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프로그램 / 문학의 해 상반기 작품활동. 소설

문학의 위기 위기의 문학




장영우 / 문학평론가

1.

정부에서 올해를 '문학의 해'로 지정한 것은, 문학계 안팎에서 논의되고 있는 문학의 위기 상황이 이미 중증에 이르렀다는 반증이 아닐까. 문학의 해 조직위원회 주최로 열린 '현대 한국 사회와 문학' 세미나에서 문학의 위기를 문단 스스로 자초한 것으로 파악하고 통렬한 자성을 촉구한 유종호의 발언에 문학인 모두가 귀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이다. 80년대 후반,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급속한 퇴조 이후 대다수 문학인들이 새로운 시대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문학적 좌표를 마련하지 못한 것이 문학의 위기 담론을 형성하게 한 근본 원인이긴 하지만,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문학권 내부의 섹티즘화 현상이 현재의 혼란과 위기에 일조를 했다는 것 또한 부정하기 어렵다. 과거「현대문학」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문협정통파의 독주를 견제하고자 했던 「창작과 비평」,「문학과 지성」등 계간지가 우리 문학의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 간과 할 수 없는 기여를 한 공적은 인정되지만, 그들이 또 하나의 세력권을 형성하여 문단의 섹티즘화를 증폭시켰다는 혐의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주로 계간 문예지를 중심으로 짜여진 8,90년대의 새로운 문학 판도는 문학적 성향이나 이념을 함께 하는 문인들이 자연스럽게 군집을 형성했던 과거와 달리, 대중 독자들에게 어필하는 젊은 작가들을 자기 자장권안으로 포섭하여 세력화하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올 상반기 주요 계간지에 소설을 발표한 작가의 상당수가 30대 여성이라는 사실처럼 현재의 문학적 흐름과 성향을 잘 설명해 주는 사례도 달리 없을 것이다. 이것은 계간지 편집의 주축을 이루는 계층이 삼십의 평론가들인 것과 무관하지 않을 터인데, 이들의 의식은 선배세대보다 훨씬 폐쇄적이고 상업주의적인 것처럼 보인다. 요컨대 과거「창작과 비평」,「문학과 지성」세대들이 각각 상이한 문학적 지향을 선명히 하면서도 상호교통로를 완전히 차단하지 않았던 반면에, 이들은 문학의 위기 상황을 공공연히 거론하면서도 그것을 타개하려는 어떤 구체적인 행동도 시도하지 않는 것이다. 비근한 예로, 현재 문학계에서 활발한 논쟁을 찾아 보기 어려운 것도, 서로 입장을 달리하는 문학권을 백안시하거나 등거리 관계에서 바라보기만 할 뿐 그런 위기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할 의지를 그 어느 책도 갖고 있지 않다는 의사로 보인다.

계간지 창간에 참여했던 1세대와 그 바통을 이어받은 2세대의 대표주자들이 문학적 입장과 계파를 초월해 한데 모여 오늘의 한국문학을 총괄적으로 점검하고 반성하는 자리를 마련하는 것은 어떨까. 그 일이 쉽게 성사되겠는가고 지레 뒤로 물러앉을 게 아니라, 미구에 닥칠 새로운 세기에도 문학이 여전히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 번쯤 깊이 생각해 볼만한 일이 아닌가 한다.

올 상반기 주요 문예지에 두편 이상의 소설을 발표한 작가는 모두 29명인데, 김소진, 김이태, 박명희, 송석제 등이 3편, 송경아, 차현숙 등이 4편을 발표하여 가장 왕성한 작품 활동을 전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선옥 : 그 푸른 바다 눈에 보이네(사상·4), 그 여자 난주(현대·6)

김병언 : 금색 크레용(동서·여름), 천지의 사랑(현대·5)

김경욱 : 베티를 만나러 가다(현대·5), 변기 위의 돌고래(중앙·여름)

김소진 : 길(사상·3), 양파(작가·봄), 쐬주(소설·여름)

김연수 : 타르타필루스(현대·5), 사랑이여 영원하라(중앙·여름)

김이태 : 궤도를 이탈한 별(사상·1), 식성(세계·여름), 전함 큐브릭(소설·여름)

김인숙 : 풍경(현대·3), 봉우리 어디쯤…(한국·봄)

김향숙 : 미나(사상·1), 그 여자의 아들(문사·여름)

김형경 : 솔잎란식물의 약속(사상·2), 세사의 둥근 지붕(세계·여름)

박상우 : 1942년 여름의 포인세티아(중앙·봄),물그림(사상·4)

박경철 : 다락방에 같힌 새(현대·4), 훌라후프를 돌리는 소녀(세계·여름)

박명희 : 바람벽(사상·1), 마음의 가위질(현대·2), 못난이 인형(작가·여름)

박청호 : 단 한 편의 연애소설(문사·봄), 폴란드산 마녀의 외출(현대·4)

배수아 : 검은 저녁 하얀 버스(동네·봄), 내 그리운 빛나(중앙·여름)

서하진 : 김장(소설·봄), 홍길동(현대·5)

성석제 : 첫사랑(세계·봄), 이른 봄(현대·5), 새가 되었네(동네·여름)

송경아 : 엘리베이터(세계·봄), 바리(현대·5), 호랑이(사상·6), 집 (중앙·여름)

신경숙 : 마당에 관한 짧은 얘기(동네·봄), 감자 먹는 사람들(창비·여름)

윤대녕 : 천지간(사상·4), 상춘곡, 1966(동네·여름)

은희경 : 빈처(현대·1), 타인에게 말걸기(동네·봄)

이응준 :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나라의 분명한 기록(정신·봄), 담위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문사·여름)

이혜경 : 어스름녘(한국·여름), 불의 전차(창비·여름)

전상국 : 시인의 겨울(중앙·봄), 개미거미들의 화음(작가·봄)

조경란 : 환절기(현대·3), 아름다운 칼(중앙·여름)

차현숙 : 나비, 봄을 만나다(문사·봄), 불임나무(한국·봄), 삼십삼세(사상·5), 블루 버터플라이(소설·여름)

최수철 : 황금과 납(동서·봄), 어둠의 후광(현대·6)

하성란 : 두 개의 다우징(현대·3), 지구와 가까운 소행성과의 랑데부(중앙·여름)

한승원 : 와블을 찾아서(현대·2), 다시 아버지를 위하여(사상·2)

함정임 : 행복(중앙·봄), 바다로(정신·봄)

(현대 : 현대문학, 사상 : 문학사상, 창비 : 창작과 비평, 문사 : 문학과 사회, 세계 : 세계의 문학, 중앙 : 문예 중앙, 한국 : 한국문학, 소설 : 소설과 사상, 작가 : 작가세계, 정신 : 문학정신, 동서 : 동서문학, 실천 : 실천문학)

전상국·한승원·김향숙·최수철 등 선배 작가들의 지속적인 활동도 눈에 띄지만, 8,90년대 등장한 신예들이 활발한 창작활동을 전개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크게 문제될 까닭은 없을 터이다. 등단과 함께 절필에 가까운 완강한 침묵을 보여주었던 예가 적지 않았던 우리 문학계에서 이들 젊은 작가들의 왕성한 활동이 문학의 위기를 타개할 소중한 계기로 작용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실제로 몇몇 신진들의 작품은 뚜렷한 개성과 문학적 성취로 탄탄한 자기 위치를 이미 확보하고 있다. 윤대녕·신경숙 등은 이제 신예라는 칭호가 어색할 만큼 훌쩍 커버렸고, 송경아와 차현숙은 지금까지 축적해 놓았던 물을 한꺼번에 방류하기로 한 저수지처럼 정력적이 작품 활동을 보여 주목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여성작가들의 괄목할 만한 성장과 두드러진 활약상이다. 그들은 우선 수적으로 남성작가들 압도하고 있으며 작품성에서 상당한 역량을 가진 것으로 평가되는 예도 적지 않다. 몇 년 전부터 낌새가 느껴지던 문학계에서의 여성 우위가 이제는 엄연한 현실로 자리잡은 것이다.

80년대말 이후 여성작가의 숫자가 급작스럽게 증가하고, 그들의 활약이 남성을 앞지른 현상을 한두 마디로 설명하기란 결코 용이하지 않다. 하지만 여성작가의 대두 요인을 여성의 의식 성장과 사회적 상황의 두 가지 측면에서 파악하는 것은 별 무리가 없어 보인다. 한국소설사의 한 획을 그을 만큼 탁월한 기량을 발휘한 선배 여성작가도 많지만, 오늘날처럼 여성작가의 존재가 이목을 끈 적도 달리 없을 것이다. 그들은 대부분 대학교육을 받은 전문 직업여성이고, 연령층으로는 신세대에 속하는 계층이다. 다시 말해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풍요한 물질과 세련된 감각에 길든 그들은 콜라, 맥주, 피자 및 인스턴트 식품을 즐기고, 카페나 레스토랑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오피스텔에서 혼자 생활하기를 좋아한다. 또 그들은 그저 ‘심심해서 사랑을 하거나 (배수아, 「아멜리아의 파스텔 그림」),’가볍게 만나 아무렇지도 않게 헤어지는 일에 익숙하다. 그들은 한 끼의 식사를 하듯 오피스텔이나 호텔에서 섹스를 하지만 정작 ‘섹스의 기쁨도 모르고 사랑의 감동도 없다 (배수아,「푸른사과가 있는 국도」),’따라서 그들의 소설이 역사나 현실같은 무거운 제재(주제)를 다루기보다 지극히 사사로운 개인의 일상에 한정되거나, 현실과 전혀 거리가 먼 환상적인 이미지의 비연쇄적 나열로 시종하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80년대 소설의 주된 흐름이 '무엇을'의 문제에 대한 고뇌였다고 한다면, 이들 여성작가는 '어떻게'에 보다 깊이 경시되고 있지만 그것을 방법론적 차원으로까지 확장·심화시키는 데는 별다른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 최근 여성작가들의 작품이 작가의 개인적 체험의 원형을 그대로 드러내 생경한 느낌을 자아내거나, 사회 역사적 현실을 거의 철저하다시피 괄호 속에 묶어놓고 있는 것도 이런 사정과 관련되는 것으로 보인다. 한마디로 이들 작품에서 자아와 세계의 갈등과 화해라는 전통적 서사 정신을 발견하기란 좀처럼 쉽지 않은 것이다.

2.

1996년 상반기 소설을 개관하라는 청탁자의 의도에 충실하기에는 주어진 지면과 시간이 모두 부족하다. 이 글을 쓰기 위해 필자는 월간지 2종 12권, 계간지 10종 20권 등 30여 권의 문예지를 읽었는데, 거기에 수록된 중·단편 소설은 백여 편을 상회하며 저마다의 색깔과 목소리가 독특해 짧은 지면에 그것을 소화하기가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 필자는 90년대 가장 주목받는 몇몇 작가의 최근 작품의 성과와 문제점을 일별(一瞥)하는 것으로 책임을 면피(免避)하고자 한다.

윤대녕은 두 편의 단편소설 외에도 「추억의 아주 먼 곳」이란 장편소설을 상재함으로써 마치 활화산 같은 창작열을 뿜어낸다. 최근 몇 년간 윤대녕 소설이나 작품론(작가론)이 실리지 않는 경우가 오히려 드물 정도로 각 문예지나 비평가들은 그의 문학적 작업에 관심을 기울여 왔는데, 그는 주위의 이런 관심에 호응이라도 하듯 고른 수준의 작품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는 것이다. 윤대녕의 이제까지의 문학적 관심은 존재의 근원과 본질을 추구하는 집요하고도 내밀한 작업으로 일관하고 있다. '제20회 이상문학상’수상작인「천지간」(문학사상·4)은 전형적인 여로형 구조를 토대로 인간의 숙명적인 인연과 죽음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외숙모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길을 떠난 화자가 불현듯 한 여성이 발산하는 강력한 흡인력에 이끌려 구계동에 가게 된 배경에는 어릴 적 목숨을 걸고 자신을 구해준 친구의 죽음에 대한 기억이 자리하고 있다. 윤대녕 소설이 항용 그렇듯이 추리적 기법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는 이 작품에서 작가는 삶과 죽음 또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불교적 세계관, 좀더 자세히 말하면 인연론(因緣論)으로 해석하려는 태도를 보여준다. 평소에 까맣게 잊고 지냈던 옛 기억이 죽음의 백색 그림자를 껴안고 있는 한 여자에 의해 크나큰 정신적 부채로 다가오고, 마침내 화자가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다는 중심 서사는 불교의 인연관을 확장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에서 남녀 주인공의 만남은 우연한 것이지만 화자의 행위가 결국 한 여인의 생명을 구한다는 결미에 이르면 인간사가 매우 복잡하고 정교한 인연의 그물로 얽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그들 남녀가 전생에 어떤 인연을 맺었다는 상투적 인연설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다시 말해 윤대녕은 불교적 인연관을 보다 폭넓게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또 화자가 구계동에서 본 한 소리꾼의 자살과, 여인이 떠난 뒤 숙박업소로 찾아든 한 쌍의 남녀에 관한 삽화는 인간의 삶이 지속되는 한 이와 같은 사건이 빈번히 반복될 것이라는 작가의 삶에 대한 사유와 통찰이 밑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와 함께 「상춘곡,1966」(문학동네·여름)은 한편의 깔끔한 연예소설로 읽을 수 있는데, 서간체 형식 속에 작가 특유의 감성과 서정이 절묘한 배합을 이루며 용해되어 있다. 고교 은사의 고종누이 최란영과 화자의 순탄치 못한 관계는 혼란스러운 정국과 마음속에 화톳불을 지피고 있는 그녀의 강한 성품 탓으로 처음부터 예정된 것인지 모른다. 80년대 초반의 어수선한 사회 상황에서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던 두 남녀는 서로의 사랑을 깊이 헤아려 볼 여유도 갖지 못한 채 헤어진다. '나를 사랑한다던 자는 내 인생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옆에 없었다.’는 말로 둘의 관계를 매듭짓고 운동권 선배와 결혼한 최란영은, 그러나 '잔치집만 기웃거리고 다니는 기회주이자’로 판명된 선배와 이혼하고 아이마저 빼앗긴 뒤 포천에 칩거하게 된다. 인옥이 형(화자의 고교은사)의 반억지로 두 사람이 재회를 하게 된 것은, 그들이 처음 만난 때로부터 십 년이 흐른 뒤이다. 그 자리에서 인옥이 형이 누이에게 '제때 제때 먹지 않으면 맨 날 찬밥만 먹게 된다는 거 너도 알잖아. 이젠 따뜻한 밥 먹으면 따뜻한 밥이 왜 좋은지 알겠더라.’고 한 말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또 벚꽃이 피면 한번 오라는 그녀의 말을 듣고 화자가 사월 초하루 고창 선운사로 내려간 것은 보다 적극적으로 그녀와의 화해를 모색하려는 의지로 읽힌다. 하필이면 그곳에서 미당 서정주를 만나 '타나 남은 것들을 가지고 조각조각 이어서' 재건한 '만세루' 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도 천의무봉에 가까운 소설적 장치가 아닐 수 없다. 동백이 피었더냐는 미당의 질문에 아직 안 피었습니다고 대답하는 화자, 그럼에도 '나는 벌써 보고 가네' 라는 미당의 능청에 '…수선화는 피어있습니다' 라고 화자가 대꾸하니, '아냐, 그건 석산(石蒜)이라 부르는 걸 게야. 수선화과에 딸려 있긴 하되 아니지' 라고 자상히 설명해 주는 미당의 말은 미처 아집을 버리지 못한 무명(無名)을 통렬히 질타하는 것이라 보아 무방하다. 요컨대 윤대녕은 「천지간」과「상춘곡,1966」등 신작을 통해 인간살이의 영겁적인 반복이 강인한 인연의 끈으로 조정되고 있다는 불교적 세계관과, 어떤 우연한 만남도 있을 수 없으며 그것을 필연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 서로가 양보하고 노력해야 한다는 따뜻하고 웅승깊은 인생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신경숙의「감자 먹는 사람들」(창작과 비평·여름)은, 그녀의 출제작 「풍금이 있던 자리」의 그것과 너무나도 닮아 있다. 고백적 서간체의 형식부터 그러하거니와, 주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듯 하지만 그것이 결국 자신의 이야기라는 구조가 예전의 작품과 별로 달라진 바 없어 보인다. 「풍금이…」의 매력과 감동은 무엇보다 시앗을 본 어머니의 고통을 에어로빅이나 줄넘기를 하는 주변 인물의 집요한 노력과 통곡을 통한 낯선 방법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시앗 때문에 가정이 파탄하는 얘기가 전혀 새로울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독자의 감동을 유발했던 가장 큰 원인이 더듬거리는 듯한 어투와 봄 산 색깔처럼 투명하고 화사한 문체에 힘입은 때문이란 기존의 해석은 대체로 온당하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동인은 진부한 스토리를 낯설게 하기 방식으로 서술한 작가의 소설적 기법이 많은 독자들의 감성을 자극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감자 먹는 사람들」은 「풍금이…」의 자리로 되돌아 온 것으로 이해되는데,「깊은 슬픔」,「외딴 방」등 그녀의 장편은 결국 원점으로 회귀하기 위한 동어반복적 도정에 지나지 않았음이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딴 방」의 심연의 기억과 절실한 체험의 밀실을 통과한 그녀가 다시「풍금이…」의 화사하면서도 그윽한 관조의 시각을 회복한 것이 단순한 답보라 생각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변의 끈질긴 유혹에 잠시 어리둥절했던 작가가 비로소 자신을 되돌아보고 새롭게 세상을 관찰하고 해석하려는 태도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제20회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김이소의 「거울 보는 여자」(세계의 문학·여름)는 소설적 재미와 미학적인 면에서 단연 뛰어나다. 그녀는 30년대 이상(李斀)이 거울로 당대 현실을 조감한 것처럼, 현대인의 부박하고도 위선적인 삶을 거울을 통해 선명하게 조상(彫像)하고 있다. 여러 심사위원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것처럼 이 작품의 묘미는 효과적인 거리의 유지와 반복의 기법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무엇을'에서 '어떻게'로 관심의 향방이 변화하는 현시점에서 하나의 전범을 보여준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여상(女商)을 졸업한 뒤 고급 의상실 판매원으로 일하는 화자와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문화 평론가인 '그'의 우연한 만남과 동거, 그리고 무책임한 이별이란 통속적인 줄거리가 신선하게 와닿는 것은 전적으로 기법적 탁월함에 바탕을 둔 것이다. 두 남녀의 헤어짐이 예정된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 것은 학벌과 신분의 차이 때문이 아니라 '거울 속에는 또 하나의 방이 있었다. 그 안에 그와 내가 있다'라는 진술, 또는 '책상에 앉아 있는 그에게 말을 할 때도 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대신 고개를 옆으로 돌려 거울을 바라보았다. 그도 몸을 뒤로 돌리는 대신 의자를 조금만 옆으로 돌리면 거울 속에서 내 얼굴을 볼 수가 있었다. 우리는 그런 자세로 말을 주고받기도 했다'라는 대목을 통해 강력히 암시된다. 그들의 첫 만남이 자동차 백미러를 통해 이루어졌고, '그가 거울 속으로 사라졌다'는 간명한 문장으로 소설이 종결되는 것도 이 작품이 얼마나 치밀한 구성법에 의해 직조되어 있는가를 알려주는 보기가 된다. 30년대의 이상이 파악한 거울 속의 나는‘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를 가지고 있고 '내 握手를 받을 줄 모르는' 왼손잡이로 그려져 있는데, 김이소의 소설에서도 두 사람은 대화가 거의 단절되어 있다는 점에서 이상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한 면모를 보여 준다. 다시 말해 그들의 사랑은 거짓이고 섹스도 다소 과장되어 있으며 똑같은 벽지를 놓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할만큼 삶의 모든 부분에서 이질적이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지식인(특히 '그'와 '미세스 다웃파이어')은 이기적이며 속물적인 데다가 일상의 반복에서 오는 지루함을 섹스로 해결하는 점에서 겉과 속이 판이한 위선적 지식인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다. 그에 비해 이 작품의 화자는 순간적인 감정에 솔직하고 일상적 대화에서도 깍듯한 '합니다체'를 쓰는 여성으로 그려져 있다. 일상의 대화에서 이처럼 깍듯이 '합니다체'를 쓰는 경우는 위계 질서가 분명한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인데, 그것은 화자가 '그' 주변의 인물과 자신의 신분이 다르다는 점을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한 철의 만남이 철저히 거울을 매개로 이루어진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 두 남녀는 거울 속의 환영에 영혼을 저당잡힌 현대인의 초상이라 할 만하다.

3.

송경아, 배수아, 함정임 등 여성 작가들의 최근 활동을 양적인 면에서 평가한다면 다른 작가들이 주눅들만큼 정열적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이들의 소설은 기초가 대단히 부실하여 언제 붕괴될지 모르는 불량건축물 같아 위태롭기까지 하다. 가장 문제적인 것은 신진 작가들의 몇몇 작품은 문장 구사력이 현저하게 뒤떨어지거나 기본적인 문장도 안되어 있으며, 상징의 의미가 매우 애매하여 이해하기 곤란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들의 작품은 공들여 읽어도 선뜻 내용이 다가오지 않을뿐더러 정상적인 독서를 끊임없이 교란한다. 이러한 혼란은 비문과 어색한 번역체 문장에서 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처음에 집을 지은 사람은 이층의 방문을 모두 하얀빛으로 칠해놓고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전등이 없다.’

‘바느질하는 집의 이층은 방 하나짜리 셋집들이 가득하게 들어차 있고 베란다에는 배달해 주는 가스통과 널어놓은 빨래와 싸구려로 번쩍거리는 아기 유모차들과 함께 나와 있는 곳이다.’

‘거리를 사이에 두고 어느 편은 쓸쓸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는 들판이다.’

-배수아, 「검은 저녁 하얀 버스」, 문학동네·봄

‘빛나의 삼촌은 대학에 전임자리를 얻고 빛나의 숙모에게는 아이가 없었다.’

‘남자아이는 오랫동안 첼로를 연주하는 고등학교 오케스트라의 단원이었고 빛나의 사촌인 남동생과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다.'

‘오래 전에 그들이 결혼할 때도 날은 몹시 무덥고 숙모가 대학에서 퀸으로 선발된 다음해였다.’

-배수아, 「내 그리운 빛나」, 문예중앙·여름

배수아는 대등한 관계로 이어지는 문장의 특질을 전혀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 자리에서 문법 강의를 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대등적 연결어미로 이어지는 문장에서 주어가 증발하면 어떤 결과가 발생하는지 유념해야 하리라 믿는다. 흔히 배수아의 문장(문체)을 영상적 이미지와 연관시켜 해석하는데, 솔직히 필자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정확히 이해할 수 없다. 또 그녀의 글쓰기가 의도적인 실험이 아니라는 점을 많은 평자들이 강조하고 있는데, 그러한 지적은 역설적으로 배수아의 문장이 기초부터 잘못되었음을 말해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함정임의 소설 역시 문장론 강의에서 비문 또는 어색한 문장의 전형적 보기로 쓰일만한 구절이 적지 않다.

'나는 그것을 지켜주고 싶었고 또한 보호받고 싶었다.'

'소설이라는 허구에 매달리는 것 자체를 옆눈질하는 얼빠진 여자로 생각했었을지……'

'긴 시간을 달렸건만 거리의 진전을 느낄 수 없었다.'

'공연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원작 소설인 「영원한 남편」이었다.'

-함정임,「바다로」,문학정신·봄

위 인용의 첫째 문장은 '보호받고'의 객체가 생략된 비문이다. 다시 말해 이 문장은 '누구(무엇)로부터 '라는 수식어가 있어야 완전한 문장이 되고 정확한 의미 전달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두 번째 이후의 문장도 어떤 문장 성분이 생략되어 있거나 단어의 선택이 적절하지 않아 독서를 방해하고 의미 해독에 지장을 주는 경우이다.

작가가 갖추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조건인 우리말의 자연스러운 구사와 정확한 문장이 일탈하고 있는 현상은 보다 많은 작가들의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다. 이응준과 김경옥의 작품도 예외가 아닌데, 이들은 과장된 비유와 부적절한 표현, 또는 과도한 외래어의 사용으로 작품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혼란을 자초하고 작품성마저 떨어뜨린다(아래 문장을 왜 인용했는지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할 겨를도 없으려니와 그 필요성조차 느끼지 않는다. 문장을 꼼꼼히 분석해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본다).

'나는 그즈음 졸업작품 겸 대한 민국 건축대전의 출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심심풀이 삼아서 눈에 들어오는 핏빛 십자가들을 세어 보았다. 거짓말 같지만, 사방 모두 스물한 개였다.'

'어느집 창문에도 새로이 불켜지지 않고 있었다.'

-이응준,「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나라의 분명한 기록」,문학정신·봄

'커튼을 걷으며 시선을 위쪽으로 쏘아올린다. 시선을 쏘아올리는 데에는 요란한 카운트다운 같은 것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하지만 무언가가 결핍, 되었다는 느낌이 머그잔 위로 뭉클거리는 허연 김처럼 피어오를 수밖에.'

'어제, 그녀는 오렌지빛 베일에 희미한 그림자를 남기며 앉아 있고, 그녀의 오른손만 그 베일에서 세상 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김경욱,「베티를 만라러 가다」, 현대문학, 5

문학의 위기가 문학권 내부의 잘못이라면, 발전 가능성이 풍부한 신인들을 지나치게 닦달하여 고사 지경에까지 몰아붙이는 작금의 문예지 편집자들의 한탕주의도 한몫 거든 것은 아닐까. 등단 후 지면 얻기가 쉽지 않은 우리 문학계에서 원고 청탁을 과감히 뿌리칠 용기있는 작가는 거의 없을 터이다. 그러나 습작이 충분치 않은 작가들이 모든 청탁에 응해 자신을 소진시키면 풋내기 노름꾼처럼 금방 본전을 털리고 도태될 것은 명약관화하다. 70년대의 대표적 작가 하나가 등단만 시켜놓고 나 몰라라 하는 태도를 보여왔던 발표지의 무성의를 '또 하나의 사생아가 태어났다. 그 어머니 이름은 XX'라는 식으로 비꼬았던 일은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작금에는 특정 매체에서 자기 출신의 소수 특정 작가만을 감싸고 도는 파행적 형태가 빈번히 발생하고 있어 우려를 자아낸다. 문학이 영상 매체의 가공할 위력에 밀려 사양의 길을 걷고 있는 이때 독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작가를 잡지사에서 선호하는 것은 의당 있을 수 있는 일로 여겨진다. 그러나 아무리 인기있는 연예인이라도 여러 채널에서 동시에 얼굴을 보이면 시청자들이 식상하듯, 젊은 작가들 주력상품으로 내세워 혹사시키는 일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문예지 관계자들이 진정 우리 문학을 사랑하고 작가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그들에 대한 보다 따뜻한 관심과 배려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한 관심과 배려는 발표지면을 많이 확보해주는 데 있는 게 아니라 그들의 작품을 애정 어린 시선으로 비판하는 작업에 깃들여 있으리라고 믿는다. 이와 더불어 작가 스스로도 엄격한 자기 검열을 통한 작품 발표와 함께 부단한 자기 갱신을 위한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