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의 미, 창조를 통해서만 전통도 계승된다
서성록 / 미술평론가
한국에 문화가 없다는 얘기가 제기되는 이유는?
흔히 한국에는 경제만 있지 문화가 없지 않느냐는 얘기를 듣는다. 5천년 역사를 지니고 있다고 믿는 우리로서는 대단히 유감스러운 얘기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문화선진국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그네들은 꾸준히 우리의 문화전통에 대해 의심을 보내는 것 같다. 자동차 수출과 반도체 수출, 그리고 선박 수출로는 이름이 꽤 나 있지만 한국문화의 실체에 대해선 쉽게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그간 경제에만 치중한 결과로 문화에 대해서는 아예 무관심한 민족이란 인상을 깊게 심어준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들에게 문화는 경제력 이상의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문화에 소홀하다는 지적은 우리의 취약성을 짚어준 말로 새겨들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특히 무형의 자산인 문화예술이 경제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된 것은 비교적 근래의 일이며, 늦었지만 늦은 것을 확인한 사실 자체가 여간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에게도 찬란한 문화재와 우수한 예술품이 얼마든지 있으며 그것을 알뜰히 가꾸며 외부에 알릴 필요성을 비로소 자각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로마, 바티칸을 가면 그리스, 로마시대와 중세 르네상스 시대에 건립한 수많은 문화재들이 그곳을 찾은 사람들을 질리게 만든다. 이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로마 국립미술관, 바라코미술관, 시립미술관, 국립갤러리, 국립현대미술갤러리, 루카 아카데미아, 토를로니아미술관 등 크고 작은 미술관에서 우리는 유럽문화를 이끌었던 이태리의 찬란한 예술을 만난다. 온 도시가 미술관으로 뒤덮여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파리는 어떤가? 「모나리자」가 보관되어 있는 루브르미술관을 위시해서, 오르세이미술관, 퐁피두센터에서 프랑스 문화의 저력을 새삼 실감케 한다. 근대미술의 발상지답게 어느 곳을 가든 보석 같은 미술품이 버티고 서 있는 것이다. 영국도 프랑스 못지 않다. 연중 수많은 인파로 붐비는 대영박물관에는 ‘해가 지지 않았던 나라’답게 인류의 문화재를 모두 소장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낳는다. 고고학적으로 가치있는 것들뿐만 아니라 인류사적으로도 귀중한 유물들이 전시장을 가득 메워 부러움을 산다.
내셔널 갤러리, 빅토리아 앨버트 뮤지엄, 테이트 갤러리, 존 소안 뮤지엄, 왈리스콜렉션 등 자국의 미술품을 보존한 전시장도 풍부해 영국의 문화수준을 가늠케 한다. 빈의 자연사박물관, 미술사박물관, 현대미술관, 빈 역사박물관에서도 그같은 인상을 받기란 마찬가지다.
3백년의 역사밖에 안된 미국의 경우만 해도 그렇다. 이집트, 그리스와 로마, 중세, 원시미술, 아시아미술, 근동 및 이술람미술 등 전세계의 인류문화재 및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을 위시해서 현대 미술관, 솔로몬 R. 구겐하임미술관, 휘트니미술관, 플릭콜랙션에서는 상설전시 및 기획전시를 쉴 새 없이 터뜨린다. 물론 이것으로 그치는 것은 아니다. 수백 개의 화랑이 즐비한 소호엘 가면 갓 태어난 신생 문화의 실체가 무엇인지, 또 미국을 ‘현대미술의 메카’로 만든 원천이 어디서 생긴 것인지 쉽게 알 수 있다.
각 나라에는 그 나라의 문화를 알려주는 공간이 있다. 미술관과 박물관이 그러하며 자생적으로 태어난 문화의 거리도 있다. 문화공간으로 치면 우리의 경우도 결코 뒤지지 않는다. 전국의 문예회관은 백여 개를 상회하고 그 밖에도 크고 작은 박물관, 미술관이 전국에 산재해 있다. 거기다가 고적이나 명승지까지 합치면 볼거리가 충분하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그럼에도 한국에 문화가 없다는 얘기가 꾸준히 제기되는 것은 과연 어떤 이유에서일까? 이 방면의 미진한 정책적 관심, 우리의 저조한 문화의식, 홍보 미흡 등을 주요인으로 들 수 있을 것이나, 중요한 것은 문화공간의 '노른자위' 에 해당하는 프로그램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으리라 본다. 가령 '동양 최대' 를 자랑하는 국립현대미술관만 해도 그렇다. 소장품은 일본 현(縣)미술관 정도에 그치고 게다가 국내 작가의 소장품 확보율은 더욱 저조해 '간판 역할’을 할 수 없다는 지적이 누차 되풀이되어 왔다. 가령 우리가 자랑할 만한 대가의 작품은 턱없이 부족한데 김환기나 이중섭, 그리고 박수근의 작품을 일부 소장하고 있기는 하나 인사동의 상업화랑이 가지고 있는 소품 정도의 부끄러운 수준이다.
시립미술관의 경우 사정은 더 딱하다. 말이 미술관이지 이 곳은 대관전용 전시장에 가깝다. 기획은 엄두도 내지 못할 형편이고 임대에 의존해 미술관을 가까스로 꾸려가고 있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예술의 전당 내 미술관도 사정은 비슷하다. 손이 딸리고 예산이 부족하다 보니 기획은 '강 건너 불구경' 식이 될 수밖에 없다. 획기적인 조치 없이는 공간의 활성화를 기대할 수 없는 실정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이나 시립미술관, 그리고 예술의 전당 미술관은 규모면에서 다른 나라의 것과 손색이 없으나, 열악한 조건으로 그 기능을 전혀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보여줄 것은 미술관의 화려한 외모가 아니라 충실한 내용물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섬세한 바탕결에 나타난 우리나라의 이미지 조형예술
다른 하나의 얘기를 생각해 보자. 아직 요원한 일처럼 들리지만, 만약 위에서 말한 문화선진국들처럼 조건을 구비하였다고 가정해 볼 경우, 우리 문화의 아이덴티티란 문제가 새롭게 재기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어떤 점이 서구를 비롯하여 가까운 일본이나 중국과 다르며, 무엇을 우리의 것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다. 이 점을 뚜렷이 할 때 한국의 문화적 이미지는 한층 선명하게 부각될 수 있음은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그 실마리를 필자는 한국미의 성질을 윤곽 지어 봄으로써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짧은 지면에 그같이 엄청난 물음에 답할 수는 없겠지만, 한국적 문화이미지의 설정 문제를 풀어가는 데 단서를 제공할 수 있으리라 여기기 때문이다.
한반도에서 건너간 일본의 문화재 중 백미를 꼽는다면 경도 광륭사에 있는 「목조반가사유상」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경주 금동반가사유상의 쌍둥이라 할만큼 경주의 것을 빼어닮은 이 작품을 볼 때마다 찬란했던 한반도 문화의 우수성을 다시 한번 확인 받게 된다. 「목조반가사유상」보다는 덜 알려져 있지만 일본인들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 이도사발, 즉 「키자에몽이도(喜左衛門井戶)」라는 것이 있다. 이 사발은 조선시대의 막사발로 일본 무로마치시대에 선승들에게 최고의 명물로 인정받아 왔다. 후에 이 사발은 야나기무네요시에 의해 동양미의식의 극치란 평가를 받았는데, 흥미로운 것은 사발의 재질과 형태이다.
일본이나 중국의 그릇이나 공예품과 다르게 이도사발은 시쳇말로 '별로 생긴 것이 없는' 불완전한 형태이다. 표면은 울퉁불퉁하며 좌우는 비대칭이고 거기에 어떤 장식도 새기지 않아 무덤덤한 체취를 강하게 풍긴다. 무명의 공인들이 미를 의식하지 않고 자연에 맡겨서 무심으로 제작한 것이다. 따라서 인공미는 발견되지 않고 거칠고 투박하며 둔후한 성질이 역력하다. 이중 불완전한 형태와 잔재주 없는 거친 표면에 우리의 시선이 멈춘다. 막사발뿐만 아니라 조선 초의 분청사기에서도 그같은 측면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에는 이른바 귀얕자국이란 것이 새겨졌다. 그 귀얕자국은 일종의 붓자국으로 인공무늬라기보다는 바람이나 물의 파장처럼 자연이 생성시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분청사기에 대해 최순우는 "고려청자가 명주고름 같은 비단결의 감각에 비교한다면 분청사기의 아름다움은 아마 생모시나 부둔한 수묵필의 감촉 같은 것을 지녔다" 고 설명한 바 있다. 귀얕과 아울러 여러 추상적 무늬를 볼 수 있는데 그 무늬란 한사코 정형화되기를 거부한다. 말하자면 틀 잡힌 균형이나 반복패턴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대신 어린이들의 모래장난처럼 흙에다 뭔가를 긁적거려 그 자취만 남게 한 인상을 받는다. 가급적 도안의 인위성을 피하고 무심하고도 순정적인 재질 표현에 우위를 둠으로써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비정형화된 상태에서 자연적 이상을 추구하고자 했던 우리 선조들의 정신을 감지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자연스러움의 흔적은 주위의 건축에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경회루의 돌기둥은 북경 자금성의 누각과 달리 기둥에 장식을 넣지 않았다. 아이보리 화이트의 은은하고 정갈한 화강석 그대로이다. 담백한 화강석의 재질감을 최대한 살리기 위해 여기서도 일체의 작위성을 피하면서 화강석 스스로 발언하게끔 유도했던 것이다. 분청의 수수하고 담백한 질감과 맥을 같이 하고 있는 명백한 증거다. 그 외에도 꾸밈없는 석탑, 석교, 기와집의 주춧돌, 기단, 교(橋)마루의 네모기둥이나 층대돌에서 화강석 재질의 바탕결은 여지없이 드러나고 마는데 여기서 건축가의 위상은 '창조자' 라는 개념보다는 '자연의 숨결과 호흡을 나누는 이', 또는 '질료의 그림자' 로서 위치된다. 말하자면 그 자신의 의도를 밝히는 데 주력하는 대신 재질의 존재를 표출하는데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한국미의 특질을 고유섭은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 이란 말로 요약해 준 바 있다.
'한국 고미술이 지니는 전통적인 성격, 즉 성격적인 특색은 무기교의 기교, 무계획의 계획이다. 이것은 기교와 계획이 생활과 분리 분화되기 이전 것으로서 생활 자체, 즉 생활본능의 양식화 과정에서 나온 것이며, 따라서 한국의 미술은 민중에 기반을 둔 민예적인 미술이 그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신앙과 생활과 미술은 분리되지 않았었다. 즉 상품화된 미술이 아닌 까닭에 정치한 맛이 없고 늘 정돈이 부족했으나 그 대신 질박한 맛, 둔후한 맛, 그리고 순진한 맛과 구수한 맛, 파조의 아름다움 등이 두드러진다.'(고유섭)
만약 물질에 대한 존중과 작위성의 간섭 배제가 한 시기로 그친다면 우리는 그것을 전통으로 받아들이는 데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어떤 형태로든 이어가거나 발전되는 단서가 발견될 때에만 '전통적 미의식' 이라고 명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한 흔적이 현대에 와서도 간단없이 이어지는데 그 단초를 우리는 70년대의 단색화에서 발견하게 된다. 동시대적 흐름인 서구의 미니멀리즘, 일본의 모노하(物派)와 달리, 단색화는 우선 '물성발휘' 란 측면에서 대조적이다. 캔버스에는 어떤 조형 이미지 대신, 수목 담조의 검소함이 스며들어 있고 물질과 동화하려는 흔적이 뚜렷하게 삼투되어 있다. 끝없이 질료와 증화되면서 주관이 마모되고 소진되고 마는 현상을 보게 된다. 그러한 특색에 대해 혹자는 '전통에 확고하게 뿌리내리면서 그들 예술의 일관되고 기박한 성격을 통해 모국을 통해 모국을 말하고 있다' (루이스 빅스)고 말하였는가 하면 다른 이는 '현재 속에 관통하는 과거' (미네무라 도시아키)라는 말로 한국현대회화의 전통성을 지적한 바 있다. 수화 김환기는 일찍이 그런 특성을 직관하여 자신의 말년을 의미있게 장식한 바 있고, 이외에도 정창섭, 박서보, 윤형근, 정상화, 하종현, 윤명로, 최명영, 서승원 등이 뒤를 이으면서 '허정지심' 의 독특한 회화를 창출한 바 있다. 거기서 우리는 오래 전부터 문화적 혈맥을 타고 내려온 탁월한 재질에 대한 해석 능력을 볼 수 있거니와 '무기교의 기교' 라 부를 만한 예술의 높은 경지를 만나게 된다.
우리만의 독특한 결의 미를 투영한 창조를…
이상에서 필자는 우리 문화의 이미지를 조형예술에 나타난 섬세한 바탕결에서 찾으려고 했다. 물론 그 같은 바탕결의 의식이 우리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청대의 문예미학자 옹방강(翁方綱)은 기리설(肌理說)을 제안하여 살갗의 결과 같은 말의 결, 짜임새를 강조한 바 있다. 이 같은 기리의 개념을 제안한 것은 중국인이었지만 사실상 그것을 오래 전부터 발전시켜온 것은 한국의 미술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어느 나라에서도 찾기 어려운 '결의 미'가 유독 한국의 건축과 공예, 그리고 회화에서 번성하였기 때문이다.
조지훈의 말처럼 문화란 혼융의 역사다. 서구 문화가 헬리니즘과 헤브라이즘의 이질적 전통이 융합되어 발원된 것처럼, 우리의 문화도 따지고 보면 샤머니즘과 선교, 불교, 도교, 유교, 그리고 실학파를 통해 받아들인 천주교적 전통이 혼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미술 역시 예외가 아니다. 미국의 추상표현주의가 유구한 역사를 통해 축적된 유럽의 전통에 현대의 실험성을 가미하여 새로운 전통을 낳았음을 생각할 때 문화적 혼융 자체를 반대할 이유가 없다.
중요한 것은 혼융 자체로 그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전통' 을 형성시킬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일 것이다. 새로운 전통 구축에 관건이 되는 것은 얼마나 '우리의 것' 으로 만들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동양의 어느 곳에서나 불상, 자기, 건축물, 그리고 회화를 볼 수 있지만 거기에 독특한 '결의 미' 를 투영한 예는 흔치 않으며 바로 이 점에서 한국조형의 특성이 두드러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아울러 전통은 창조의 재료요 원동력이지만, 창조는 전통의 방법이요, 창조를 통해서만 전통도 계승될 수 있다는 것을 '결의 미'를 통해 거듭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