립한다. 우길의 아버지 박진사는 몰락하는 봉건지배층을 대변하는 인물로, 새로운 시대 분위기를 타고 개간지 사업과 철광 사업에 손을 대어 보지만 점점 가운이 기울어진다. 이에 반해 송병교는 신흥 부르주아로 성장해 간다.

이 작품도「대하」의 형걸처럼 작가는 우길의 형상화에 많은 배려를 하고 있다. 형 수길이가 글공부가 느는 데 비례해 자꾸만 생기가 꺾여가는 데 반해, 우길은 어려서부터 고집이 세고, 어린 나이지만 야바위판에서 개화의 의미를 읽고 있기도 하다. 우길의 직접적인 가출 이유는, 아버지가 자신의 개간지 공사자금 마련을 위해 딸 이순을 무식하고 돈만 아는 송병교의 아들과 결혼시키려는 점 때문이다. 즉 작가는 우길의 행동을 통해 정략 결혼에 대한 거부와 자유연애 사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길은 혼사를 준비하는 모든 사람들이 여동생 이순을 물어가려는 이리로 느끼는데, 마침내 자신을 구출해 달라는 여동생의 편지를 받고 동생을 서울로 데리고 가서 독립된 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우길-이순’의 도식이 형성된다. 이 도식은 작품 구조상「대하」에서의 ‘문우성-형걸’의 도식과 동궤이다.

반미, 용공과「糞地」사건

1960년대로 접어들면서 우리 문학은 질적인 도약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런 내적인 발전 경로를 50년대와의 관련성에서 깊이있게 천착하는 것은 앞으로의 과제이다. 그러나 60년대에 등장한 일군의 신인작가들은 50년대와는 달리 미국이라는 외세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남정현의「분지」이다. 특히‘일본 대신 들어앉은 미국’이라는 표현에서 드러나듯 미국이 해방군이 아니라는 인식은 해방공간의 작품과 비평에서도 보이지만, 이 작품처럼 전면적인 것은 아니었다. 60년대를 특징짓는 4·19가 금기시되었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을 가능케 했다는 점에서 이런 작품의 출현은 예견된 바 있다. 60년대 초 최인훈의「광장」을 시작으로 분단현실에 대한 비판과 냉전 이데올로기를 본격적으로 문제삼게 되는 것이다. 특히 외세에 대한 인식 문제는 80년대 광주항쟁을 통해 미국의 실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고 변혁운동이 거세게 일어날 때 중요한 문학 대상으로 자리잡게 된다. 우선 작품의 경개를 살펴보자.

「분지」는 1965년 3월 「현대문학」에 발표되었는데 홍길동의 10대손인 주인공 홍만수가 죽은 어머니에게 자신이 죽음의 위기에 처한 처지를 하소연하는 구조로 되어 있다. 홍만수의 처지는‘풍전등화’격이며, ‘독 안에 든 쥐’,‘오물’로 묘사된다. 미군이 홍만수 하나를 잡기 위해 대한민국의 1년 예산에 상당하는 금액을 소비하는 상황의 묘사는 이전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었다.

지금 제가 숨어 있는 이 향미산의 둘레에는 무려 일만 여를 헤아리는 각종 포문과 미사일, 그리고 전미군 중에서도 가장 민첩하고 정확한 기동력을 자랑하는 미제 엑스 사단의 그 늠름한 장병들이 신(神)이라도 나포할 기세로 저를 향하여 영롱하게 눈동자를 빛내고 있는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향미산을 중심으로 직경 수천 마일 이내에 거주하는 것으로 암시되는데, 그들은 인간이 아닌 두더지와 같이 미군에 의해 곤경을 겪고 있다. 만수의 죄목은 누이와 동거하고 있는 스피드 상사의 아내의 순결을 빼앗은 것이다. 작품 속에서 만수가 저지른 치욕적인 사건은‘미국을 위시한 자유민 전체의 평화와 안전에 대한 범죄적인 중대한 도전행위’이며, 이를 저지하는 미군은‘성스러운 사명감’을 지니고 있다고 묘사되고 있다. 그러나 미군의 입장과 달리 만수의 행위에는 필연성이 있다. 만수 어머니는 해방된 날 항일 독립운동가인 아버지를 맞이하려 만세 대열에 참가하였다가 새로 진주한 미군에게 강간당한 후 분노와 죄책감을 견디다 못해 발광하여 죽는다. 더욱이 만수는 군 입대 후 헤어진 동생 분이를 다시 만나지만, 분이가 스피드 상사로부터 심한 성적 학대(분이의 육체를 미국에 있는 본처의 육체와 비교하면서 나무라는 것)와 구타를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복수를 결심하게 된다. 그후 때마침 스피드 상사의 부인이 남편을 찾아 한국에 오자 그녀를 향미산으로 유인하여 겁탈한 것이다.

「분지」는 외세에 대한 저항 외에도, 표현의 자유 마저 박탈하는 권력의 횡포, 대다수 민중의 가난, 반공과 친미, 그리고 주지육림 속에서 헤게모니 쟁탈전에만 부심하는 정치권의 부패와 민족 주체성의 상실, 정치자금을 사이에 둔 재벌과 정권과의 결탁 등을 문제삼고 있다. 창조하는 역사의 대열에 자신도 서게 해 달라는 주인공 만수의 호소는 처절하게 울려온다.

남정현은 작품 발표 후인 1965년 7월 9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공법 저촉으로 구속된다. 그 후 7월14일 서울지방경찰청으로 사건이 송치되고 7월23일 구속 적부심사 끝에 석방되지만, 이후 1년 미결기를 거쳐 1966년 7월 23일 서울형사지방법원에 불구속 기소되어 징역 6개월 자격정지 6개월의 선고유예라는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그에게 적용된 법 조항은 반공법 제4조 1항이다(‘반국가 단체나 그 구성원 또는 국외의 공산 계열의 활동을 찬양 고무 또는 동조하거나 기타의 방법으로 반국가 단체를 이롭게 하는 행위를 한 자는 7년 이하의 징역 및 자격정지에 처한다’). 즉 「분지」는 계급의식과 반정부 의식을 고취하고 반미감정을 조성함으로써 북괴의 대남 전략에 동조했다는 것이다. 「분지」필화사건이 일어난 1965년은 박정희 정권의 등장 이후 가장 엄혹한 시기로 중대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 한일협정을 둘러싼 대일 굴욕외교 반대투쟁, 월남파병, 군 내부의 반정부 쿠데타 음모, 위수령 발동 등이 그것이다. 특히「분지」가 1965년 5월 8일자 북한의「통일전선」이라는 북한 노동당 기관지에 전재된 것이 큰 문젯거리가 되었으며, 바로 이점이 이 작품을 용공으로 문제삼는 근거를 제공하기도 했다. 그 당시 검찰은 유죄의 근거로「분지」가‘남한의 현실을 왜곡·허위 선전하여 빈민대중에게 계급 및 반정부 의식을 부식 조장하고 반미감정을 조성시켜 반미사상을 고취할 요소가 있는 단편소설’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러나 1965년에 간첩으로 남파되었다가 체포되어 복역 중이었던 어느 증인의 발언 속에서「분지」사건의 양면성이 드러난다.

검사 : 「분지」를 읽은 소감은?

최 : 그 내용이 남한에 대한 북괴의 악선전을 대변하고 있다.

변호인 : 이 소설을 읽고 대한민국은 자유스럽다고 느꼈는가, 반미적인 소설이라고 분개하였는가.

최 : 이런 소설이 허용된다면 자유스럽다고 생각했다. 이북에서는 상상도 못한다.

위 대화에서 증인의 발언은 검찰과 변호인측 주장 모두를 옹호하는 양면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 당시 죄수라는 증인의 신분을 고려한다면 증인의 두 번째 발언이 더욱 의미 있게 들려온다. 말하자면「분지」는 작가의 창작 본연의 입장에서 보면 전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문인들과 양심적인 지식인들이 창작이 위축될 것을 우려하여 선처를 요구했지만 정치논리가 냉정하게 관철되었을 따름이다. ‘반공’이 군사정권을 유지하는 버팀목의 구실을 하고 있는 상황에서, 「분지」사건은 최대한의 자유의 외침을 감행했고, 또 그것이 여지없이 좌절되었다는 점에서 그 파장은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그러므로「분지」사건은 4·19와 함께 우리에게는 아직 미완의 과제로 남아 있다고 하겠다. 작품은 그를 수용하는 독자들의 의식수준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유신체제 비판과「겨울공화국」(1974∼1977)

1970년대는 유신체제의 확립과 그에 대한 민주세력의 피나는 투쟁으로 점철된 시대이다. 유신체제는 근대화를 조속히 실현시키려는 의도가 크게 작용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체제 수호를 위한 독재가 강화된 결과의 산물이다. 그러나 경제 정책이 재벌 중심으로 이루어진 결과 민중의 고통은 가중되었다. 소위정경유착의 고리는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대두한다. 1974년‘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결성된 것은 바로 이 같은 시대적 질곡을 넘어서고자 하는 문인들의 의지의 표명이었다.

양성우는 1975년 2월15일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들의 석방 환영회를 겸한 광주 YWCA 구국기도회에서「겨울공화국」을 낭독하였다. 그는 이 일을 계기로 교직에서 파면되었다. 또한 그는 일본에서 발행되는「세계」지에 시「노예수첩」이 게재되어‘국가모독’및‘긴급조치 9호’위반 등의 혐의로 수배되기도 했다. 「겨울공화국」은 작가가 수감되어 있는 동안 조태일, 고은, 김정남 등에 의해 간행되었는데, 시집 발간 혐의로 고은, 조태일이 체포, 투옥되기도 했다. 국제 펜클럽을 중심으로 국내·외 문학인과 지식인 그리고 종교인들이 작가의 석방을 위해 서명운동을 전개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특히 시집「겨울공화국」은 1984년 화다 출판사에서 재출간을 시도하였으나 재차 판매금지 당하였다. 이 작품 외에도 그가 감옥에서 유서를 쓰듯이 쓴 제4시집「북치는 앉은뱅이」(1977∼1980)가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된 후 즉시 판매금지 당하였다.

시집의 서문에서 작가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詩들을 버릴 수 있지만 나는 이 땅을 버릴 수 없다.

이 詩들을 버릴 수 있지만 나는 이웃들과 이웃들의 살결, 이웃들의 언어와 사랑과 한숨, 그리고 눈물을 버릴 수 없다.

이 詩들을 버릴지라도 우리들이 빼앗긴 自由는 되찾아야 한다.

목숨 따위야 잡초처럼 살아날 수 있지만 자유는 귀한 것, 이 詩들을 버릴지라도 자유는 버릴 수 없다.

표제시인「겨울공화국」은 총 8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작가는 우선‘삼천리는 여전히 살기 좋은가?’라고 반문하면서 허위와 위선에 귀기울이며 스스로를 잊고 사는 세태를 강하게 비판한다. 그 결과 대다수 민중을 의미하는‘우리들’은 불의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변명만 하는 노예, 머슴, 허수아비로 묘사 되기도 한다. 나아가 작가는 허위와 위선을 방송하는 라디오, TV, 신문, 잡지를‘바보’로, 담벼락에 붙어 있는 벽보를‘농담거리’로 비하하면서‘돌아가야 할 것은 돌아가야 할 것’이라고 절규한다. 특히 군사정권 하의 황량함을 말해 주는‘화약 냄새 풍기는 겨울 벌판’에 잡초라도 한줌씩 돋아나길 바라고 있는 데서 작가의 민중지향적 의식과 저항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여보게

우리들이 만일 게으르기 때문에

우리들의 낙인을 지우지 못한다면

차라리 과녁으로 나란히 서서

사나운 자의 총끝에 쓰러지거나

쓰러지며 쓰러지며 부르짖어야 할 걸세.

(7연 후반부)

그래서 시인은 사랑하는 모국어로 부르짖으며, 묶인 팔다리로 봄을 기다리며 한사코 온몸을 버둥거려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앉은뱅이 연가·2」에 오면‘날선 비수 이에 물고 천리를 왔거늘, 그 어찌 이 어둠을 두려워하랴’로 표현되고 있다.

누적된 특권층의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과「五賊」

1970년대는 유신체제의 확립으로 군사정권의 폐해가 극에 달한 시기이다. 그러므로 70년대를 이은 80년대는 70년대 말 부마항쟁으로 촉발된 군사정권의 쇠퇴 조짐과 대통령 암살로 인한 급격한 혼돈, 뒤이은 군사정권에 대한 광주항쟁, 6월 항쟁 등과 연결되어 있다. 80년대는 한 마디로 변혁운동의 시대로 70년대 문학에서 제기된 문제들을 보다 구체적으로 전개한다. 그 결과 문학도 분단 극복과 통일을 지향하는 문학, 그리고 노동자 계급의 이념에 기초한 문학이 주류를 이루게 된다. 90년대적 상황에서 볼 때 80년대 문학에서 나타난 과도한 도식주의는 비판받아 마땅하지만, 그 당시의 상황에서는 그 역시 역사적인 산물이었다.

「오적」은 80년대 변혁운동에서 줄곧 다루어지는 계급간의 갈등을 70년대적 상황에서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김지하의 장편 담시 「밀어(密語)」가 북괴의 선전 활동에 동조했다는 이유로, 이 작품을 게재한 가톨릭계 월간 종합지인 「창조(創造)」가 판금 당한 것도 1972년이었다.

「오적」은 군부 독재세력과 이와 결탁한 특권층의 비리를 신랄히 풍자한 장편 담시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강렬한 풍자가 대상의 본질을 파악하는 측면보다 대상의 희화화로 치우친 결과 문학성에서는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비판적인 민중의식의 성장과 더불어 전통적인 판소리와 탈춤의 비판적 풍자정신을 잇고 있다.「오적」은「사상계」(1970. 5)에 발표되었는데, 군사정권은 이 시가 ‘북괴의 선전활동에 동조한 것’이라고 하여 반공법 위반의 이유를 붙여 작가 김지하와「사상계」의 편집인, 그리고 시「오적」을 전개한 신민당 기관지「민주전선」지를 압수하기에 이른다. 이후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한「大設〈南〉」과 시선집「타는 목마름으로」가 판매금지 당하였다가, 각각 1984년과 1985년에 해제되기도 한다.

「오적」의 화자는 ‘붓끝이 험한 죄’로 고초를 당하는데,‘태평성대’라는 반어적 표현으로 시대적 모순을 질타하고 있다. 오적은 재벌,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 장성, 장·차관 등을 말한다. 오적들은 뱃속이 오장육보가 이 나라‘큰 황소불알 만한 도둑보’가 하나 더 있는 오장칠보라는 말에서, 정경유착으로 인한 부정부패, 부동산 투기, 부실공사‘千원 工事 오원에 쓱싹’등의 문제가 신랄히 비판된다. 한 국가의 총수가 도둑질의 원조라는 사실과, 오적이‘盜짜 한자 크게 써 걸어 놓고 도둑 시합’하는 장면의 묘사, 그리고 장성이‘짐승’으로 표현되는 것과 함께 귀신들도 장·차관의 권모술수와 파렴치한 위선을 두려워하여 도망치는 모양의 형상화는 이 작품의 공격성을 단적으로 말해 준다. 또한 이 작품은 근대화로 인한 이농 현상(重農이다, 貧農은 離農으로!)과 5·16 혁명의 허구성(혁명이닷, 舊惡은 新惡으로)을 비판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농사로 호구하지 못해 서울로 올라온‘전라도 갯땅쇠 꾀수’(작자의 분신)가 오히려 오적으로 몰려 무고죄로 체포되는 데서 이 작품의 공격성은 극에 달한다. 즉 오적을 체포하려 간 포도대장은 오히려 오적의 청에 따라 그들의 집을 지키는 하수인으로 만족해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마지막은 선의 승리와 악의 패배로 끝나고 있다는 점에서 작품의 의미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문학의 형상성 여부를 떠나 불의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작가의 정신은 존중되어야 한다. 불의한 세력이 기지개를 켜다 갑자기 친 벼락에 죽는 방식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한계를 떠올릴 때 더욱 그러하다.

문민정부의 도덕성과「즐거운 사라」

1990년대는 동구권의 붕괴와 소련의 몰락으로 인해 이념을 앞세우던 기존 문학 풍토에 근본적인 변화가 초래된 시기이다. 이는 아직도 진행형이어서 쉽사리 속단하기 어려우나 문학 분야만 하더라도 이념 일변도의 획일성에서 벗어나 다원화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와 발맞추어 부의 증가 등으로 인해 소비행태의 변화와 대중문화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특히 문민정부의 탄생 과정이 어떠하든 오늘날 우리가 피부로 접하는 정치적 민주화는 이전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4·19혁명과 광주항쟁의 역사적인 의미규정, 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 구 군사정권의 단죄, 정경유착의 고리 躇기 등 외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던져 주고있다. 그러나 이 같은‘역사 바로세우기’작업에 동반한 자유화의 물결은 적어도「즐거운 사라」의 저자 마광수에게는 거리가 멀다. 마광수는 1992년 10월 29일 전격 구속되었으며, 동년 12월 28일에 열린 1심 선고공판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의 선고를 받았다. 이런 결정을 내리는 데는 교수에게 바라는 일반인의 기대감이 많이 개재된 측면도 있어 보인다. 그의 말대로‘앞서 가는’사람이‘피를 보게’되었다. 특히‘성’의 자유로운 묘사가 정치적인 민주화와 경제적인 재분배를 통한 평등한 사회의 추구와 동시적이라고 생각하는 작가에게 더욱 그렇다.

문민정부가 이전의 군사정권과의 변별성을 마련하기 위한 근거가‘도덕성’이라 할 수 있다.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공직자의 재산까지 공개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도덕성’에 정면으로 도전한‘솔직성’의 강조는 작가 마광수의 대담성인 동시에 무모함이기도 하다. 문학과 정치와의 관련성에서 볼 때 그렇다는 말이다. 문학이 정치를 넘어설 수 있는 길은 오직 상상력의 작용을 통해서이지만, 이것조차 현실적 규범을 내세우며 여지없이 묵살할 수 있는 것 또한 정치논리이다.

유부녀와 유부남의 불륜관계를 다룬「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우리 문학사에서도‘성’의 묘사는 있어 왔다. 죽음을 초월한 남녀간의 사랑을 다룬「운영전」외에도, 혼전 성관계를 다룬 이조 후기의 대표적인 판소리계 소설「춘향전」도 예외일 수 없다. 또한 남성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애정 행각을 주도하는 김동인의「감자」의 주인공 복례,‘성’의 관점에서 자연물을 묘사한 이효석의 문학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면 문학작품 속에서‘성’을 어떤 각도에서, 그리고 어느 정도로 다루어야 할까.

「즐거운 사라」사건은 일단 한 작가의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였고, 또 기타 모든 작가의 창작의욕을 위축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불행한 일이었다. 특히 남정현의「분지」사건을 맡은 변호사 한승헌씨가 다시 이 사건 담당 변호사로 선임된 것이 우리의 주목을 끈다. 형식상으로 보면「즐거운 사라」의 작가가 남정현보다 더 엄한 제재를 받은 셈이다. 어쨌든「즐거운 사라」는‘성’을 다룬 기존의 문학풍토를 근본에서 흔들어 놓았다는 점에서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더욱이「즐거운 사라」는 평론가를 겸한 작가의 치밀한 논리의 뒷받침을 받고 있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을 주저하게 한다. ‘사라’사건에는 문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표현의 자유와 인권문제, 교권과 수업권의 문제 등이 관련되어 있어 더욱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구강 성교 묘사 등‘성’의 노골적인 표현을 통해 그것에 알레르기 증상을 보이는 기존‘도덕주의자’의 위선을 벗기고, 오히려 본능의 욕구를 억제함으로써 파생된 부조화와 병리현상을 정화시키려는 의도까지 내비친 바 있다. 특히 검찰측이‘청소년 오염’문제를 제기할 때도 작가는 청소년에 대한 성교육의 미비를 지적하며 마찬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이 같은 정화는 작가의 논리를 따르면 정신주의, 교훈주의, 이광수주의를 거부하고 육체주의, 실용적 쾌락주의, 마광수주의, 문화의 자율권에 대한 옹호, 그리고 작가의 표현대로‘인공적인 꿈’을 잉태하는 상상력의 무제한적인 자유를 옹호함으로써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작가에겐 상상력의 자유는 정치적 억압에 대한 도전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며, ‘성’문제는 상상력의 자유를 몸소 실천하기 위한 한 가지 방편일 뿐이다.

작가는 신세대 문화가 젊음과 유행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점을 비판하고 있지만, 그가 신세대 문화에 주목하는 것에 비하면 그 비판의 강도는 약하다. 이는 주인공 사라의 행위 속에서도 잘 드러난다. 주인공 사라는 외설 대중문화의 유통과‘성’개방 풍조에 따라 기존 가치관의 혼란에 처해 갈등하는 90년대 젊은이들의 상징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사라는 자신의 성적 방황에 대해 조금도 뉘우치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노골적인 ‘성’묘사와 함께‘도덕성’을 치명적으로 강타한 대목으로 보인다. ‘벗는 영화와 연극’과 함께, 누드 모델 공개 모집에 스스럼없이 젊은 응모자들이 많이 모이는 것이 90년대의 현실이다.

작가는 자신의 에세이집「사라를 위한 변명」에서‘다원주의에 바탕한 문화적 혼혈주의’를 내세운바 있다. 이와 관련하여‘수구적 국수주의’를 과거 지향적이고 퇴영적인‘폐쇄적 향토주의’에 입각해 있다고 비판하면서,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이다’라는 명제는‘세계적인 것이 한국적인 것이다’라는 명제로 수정되어야 한다고 보는데, 여기에는 작가의 서구지향적 사고의 한계가 드러나 있다. 그 이유는 세계성이 본질적으로 추상적인 성격일 뿐만 아니라, 다원성을 인정한다 하더라도 우선 개별 문화의 구체적인 특성은 추상적인 세계문화와의 관련성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다원성의 구체적인 양상도 일차적으로는 개별 국가의 역사·문화적 전통과 관련하여 형성되는 특이한 측면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세계성을 강조한다고 해서 개별 문화의 특성이 무시되어서도 안되고, 무시될 수 도 없다.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그가 문단에 던지는 발언은 공소한 것만은 아니다. 그가 던지는 해명성의 발언은 변신을 감행하는 언론의 행태와 더불어 우리 문단의 풍토와 분위기, 그리고「즐거운 사라」의 작가 마광수의 이후 전개될 행적과 관련하여 많은 것을 시사해 주는 것 같다. 이 인용문이 작가가 자신을 호도하는 핑계로 본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이다. 인용문을 끝으로 글을 맺는다.

내가 이른바 얼굴이 팔리게 된 것은 1989년에 출간한「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때부터인데, 그 때는 아직 소련이나 동구권이 자유화되기 이전이라서 그랬는지 많은 문학인들이 나의 생각을‘부르주아적 퇴폐’라고 매도하였다. 그러나 소련이 자유화된 지금 나를 욕하던 문학인들 중 상당수는‘이제부터 문학이 추구해야 하는 것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욕망이다. ’라고 말하며 성 문제나 쾌락의 문제에 접근해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