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핍 속에 피어난 풍자문학
강진호 / 문학평론가
1.
'이렇게 에두르고 휘돌아 멀리 흘러온 물이 마침내 황해 바다에다가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탁류 채 얼려 좌르르 쏟아져 버리면서 강은 다하고 강이 다하는 남쪽 언덕으로 대처 하나가 올라 앉았다. 이것이 군산(群山)이라는 항구요, 이야기는 예서부터 실마리가 풀린다'
-「탁류」에서
멀리 소백산맥으로부터 흘러 내려온 금강 물줄기가 대자연의 장관과 함께 군산 앞바다에 좌르르 쏟아지면서 채만식 소설「탁류」는 시작된다.
「탁류」의 무대인 군산은 조선 고종 때인 1889년에 국제항으로 개항한 항구도시다. 국제항이라는 타국 냄새나는 거리와 여인들, 술과 도박, 애뜻한 로맨스 등을 떠올릴 수 있겠으나 군산항에서 그런 국제항으로서의 정조를 맛보기는 힘들다. 최근 '선유도'를 비롯한 주변 섬들이 관광지로 알려지면서 군산항에는 여객선으로 더 붐볐고, 외항으로 화물을 실어 나르는 작은 배 몇 척만이 한가로이 떠 있을 뿐 곡물 수출항으로서 번성했던 옛 모습은 가뭇하고 장꾼들의 흥청거리는 소리도 희미할 뿐이다.
1938년 어느 여름날, 채만식은 「군산여행기」를 써달라는 잡지사의 청탁을 받고 이곳에 내려온 적이 있었다. 그는 공원 밑에서 차를 내려 '칙칙한 솔과 약간의 잡목이 섞여 아담스럽게 우거진 야트막한 산처럼 강안에 우뚝 멈추어 선 듯한 공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고 하는데 60여 년 전에 그가 올랐던 그 길을 이제 필자가 오르고 있다. 군산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월명(月明)공원, 그곳에 서서 금강을 내려다보던 생전의 채만식은 몇 십 년이 흐른 지금 바다를 배경 삼아 문학비가 되어 서 있다.
「탁류」의 첫 구절이 고스란히 옮겨져 있는 기념비, 글씨를 쓴 이가 서예가 강암 송성용 선생이라서 비문을 좀더 유심히 살펴보게 된다.
채만식이 태어난 곳은 이곳에서 가까운 임피이다. 금강과 만경강 사이의 너른 평야 한 가운데 아득하게 자리잡은 임피는 군산과 이리의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다. 임피는 옛 이리, 즉 익산에서 27번 국도를 따라 승용차로 20분 남짓 달리다 보면 나온다. 익산에서 군산 쪽으로 26번 국도를 잡으면 벚꽃으로 유명한 '전군가도'(일명 번영로)와 연결되지만 그 길을 택하자면 군산에서 다시 익산 쪽으로 나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그래도 이른 봄 화려하게 만개한 벚꽃을 구경하려는 객이라면 그 길을 달리는 게 훨씬 나으리라.
임피는 과거에 농수산물의 집산지였고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5일마다 향시가 서고 인파가 붐비는 상가 도시여서 제법 번성했던 곳이다. 지금도 길 양옆으로 늘어선 상가들이 그때의 화려함을 상기시켜 주지만 아무래도 예전의 흥성스러움은 찾을 수 없다.
그 임피 4거리에 채만식의 생가가 있었다. 아니 생가가 아니라 '생가터'라고 해야 맞다. 상전벽해가 따로 없어서 지금까지 봐오던 그 어떤 생가터보다도 앙상(?)하다. 한 평도 못될 작은 울타리 속에 초라하게 세워진 생가 표지석이 민망스럽게 이곳에서 태어났던 한 작가의 뿌리를 표시해주고 있다.
표지석 하나 변변히 없는 이기영이나 이태준 등 월북작가들에 비하자면 그래도 나은 편이라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나 한국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채만식의 비중을 본다면 절대 표지석 하나의 기념으로 끝나서는 안될 것이기에 그 민망스러움이 더하다. 그리고 그는 임피를 대표할 문화 상표나 다름없는 인물이 아니던가. 채만식에 대해서 남다른 애정을 갖고 있는 송하춘 교수는 후손이 번성하지 못한 까닭을 들지만 관과 주민의 무관심도 그의 초라한 사후에 한 몫을 하고 있으리라는 의심과 안타까움을 지울 수 없다. 지방자치가 실시된 후 올해로 두 해째를 맞는 홍성의 "만해제(卍海祭)가 대비되어 떠오르는 순간이다.
생가터 뒤편에 자리한 임피초등학교는 채만식의 모교이다. 교정 어디에도 채만식의 자취나 기념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운동장에서 농구를 하는 꼬마들에게 채만식을 아느냐고 농 삼아 물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들에게는 낯설기만 한 이름인 듯하다.
2.
표지석 하나만 남아 있는 지금의 생가터 자리인 옥구군 임피면 취산리 31번지에서, 채만식은 부친 규섭과 모친 조우섭 사이의 6남 3녀 중 다섯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때만 해도 부친 규섭은 상당한 부농이었다고.
채만식이 태어난 해인 1902년은 조선 왕조의 운명이 막바지에 다다르고, 일본이 정치·군사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침략을 노골화했던 시기였다. 더더욱 그가 자란 고장은 일본 자본의 침략뿐만 아니라 그 내부적인 봉건 모순이 첨예하게 교차되었던 곳이기도 했다. 이 당시 채만식의 집안은 양반도 아니고 하층빈민도 아닌 어중간한 위치였던 것 같다. 그의 문학은 뚜렷한 계급적 관점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데 그러한 시각의 근거로 드는 것이 바로 이러한 출신배경이다.
귀염동이 막내아들 채만식은 대문 안에서는 양반스런 예의범절로 다스려지지만, 일단 대문을 나서면 아부하는 상인배의 교사스런 은근에 지치고, 같은 나이 또래의 이웃들은 굶주림과 헐벗음 속에서 말하느니 욕설이요 악담이요 때론 백안시(白眼視)였다. 하류 서민층의 아첨과 독설에 지친 그는 대대로 상종해 온 상류자제로부터의 백안시, 상민 대접에 완전히 넉아웃돼 버린다. 이런 상반된 분위기를 또 언어를 먹으면서 재사(才士)다운 어린이가 성장한다.
- 고헌, 「채만식 문학의 배경에 대한 연구」에서
그가 자란 고장의 특성을 엿볼 수 있는 구절이다. 6남 3녀의 다섯째라고는 하나 일찍이 두 남매를 잃어 막내아들이나 다름없었던 채만식은 모친 조씨의 자별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 송하춘 교수는 그가 어머니로부터 받아왔던 '격리보필'의 영향이 과도한 자존심을 형성케 했을 거라고 보는데, 뒷날 '남의 집에 가서 밥을 먹을 때도 숟가락을 닦아서 사용했다거나 얘기하는 도중에도 몇 번이고 엉덩이 밑을 쓰다듬어 먼지를 털고 몸매를 추스르는' 그의 유명한 청결벽도 그러한 성장과정에서 형성된 것일지 모른다는 것. 한편으로 채만식이 자란 고장은 양반적·유교적 전통이 강한 곳이었다. 그때만 해도 보통학교 입학조차도 반대하는 분위기였다 한다. 그러나 채만식의 부친은 개화문물에 개방적이었던 듯 서당에 다니며 한문을 익히던 그를 1910년, 현재의 임피초등학교 전신인 임피보통학교에 입학시킨다. 뿐만 아니라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서울의 중앙고등보통학교로 유학까지 보냈으니 이웃 고을에서까지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킬 만한 화젯거리였다. 이 시절의 추억담이 단편소설「회(懷)」에 실려 있다.
1992년에 제13회생으로 중앙고보를 마친 그는 그 해 봄 도일하여 와세다대학 부속 제일와세다 고등학원 문과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관동대지진의 와중에서 중퇴하고 마니 여기까지가 그의 학력의 전부다.
학창시절에 있었던 큰 사건은 19세 된 은선 홍씨와의 결혼이었다. 중앙고보에 다니던 중 시골로 내려오라는 편지를 받고 내려갔다가, 그의 표현을 빌면 '뭣도 모르고 장가를 들게' 된 것이다. 당시 유행하던 조혼의 습속이었는데 애정 없는 강제결혼이었던만큼 부부 생활은 자연히 평탄하지 못했다. 중편소설「과도기」에서 조혼을 한 봉우가 자신의 건조하고 멋없는 부인을 괄시하며 '신지식이 넉넉하고 활발스럽고도 온순한 미인'을 그리는 장면이 나오는데 봉우는 곧 작가의 자화상이나 다름없었던 셈이다. 결국 나중에 그는 첫부인 은씨와 결별하고 숙명여고를 졸업한 신여성과 재혼하게 된다.
그가 학창시절에 어떤 식으로 문학수련을 했는지는 잘 아려져 있지 않다. 연보를 보면 1923년인 22세에 처녀작「과도기」를 탈고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 소설에는 일본에서의 학창생활 등 자전적인 얘기들이 담겨 있어 당시 생활을 어렴풋이 엿보게 할 뿐이다. 학업을 중도포기하고 귀국한 것이 1923년이었는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예기치 못한 고난이었다. 당대 조선 농민이 걸었던 몰락의 길을 그의 부친도 피할 수 없어서 수리전답을 속아서 판 후에 기울어져 가는 재산을 일구기 위해 나중엔 미두(米豆)까지 손을 대었다가 그로 인해 완전히 파산하고 말았던 것이다. 한때 부유한 환경에서 일본 유학까지 가능했던 그였으나 부친의 파산으로 집안 전체가 몰락해 버린 것이다. 같은 해 채만식은 동아일보 기자에 입사함으로써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였으나 부친의 파산 이후 시작된 가난은 그를 평생 빈궁의 멍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였다.
「탁류」에서 '미두'로 망하는 얘기가 꼼꼼하게 그려지고 있는 것도 이러한 그의 개인적 고난과 연관이 있다.「탁류」의 주인공들은 1930년대의 식민지 현실에 놓인 인간 군상들이다. 채만식은 식민지하 조선 사람이 어떻게 몰락해 가는지를 군산의 미두상을 배경으로 하여 탁월하게 형상화 해내고 있다. 미두란 논이나 밭 또는 집을 저당으로 잡히고 현물(現物)없이 미곡을 거래하는 일종의 투기를 말한다. 채만식은 이 미두 취인 문제를 중심으로 고향 일대 농민들의 몰락상과 도시 빈민의 문제를 그려냈던 것인데, 이는 이기영이 '마름'을 통해서 농촌 현실을 파고들었던 것과 비견되는 점이다. 즉 채만식은 '미두 취인 문제'를 통해서 양곡 집결지 군산의 문제를 제시했는데, 바로 이 점이, 홍이섭 교수의 지적대로 채만식의 현실 인식이 남달랐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탁류」의 리얼리즘적 성취는 이렇듯 채만식 개인의 체험을 바탕으로 가능했던 것이다.
3.
채만식이 문단에 처음 얼굴을 내민 것은 1924년 단편「세길로」를 통해서다. 이전에 쓰여진 습작소설「과도기」를 제외하면 우리에게 알려진 채만식의 첫 공식소설이 이 「세길로」이다. 기차 칸에서 만난 한 여학생을 두고 두 젊은이가 벌이는 심리적 추이를 그린 소품이나 '평범한 재료를 가지고 그만큼 재미있게, 그만큼 깊게 사람의 부끄러운 약점을 그려낸 것은 칭찬할 솜씨'는 이광수의 평을 들었다. 그의 작가적 잠재 능력을 일찌감치 보여준 작품인 셈이다.
그러나 작가로 입문한 이후 10년간은 작가라기보다는 기자라는 직업에 더 방점이 찍혀져 있는 생활이었다. 작품 연표를 보면「세길로」이후, 1934년에 잘 알려진 단편「레디메이드 인생」이 나오기까지「불효자식」(1925), 「생명의 유희」(1928), 「산적」(1929), 「농촌스케치」(희곡)(1930)등 드문드문 글을 써서 발표했음을 알 수 있다. 그나마 대부분 짤막짤막한 소품에 지나지 않았다. 그 중에 주목할 만한 것은 1934년의 「인텔리와 빈대떡」, 「레디메이드 인생」정도, 그는 이 기간 동안 동아일보, 개벽, 별건곤, 조선일보 등 신문사와 잡지사를 전전하며 인터뷰 기사를 잘 쓰는 기자로 더 잘 알려져 있었다.
이렇듯 가난한 기자생활을 전전하던 채만식이 일체의 공직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은 1936년이었다. 채만식은 그의 작가 생애에 '마지노라인'을 긋고, '성패간에 한바탕 문학이란 자와 단판 씨름을 하리라는 비장한 결심을 한 것'이다. 그 후 곧바로 조선일보사를 사직한다. 말하자면 병자년 벽두는 채만식 문학의 2단계가 열리는 시점이고, 개인적으로는 숙명여고를 졸업한 두 번째 부인 김시영을 만나게 되면서 새로운 가계보를 형성하게 되는 시점인 것이다. 모든 공직생활을 포기하고 문학에만 전념하겠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가난과 궁핍과의 전쟁에 돌입하는 것이기도 했다. 실제로 그는 이사를 거듭하며 겹치는 가난과 병마에 포위되어 살아야 했고 죽을 때까지도 지독한 가난을 벗어나지 못한 채 허덕여야 했다. 그러나 1936년 봄의 결단이 아니었으면 '채민식 문학' 또한 그쯤에서 희미하게 좌초하고 말았을 터이니 위대한 문학은 개인적 불행을 디딤돌로 하여 빚어지는 것인가.
조선일보를 그만 둔 뒤 금광업을 하는 형이 사는 개성 집으로 거처를 옮긴 채만식은 형의 일을 도우면서 창작에 전념한다. 장편「탁류」를 조선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한 것이 그 이듬해, 「태평천하」, 「금의 정열」과 같은 장편 외에 수많은 단편과 희곡을 집필하면서 그는 30년대 후반의 가장 문제적인 작가로 부상하게 된다.
당시의 문단 상황은 30년대 초반까지 문단을 주도했던 프로문학이 점차 지하로 숨어들고, 대신에 순수문학을 표방했던 이태준, 박태원, 이상 등의 '구인회' 부류와 김동리, 현덕, 최명익 같은 이른바 '신세대 작가'들이 등장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벌이던 시점이었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나 최대의 생산력을 보여주던 문학사의 번성기였던 셈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는 탈사회적이고 순수문학 쪽으로 기울었고, 리얼리즘은 문학사의 뒷전으로 밀려나는 시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적 고통을 사회적 문제로 승화시킨「레디메이드 인생」, 「치숙」, 「탁류」는 단연 이채를 띨 수밖에 없었다.
채만식은 지식인의 고뇌와 비애를 풍자적으로 그려냄으로써 개인과 신변 일상에 함몰되었던 당대 문단에 사회적 관심을 환기시키고 리얼리즘의 새로운 지평을 열였다. 김남천이 「탁류의 매력」에서 「탁류」를 새롭게 평가하면서 30년대 소설사에서 중요한 성과라고 평가했던 것이 그 단적인 예가 된다.
당시 채만식은「자작안내」(1939)라는 산문을 통해서 「레디메이드 인생」을 끝으로 절필하였다가 다시 창작에 몰입하는 과정을 회고하고 있는데, 흥미로운 것은 침묵 이후의 재기작,「명일」을 보는 작자 자신의 소감이다.
'「명일」은 내가 위에서 말한 갑술년부터 의식적으로 문학을 중단하고서 침음하던 최종의 작품 「레이디 메이드 인생」의 발전이요, 인해 나의 문학의 방향의 한 가닥이 거기에 근원을 둔 만큼 나에게는 중난스런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명일」의 흐름이 오히려 건전하게 발전이 된 것이 「치숙」의 방향을 좀더 넓고 세속적인 세계에서 발전시켜 보자는 것이 장편 「탁류」였다.'
- 「자작안내」중에서-
「명일」, 「레디메이드 인생」과 「인텔리와 떡」은 모두 1930년의 가난한 지식인들을 다룬 작품들이다. 채만식의 초기 관심이 가난한 지식인의 현실과 역사비판에 있었음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레디메이드 인생」에서 나오는 P는 작가 자신의 분신이자 30년대 지식인의 초상이기도 하다. 채만식의 소설에 나오는 지식인들은 자신들을 양산한 식민지 체제에 대해 불만과 비판의식을 갖고 있으나 '육체노동에 뛰어들 결심'은 하지 못하고 인텔리로서의 자기 존재에 대한 야유와 부정에 머문다. P가 열 살도 채 안된 아들을 공원으로 취직시키려는 것은 그런 의식의 소산이다. 채만식이 당대 사회의 모순을 날카롭게 지적했다고는 하나 그 자신이 모순의 근본적 제거를 위한 아무런 실천적 기반을 가지지 못한 무기력한 지식인이었기 때문에 '지식인 부정'이라는 허무주의의 한계에서 더 나아가지는 못하는데 이 점은 채만식 문학의 한계이기도 하다.
지적으로 열등한 화자의 시각을 통해 실패한 지식인의 행적을 서술하고 있는「치숙」또한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채만식의 독특한 풍자 문체가 위력을 발휘한 작품이다. 반어와 역설의 표현, 구어체 리듬 그리고 희곡체 문장의 사용은 채만식 문제가 보여주는 특징들인데 그는 이러한 문체를 자유자재로 변용 하면서 그의 독특한 풍자문학을 형성한 것이다.
속물근성의 반지식인을 질타하는 내용의 「태평천하」는 판소리 사설체의 수법으로써 그 풍자의 극을 보여주고 있다.「태평천하」의 윤두섭은 가난한 지식인도 역사적으로 의로운 인물도 아닌, '반민족적 이기주의자'요 속물근성을 가진 인물이다.
채만식은 자기 폭로, 비유, 희화와 과장 등의 방법을 사용하여 이 인물을 비하하고 조롱하며, 이를 통해서 30년대 지주계급의 유한 가정을 통렬히 풍자한 것이다. 특징적인 것 이주형 교수의 지적대로 '입니다'의 경어체로 시종일관 전개된다는 점. 이것은 독자로 하여금 작가와 가까운 거리에서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을 연극 속의 장면을 보는 듯이 직접적으로 판단하고 평가하게 하는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따라서 독자가 끝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도록 하면서, 사태를 즉석에서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동시에 독자를 작가 쪽으로 끌어들인다. 또 연극적 장면화를 통해서 현장감을 증대시키기도 했는데, 실제로「태평천하」의 곳곳에서 연극적인 구절을 만날 수 있다.
채만식은 희곡에도 관심이 많아서 실제로 많은 희곡 작품을 썼던 작가다.
그가 쓴 희곡만 해도 1927년의 「가죽버선」을 시발로 하여 그 구성과 주제면 에서 문제작으로 꼽히는 「심봉사」, 「제항날」, 「당랑의 전설」, 「흘러간 고향」등을 포함하여 마지막 희곡인「대낮의 밤주막」(1941)까지 수십 편이 넘는다. 소설을 통해 표현하기 힘든 것들을 다른 장르를 통해 표현코자 했던 것이 아니가 한다.
채만식의 풍자는 해방 이후까지 지속되어「맹순사」, 「논이야기」, 「미스터방」등의 단편으로 형상화된다.
4.
채만식의 이력에는 그 자신 가장 뼈아프게 생각하는 '흠'이 있다. 그것은 그가 일제 말기에 어쩔 수 없이 친일문인의 대열에 끼어야 했다는 것이다. 1938년 그는 불온독서회를 배후 조종했다는 혐의로 경찰서에 붙들려 갔다가 풀려난 일이 있었다. 그때 그를 구해준 것은 '조선문인협회'라는 데서 날아온 엽서 한 장이었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채만식은 몇 편의 친일적인 글을 쓰기도 하고 시찰단이나 위문단의 일원으로 만주에 다녀오기도 했던 것이다. 일제하라는 외적 변수가 지식인들의 생애를 어떻게 변형시켰는지에 대해서는 이효석이나 홍명희 등의 예를 통해서도 볼 수 있거니와, 심훈 같이 요절하여 그 시련을 피해간 경우를 뺀다면 대부분의 지식인들이 생계유지를 위한 친일과 지식인의 양심이라는 선택의 기로 앞에서 심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채만식과 같이 예민한 신경을 가진 사람이 '친일의 오점'을 남겼다는 것은 스스로 견디기 힘든 일이어서 1945년 그는 농사나 짓겠다는 결심으로 낙향하고 만다. 그는 나중에 「민족의 죄인」(1948)이라는 자전적 소설을 통해서 이때의 일을 숨김없이 고백한 바 있다. 그는 이 소설을 통해 민족 앞에 자신을 비판하고 반성코자 했던 것이다.
「민족의 죄인」에는 해방 전후에 겪은 그의 생활과 사상의 갈등 등이 다루어져 있는데 소설 속에서 '나'는 해방 후 서울로 올라왔다가 친일경력이 없는 '윤'이라는 사람을 만나 노골적인 비난을 받게 된다. 그의 비난을 받으면서도 유구무언이었던 '나'는 병든 사람처럼 꼬박 보름 동안 누워 있다가 다시 시골로 내려갈 생각을 하는데 이것은 작가 연보에서 1946년 전북 이리시로 거처를 옮기는 사실과 일치한다.
채만식은 낙향을 전후로 부친이 사망하고, 장남이 병사하는 등 신산스러운 일을 겪었고 이리로 이사한 이후에도 그 이듬해에 모친이 별세하는 등 환란이 겹쳤다. 그러나 창작을 게을리 하지는 않았다.「논이야기」, 「맹순사」, 「소년은 자란다」등 그 짧은 몇 년간에도 수많은 작품을 써놓았다. 1949년 6월 병상에 눕게 된 것도 무리한 창작으로 인한 과로가 큰 원인이었다.
그는 평생 제대로 된 집 한 칸을 지니지를 못했으므로 그것이 큰 한이 된 듯하다. 1948년에 「탁류」를 재판하여 수입이 좀 생기자 이리에 조그마한 기와집을 샀다가 병 치료를 위해 도로 판 일이 있었다. 그의 경제적인 불운은 '무자비'할 정도였던 것이다. '달구지를 보통 것보다 훨씬 크게 만들어, 그 위에다 지붕을 만들고 두 개의 침대와 책상 하나, 그리고 얌전한 암소로 하여금 달구지를 끌게 하여 글을 써가면서 팔도강산을 돌아다니'고 싶어했던 그의 평소 소망은 사실은 집이 없는 그의 설움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리라.
5.
채만식 문학 또한 이육사, 김유정 같은 작들과 마찬가지로 70년대에 들어와서야 본격적인 조명을 받았다. 그의 문학을 종합적으로 연구한 최초의 결실로 꼽히는 이주형 교수의「채만식연구」가 나온 것이 1973년의 일. 그러나 채만식 생애에 대한 연구는 여전히 미흡해서 문학적 수련과정도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성장과정도 일부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이는 채만식의 성격과도 연관이 있는데, 채만식은 워낙 신경이 날카롭고 결벽스러운 데다가 비타협적이어서 생전에 깊이 사귄 친구가 적었고, 문단에서는 고작 이무영 정도가 유일한 친구였다. 이무영에 의하면 채만식은 인간관계가 극히 나빴고 거의 외곬으로 지내다시피 했다고 한다. 이러니 그의 개인적인 이력을 전해줄 이도 많지 않았던 것이다.
잡지「별건곤」에서 같이 일했던 안회남이 가까이서 지켜본 채만식은 그 스스로가 자신을 '신경질 제3기'라고 일컬을 정도로 우울증과 신경질 덩어리였다고 한다.
'그가 그런 성격을 갖게 된 것이 혹시 당상과 슬하를 멀리 고향에 이별하고 십유여 년을 서울의 차디찬 하숙에서 혈혈고종한 탓이 아닐까......... 그의 백퍼센트의 신경질은 모든 것의 자포자기적 심리에서 나오는 것이라 볼 수 있는 것이다' (안회남의 '채만식논변' 중에서)
안회남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는데, 그는 채만식의 이상 심리가 '경제적 공황'과 '생활의 모순'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었다. 송하춘 교수는 그의 혼란한 심적 상태가 근대적 지식인들이 겪어야 했던 심리적 아노미 현상 같은 것이 아니가 보기도 한다.
그의 의식구조는 '전근대적 환경'으로부터 근대적 자아로의 일탈을 보여주는 특징적인 보기라는 것이다. 인습과 비인습, 전근대성과 근대성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 의식구조의 이중성을 체험해야 했던 것이 개화기 지식인들의 특징인데 채만식의 경우 이 점이 보다 두드러지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가난이었던 것 같다. 그가 임종 직전에 차남 계열에게 남긴 다음의 말을 들어보면 그 고통이 어떠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외투, 동복, 두벌의 춘추복은 사후에나마 생색이 있도록 팔아서 장비와 생활의 기반을 만드는 비용으로 쓰도록 하라. 작년에 이것들을 팔아서 마이신을 맞고자 하는 생각을 했었지만 미련으로 결행치 못했던 것인데, 만일 그때 그것을 팔아서 마이신 한 2, 30병이라도 맞았더라면 병이 이렇도록 급히 악화되어 오늘의 이 지경에 이르지 아니하였을지도 몰랐다고 생각할 때 기가 막히는 몇 벌의 양복이다."
이것이 채만식이 임종 때 남긴 마지막 유언이었다.
죽기 전 채만식의 마지막 소망은 원고지를 20권쯤 머리맡에 쌓아두는 것이었다고 한다. 일평생을 두고 원고지를 풍부하게 가져 본 일이 없었던 까닭에 죽을 때나마 머리 옆에다 수묵이 놓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닭을 20마리쯤 고아 먹고싶다'고 했던 김유정이나 감옥에서 쓸쓸히 죽어간 이육사와 윤동주, 모두가 가난한 조국의 품안에서 유복하지 못한 생애를 마쳐야 했던 불운한 시인이요 작가들이었다.
6·25가 일어나기 두 주일 전인 6월11일 채만식은 힘든 생을 마감하고야 만다. 그를 죽음으로 몰아 넣은 병마는 폐결핵, 그리고 가난이었다.
"내가 죽거들랑 보통 상여를 쓰지 말 것이며 화장을 하되 널 위에 누이고 그 위에 들꽃을 가득 덮은 후 활활 태워주오."
현실은 아직도 인색하여 그가 남긴 터를 잘 닦아주지도 빛내 주지도 못하고 있다. 그러나 불우했던 작가의 짧은 생애가 남긴 작품이 아직도 불멸하고 있으니 열심히 읽어주고 찾아주는 것도 작가에 대한 한 예우가 아닐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