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맞는 여자가 사랑한 매맞는 남자- 『우묵배미의 사랑』
채명식 / 영화평론가
외도를 자주하여 그때마다 성미 괄괄한 아내에게 무방비 상태로 매맞는 남자가 있다. 폭력을 휘두르는 남편에게 별 잘못도 없이 처참하게 매맞는 여자가 있다. 미싱공인 그들은 소규모 공장에서 재봉틀을 나란히 하고 만나게 되었다. 상대편의 일하는 모습이, 상대편의 감정 상태가 곁눈질만으로도 빤히 눈치 잡히는 가까운 거리만큼이나 쉽고도 빨리 두 사람은 알게 되었다. 유일하게 젊은 한 남자와 유일하게 젊은 한 여자라는 사실을. 언제라도 아내 아닌 여자의 단맛을 빨 준비가 되어 있는 바람기 있는 남자와, 남편이외의 남자를 받아들일 작정으로 마음의 정리를 서두르게 되는 여자. 그리하여 그들이 마침내 서로의 몸을 탐하게 되는 곳 - '우묵배미'는 서울과 경기도의 접경 지역인 난곡이며 비닐하우스이다.
돈이 떨어지자 자연히 도달하게 된 은밀한 곳이다. 영화「우묵배미의 사랑」은 바로 이러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유부남과 유부녀의 혼외 정사이다.
논의를 위한 예비 토의
박영한의 동명 소설을 토대로 하고 있는 장선우 감독의 「우묵배미의 사랑」에는 세 명의 주인공이 있다. 배일도(박중훈 분), 배일도의 처(유혜리 분), 배일도가 유혹해 낸 여자이다. 배일도가 유혹해 낸 여자의 이름은 민공례(최명길 분)이다. 배일도가 가장 감격해 하는 이름이 바로 이 민공례이다. 그러나 영화가 끝나도 관객은 '배일도의 처'라는 여자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이 영화의 화자이며, 그녀의 남편인 배일도는 그녀를 '마누라 년/ 이 년/ 그 년/저 년' 이외의 명칭으로는 부르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인물들을 통해서도 그녀의 이름은 불러지지 않는다. 그들에게 그녀는 단지 '새댁'일 뿐이다. 그러나 '마누라 년/ 새댁'이라는 호칭의 대조에서 보듯이 그녀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여 있다. 그것은, 남편에게 가장 사랑받아야 할 그녀가 가장 사랑 받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발생하는 아이러니이다. 방안 가득히 '하면 된다!'고 써 붙여 놓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그녀의 상황 또한 아이러니이다.
아이러니는 배일도에게서도 발생한다. 그의 이름을 한자로 어떻게 쓰는지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정보도 입수하지 못했지만 그의 팔에 '일심(一心)'이라는 문신이 새겨진 것으로 보아 '일도(一道)'라 읽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무수한 여자들에게 달콤한 말을 지칠 줄 모르고 뿌려대는 그에게서 읽을 수 있듯이 '오직 한 마음/ 오직 한길' 따위와는 아주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런데도 실천되어지지 않는 팔뚝의 '일심(一心)'에 대해 전혀 반성하지 않는 이 배일도란 인물은 아이러니한 인물인 것이다.
민공례로부터는 아이러니가 발생되지 않는다. 그녀는 이름 그대로 공손하고 예의 바른 여자이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비극적인 인물이다. 그녀처럼 괜찮은 여자가 왜 그따위 남자에게 붙어사는지, 왜 그다지도 처참하게 매맞고 사는지, 왜 배일도 같은 저질의 남자를 새로운 동반자로 점 찍었는지 그 모든 것들이 관객인 우리로서는 아쉬울 뿐이다. 그들은 모두 그녀가 지닌 품격과는 영 거리가 있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자칫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을 이 영화를 의미 있게 만드는 인물이 바로 이 민공례이다. 그녀를 통해 관객은 진한 페이소스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배일도에게 민공례는 무엇이었는가
민공례는 배일도와 정분 난 여자 중 네 번째에 해당하는 여자이다. 아마도 다섯 번째로 기록될 수도 있는 여자와 외박한 뒤 새벽에 집 찾아 들어오던 배일도는 늘 그랬듯이, 마누라 년에게 매맞고 도망쳐 나온다. 그때 그가 황홀하게 떠올리는 여자가 바로 민공례이다. 적어도 다섯 여자와 정분을 맺었으면서도 유독 민공례만을 떠올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민공례는 그가 섭렵한 여자 중 최고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일도는 민공례의 가치를 알지 못했다. 여자 사냥에나 재주 있을 뿐 무식하고 천박한 그에게 민공례란 '거저 굴러 든 떡'일 뿐이었다. 민공례란 그저 빨리 정복하면 할수록 좋은 성욕의 대상에 불과했다. 민공례 같은 바람기 없는 여자가 왜 자기 같은 건달을 욕망 하는지를 배일도는 알지 못했다. 민공례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물어왔을 때조차 그는 숙고하기를 거절했다. 자기 말처럼 그는 '복잡한 것은 딱 질색인 인간'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배일도도 나름대로는 민공례를 평가하고 있었다. 민공례를 그는 좋아했다. 그 이유가 그의 고백처럼 '눈빛'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그의 회고처럼 '속살' 때문인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나중까지 잊지 못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가 거친 많은 여자 중에서 유독 민공례만을 그토록 간절하게 회고하는 이유 또한 바로 이것이다. 그녀가 사라진 다음에야 깨달았을 것이지만 배일도에게 민공례는 과분한 만족을 주는 여자였다.
민공례를 만났으면서도 배일도는 자신을 조금도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마누라 년과 헤어지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하지 않는다. 물론 배일도는 민공례와 살림을 차린다. 그러나 그것은 '마누라 년'과의 결별로 보기는 어렵다. 이 점이 관객인 우리는 이상스럽다. 매맞을 때마다 결혼식은커녕 혼인 신고도 하지 않았음을 번번히 꼬집어 말하는 자가 바로 배일도이다.
'같이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주는 것'이라고 꼭꼭 정정해 말하는 자 또한 배일도이다. 그런데도 배일도는 그가 그토록 저주스럽게 생각하는 잘못된 동거를 갱신시키려 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자신과 같이 사는 여자를 조강지처인 양 민공례에게 말하기까지 해서 그녀를 결국엔 울리고야 만다. 따라서 우리는 질문한다. 배일도는 왜 마누라 년을 버리지 못하는가?
가능한 두 개의 짐작을 다 고려해 보기로 하자. 버리고 싶지만 버릴 수 없는 경우와 버릴 필요가 없는 경우 말이다. 어느 쪽일까? 마누라 년이 이 땅의 어느 구석까지라도 배일도를 찾아 나설 기세인 것만은 틀림없지만, 그러나 그와 똑같은 기세로 숨어버리고자 하는 사람까지를 찾기란 결코 쉽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버릴 수 없다는 것은 변명이다. 상대인 민공례는 분명 남편을 버렸지 않은가? 남편은 그녀를 못 찾고 있지 않은가?
여러 정황을 미루어 볼 때, 그가 외도할 때마다 도끼눈을 뜨고 죽일 듯이 달려드는 마누라 년의 존재를 배일도는 즐겼던 것 같다. 그녀의 등등한 기세는 배일도의 외도를 정당화시키고 더 강화시키는 구실을 했는지도 모른다. 노골적으로 말해서, 마누라 년은 그가 더 이상 매력을 느끼지 않게 된 여자들과의 관계를 도맡아 처리해 준 것은 아닐까? 따라서 이런 역할을 하는 마누라 년의 존재는 편리한 것이었다. 자신의 마음이 떠나기 전에 마누라 년이 들이닥쳐서 아쉽게 끝나버린 민공례의 경우는 예외일 것이지만 말이다.
민공례에게 배일도는 무엇이었는가
배일도가 손쉽게 유혹해 낸 민공례는 남편과 아들이 있는 여자이다. 묵묵히 일하지만 정신과 육체 모두가 멍들어 있는 여자이다. 그녀의 몸놀림에는 너무도 두들겨 맞아 모든 것이 두려워진 자들이 흔히 갖게 되는 의기소침과 눈치 살핌이 있다.
민공례가 남편 아닌 남자에게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바로 이 매 때문이다. 배일도는 아마도 그녀에게 최초로 친절한 남자였을 것이다. 자신의 처지와 비슷한 구석이 있었으므로 불쌍한 남자라고도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한 그에게 그녀가 바란 것은 사랑이었다. 그녀는 그가 보여준 관심을 진실하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사랑하고 사랑 받고 있다는 그 최초의 공감을 향해 끝없이 몸 바치고 싶어했던 것이다.
이 영화는 민공례라는 인물을 썩 잘 형상화시켜 놓고 있다. 그 중에서도 압권이 되고 있는 것은, 남편 아닌 남자와 의 잠자리에서조차 그 남자의 양말을 빨아놓아야 마음 놓여 하는 민공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그러나 그녀는 남자에게 헌신할 줄만 알지 남자의 속셈을 결코 간파하지 못하는 여자이다. 전형적인 착한 여자이다. 이런 여자가 남편에게 시도 때도 없이 매맞고 살고, 새로운 삶을 살고자 따라나선 남자로부터는 육체의 제공만을 끝없이 요구받게 된다는 이 영화의 설정은 자못 의미심장하다.
「우묵배미의 사랑」의 진정한 주인공은 바로 이 민공례이다. 배일도는 민공례를 기억해내는 인물에 불과한 것이다. 배일도는 물론 이 영화의 화자이다. 그러나 우리는 화자로서의 배일도를 전혀 믿을 수가 없다. 마누라 년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그가 그토록 황홀하게 기억해내는 공례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질렀는지를 배일도는 전혀 알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고민하지 않는다. 여성 편력에 대해, 아내에게 덜미잡혀 질질 끌려 다니는 것에 대해. 부모형제와 고향 사람들 앞에서 패륜아로 낙인찍히는 등의 패가망신에 대해, 민공례를 처량한 처지로 만든 무책임에 대해 그는 결코 고민하지 않는다. 따라서 관객은 배일도의 의미를 정확히 읽게 된 한 인물과 마주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낮은 자세로만 살고, 낮은 목소리로만 이야기하던 민공례가 영화의 끝에서 갑자기 소리 높여 복받친 울음을 울 때가 바로 그 때이다. 민공례가 울음을 통해 배일도에 대한 환멸을 표현하는 순간, 문득 이 영화는 주제를 드러낸다. 한 여자를 무참하게 바닥내고서야 비로소 본색을 드러내고 있는 참을 수 없이 천박한 우스꽝스러운 남자들 말이다.
끝내면서
민공례에 대한 배일도의 회고인 이 영화는 현재(1)/ 과거/ 현재(2)로 짜여 있다. 특이한 점을 다른 회고물과 달리 현재(2)보다 현재(1)이 더 최근의 현재라는 점이다. 자세히 말해서 현재(2)는 민공례가 배일도로부터 영원히 사라져버리는 시간이며, 현재(1)은 민공례에 대한 추억이 선명하게 남아있는 시기에 이미 또 다른 여자와 혼외 정사를 시작하고 있는 배일도를 보여줌으로써 감독은 그가 얼마나 구제불능의 바람둥이인가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