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한 자세의 작업태도를…
이종호 / 무용평론가
미흡한 안무―서울시립 중견단원 창작공연
국·시립 무용단원들의 창작욕을 살려 주려는 취지에서 단체마다 연중행사로 치르고 있는 '중견단원 창작무대'류의 공연은 80년대 중반에 시작됐다. 관립단체의 성격상 대개는 무용수 역할을 주로 수행하게 마련인 단원들 가운데 각별히 안무의 재능이나 의욕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이런 자리는 처음에는 무용계 전반의 활발한 창작 분위기와 어울리면서 제법 좋은 작품들의 발표 공간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웬일인지 최근 들면서는 부쩍 질적인 저하를 드러내면서 긴장도 흥미도 없는 내부행사에 그치고 있다. 좀더 진지한 자세로 작업에 임하든가, 아니면 무용수로서 좀더 향상되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 나을 것으로 생각된다. 나이나 경력상 중견이 됐다고 해서 의무적으로 또는 체면상 안무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안무가 무용의 전부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3월 26∼27일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있은 서울시립무용단 중견단원 창작무대에 발표된 네 작품 역시 진부한 내용과 평범한 구성에 머물고 있었으며 심지어 창작의 기본 개념조차 갖추지 못한 경우도 눈에 띄었다. 한 작품에 10∼15명의 무용수가 출현했는데 그 인원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지 못한 것도 역량의 문제였다. 유일하게 정은숙의 「현기증」이 웬만큼 틀을 갖춘 정도였는데 그나마 틈새로부터 새어 나와야 할 어떤 '느낌'은 거의 감지되지 않았다. 높고 불안한 단 위에 정은숙이 서 있다. 휘청하는 순간 걸쳤던 망토가 밑으로 떨어지고 그도 함께 추락하듯 내려오면서 작품은 시작된다. 고층건물 모양의 이동 장치물 네 개, 어지럼증나는 제자리돌기, 산발적으로 등장해 빠른 손가락 놀림으로 동작에 속도를 붙여 가다 문득 신경질적으로 다투는 무용수들, 붉은 불빛을 바라보며 이상하게 변하는 눈빛과 함께 시작되는 증세, 급기야는 발작―이 안무가가 묘사한 증상들은 주로 복잡하고 비인간화된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겪는 현기증이다. 하지만 정작 정은숙과 무용수들의 춤에서는 현기증이 피어오르지 않는다. 다만 묘사되고 있을 뿐이다. 제시―전개―마무리 같은 작품 짜기의 골격은 갖춘 터이니, 이제는 평소 남의 작품에 출연하면서 유감없이 발휘해 왔던 독특한 춤맛과 기질을 자신의 창작에서는 어떻게 살려 낼 것인가를 생각할 때인 것 같다.
심민자의 「숨결 Ⅰ Ⅱ Ⅲ Ⅳ」는 굿판을 무대로 옮겨 본 것이지만 특별히 양식화한 것은 아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북이 놓인 중앙 뒤편의 단을 기점으로 넓은 천을 펼치거나 잡아당기는 것을 조그만 가미(加味)로 볼 수 있겠지만 이미 너나 할 것 없이 자주 사용되는 장식품이다. 춤들은 무난했지만 구태여 창작품으로 다듬을 소재는 아니었다.
박영순의 「나를 바라보는 나」는 거울을 통해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는 소박한 그림이다. 흔히 내면적 성찰이나 반추를 권유하거나 암시할 때 쓰이는 객석을 향해 비치는 빛, 그 빛을 마주보며 거울 속의 자신을 더듬어 보는 동작과 표정, 웃었다 슬펐다 식의 감정 변화, 주인공의 심리상태와 병행하면서 받쳐주는 군무의 검은 의상 같은 것들이 직설적으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그러나 유일하게 긴장을 야기할 수 있었던 대목인 뒷부분의 반전(反轉)이 타이밍을 놓쳐 맥이 풀린다. 춤을 별로 활용하지 않은 대신 연극적인 수법에 적절히 의지한 점은 안무자의 취향으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연극적 수단이란 것도 실상 자주 쓰이는 것들이어서 별다른 맛은 없다.
박종필의 「땅, 울림소리」는 대지모신(大地母神)을 등장시킨다. 개막과 함께 천장에서 거꾸로 매달려 내려오는 남자, 여자무용수의 키를 높이고 치마폭을 거대하게 부풀려 만든 큰무당 분위기의 모신상(그 치마 밑에서 생명들이 기어 나오는), 느리게 처리되는 남성들의 무예동작이 아주 서늘한 목소리의 음악과 어울리면서 무엇인가 빚어낼 것 같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무대는 순간 느닷없이 일련의 민속춤 보여주기로 떨어져 버린다. 죽창 같은 막대기로 땅을 두드리며 모신을 어르고 위협하기도 하는 남자들과 서서히 쓰러지는 모신, 만장의 행렬도 그 때문에 도대체 의미가 잘 살아나지 않는다. 게가가 회심곡(回心曲)까지 동원한 것은 좀 지나쳤다. 아마도 대지모신의 이미지와 부모에 관한 이야기를 구분하지 못했던 탓으로 보인다. 의욕이 과했던 것일까. 혹은 미처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작업에 임했을까. 무용이건 다른 장르이건, 작품 만들기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아야겠다.
10년 노력의 성과―박경숙 발레공연
박경숙(朴慶淑) 발레공연(3월 25일 문예회관 대극장)은 그가 공주대학에 부임한 이후 지금까지 열성으로 제자를 길러내고 부지런히 무대작업을 해왔던 10년이란 시간의 결정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올린 작품이 둘뿐이라는 점에서 결정(結晶)의 전면은 아니고 단면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발레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그곳에서 그만큼 뿌리내리려 애썼다는 점만은 충분히 입증해 준 무대였다.
그 자신 프로그램에서 밝히고 있듯 '전공생들조차 토슈즈를 신지 못하는 상황'에서 느껴야 했던 부임 당시의 막막함을 지금은 어느 정도 해소했는지 모르겠지만, 박경숙발레단과 졸업생들로 구성된 프르미에르발레단은 충청남도는 물론 서울과 또 다른 곳들을 부지런히 오가며 무대를 만들고 다녔다.
이런 왕성한 의욕에 힘입어 그들의 존재는 어느 정도 인정받는 시점에 와 있다.
이번 무대에서는 「디베르띠스망 글라주노프 Divertissement Glazounov」(20분)와 창작 「새벽을 여는 사람들」(30분)이 공연됐다. 우선 「디베르띠스망 글라주노프」의 경우, 고전작품이란 언제나 정확한 춤기술을 전제한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심하게 말하면 연기나 표현력도 그 다음에나 요망되는 항목일 터이다. 매우 상식적인 이야기가 되겠지만 테크닉을 충분히 익힌 다음 연기와 감정처리까지 익숙하게 해내는 훈련을 거듭하는 것이 순서이다. 주인공을 맡은 경성숙은 좀더 집중적인 훈련을 거친다면 좋은 무용수로 성장할 수 있을 것 같다.
「새벽을 여는 사람들」은 누적된 죄악을 말끔히 씻어내고 새롭고 깨끗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갈구를 그리고 있다. 다분히 성서적인 분위기를 현실의 모습으로 끌어들인 이 작품의 첫 장면은 남자(김형민)와 여자(박선영)가 단의 위아래에 각각 서 있고, 위쪽의 여자가 붉은 조명을 받아 유혹에 빠져들면서 남자에게까지 악의 기운을 전파하는 것이다. 악의 기운이 군무로 퍼지면서 세상이 타락하기 시작함을 보여주고 그 죄가 인간 전반에 확산되면서 극에 이르는 장면을 한 여자에게 폭력을 가하는 네 남자로 구체화하고 있다. 다시 최초의 남녀가 흰 의상을 입고 정화된 춤을 추면서 마치 통곡의 벽처럼 서 있던 뒤편의 거대한 성곽이 허물어져 내린다. 다소 상식적인 구성에 동작들도 비교적 단순하지만 대신 간결한 맛을 준다.
10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에 비해 아직 이 대학은 충분한 무용수들을 배출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체육과 무용전공으로 소속돼 있어 무용 전공학생의 수가 지극히 제한돼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히 금년부터는 정식 무용과로 격상했고 입학생 수도 늘었으므로 좀더 본격적인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외형적으로는 웬만큼 자리잡고 이름도 알려졌으니 본격적인 도약을 위해 앞으로 힘써야 할 일은 이상적인 훈련법에 입각한 지독한 연습으로 내실을 기하는 일일 것이다.
계속되는 부진―탐 정기공연
탐의 빛깔이 제대로 살아나지 않고 있다. 작년과 올 사이 몇 차례의 정기공연에 올려진 작품들은 한결같이 보여주는 것이 별로 없다. 과거 조은미의 개성이 주도하던 탐의 무대였지만 리더인 조은미 자신의 최근작들이 예전에 비해 공들인 흔적이 희미해지면서 쉽게쉽게 흐르고 있을 뿐 아니라 신인에서 중견으로 발돋움하는 후배들도 내용있는 무엇인가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물론 개인적으로는 안무가로서 혹은 무용수로서 뛰어난 단원들이 여전히 여기저기 빛나고 있지만 정기공연 같은 중요한 무대에서 과거의 성가를 지탱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분명 요즘 두드러진 증상이다.
제16회 정기공연(3월 16일 호암아트홀)의 두 작품도 일정한 수준에 이르지 못한 채 어설픈 습작처럼 끝났다. 오현옥의 「가스 체임버」(그냥 가스실이라고 하는 편이 나을 듯한데, 가급적 우리말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는 측면에서나 어감 자체에서나)는 나치수용소의 가스실에서 죽어간 사람들의(영혼의 또는 정신적) 부활을 그리면서 생명의 소중함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작품은 요즘 조금만 관찰하고 연구하는 안무가라면 아마도 쓰지 않았을 진부한 동작들과 그보다 더 진부한 음악으로 지극히 상식적인 무대를 만들고 있다. 고개를 떨군 채 한 곳에 몰려 서 있는 푸른 옷의 수감자들, 뒤에는 촘촘하게 짜인 철망에 걸리거나 매달린 시신들의 모습, 고통의 몸짓과 비명, 죽어갈 때의 단말마, 한 구덩이에 쌓이는 주검들, 거기서 서서히 솟아오르는 무용수들이 객석을 향해 조심스레 전진하는 모습이 이 작품의 기본 그림이다. 거기에 2―3―4인무가 자주 삽입되지만 맥락상의 연결점으로도, 춤의 볼거리로도 그다지 역할을 하지 않는다. 전개방식이 도식적이었기 때문에 부분들이라도 좀 더 살아 움직였더라면 한결 좋았을 것이다.
이연수(李娟受)의 「일상―노(怒)」에서는 무대장치와 미술(양동주)이 튄다. 연출도 무엇인가 의도한 듯하지만 살아나지는 않는다. 안무가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야만의 시대'에 침묵으로 일관했던 부끄러움을 속죄한다는 것인데, 아마도 이런 식으로 전개하면 이런 식으로 전달될 것이라는 손쉬운 믿음, 혹은 그렇게 보여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검증되지 않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혔던 탓은 아닐까. 대칭을 통한 대비나 포개어짐도 시도하고, 단상과 단하의 움직임으로 무엇인가 보여주려 해보고, 제의(祭儀)의 냄새를 피우기도 하지만 관객의 눈길을 끄는 것은 밝게 떠오르는 색조의 벽면 미술과 붉은 줄에 매달린 이연수의 몇몇 동작뿐이다. 그보다는 차라리 단편적이지만 성미연이나 조양희의 신선한 춤 기량을 감상하는 편이 나았다. 「일상―노」라는 제목도 작품 분위기와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