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한 영화들의 조용한 파문
채명식 / 영화평론가
결한과 해한 「서편제」
「서편제」(1993)는 판소리에 관한 영화이다. 그리고 한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에서 한은 원한 같은 정서이며 판소리는 그 한을 풀기 위해 주인공들이 의지하는 민중예술 양식이라는 점에서, 한과 판소리는 원인과 결과 관계에 있다. 「서편제」는 결한과 해한에 관한 영화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세 사람에게는 저마다 한이 있다. 유봉(김명곤 분)의 한은 크고도 깊다. 명창의 수제자였던 자신의 자리를 박탈당한 일이 이 영화에 나타난 유봉의 최초의 한일 것이다. 일생을 전전해야 하는 술집이었지만 송화(오정해 분)가 희롱당해야 하는 것을 보아야 하는 것도 한이다. 자신에게 가해지는 "저런 천한 잿놈이!"를 들어야 하는 것도 한이다. '판소리가 판을 치는 세상'이 오기는커녕 점점 맥 못추는 세상이 되는 것 또한 한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감수해야 하는 가난이, 그리고 떠돎이 한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비참해지고, 세월이 갈수록 더욱 적막한 마을로 흘러 들어간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도 큰 한은 명창이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송화에게 한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삼키고 있을 뿐이다. 남동생 동호(김규철 분)가 도망갔을 때 비로소 그녀는 자신의 한을 드러낸다. 남동생에 대한 무한정한 기다림이 그녀의 한이다. 장점이 된 것에 대한 한은 오히려 표현이 되고 있지 않다.
동호의 한은 어머니의 죽음이다. 그 원인이 유봉 때문이라고 믿는 데에 그의 한이 있다. 동호는 줄곧 갈등에 시달린다. 가난과 판소리가 싫어 도망쳤지만 판소리의 매력을 끝내 잊지 못하는 것이다. 원수를 아버지라고 부르기 싫었지만 그를 인정해야만 송화와 함께 살 수 있었다.
각각의 한이 어떤 것이었든 간에, 그들은 단 한번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다. 롱테이크로 유명한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고개를 넘는 장면'말이다. 그때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그들은 한마음이었다. 송화와 동호에게 가장 크게 맺힌 한은 차라리 이것이었다. 행복인 줄 몰랐던 그때를 다시 한번 반복하고픈 갈망, 이것이 송화와 동호의 한이었다. 이 영화가 송화를 찾아다니는 동호의 이야기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송화를 찾아 한을 풀었을 때 영화는 끝난다.
임권택의「서편제」는 흥행 기록의 의미 외에도 한국 영화사상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판소리 영화라는 새로운 장르의 개발이며, 더 나아가 음악 영화의 토대 마련이다. 음악 영화가 있기는 했지만 전통 음악을 소재로 한 것은 아니었고 이토록 본격적인 접근 또한 아니었다. 국악계가 지난 40년 동안 경주해온 국악 홍보를 단 한 편의 영화로 달성했다는 것 또한 즐거운 부산물일 것이다. 아쉬움이 있다면 이 영화 속에 잠재해 있었던 근친상간의 주제가 실종된 전이다. 이 주제가 좀더 확연하게 표현되었어야 영화의 마지막에서 소리와 북을 통해 서로의 한을 푸는 장면이 더욱 의미로웠을 것이다. 서로를 확인하지 않은 채 다만 소리와 북을 통해 서로를 인지하면서, 그들은 그 옛날 근친상간에의 욕망을 풀어 버린 것이다.
한을 푸는 또 하나의 방식「태백산맥」
임권택은 왜「태백산맥」(1995)을 영화로 만들 생각을 했을가? 대하 장편소설을 말이다. 먼저 이것을 풀어야 논의가 쉬울 듯하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 이전에「서편제」가 있었음을 기억하자. 판소리가 강조되는 통에 흔히 간과되어 온 사실이지만「서편제」는 임권택이 소위 '띤따라'로 불려왔던 자신의 한을 푸는 영화였다는 혐의가 짙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나라에서의 영화감독이란「서편제」의 유봉과 그리 다를 것 없는 처지였다. 임권택은 유봉을 그리면서 자신의 그간의 모습을 보았음에 틀림없다. 그리하여 유난한 애정을 가지고 그를 표현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소리꾼 유봉의 한은 매우 '전라도적'이었다.
전라도적인 것을 따진다면「태백산맥」을 통해 역사에서 늘 핍박당하고 질시되어져 온 전라도인의 한을 푼다. 어떻게 푸는가? 「서편제」에서 그것은 판소리였다. 그러나 「태백산맥」에서 택한 것은 사투리였다. 이 사투리의 구사야말로 영화「태백산맥」을 성공으로 이끈 동인이다.
「태백산맥」에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은 염상진(김명곤 분)과 염상구(김갑수 분)이다. 김명곤의 빼빼 마른 몸집과 사나운 눈빛은 타협을 배우지 못한 자의 강인함과 결탁하여 빨치산을 형상화시키는 데에 일조하고 있다. 반면에 김갑수의 넉넉한 살집과 질탕한 눈빛은 부패 공무원을 연상시키는 데에 매우 효과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이들이 형제라는 설정은 한국 전쟁이 동족상쟁임을 강하게 상징한다.
그러나 주의하자. 임권택은 이들을 부각시켰지만 그 어는 쪽에도 동조하고 있지 않다. 임권택이 긍정의 시성을 보내고 있는 인물은 김범우(안성기 분)이다. 좌우 대립에 대한 대안으로서 중도주의를 내보이고 있는 것이다. 왼쪽에 김명곤이 있고 오른쪽에 김갑수가 있고 바로 이 사실에 대한 반증일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영화의 성공이 염상진과 염상구 때문이지 감독이 지지하는 인물 때문이 아니라는 점이다. 김범우는 마치 허구 속에 끼어든 실제 인물처럼 어색하기만 하다. 게다가 김범우가 그의 마름에게 소작쟁의가 왜 벌교에서 유난히 많이 일어났는가를 역사적으로 설명하는 장면에 이르면 이 영화의 실패는 자명해진다.
하지만 이상하다. 왜 김범우는 사투리를 쓰고 있지 않은가? 아니 전라도 사투리를 모르는 안성기를 왜 김범우로 분장시켰을까? 이 궁금증이야말로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대목이다.
염상진은 염상구를 죽이지 못한다. 그 까닭은 사투리 때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사투리 때문에 촉발된 그 동안의 미움을 지워버리는 끈끈한 형제애의 힘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이 장면은 분단 40년을 뛰어넘을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희망의 메시지처럼 보인다.
선의의 위선에 대한 긍정「축제」
제목과는 달리 임권택의「축제」는 장례식을 다루고 있다. 부고를 받고 삼우제를 치르기까지가 이 영화의 주된 내용이다. 이 영화는 마치 전등 장례식을 교육하는 것이 목표인양 장례 과정을 일일이 보여준다. 자막 때문에 극 속으로의 몰두가 어려워짐에도 불구하고 해당 장면마다 과감하게 장례용어를 삽입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 눈여겨보아야 하는 인물은 두 명이다. 그 하나는 용순(오정해 분)이며, 이 인물에다 초점을 맞출 때 이 영화는 한때 제외되었던 인물이 장례식을 계기로 가족 속에 다시 편입되는 이야기가 된다. 아울러 다른 하나인 장혜림(정경순 분)에다 초점을 맞출 때 이 영화는 소설가 이준섭(안성기 분)에 대한 문학 담당 기자의 추적담이 된다. 용순과 장혜림은 이준섭이라는 인물을 관객이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인물들이 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결론부터 밝힌다면 장혜림과 용순은 이준섭을 긍정한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이 관객으로서는 의외다. 이준섭은 다분히 위선적인 인물로 읽히기 때문이다. 소설과 동화에서와는 달리 실제의 그는 효자로 인정되는 것은 가족과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썼기 때문이며, 그들을 소설 속에다 미화시켜 그려 놓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의 소설이 평판 좋은 까닭은 평론가와 절친한 관계를 유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서 보듯이 그의 소설을 매우 좋게 평가한다는 그 평론가란 매우 고상한 인물이 아니라 지독한 속물에 불과했다(그는 이준섭의 집에 들어온 부조금을 마치 제돈 찾아 쓰듯 달라고 하며, 안 주면 집어다 쓰기까지 한다. 그것을 묵인하는 이준섭의 태도를 보라!). 이준섭 또한 겉 다르고 속 다른 속물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러나 위선은 이준섭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장례식에 모여든 가족 모두에게 있다. 87세의 치매 노인이 빨리 죽어 버렸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은 한결같지만 정작 부고를 받으면 누구보다도 섧게 우는 것이 바로 이들이다. 그리하여 장례식은 이러한 심리 상태를 서로 알아 버리는 순간 축제가 된다. 이러한 겉 다르고 속 다른 태도를 이해하지 못했던 용순마저 이준섭의 동화를 통해 감화가 됨으로써 완벽한 축제가 된다(축제는 제외되는 인원이 없어야 한다!). 겉 다르고 속 다른 이 선의의 위선에 대한 긍정이야말로 전라도적인 것에 대한 감독의 긍정에 다름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