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권의 확보는 새로운 생존조건이다
이중한 / 서울신문 논설위원, 본지 편집자문위원
문화복지의 지향이란 문화권의 확립을 뜻한다
올해 우리는 '문화복지'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했다. 낯익은 말처럼 들리면서도 한쪽으로는 그게 뭔가라는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가 하면 문화복지의 지향이란 곧 문화권의 확립을 뜻하는 것이다 라는 논지도 제시된다. 더 생소하다는 인상이 생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이 생소하다는 것은 우리가 헌법마저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지낸다는 사실을 드러낼 뿐이다. 헌법 제11조 1항을 보면 '모든 국민은 법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는 조문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문화적 생활에서의 차별 받지 아니함'을 생각하자는 것이 곧 문화권의 출발점인 것이다.
문제는 무엇이 문화적 생활인가에 있다. 전기와 수도를 쓰는 것인가, TV를 보는 것인가, 노래방을 자유롭게 가는 것인가, 아니면 모두 평균적으로 승용차를 1대 이상 공평하게 가질 수 있고 냉장고도 크고 작은 것으로 가진다는 것인가. 이런 관점으로부터 논의는 시작될 수 있다. 이상하게도 문화권의 확립과 신장을 감당해야 할 문화정책의 지표는 모든 보통사람의 문화적 삶에 대해 그다지 큰 관심을 가져오지 않았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문화정책의 목표는 문화적 정체성의 존중, 민주주의적 참여의 중요성, 문화 발전과 사회 발전 목적에 있어서의 통합교육의 문화예술적 접근들이 있었다. 이는 한 사회의 포괄적 개념에서의 문화적 의의를 갖는 것이긴 했으나 문화 향유자·문화 수용자 등으로 표현되는 개개인의 문화참여에 있어서는 좀 떨어진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책적 지원도 70년대까지는 선진국들에 있어서도 대부분이 문화예술 창조진들을 돕는 데 집중했다. 예컨대 연극예술을 돕기 위해서는 연극인에게 생활비를 보조하거나 연극 공연 제작비를 지원하면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만일 막대한 지원을 통해 한 편의 위대한 연극 공연을 성공시켰다 해서 그것이 보통사람들에게 어떻게 공평하게 나누어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이는 헌법 조문과는 좀 거리가 먼 것이다.
그러나 188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세는 크게 바뀌었다. 무척 많은 나라들이 개개인의 문화 향유가 어떻게 보다 많이, 그리고 보다 잘 이루어져야 할 것인가에 관점을 갖기 시작했다.
이 관점은 또 특정한 문화내용물들의 공평한 분배가 곧 문화향유의 분배는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됐다. 모든 국민을 균등하게 어떤 공연물에 초대한다 하더라도 그 느낌이 모두 같을 수는 없다. 당연히 연극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문제가 생길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아마도 어떤 사람은 연극이 뭔가, 노래방이나 가게 해주지 할지도 모른다.
문화향유 능력을 위한 감수성 교육이 필요하다
여기서부터 문화적 감수성이 교육되어져야 한다는 명제가 성립된다. 개개인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공연물이 아니라 그 공연물에 대한 느낌과 그 느낌의 질적 수준에 있다.
이것을 우리는 지금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향유 능력' 이라고 말한다.
문화의 향유 능력이란 표현은 19세기의 영국사상가 존 러스킨으로부터 시작됐다. 이점에서 그는 대단한 선구자였다고 말해도 좋다.
향유 능력은 단순한 교육 커리큘럼으로만 가능한 것인가라는 명제도 생긴다. 따질 것도 없이 그렇지 않다. 학교교육의 과정은 주로 텍스트에 의해 이루어진다. 문자로 된 책일 경우가 많고 실체험은 부족하다.
예를 들어보자. 음악의 향유 능력은 음자리표를 배우고 음악가나 명곡의 이름을 외우는 것으로만 가능한가. LD나 CD를 들으면 충분한가. 물론 아니다. 이보다는 음악회장에 가서 생음악을 들어야 깊이가 있는 음악감수성을 배울 수 있다.
그렇다면 음악의 향유능력으로서의 교육은 교과서 교육으로서는 부족한 것이다. 이 부족한 교육은 또 문화의 권리와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문화권을 가질 기초적 소양에 빈곤함을 주게 하고 보다 공평한 배분, 도시와 농촌의 차이 등의 논의가 이루어진다. 공연물들의 도시 집중화나 문화프로그램의 편중화들도 마찬가지다. 문화권은 골고루이기를 원칙으로 하고 있지만 현상은 매우 불평등한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문화예술적 수용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일상적 삶의 환경 속에서도 문화적 감수성의 계발과 향유의 문제는 제기된다. 도시의 아파트 속에서 성장한 사람과 지역 자연의 숲이나 강가에서 자란 사람의 문화감수성은 다르다. 아니 심성까지도 다를 수 있다. 그래서 사람이 살만한 최소의 도시 조건들에 공원, 가로수, 또는 마당, 인도 들의 시설이 중요한 사회적 조건이 된다.
소음이나 일조건 같은 것도 같은 항목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지금 기본적 삶의 최소 요건으로서의 문화권에 거의 무관심한 채로 있다. 국가적 정책에서만 묵살되고 있을 뿐 아니라 이것이 삶의 중요한 요구일 수 있다는 문제의식을 아예 갖고있지 않기 때문에 시민의 주장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최근 서울에서 인도를 돌려달라는 운동이 작은 목소리로 시작은 되었다. 그래도 현상은 오불관언이다. 자동차 길도 없고 주차장도 없는데 무슨 인도를 말하는가라는 정도의 반응일 뿐이다.
그러나 프랑스의 예를 들자면 그들은 70년대에 이미 이런 연구들을 해놓았다. '도시의 샐러리맨이 귀가를 하는 길가에 어느 정도의 가로수가 있으면 다소나마 피로가 회복될 수 있는가', '아파트에서 주부들이 고성으로 외치는 불편한 심기의 목소리는 생활공간의 넓이에 역비례한다. 즉 좁은 공간에 사는 주부가 더 잘 화를 낸다'같은 것이다.
미국도 '4차선 도로, 8차선 도로 같은 지역에 사는 사람은 그들의 이웃과 얼마나 친밀하게 지내는가. 이들의 이웃 친구는 또 밀집가구지역이나 넉넉한 정원을 가진 동네의 사람들과 어떤 차이를 갖는가'라는 사회조사를 하고 있다.
거리의 가로등도 문화감수성의 과제일 수 있다. 밝은 등과 어두운 등은 밤거리나 밤 동네길에서 각기 사람들의 삶을 어둡게 하거나 밝게 한다.
더 나아가면 이런 주제들과도 만난다. 어떻게 아파트 내에서도 자유롭게 높은 음으로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할 것인가. 이런 건축물을 만들려면 어느 정도의 방음벽을 가져야 할 것인가. 또는 유치원에서 아이들은 한 방에 몇 명을 수용하는 것이 좋은가. 5명이나 6명 이상이면 공간의 넓이와 관계없이 쉽게 갈등 감정이 생길 수도 있다 등등이다.
이 관점들과 이에 대한 연구들은 지금 우리에게서 매우 한가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사회가 그저 각박한 것이 아니라 매우 조급하고 난폭하며 너무 자주 싸우고 대립적이 되는 것은 사실상 삶의 기본적 환경이 참혹하게도 비문화적이라는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사회과학적 논증을 하려면 한참 걸리겠지만 이것은 사실일 수밖에 없다.
이 시대는 문화적 감수성에 의한 창조력을 가져야 살 수 있다
더 중요한 문제는 이 난폭해진 감수성으로 살아가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음이 평화로워야 잘 산다라는 고전적 가치 때문이 아니라 이 시대는 점점 더 문화적 감수성에 의한 창조력을 가져야 살 수 있게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러스킨도 말하기를 '문화를 받아들일 수 있는 향유능력을 육성시킴으로서 소비자의 수익과 창조능력을 기르고 이를 통해 또 문화적 욕구를 증대함으로서 생산자와의 새로운 관계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이 관점은 오늘날 더욱 절실해지고 있다. 무엇보다 새로운 산업과 생산성의 문제와 직결된다.
문화산업시대라는 말은 지금 관용구처럼 쓰이지만 그 문화산업의 기반에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에는 이해가 부족하다. 문화산업적 제품들이 먼저 만들어져서 보급이 되기 때문에 문화 산업시대가 된다고 본다면 그것은 한마디로 쑥 같은 생각이다.
대중적 차원에서 문화적 욕구가 커지고 그 욕구의 취향과 양에 따라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 곧 문화산업 제품이다. 80년대 미국에서는 새로운 대규모 박물관만 1백 개가 새로 지어졌다고 한다. 이 이유가 바로 미국 시민으로서 연간 박물관을 찾는 시민이 70년대 1억 명으로부터 80년대 2억 명으로 증가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80년대라는 시기는 디지털 기술에 의해 각종 문화수용 도구가 발전했던 때이다. CD의 개발, 비디오의 확산, CATV의 확대 등이 모두 이때 이루어졌다.
사람들은 집에 앉아서 더 잘 볼 것이 많아졌음에도 왜 박물관을 더 찾게 되었을까. 이 대답은 하나일 수밖에 없다. 각종 문화기기를 통해 보통사람들의 문화감수성이 급격히 증진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멀티미디어는 지금 모든 기존 문화기기를 통합하고 있을 뿐 아니라 문자·영상·음향까지도 환상적으로 혼합하고 있다. 그렇다고 점점 더 사람들은 이 환상적 멀티미디어 앞에만 앉아서 지낼 것이라고 본다면 매우 큰 오산이다. 멀티미디어는 사람들을 더 문화적 현장으로 이끌어 낼 수 있다. 앞으로 최대 산업이 될 것으로 지칭되고 있는 것은 문화산업만이 아니라 관광산업이라고 하는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설명할 수 있다.
TV다큐멘터리로 보고, 비디오로 다시 보고 컴퓨터 모니터로 확인한 뒤 사람들은 직접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문화감수성의 획득이며 증진이다. 그리고 이 문화감수성의 습득 조건과 환경의 조성이 새로운 문화정책의 과제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을 만들어내야 하는 것은 물론 사회적 과제이다. 그러나 이 과제를 요구하는 것은 하나의 권리일 수 있다. 이것이 문화권이라고 할 때 우리는 지금 이 권리를 주장하고 요구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해야 하고, 실은 요구하고 있지 않다는 우리의 맹점을 자각해야 한다. 지자체가 시작되어서 지역별로 문화적 노력들이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상당히 도식적이다. 문화공간을 가져야 하고 이런저런 이벤트적 행사를 해 보려고 하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문화공간은 태반이 늘 비어 있고, 프로그램은 노래방 이상의 것은 없다. TV에서도 가요가 중심이고, 모이기만 하면 노래 부르지만, 주변을 조금만 자세히 살피면 우리 문화에서는 지금 연극도 쇠잔하고, 영화도 죽고 있고, 책읽기도 축소되고 있다. 88올림픽을 계기로 외국 공연물들이 한동안 비싼 값으로 곧잘 흥행이 되는가 싶더니 이제는 이것도 시들해졌다.
높은 수준의 문화적 감수성 익힐 수 있는 삶의 환경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
어느 것이 과연 높은 수준의 문화물인가를 구분하는 일은 물론 쉽지 않다. 꼭 세계적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들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고, 셰익스피어를 모르고 산다고 비문화인이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매일의 삶이 노래방과 고스톱과 술마시기 정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여기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 바로 문화감수성의 빈곤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 역시 심각한 문제이다.
뿐만 아니라 보다 높은 수준의 문화적 감각을 익힐 수 없는 삶의 환경에 그것이 하나의 권리로 요구할 수 있다는 것마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비극적인 것이다.
이제는 무엇인가를 바꿔야 한다.
도시의 거리에서 인도도 넓혀야 하고, 가로수도 더 있어야 한다라고 말해야 하고, 공원도 가져야 하며, 시멘트벽만 부실공사 상태로 있는 주거의 약점도 고쳐야 한다. 그리고 삼류 공연물을 벗어나 진정으로 완성도가 있는 공연물들도 찾아볼 수 있어야 한다.
외국에 관광을 나가서도 로비에서 맨발로 술병이나 들고 다니다가 쇼핑 몰에나 들렀다 돌아오는 형태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이를 위해 우리는 무엇인가 문화교육을 받아야겠다는 주문도 어디엔가서 하기는 해야 한다.
이런 일을 좀 하자는 것이 바로 '문화복지'의 계획이며, 이중 가장 중요한 개념인 '문화권'의 확립인 것이다. 이점에서 문화권의 인식은 곧 새로운 생존조건의 인식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