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디어는 문화이미지를 마음껏 펼칠 수 있는 통로에서 나온다
구히서 / 연극평론가
문화이미지는 문화적인 노력만으로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한 나라의 문화적인 이미지는 갑작스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쩌다 생긴 것인인지는 몰라도 한번 얻어진 이미지는 고쳐지기가 무척 어렵다. 문화적인 이미지라 해서 문화적인 노력만으로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정치·경제·사회·학문·예술 등 다양한 측면에서 모두가 자신의 독자적인 목소리를 가지려는 자존심이 있어야 하고 그 자존심이 문화적으로 품격을 지닌 표현으로 드러나야 한다.
88서울올림픽을 치루면서 우리는 세계를 향해 우리나라가 역사와 문화가 있는 나라임을 보여주려고 무척 애를 썼다. 그대까지 거들떠보지도 않던 많은 것들, 서양문화의 광휘에 눈이 부셔서 보이지도 않던 모든 것들이 갑자기 소중해져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들쑤셔댔다.
세계를 향해서 뭔가 '나' 와 '우리' 를 알리고 보여주고 인정받고자 했을 때 그때 깨달은 것은 우리말 우리의 목소리로 얘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전통음악이나 무용, 전통예술 분야의 많은 것들이 그 중요성을 인정받았고 부림을 받았다. 창작에서도 우리의 목소리, 우리의 정신이 존중되었고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런 열정은 그때 잠깐뿐 지금은 벌써 많이 시들해졌다. 문화는 여전히 국가예산에서 뒤로 밀리는 부분이고 우리 것이라고, 우리의 목소리라고 내세워졌던 모든 것들에 대한 배려는 정치에서도 경제에서도 가장 소중하지 않은 것인 채로 남아 있다.
한 나라의 문화는 문화를 창조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그 문화를 결정하고 수행하는 사람들에 의해 주도될 수 있으며, 그 문화를 누리는 사람들에 의해 완성된다. 그리고 그 나라의 문화이미지는 이렇게 완성된 문화에서 파생되는 것이다.
하나의 집을 예로 들어보자. 집을 지으려는 사람, 집주인이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긴다. 건축가는 집주인, 그 집에서 살아갈 사람들을 위해서 설계를 한다. 건축가는 이럴 때 문화의 창조자의 입장에서 가장 이상적인 설계를 구상할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을 설계대로 지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집주인이다. 그리고 그 집에서 사는 사람들, 그 집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주인 한 사람만은 아니다.
그러므로 집은 그 집을 설계한 사람과 그 집을 짓겠다고 결정한 사람과 그 집을 사용하는 사람들 모두에 의해서 하나의 완성을 보는 것이다.
여기서 설계자-문화창조자, 집주인-문화결정자 또는 정책결정자, 주민-문화향수자의 등식을 생각해 볼 수가 있으며, 이 삼자는 문화의 완성에서 모두 중요한 요소임을 알 수가 있다.
좋은 뜻, 좋은 품질, 좋은 이미지는 어느 한쪽에만 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다.
광화문 네거리에 일본 도쿄에 있는 건물의 복사판 같은 건물이 버티고 서 있다면 그것은 누구의 양심이며 누구의 잘못일까 생각해 보면 이 등식은 설득력이 있다.
좋은 문화이미지를 구축하기 위한 아이디어는 그러므로 일시적인 필요에 의한 관심에서 다뤄져서는 안되고 어느 한쪽에만 그 책임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일시적인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생존 자체의 문제라고 심각하게 생각하고 다같이 책임을 지고 다뤄야 할 문제다.
작은 일, 사소한 문제가 하나의 문화이미지 형성의 효소가 된다
아이디어는 하나의 꿈에서 시작된다. 꿈은 허황된 것이라고 무시되기가 쉽다. 지금 우리의 꿈은 우리의 말, 우리의 목소리를 가져야 되겠다는, 그래서 누구의 흉내로서가 아닌 우리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절실한 필요에서 우러나온 것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큼직한 결단만이 아닌 작은 부분에까지 신경이 가 있어야 한다. 작은 일 사소한 문제들이 문화이미지를 형성하는 하나의 효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작은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2002년 월드컵을 유치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노력을 했고 그를 위한 각종 홍보전략을 구사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일반의 눈에 띄었던 것이 2002 World Cup Korea 라고 씌어진 스티커였다고 생각된다. 이 간단한 표어를 담은 스티커는 그 동안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아주 많이 보여지면서 하나의 영상을 남겼다. 이 스티커에서 한국은 어디 있는가? 우선 Korea라는 나라 이름이 나온다. 그리고 두 개의 0속에 태극문양이 우리의 국기를 상징해 준다. 이만하면 우리의 존재를 충분히 시각적으로 표했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하나의 스티커 속에 단 한자라도 우리의 글자를 집어넣어야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사람이 있었더라면 어떠했을까? 간단하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설득을 할 수 있는 스티커에 왜 꼭 우리 글자가 들어가야 하느냐, 오히려 더 복잡해져서 의미가 흐려질 염려가 있을 것이다라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문제는 없다. 그러나 전세계로 들고 다니며 여기저기 붙이고 흔들어댄 하나의 작은 쪽지에도 우리의 글자를 한 글자라고 집어넣어야 직성이 풀리는 마음가짐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모르는 언어는 의미없는 소리로만 들리기 쉽고 모르는 문자는 그저 부호나 그림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소리나 그림이 바로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1950년대 영국의 어떤 신문엔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기대하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나와 당시의 여러 어른들을 흥분시킨 적이 있다. 그때 우리 신문들에서는 이 말에 대한 여러 가지 반응이 나오고 정계를 비롯한 각계의 반응이 나왔었다. 반성도 하고 비판도 하고, 억울해 하기도 하고.
1960년대 영국정보부 출신의 스파이 소설작가 이언 훌레밍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가 영화로, 책으로 소개됐을 때 그 시리즈 중 하나에는 오드 잡 Odd jop 이라는 괴상한 이름의 주인공이 나온다. 악당의 부하로 주인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지 하는 비열하지만 충직한 하인이다. 그래서 온갖 잡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이다. 그는 한국인으로 설정이 돼 있고 작가 이언 훌레밍은 그가 나오는 대목에서 한국인의 민족성에 대해 상당히 아는 척을 하면서 한국인은 창의력이 없어 지도자가 될 수는 없지만 충직해서 배반하지 않으며 그래서 하인으로서는 더할 나위 없다는 설명을 했다. 요컨대 노예근성이 있는 백성이라는 것이다. 이런 이상한 지식(?)은 물론 우리가 우리를 설명한 말에서 얻어진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의 약삭빠른 이웃에 의해 조성된 한국인의 그릇된 이미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이 번역되어 팔리고 영화가 들어와서 인기를 끌었어도 이에 대해서 정면으로 논의를 끌어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떳떳한 자기인식과 거기서 나온 창조적인 것들이 한국의 문화이미지가 돼야 한다
미국 영화계의 귀재로 주목받고 있는 흑인 영화감독 겸 배우인 스파이크 리의 영화 속에 그려진 한국이민들의 모습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그러한 이미지 개선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라는 문제에 대해서도 전혀 적극적인 논의가 일지 않았다.
그의 영화가 미국 흑인들의 LA 한인타운 습격이라는 무서운 사태의 촉매제가 됐다는 분석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야기는 영화쪽에서만 관심이 있고 영화쪽에서만 알아서 얘기해야 하는 문제였던 모양이다.
문화이미지는 문화쪽의 문제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그렇지만 그런 생각이 많은 것 같다.
최근 문화라는 단어는 여러 분야 모든 사항에 덧붙여져서 널리 쓰여지고 있다. 이를테면 스포츠문화도 있고 음식문화도 있다. 음주문화라는 단어도 등장했다. 참 많이 쓰여진다. 뭔가 ‘그 이상’의 것을 얘기할 때 문화라는 단어가 편리한 통로가 되는 모양이다.
사실 그렇다. 문화란 뭐든지간에 ‘그 이상’ 이어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현상만이 아닌 ‘그 이상’의 것 그것은 창조에서 나온다. 창조, 좁은 의미에서 창작이다. 창작은 역사에서 나오고 역사를 만든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이며 미래다. 우리말에 평지돌출은 없다는 말이 있다. 뭐든 갑자기 생기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의 창조는 미래의 창조가 비빌 수 있는 언덕을 만들어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창조·창작은 내 것 만들어내기다. 남의 것 흉내내기가 아니다. 그러므로 창작에는 자기발견, 자기인식이 필요하다. 우리의 문화이미지는 그러므로 바로 우리들의 자기인식에서 비롯된다. 우리역사, 우리문화, 우리가 원하는 미래에 대한 헛된 자랑이나 오만이 아닌 떳떳하고 독립적인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떳떳하고 부끄러움 없이 자신을 바라볼 수 있고 그렇게 하려고 노력할 때 우리의 창작은 진정한 창작이 될 수 있고 우리는 그러한 창조를 우리의 문화로 누릴 수가 있으며 우리의 내일로 지켜나갈 수가 있다. 지금 우리는 자연스런 흐름으로 이러한 통로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자각을 가지고, 의지를 가지고 자신을 자신으로 지키고, 이끌어가야 한다.
한국의 문화이미지, 그것은 부끄러움 없는 떳떳한 자기인식과 거기서 나온 창조적인 것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드러내고 알리려는 자세에서 창출될 것이다. 작은 것에서도 큰 의미를 느끼고 큰 것에도 주눅이 들지 않는 당당함으로 자신을 무장해야 한다.
각자가 자신의 집 문패가 무슨 글자로 어떻게 쓰여져 있는지부터 점검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문화는 문화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밥그릇의 크기만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돌아봐야 한다.
백범 김구 선생의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 는 그러므로 지금 우리 모두의 좌우명으로 생각할 만하다. 문화이미지 구축을 위한 아이디어는 그 아이디어를 죽이는 사람이 없는 풍토에서 꽃을 피울 수가 있다. 한번쯤 내가 원하는 우리나라는 문화가 꽃피는 나라라는 백범 선생의 글을 외워보고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져보는 것, 어쩌면 그런 작고 멀리 있는 노력에서 우리 문화이미지는 자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