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프로그램 / 작가의 생가와 문학의 세계. 5

난초처럼 살다간 시조 시인 이병기




강진호 / 문학평론가

1.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가 논산을 지나 전북 익산역에 멈추어 선 것이 오전 10시, 꽃샘 추위가 간간이 변덕을 부리는 4월 초순이었다. 익산역, 원래는 이리역이었던 곳이다. 작년 5월 이리와 익산이 합쳐지면서 한때 열차 폭발 사고로 세인의 기억에 새겨졌던 '이리'라는 지명은 지도 위에서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역전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여산 가는 길을 물었다. 마침 기사 아저씨는 그곳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였다.

"이곳에 어떤 문화유적들이 있나요?"

차를 타고 가며 짐짓 물었더니, 고개를 갸웃하다가 뭐 내세울 만한 특별한 문화 유적이 없노라고 긁적인다. 익산에 자랑스런 유산 하나가 숨겨져 있음을 그 토박이 기사는 미처 기억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한평생을 학문과 시조에 바친 가람 이병기 선생이 태어나고, 만년을 보낸 생가 유적이 이 곳 익산에는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한글 세대라면 「국문학 전사」를 후학들에게 남긴 국문학계의 태두이자 한국 시조의 거봉인 가람 선생의 난초 시편을 한두 수 암송하면서 학창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필자를 태운 택시 기사도 거기서 예외일 수 없을 터.

차는 원광대학교 정문을 비껴서 논산 방향의 1번 국도를 따라 달렸다. 필자의 무릎 위에는 1976년, 신구문화사에서 나온 문고판 「가람일기」가 그 주인을 찾아가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차가 진동할 때마다 몸을 들썩이며 여행길을 함께 하고 있다.

한 사람이 반 세기 이상이나 써 온 일기는 이미 특정 개인의 내밀한 기록을 넘어서는 사료(史料)적 의미를 갖는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1909년부터 쓰기 시작하여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옥고를 치를 때 빼고는 한 날도 쉬지 않고 써 온 일기이고 보면, 이미 그것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한 편의 문학사 내지는 사회사의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이 문학사에 단 한 편의 친일 문장도 남긴 일이 없고, 일제하 암흑기에서도 창씨개명의 혹한을 견뎌냈던 이의 일기라면, 그 가치는 더욱 빛날 수밖에 없다.

여산군 소재지에 못 미쳤을 때, 문득 국도 왼편 마을 어귀에 세워져 있는 '지방기념물 제6호, 이병기 선생 생가 입구'라는 안내문이 발목을 잡는다. 건성으로 지나치면 놓쳐 버리고 말았을 표지이다. 바로 그 인근이 선생의 고향인 진사동 마을이었다.

집과 집 사이의 소로와 논길을 거슬러 1킬로미터 남짓 안쪽으로 올라가니 저만치서 주위의 개량 농가들과는 사뭇 다른 풍모의 고풍스런 선비 가옥 한 채가 시선을 끈다. 억새로 이은 지붕이 자아내는 독특한 운치! 그리고 초가 너머에 병풍처럼 둘러진 푸르른 대숲, 언뜻 보기에도 그것은 참으로 절묘한 조화였다.

선생의 생가임을 알리는 안내 표지판이 영문과 한글로 병기되어, 친절하게 방문객을 맞아주는 것도 앞서 방문한 생각들과 구별되는 정경이다. 지방 기념물로서 구색을 갖추어 놓았다고나 할까. 표지판 밑에 한국문인협회의 문학 표징물이 생가 표지석과 함께 나란히 자리하고 있는 것도 시선을 끈다. 이곳에 선산이 있고, 대대로 터를 잡고 살아온 연안 이씨 집안의 내력이 숨어 있어서인지, 아니면 국가가 선생에 대한 자리매김을 이 정도의 예우로써 보여주고 있는 것인지. 지도 하나만을 의지하고 온 초행의 과객은 이제 유적 속에 깃든 선생의 잔영 앞에 옷깃을 여민다.

2.

선생이 이곳에서 태어난 것은 1891년 3월 5일, 6남 6녀의 장남이었다. 아버지 이채(李採)는 당시 부안에서 변호사업을 개업했을 정도로 개화한 인물이었다고 한다.

가람은 이 곳 수우재(守愚齋, 생가의 당호다. 수우재의 '愚'는 존경하는 할아버지 동우(東遇)의 이름을 받은 것이라 했다)에서 완고한 조부의 가르침을 받으며 10여 년간 한학을 배웠는데, 가람이 처음으로 신학문의 세계를 접한 것은 양계초의 「음빙실문집」을 통해서였다. 「음빙실문집」은 청나라 말엽 학자요, 정치 사상가였던 양계초의 문집으로, 개혁적인 계몽사상을 담고 있어서 당시 우리 나라나 일본, 월남 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책이다. 이 책을 섭렵하면서 선생은 신학문에 눈을 뜨게 된다.

그리하여 뒤늦게 전주 공립보통학교에 편입한 것이 19세 때였고, 이를 6개월만에 졸업하고 20세에, 당시 전국의 수재들만 모인다는 한성사범학교에 입학한다. 그후 그는 일요일마다 조선어강습원을 다니며 주시경 선생의 문법 강의를 듣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국어 연구와 한글운동에 눈을 뜨며, 국문학 연구와 시조 부흥에 적극 나서게 된다. 그러나 구한말에 출생한 선생의 앞날에는 참으로 파란만장한 이 땅의 역사가 가로놓여 있었다.

경술국치는 선생에게 깊은 충격을 안겨준 정신적 사건이었다. 20세의 젊은 나이로 선생은 괴로운 나날을 보냈는데, 훗날 선생이 두 번이나 망명을 시도했다는 사실은 당시 겪었던 고충이 어떠했는가를 말해 주거니와, 그때의 '처연'했던 심경을 선생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서울에 유학와서 일년이 되었는데 到此漢城偶一年

나그네 심사가 정히 처연하다 客中心事正凄然

끝없는 세상 근심 말을 다 못 이뤄 萬端世慮難成語

먼 고향 생각에 잠을 못 이룬다 千利鄕懷不得眼

매화지고 버들 푸른, 이미 봄인데 梅朸柳新春已地

대포소리 떨치는 깊은 밤하늘, 타오르는 세상 破振蘆燒夜深天

세상을 감당하는 남아의 뜻은 因循堪耐男兒志

후일 반드시 큰 뜻을 이루리라. 他日必期偉業傳

이제 가람이 품은 절치부심, 그 '큰 뜻'은 무엇이었던가. 그의 생애가 입증하듯이, 그것은 국문학 연구와 후진양성, 시조 시학의 완성이라는 위업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 모두가 나라를 빼앗긴 상태에서는 용기와 인내를 요하는 일이었기에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일찍이 김윤식 교수는, 가람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가람이 시조를 선택한 의미와 민족의식과의 상관관계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거니와, 일제치하에서 그것은 또 다른 형태의 저항운동이었던 것이다. '보다 큰 것에 바치되, 밖에다 떠들지 않는다'는 것이 가람의 처세술이었는 바, 소리 높여 애국을 부르짖는 세태 속에서 가람은 이처럼 '조용히 우리 것을 찾고 지켜가는' 길을 걸어갔던 것이다.

1913년 한성사범을 졸업한 가람은 고향에서 훈도 생활을 하면서 박봉을 떼어 고문헌을 수집하고, 시조를 창작하기 시작한다. 뒤에 동광을 거쳐 휘문고보 교사로 재직하면서도 방학 때마다 전국을 여행하며 사적을 답사하고 문헌을 수집하는 게 일과였다. 그렇게 모은 고서적이 20여 년 동안 수천 권이었다. 교편을 잡으면서 받는 월급의 반은 책을 사는 데 썼는데, "처자들에겐 반반한 치마 한 벌, 과일 한 톨 사 줄 수 없었다"고 당시의 괴로운 심경을 일기에 적어 놓고 있다. 이렇게 모아진 수천 권의 저서는 훗날 서울대학교에 기증되어 현재까지도 많은 국문학도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우리 나라 민간 학술단체의 효시라 할 수 있는 한글학회의 전신인, 조선어연구회가 현재의 휘문중고 자리에서 탄생한 것은 1921년이었다. 여기서 가람은 연구회 간사를 맡으면서 조직적인 우리말 연구 운동을 펼쳐 나갔고, 4년 뒤인 26년에는 시조회를 조직하여 민족문학의 연구와 보급에도 사명감을 불태웠다. 그러나 일제의 무단통치가 시작되면서, 우리말에 대한 탄압이 날로 거세어졌고 상황은 더욱 약화되기만 했다. 창씨개명도 하지 않고 버티던 가람은 마침내 조선어학회(1942)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서 1년간의 옥고를 치르게 된다. 가람은 당시의 심경과 고초를 29수의 「홍원저조(洪原低調)」라는 시편을 통해서 기록하고 있다.

세상 모든 일이 저절로 잊어지고

죽지 못하여 하찮이 남은 목숨

도리어 도야지 팔자를 조석으로 기린다.

뜰에 나던 볕이 창으로 도로 든다

하루를 보내기 한해도곤 더디더니

어느덧 재돌을 이어 또 가을이 되었다.

「홍원저조」, 5, 29연

출옥 이후 가람은 고향에서 농사에 전념하며 일제 말기의 어두운 삶을 견디어 나갔다. 이 시절의 일기에는 '이럴 적에 대성통곡이라도 했으면 시원할 듯 온몸에서 끓는 피가 쏟아져 나오는 듯 도무지 세상이 원수 같다'는 격양된 표현도 보인다. 여기에다가 설상가상으로 아들 동희마저 징병으로 끌려가 실종되는 참척을 겪게 되니, 이 민족의 고통에 찬 삶과 더불어 가람 개인이 겪은 고통과 슬픔은 필설로 다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이 시련 속에서도 가람은 연구와 창작을 게을리하지 않아 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성과를 내놓는다. 「한중록」을 주해하고(39), 「인현왕후전」울 묶어냈으며(40), 「역대 시조선」(39)과 창작집 「가람 시조집」(39)을 내놓았다.

1945년 가람은 고향에서 해방을 맞았다. 민회(民會) 등에서 그를 모시러 오곤 했으나, '관리니 단체니 정당이니 무슨 회니 하는 것은 체질적으로 맞지 않는 일'이었기에 그는 한글강습과 문화강연에 더 힘을 기울였고, 다른 사회활동과는 거리를 두었다. 가람의 소망은 '시조나 짓고 책이나 모아 뒤적이고 노트나 만들고 국학에 관한 몇 가지 저작이나 하고 교육 겸 호구나 하기 위하여 칠판에 백묵이나 날리자는' 데서 더 나아가지 않았으며, 자신의 본분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로 자청하지 않았다. 가람의 이런 태도가 일부 인사들로부터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가람은 끝내 정치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학자적 소신을 지켜갔던 것이다.

이후 서울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면서도 우리의 말과 글을 일깨우고 후진을 양성하는 데만 힘썼고, 6·25 동란 와중에서도 고전에 대한 연구를 중단하지 않았으니, 「지리산가」,「춘향가」,「청구영언」, 「해동가요」의 주해가 모두 이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다. 1956년 전북대학교에서 정년퇴임한 이후에도 학문에 대한 정진을 중단하지 않아 이듬해에는 백철과 공저로 「국문학 전사」를 세상에 내놓았다. 백철이 2부 「신문학사」를 쓰고, 1부의 「고전문학사」와 부록의 「국한문학사」를 선생이 썼는데,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선생의 국문학에 대한 열정과 해박한 식견을 느끼게 된다. 특히 평민 중심의 문학사 서술방식은, 문학사를 어떻게 서술해야 하는가 하는 중요한 시사를 던져 주어 이후 문학사 서술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그러나 그 해 「우리말 큰사전」의 발간을 기념한 한글날 기념행사에서 감격에 찬 술잔을 사양 않고 들이킨 것이 화근이었다. 귀가 길에 뇌일혈이 발생했고 이후 1968년 세상을 뜰 때까지, 기나긴 와병생활에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3.

기쁘거나 슬프거나 가장 나를 따르노니

이생의 영과 욕과 모든 것을 다 버려도

오로지 그 하나만은 어이할 수 없고나

시마(詩魔)」, 3연

노산 이은상과 더불어 이 땅의 대표적인 시조 작가로 일컬어지는 가람은 13세 때부터 시조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찍이 한학을 공부한 까닭에 처음엔 한시를 쓰다가, '우리의 말로 우리의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시조 창작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그런데 가람이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30년대는 서구풍의 모더니즘과 화려한 감각의 이미지즘 등이 작가들을 사로잡았던 시기이다. 대부분의 작가들이 이른바 '새것 콤플렉스'에 젖어 있어 우리 고유의 전통을 한갓 고완품으로 밖에 취급하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런데도 가람은 유독 낡은 형식의 시조를 선택했는데, 가람의 독특한 면모는 이런 데서 드러난다.

새 것을 좋아하고 낡은 것을 싫어함은 누구나 다 같은 생각이지만은 우리 소용이 됨에는 낡은 것이라도 새 것만 못지 않다. (…) 밟을 건 다 밟아야 한다. 성급함보다도 차근하고 찬찬하고 꾸준해야 한다. (…) 제가 스스로 살피고 따지고 깨닫고야 정말 그 가치와 생명이 드러날 것이다.

「가람문선」

김윤식 교수는 가람의 이 글에 주목하여, 그가 전통이 무엇인가를 투철히 아는 보기 드문 정신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갈파한 적이 있거니와, 이러한 시조관은 당시에 횡행하던 '시조야말로 우리 만족의 유일한 시 형태며 문학양식'이라는 맹목적·지사형적 사고와는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다.

당시 가람의 시조들은 시조의 '신조'라 불릴 만큼 문단에 신선한 반향을 일으켰다. 1939년 「가람시조집」이 백양사에서 나오자, 정지용은 '송강 이후에 가람이 솟아 오른 것이 아닐까'라고 했으며, '가람 이전에 가람이 없고, 가람 이후에도 가람이 없다'는 발문으로써, 그 위대성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낼 정도였다.

가람 시조의 비밀은 그의 '시조 혁신론'에서 드러난다. 가람은 시작(詩作)을 하면서 다음 5가지 원칙을 지켰는데, 첫째는 실감·실정의 표현에 힘을 기울일 것, 둘째는 취재의 범위를 넓혀 일상적인 소재까지 시화하려고 애쓸 것, 셋째 용어의 참신성을 강조하여 새로운 조어와 순수한 우리말의 발견을 통해 시어의 범위를 넓혀갈 것, 아울러 새로운 격조의 창조, 연작 쓰기를 시도할 것 등이었다.

이 가운데서 특히 시조에 새로운 율격과 예도를 새로운 격조(格調)로 얹힌 그의 혁신성은 '가람의 천재가 폭발했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주목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를테면 현대시조와 고시조의 차이는, 고시조는 가락을 띤 창이라는 데 있었으나, 현대시조는 고시조의 음악을 탈피하는 새로운 격조의 창조를 과제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옛 시조가 근거하고 있던 곡조의 자리에 새로운 격조를 대치시킴으로써 가람의 시조는 비로소 현대성을 띨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가람에게 있어서 격조는 자연의 본질과 결부되는 것이었다. 가람은 자연의 본질과 삶의 이치를 난초와 매화, 수선 등 산수를 통해서 깨달았고, 그 깨달음의 오도를 시조의 새로운 격조로 앉히는 개가를 울렸으니, 여러 사람들의 지적처럼 가람 시조의 격조를 높인 중요한 원천은 '난초'였다. 가람하면 난초를 떠올릴 정도로 가람의 생활 속에 난초의 정신은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가람일기」에 의하면, 배양이 제일 어렵다는 난초가 많을 때는 20여 종, 30여 분(盆)이나 키웠을 정도라고 하니 관심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가람의 문하에서 사사했던 최승범 교수에 의하면, 가람은 글에서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빵은 육체나 기를 따름이지만 난은 정신을 기른다"는 말을 곧잘 했다고 한다.

'내가 난초를 재배한 지 30여 년에 이걸 달라는 이는 많았으나 주어도 기르는 이는 없었다. 이도 또한 오도(悟道)다. 오도를 하고서야 재배한다'(수필 「난초」)

말하자면 가람에게 있어서 난초는 '오도'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난을 기르며, 인생의 도를 깨달았던 가람. 이렇게 해서 빼어난 난초시편들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빼어난 가는 잎새 조는 듯 보드랍고

자주빛 굵은 대공 하얀 한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래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 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

받아 사느니라

「난초」

가람이 도달한 시 세계는 관조와 법열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일찍이 한학에 깊은 조예를 갖고 있었던 까닭에 난초와 자연을 벗하면서 관조의 세계에 몰입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무욕(無慾)과 무위(無爲)의 세계를 꿈꾸며 사물을 응시하고 음미하는 모습은 선생의 안온하고 담담한(淡淡)한 성격과 고스란히 부합되는 것이다.

그런데 가람의 관조적 태도는 고시조에서 볼 수 있는 것과는 사뭇 달랐다. 종래의 시조들이 먼 거리에서 대상을 바라보고 관념적인 절대 가치를 부여하는 형식이었다면, 가람의 경우는 가까운 거리에서 작은 것을 관찰하고 그 본질을 파악한다. 김제현 교수의 지적처럼, 가람은 관조적 태도로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멈추지 않고 '나'와 '자연'이 융합된 상태에서 자연의 질서를 찾고 그 오묘한 이치에 도달하고자 하는 구도의 길을 보여준다.

청기와 두어 장을 법당에 이어 두고

앞 뒤 비인 뜰엔 새도 날아 아니 오고

홈으로 나리는 물이 저나 저를 울린다

바위 바위 위로 바위를 업고 안고

또는 넓다 좁다 이리저리 도는 골을

시름도 피로도 모르고 물을 밟아 오른다

「계곡」2, 5연

새 한 마리 날지 않는 적요한 법당 뜰에 청명한 소리를 내며 흐르는 물은 순진무구한 자연을 상징한다. 바위가 바위를 업고 안고, 좁았다 넓어졌다 하는 계곡 사이를 시름도 피로도 없이 흐르는 물은 원초적 자연이자 작가의 맑은 성정인 셈이다.

그리고 두 번째의 '바위 바위 위로 바위를 업고 안고'에서 'ꑁ'과 '葡, 螡'의 적절한 조화를 통한 음악적 효과의 활용 역시 주목할 사실로, 가람이 현대시 못지 않은 감각과 기교를 시조에 도입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조에서 감각을 최초로 보여준 시인'(김제현)이라는 평가처럼 가람은 여러 가지 방법으로 고시조의 정형성을 탈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한자의 적절한 사용과 배치로 시각적 조형미를 고려한다든지, 일상어를 직접 시어로 선택하여 구어체 문장의 효과를 최대로 발휘한 것 등은 모두 가람의 업적인 셈이다.

이러한 성과가 있었기에 가람은 현대시조의 거봉이라는 평가를 받기에 이른 것이다. 아울러 '시조를 사적으로 연구한 이, 이론으로 분석한 이, 비평에 기준을 세운 이'(정지용)라고 일컬어질 만큼 가람은 시조의 대표적 이론가이기도하였다. 시조라는 명칭이 처음에는 곡조의 이름이었고, 영·정조의 이세춘에 의해 최초로 명명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한 이가 곧 가람이라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4.

'영양가야 밥보다는 술'이라는 지론을 펼칠 만큼 가람은 술을 즐기는 애주가였다. 또한 평생 고서를 수집할 만큼 소문난 애서가이기도 하였다. 평소 '고서도 없고 난도 없이 서화나 붙여 놓은 방은 아무리 화려하더라도 요리집에 불과하다'고 경멸할 정도였으니, 선비다운 선생의 취향과 성품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선생의 방 안에는 늘 난초와 함께 책이 가득하였다. 술과 난초향과 장서가 동고동락하는 생애였다고나 할까.

한 그루 고매(古梅)를 자처하던 가람이었으나, 뇌일혈로 쓰러진 이후에는 의사소통마저 힘들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기도 했다. 그러나 마지막날까지 가람은 새 소리에 날이 밝고, 담담히 잔을 기울이며 하루해를 보내는 강호(江湖)의 생활을 버리지 않았다. 거동이 불편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채와 툇마루 모정의 청소는 손수 했다고 하며,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술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고 한다.

1968년 11월 28일, 셋째 며느리 윤옥병씨에 의하면 가람은 점심을 들고 집 뒤의 진수당으로 나갔다고 한다. 그 뒤 이상한 소리가 나서 급히 가보니 술을 따라 놓은 채 쓰러져 있었다는 것이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송뢰에 해가 저물 듯' 그의 생애가 저무는 순간이었다.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술을 멀리하지 않았던 가람, 향년 78세였다.

가람이 말년을 보낸 수우재는 집안 대대로 내려온 종가집이다. 사랑채, 안채, 고방채, 모정 등은 여전히 옛 모습대로 남아 있으나, 행랑채만은 연전에 철거되었다 한다. 가람의 혈손으로는 아들 셋과 딸 하나가 있었으나, 현재 아들은 모두 사망하고, 따님 한 분만이 서울에 생존해 있다고 했다.

생가 앞마당에, 연못터가 있었다. 가람의 조부가 용화산 기슭에서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뽑아 만들었다는 연못터는 제법 컸는데, 웬일인지 파헤쳐져 있었다. "작년에 익산시에서 이곳을 문화마을로 지정하면서, 새로 보수 공사에 들어갔다"는 설명이다. 아직 봄기운을 채 피워 올리지 못한 백련나무, 백일홍만이 못가 주위에 듬성듬성 심어진 채로 주인이 가고 없는 빈 집의 쓸쓸함을 메꿔주고 있다.

"수우재가 원래는 초가지붕이었지요. 그런데 자꾸 물이 새서 3년 전에 억새로 새로 이었답니다. 아직까지는 잘 견디고 있네요."

걱정스런 표정인 윤씨는 시아버지 되는 가람이 이 곳에서 말년을 보낼 때 간병을 하며 살았고, 현재도 수우재를 지켜 나가는 이다. 듣자하니, 생가가 유적지로 지정된 것은 약 10여 년 전의 일이고, 그후부터는 익산시 공보실에서 생가 및 생가 주변의 보수와 관리를 맡아서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이곳으로 올라올 때 어귀에 서 있던 포크레인 등도 알고 보니, 익산시에서 주차장 부지를 담기 위해서 갖다 놓은 것이었다.

수우재의 뒷동산에 자리한 선생의 유택(幽宅)에 경배하고, 발길을 시비와 동상이 있는 여산남초동학교로 돌렸다. 선생의 시비는, 생가에서 2, 3 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여산초등학교 뒤뜰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적하고 깔끔한 분이기였으나 교사(校舍) 뒤편에 위치한 까닭에 바로 눈에 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교사를 앞뒤로 하고 서 있는 모습은 평생을 학문과 더불어 살다간 선생의 분위기를 상징하는 듯하였다.

시비를 뒤로 하고 학교를 빠져 나오니, 다시금 생가 뒤편의 푸른 대숲이 시야에 들어온다. 비록 난세에 처했을 지라도 학자의 본분이 무엇이며, 어떤 길을 밟아 나가는 것이 온당한가, 선비의 처신과 기품은 어떠해야 하는가. 진사동 마을을 빠져나올 때, 저 푸른 대숲 속에서 선생의 영혼이 질타하는 소리가 어쩐지 귓전에서 울려오는 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