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프로그램 / 문학의 해 작품활동. 시

그래도 시인은 숲으로 가야한다




강연호 / 시인

1.

요즈음 문학의 위기, 특히 시의 위기라는 담론이 부쩍 무성하게 거론되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담론의 배경으로 이른바 후기 산업사회의 여러 특징적 징후들이 지적되고 있다. 냉전 이데올로기의 종언과 자본주의적 일상의 팽창, 활자문화의 쇠퇴와 영상문화의 득세, 일회적이고 소비적인 문화 양상과 상업주의의 횡행 등이 그것이다. 거기다가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적 글쓰기에 대한 논의는 언어에 대한 회의와 더불어 재현 불가능이라는 인식까지도 낳고 있는 형편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과 삶의 여러 양상에 대해 그 동안 문학이 진지하게 제기해온 질문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게 된 것이다.

우리는 지금 문학이 대중 소비산업의 일환이 되고, 자본의 논리에 휘말리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독자들은 삶과 세계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지는 작품보다는 감각적이고 충동적인 작품들에 눈과 귀를 더 열어놓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른바 베스트셀러라는 명목으로 서점을 장식하고 있는 시집들의 태반이 경박한 감정의 직설적 토로를 보여주는 데 그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그렇지만 달리 생각하면 문학의 위기, 특히 시의 위기는 어제 오늘의 문제가 아니다. 위기 아닌 시대가 어디 있었는가. 어쩌면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또 위기 타령이냐고 짜증부터 낼지 모른다. 문학을 포함하여 모든 예술은 처음부터 불가능성과의 싸움, 패배가 예정된 싸움을 수행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문학의 위기, 시의 위기를 말하는 것은 어쩌면 삶의 진실을 담아내는 진지한 예술 양식으로서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회의적인 의문을 던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문학에서는 적어도 무거움의 반대가 가벼움이 될 수는 없다. 삶과 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 문학의 본질에 다가서는 길이라면, 무거움의 포기는 곧 진지함과 진정성의 포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유념해야 할 것은 위기의식이 아니라, 상업적 발상이나 자본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문학 본연의 자리를 어떻게 지켜낼 수 있는가에 있다. 삶의 진실을 담아내는 진지한 예술양식으로서의 문학을 지켜나가야 한다는 말이다. 소설이 그 태생적 운명일 수도 있는 통속성과의 싸움을 통해 자신의 존재 의의를 지켜 나간다면, 시는 과연 무엇과의 싸움을 수행해야 하는지 끊임없는 반성과 모색이 더욱 요청되는 때다. 물론 문학만이 삶의 진실을 담아내는 진지한 예술 양식이라거나, 혹은 여타의 장르와 달리 시만이 고결하고 순수한 어떤 것이라는 식의, 독선적 고답주의를 암암리에 내포하고 있지는 않은지 경계해야 할 것이다.

문학의 해로 정해진 올해가 벌써 반이 지나고 있다. 그 동안 '문학의 즐거움을 국민과 함께'라는 공식표어에 걸맞는 성과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여러 행사가 있었고, 방송과 신문 등의 매스컴에서도 문학과 관련하여 다양한 특집을 꾸미거나 지면을 할애해 주고 있다. 세계 어느 나라에서 이러한 문화정책이 가능할 수 있는지, 축복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일부 냉소적인 사람들은 관제행사니 일회성이니 하며 비웃기도 하지만, 적어도 문학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인정될 수 있다. 문제는 문학의 즐거움을 제대로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데 있다. 문학의 진짜 즐거움은 꿈과 현실의 장벽을 인식하고 억압없는 세상을 꿈꾸는 데 있다. 그런 점에서 문학의 즐거움은 고통스러운 현실을 확인하는 즐거움이다.

2.

1990년대도 중반을 넘어서는 올해 상반기 우리 시단의 성과를 몇 마디로 집약하기는 성급한 감이 있다. 다만 많은 평자들이 90년대의 우리 문학에 대해, 거대 담론이 사라진 시대에 삶의 일상성과 개인의 의식 속으로 파고든 내면화·다양화의 과정을 보여준다고 지적하고 있다. 특히 시의 경우 80년대와 비교하여 90년대의 가장 큰 특징으로 이른바 서정으로의 회귀를 꼽고 있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올해 상반기의 성과를 살펴보기에 앞서, 우선 시쓰기의 진정성과 진지함에 대한 우려를 먼저 제기하고자 한다. 요즘 우리 시단에서 진정성은 엄숙주의로, 진지함은 고루함으로 비춰지고 있는 듯한 경향이 엿보이고 있다. 물론 우리의 현대문학은 그동안 역사적 소명의식이나 엄숙주의의 차원에서 그리 자유롭지 못했음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엄숙주의에서의 탈피가 곧 가벼운 글쓰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할 수 없는 것은 문학이 삶에 대한 진지한 사유와 고통의 글쓰기를 수반한다는 사실이다. 도무지 문맥조차 통하지 않는 요설적 경향이나 섣부른 초월과 안주, 그리고 도시의 삶에 대한 상투화된 환멸의 표출 등은 모두 시쓰기의 진정성과 진지함의 결여로 인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과 같은 상품 소비문화의 시대에 이러한 시쓰기는 앞서 언급한 시의 위기를 스스로 조장할 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시는 오히려 상품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그 존재의 타당성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여과되지 않은 감정의 토로나 감각적이고 즉흥적인 작품, 그리고 가벼운 말놀이나 재치에 의존한 작품들이 일부 나타나고 있는 경향은 우려할 일이라고 하겠다. 한 평론가의 날카로운 지적처럼, 시를 빚어내는 일 자체가 시적 글쓰기의 억압이라는 인식이 암암리에 널리 퍼져 있는 상황에서, 주목할 만한 작품을 기대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해마다 새로운 시인들이 엄청나게 나타나는 데 비해, 시는 점점 읽히지 않는 웃지 못할 상황도 발생하는 것이다. 언어에 대한 폭력적 휘두름이거나 가벼운 재치와 요설적 농담으로 만들어진 시를 읽고, 과연 우리는 우리가 처음 시를 접하던 순간의 아름다운 경이를 되살릴 수 있겠는가.

이러한 점에서 우리는 올해 상반기 두드러진 성과를 보여준 시인으로 김춘수, 최하림, 박재삼, 이시영, 정진규, 이승훈, 김명인, 최승호, 장석주, 송재학, 장석남, 이선영, 이윤학, 이혜영, 박상순, 김소연 등을 꼽을 수 있다. 문단의 원로 시인으로부터 젊은 시인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시쓰기의 진정성과 진지함을, 문예지를 통한 신작 발표나 시집으로 묶어 보여주고 있다.

김명인은 최근 들어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가장 왕성한 시적 성과를 보여주고 있는 시인의 한 사람이다. 시인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이 그는 지금 몰아서 시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러 문예지에 걸쳐 그의 신작들이 소개되고 있다. 양적 풍요가 반드시 질적 성과를 보장하는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김명인의 작품들을 한결같이 고른 품격을 유지하고 있어, 일부 시인들의 작품간 편차에 대조된다. 그의 작품 「붉은 산」의 일부를 보자.

어제 마주쳤던 구릉까지 가보았지만 절도 산도

그 자리에서 다시 찾을 수 없었다.

내 모르는 꽃덤불 붉은 산 속에 핀다 해도 얽힌

골짜기 파고드는 통증 같은 안개,

이제 그리움조차 지난날 향기 간직하지 못하는데

나 아직도 건너가야 할 저런 난장 노을,

그 산 근처까지만 갔다가 돌아서는 저녁 무렵이다.

- 「붉은 산」(「현대문학」3월 호)

김명인의 시가 폭넓은 호소력을 지니는 이유는 그가 '그리움'이라는 지극히 보편적 감성을 평범한 서술적 어조로 끌고 나가면서도, 시적 형상화에 있어서 탁월한 능력을 보여준다는 데 있다. 위의 「붉은 산」에서도 그렇지만 요즈음 그의 시적 주제는 삶과 죽음, 그리고 운명과 맞서는 자아를 그리는 데 주력하고 있는 듯싶다.

한편, 이승훈 역시 여러 지면을 통해 많은 작품을 발표하고 있는데, 그의 최근 작품들은 있으면서도 없고 없으면서도 있는 '나의 실체' 를 해부하는데 한결같이 집중되어 있다. 이 자아의 분열은 언어를 통해, 다시 말해 문자를 통해 자기를 포함한 모든 세계와 사물의 의미를 규정하고자 하는 문학 행위의 가장 본질적인 측면에 대한 지적 성찰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서 그가 확인하는 것은 본질 / 의미는 없고 언어 / 기호만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승훈의 시를 다룰 때는 그의 시를 구성하는 것은 반드시 거기 있는 것(즉 말해진 것, 보이는 것, 읽을 수 있는 것, 존재하는 것, 나타내진 것, 재현되는 또는 재현되어지는 것)이 반드시 아니고 거기 없는 것(중략)

임을 인정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승훈의 시에서 중요한 것은 부재하는 것이다.

-「크리티포에 추리?」(「작가세계」여름호)

여기서 우리는 '나의 타자'라는 랭보식의 규정과 더불어 자아의 존재까지도 부재로만 확인하는 지적 성찰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성찰의 극단은, 글을 쓰는 자신은 과연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넘어서 부재로만 존재하는 자아, 즉 자아의 해체라고 하겠다.

장석남과 이윤학은 자신들의 개성을 그대로 이어가면서도 삶의 내면을 깊이 있게 응시하고 있으며, 김소연과 이혜영은 이른바 여성시의 그늘을 일찌감치 벗어나 자기의 목소리를 독특한 형식에 실어 보이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 40여 권이 넘는 시집들이 출간되었다. 한 조사에 의하면 한 해에 새로 등단하는 시인만 해도 근 100여 명이 넘는다고 하니 시집들이 이렇게 많이 출간되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렇지만 이들 시집들이 모두 나름대로 일정한 성취를 보여준다고 하기는 어렵다. 이 시기에 특히 주목할 만한 시집들은 다음과 같다.

김춘수, 「호(壺)」(한밭).

김광림, 「대낮의 등불」(고려원)

박재삼, 「다시 그리움으로」(실천문학사)

이시영, 「사이」(창작과 비평사)

최승호, 「눈사람」(세계사)

이선영, 「글자 속에 나를 구겨 넣는다」(문학과 지성사)

박상순, 「마라나, 포르노 만화의 여주인공」(세계사)

김춘수는 예의 언어 실험을 여전히 계속하고 있다. 글은 존재의 문제나 허무의 문제를 언어의 극한까지 밀고 나가서 모색하는 싸움을 수행한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모순이나 역설은 이상하게도 그것을 모순이나 역설로 읽지 않게 하는 힘을 발휘한다. 가령 '1986년 / 그해, /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죽었다' (「보르헤스가 죽었다」에서)는 시구절은 이미 논리 이전에 있는 것이다. 돌연한 이미지와 이미지의 병치는 대상없는 언어를 추구하는 김춘수의 시적 역정을 그대로 드러내 준다. 그것은 허무이지만, 허무의식을 그만큼 끌고 간 시인은 아직 우리에게는 김춘수 외에 없고, 그래서 우리 시는 아직도 상당 부분 그의 영향 아래 있다고 할 수 있다.

김광림 시인의 시집은 일상의 사소한 편린들 속에서 삶의 진실을 발견하고자 하는 시인의 자세가 담겨져 있어, 그만큼 삶과 인생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함께 시인의 연륜을 짐작하게 해준다. 박재삼 시인의 시집은 투병 소식과 함께 그를 돕기 위한 문인들의 관심으로 발간 전에 이미 에매되기도 했던 시집이다. 이 시집에서 우리는 전통 서정시의 한 성과와 더불어 삶에 대한 관조를 집약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가령 '죽도록 부지런히 쓴다만 / 시를 쓰는 것은 / 돈과는 거리가 멀고 / 그러면서 그 짧은 행간에 / 짜릿한 공감(共感)을 심는 일은 / 늘 아득하기만 하네(「아득한 청산(靑山)을 보며」)와 같은 시구절이 그렇다.

최승호의 시들은 특히 사색의 깊이와 명상이 정신세계를 보여준다. 그는 삶의 모순과 고통을 드러내면서도 그것을 지극히 담백하게 처리하여 오히려 울림의 진폭을 넓히고 있다.「눈사람」과 같은 계열의 순백 이미지 시편들에서도 그렇지만, 다음과 같은 시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울림의 진폭을 확인할 수 있다.

낮에는 무엇인가 찢어진다

밤에 보면 다름아닌

가슴이다

깁는다는 말

뜨게질한다는 말

세상의 어머니들이 그렇게 했듯이

고개를 숙이고 밤늦도록 앉아서

아무말도 하고 싶지 않은 밤들은 있다

-「검은 잉크병」

깁는다거나 뜨개질한다는 것은 세상의 어머니들에게 남겨진 몫이다. 이 시 속의 화자가 그렇듯이 사람들은 낮에 찢어진 가슴을 밤에 깁으며 살아가는 것인지 우울하게 되묻게 한다. 글쓰는 사람들은 결국 잉크를 통해서 자신의 찢어진 가슴을 확인한다고 하겠는데, 검은 잉크병과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백지를 통해서 글쓰기의 본질에 대한 생각을 하게 하는 작품이다.

이시영의 새 시집은 짧은 전통 서정시 형태로 인간과 삶의 본질을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간행된 이전 시집 「무늬」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시집에서 적막과 고요를 더 한층 진경으로 그려내고 있다. 가령 '가로수들이 촉촉히 비에 젖는다 / 지우산을 쓰고 옛날처럼 길을 건너는 한 노인이 있었다 / 적막하다'(「사이」)와 같은 작품이 그렇다.

젊은 시인 이선영이 시집 한 권을 온통 글자로 채우고 있다. 글자란 무엇인가, 인간과 인간을 소통하는 매개수단일 뿐인가.

이선영은 그 글자에 놀랍게도 육체를 부여하고 있다. '글자 안에서 당신에 대한, 내 식도를 꽉 메워버리는 사랑은 / 이내 글자 안 빈곳을 기웃거리고'(「글자 밖에서」)처럼, 그의 시집에서 글자는 삶의 양식화이며 규범이기도 하고, 반대로 삶의 질곡에서 벗어나려는 욕구의 기호이기도 하다.

한편, 올해 상반기의 각종 시문학상 수상 소식을 덧붙일 수 있다. 제 1회 '시와 시학상'에 이성선 시인이, 제7회 '김달진 문학상'에 송수권 시인이, 그리고 젊은 시인에게 수여하는 제2회 '현대시 동인사'에 박상순 시인이 선정된 것은 특히 의미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게 우리의 문학상이지만, 상반기 시문학상의 경우 돌아갈 시인에게 돌아갔다는 말이 결코 수사적 표현만은 아니라는 게 중론이다. 이성선 시인의 최근의 산시들이 보여주는 무욕의 세계, 송수권 시인의 토박이 우리말에 대한 천착, 그리고 젊은 시인 박상순 시인의 전위적 실험성 등이 제대로 인정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3.

자본의 논리와 더불어 해체적 글쓰기가 더욱 기세를 올리고 있는 요즈음, 시의 위기에 대한 논의는 밖에서 주어진 것이라기 보다 차라리 내적으로 기인한 것이다. 유행적이고 자기 소모적인 글쓰기는 그러한 논의를 더욱 부채질할 뿐이다. 문화 상품의 시대에 시가 그 존재의 이유를 획득하는 길은 시쓰기의 진지함과 진정성을 회복하는 것뿐이다. 그것은 곧 부박한 시대에 삶의 신중함을 견지하는 자세와 통할 것이다. 널리 알려진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본 사람들이라면 기억할 지 모르지만, 한 외국시인은 일찍이 '나는 신중하게 살고 싶어서 숲으로 갔다 I went to woods because I wanted to live deliverately' 고 노래하고 있다.(H.D. Thoreau)

신중한 삶이 아니라면, 다시 문학은, 시는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일찍이 우리의 한 시인도 노래했듯이 '이제 시인은 숲으로 가지 못한다지만 / 아직도 숲 속 골짜기에는 / 산 절로 물 절로 하는 호수들이 있긴 있는'(고재종의 시「여름 다저녁 때의 초록 호수」에서)것이다. 시 쓰기의 진지함과 진정성은 신중한 삶의 자세에서 나온다. 그것만이 소문 무성한 시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다. 그래서 시인은 여전히 숲으로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