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프로그램. 1 / 간도, 백두산 기행. 10

내적 정결성과 부끄러움의 미학




강진호 / 문학평론가

1.

북경행 비행기가 저만치 김포공항을 떨어뜨려 놓고 날아오를 때쯤에야 나는 문득 내가 이 나라를 벗어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비행기 날개 밑으로 구름에 가려졌던 전답과 가옥들이 얼핏얼핏 보이다가 점점 까마득하게 멀어져 갔다.

도대체 내가 살아온 나라의 44배쯤 되는 대륙의 크기란 어느 정도인 걸까. 순치지국이라 불릴 만큼 우리의 역사 속에 깊이 들어와 있는 나라이면서도 멀게만 느껴지는 나라가 중국이다. 5년 전가지만 해도 갈 수 없는 적성국가였던 그 나라를 향해 비행기가 날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향하는 그곳에는 '간도'가 있다. 오래 전에 이 간도라는 이름을 앞에 높고 나는 마치 가보지 않은 어떤 전설의 섬을 대하는 듯한 낯설음을 느꼈었다. 윤동주가 「별헤는 밤」에서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할 때의 그 북간도의 형상은 까마득하고 어렴풋했다. 「토지」에서 서희가 재기의 발판으로 삼았던 그 용정땅과 안수길의 「북간도」에서 일제하에서 짓밟힌 농토를 뒤로하고 가난한 농민들이 남부여대 향했던 그 전설의 땅은 머리 속에서 긴밀히 연결되지 않았다. 간도는 과연 어디에 어떤 모습으로 실재하고 있었던가. 옛 간도땅, 오늘의 중국, 연변 자치주를 찾아가는 길은 나로선 잃어버린, 그리고 잊혀졌던 우리 역사의 한 대목과 해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북경 수도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 때문인지 공항도 도시도 어찌 우중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지은 지 오래된 듯한 공항 청사는 낡고 칙칙한 느낌을 주었는데 그 전체적인 색조가 아무래도 김포공항과는 판이했다. 그러나 나중에 연길 공항에 가보니, 그곳은 영락없는 시골 기차역과도 같았다. 그에 비하면 이 북경 공항은 규모도 엄청나게 크고 상당히 수준높은(?) 것이라는 것을 뒤에야 알 수 있었다.

수도 공항에서 연길 공항까지 다시 두 시간의 비행. 저녁 무렵에 비행기가 내려준 곳은 웬 깜깜한 운동장 같은 곳이었다. 공항버스도 없어서 사람들은 대문 옆에 붙은 작은 쪽문처럼 생긴 출구를 향해 기차에서 내려 개찰구로 밀려나가듯 우르르 쏟아져 나갔다. 문득 바람에 묻어와 코끝을 스치는 풀냄새, 시골에서 흔히 맡을 수 있는 소똥 말똥 냄새, 여긴 정말 중국의 변방이구나. 아마, 연길에 오는 많은 한국인들이 나와 비슷한, 마치 한국의 시골 도시에 온 것 같은 느낌을 가질 것이다. 귓전에 들려오는 말들은 왜 이리 낯익은지, 주위에 보이는 얼굴들도 외관상으로는 그 국적을 구별하기가 힘들다. 아까 연길행 비행기를 탄 행 승객들도 대부분 한국인 또는 조선족이었던 것 같다.

현재 연길에는 35만 명의 조선족이 산다고 한다. 중국에는 56개의 소수민족이 있는데 그중에 조선족이 195만명, 약 200만 명을 차지한다. 14번째로 많은 숫자이다. 이중 절반 가량이 연변에 거주하고 있고 특히 일제치하에서 독립군의 근거지로 명성이 높았던 용정은 주민의 대부분이 조선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연변에 온 한국 사람들은 제각기 감회가 남다를 것이다. 이곳은 사실 남달리 기구한 역사를 지닌 땅이다. 고조선, 부여, 고구려와 발해의 고토이기 때문이다. 나는 가보지 못했지만 심양과 집안에는 고구려 고분과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오래 전에 선조들이 이 광활한 대륙에서 활을 쏘고 말을 달리며 삶의 터전을 일구었었다는 '옛 우리 땅에 대한 묘한 향수'를 조금씩은 품게되는 것이다.

선조의 고토였던 이 땅은 한동안 비워져 있었다. 만주족에 의해 청나라가 세워진 이후, 이곳이 시조 발상지라 하여 신상불가침의 구역으로 선포되었고 만주족 이외의 타민족은 들어갈 수 없게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도 월경죄를 만들어 출입을 엄격히 금했다. 그러나 월경죄에도 불구하고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수백년 동안 비워두어 비옥해진 이 땅에 숨어들기 시작했다. '강만 건너가면 땅이 어찌나 비옥한 지 농사가 절로 되었다'고 했다. 초목이 우거진 땅을 갈아 밭을 만든 후 씨를 뿌려 두었다가 나중에 추수해 오는 일종의 도둑농사 같은 것이었는데, 그때 그들은 두만강 속에 있는 사이 섬, 즉 '간도'에 간다는 핑계를 대어 강을 건너갔다는 것이다. 간도를 두만강과 송화강 사이의 지역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송우혜는 이 간도가 당시 선조들이 은밀히 사용했던 일종의 암호 같은 것이었다고 보고 있다. 처음엔 두만강 위쪽 땅을 그냥 '간도'라고 지칭하다가 나중에 압록강 이북을 서간도로 구분하면서 두만강 이북땅은 북간도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지금 시인 윤동주를 낳은 땅이며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꿈과 기개를 키웠던 그 땅을 찾아가고 있다. 청나라에서 중화민국 다시 중국으로 통치체제는 바뀌었어도 한결같이 자신의 영토를 지켜오고 일궈 와, 우리말과 문화를 고스란히 보존해온 희귀한 문화 영토, 그러니까 영토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어도 정신적으로 우리의 분신 같은 땅으로 존재하는 것이 오늘의 연변 조선족자치주이다. 연변의 작가 김학철은 교포라 불리는 것을 싫어한다고 한다. 현실적인 국적은 중국으로 되어 있으되 정신적인 국적은 한국이라는 조선족 특유의 뚜렷한 의식을 보여주는 예이다. '중국내 조선땅'을 지키고 보존해온 바탕에는 조선족들의 이러한 견결한 자존심이 깔려 있는 것인지 모른다.

2.

이곳은 해가 일찍 뜬다. 새벽 4시인데도 주변은 벌써 뿌옇게 밝다. 해가 3시에 뜨기도 한다고 한다. 어제는 어둠에 묻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던 거리 풍경이 이제 베일을 벗듯 하나씩 그 모습을 드러낸다. 알고 보니 호텔 맞은편에 놓인 큰 건물이 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다. 그러니까 우리의 시청 같은 곳이다.

이곳 거리의 특징은 거리의 간판마다 한글과 한자어가 함께 표기되어 있다는 것. 그리고 한글이 반드시 위에 붙는다는 점. 한글 우선으로 하지 않으면 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로부터 경고를 받는다고.

TV에서 북한 화면을 보여줄 때 나오는 평양 거리와 흡사한 화면 속을 차가 지나가고 있다. 붉은 활자들이 강렬하다. 붉은 색깔의 활자들은 도처에서 눈에 뛴다. 가장 신기하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역시 간판들이다. 서울 거리와 같은 영어 간판은 전혀 없다. 버스터미널은 '시내중심 뻐스역', 카센터는 '자동자 수리부', 여관은 '려관', 납작납작한 건물들 전면에 빨간 고딕과 특유의 흘림체로 쓰인 북한식 우리말이 시선을 끈다. 이런 간판도 있다. '웨슬리 계렬-얼음과자, 빵 등'이라고 길게 쓰인 간판, '마음에 드는 식당', '봄빛 약방', '교통상점', '상업인쇄공장', '장백인평저금소', '연변 구락부'.

차안에 별안간 「소양강 처녀」가 울려 퍼졌다. 택시기사인 최승철씨가 한국에서 가져온 가요테이프를 틀어 놓은 것이다. 뽕짝과 함께 달리는 연길 거리라…… 그것은 한국인 관광객에게 이상한 감회를 불러 일으킨다.

조선족 택시 기사인 최씨는 말수가 적고 순박한 인상을 지닌 중년 사내였다. 그는 한중수교 이후 한국에 건너가 공사판에서 3년쯤 일을 하고 작년 11월에 돌아왔다고 한다. 한국에서 번 돈으로 이곳에 아파트도 장만했다. 한국 돈으로 싯가 1,800만 원대인 '산타모' 승용차도 그렇게 번 돈으로 구입한 것이었다. 고생을 많이 한 듯한 그의 얼굴은 나이에 비해 훨씬 겉늙어 보였는데 50대로 알고 있다가 41세라는 것을 알고 놀랐다. 원래 고향이 속초였던 그의 할아버지는 일제 때 이곳으로 이민을 왔다고 하는데 그러면 그는 교포 3세인 셈이었다.

그에 의하면 연변도 예전과는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중국 개방 15년, 한중수교 5년째 연변에 부는 바람은, 가난한 연변 조선족들이 남한에 한약재를 들고 와 전철역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있던 지난 몇 년간의 풍경과 함께 많은 것을 급속도로 변화시켰다. 순박한 변방의 인심과 정취를 간직하고 있던 이곳에 외부침입자(?)들이 수시로 출현하면서 생긴 변화들이다. 젊은이들은 도시로 빠져나가고, 한국으로 일자리를 찾는 사람도 늘고 있다. 최씨는 한국에서 불도저를 몰았는데 나중엔 부인도 한국에 들어와 일했다고 한다. 그들에게 남한은 부자 나라였다. 화폐가치를 비교해 본다면 인민폐 100원이 우리 돈 1만 원. 그런데 교수 월급이 800원이고 조선족 한달 평균 임금은 4∼5백 원 수준이라는 것. 한국에 가서 몇 년만 일하면 떼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이 들만하다.

같은 동포라고 환대하던 예전의 순수한 분위기하곤 다르다는 것을 나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많은 부분 남한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는데 연변에 가면 모두가 사장이요, 회장이라고 큰소리치고 돈 꽤나 있는 것처럼 추태를 보였으니, '건방진 한국인으로 보일 수 밖에. 이것은 신문에도 났던 일인데, 남한 사업가가 연변에까지 가서 순진한 사람들을 상대로 사기쳐서 급기야 한 마을 사람들이 길거리에 나앉게 된 비참한 경우가 있었다. 또 한국에 취업하러 가서 당한 수모와 천대가 알려지면서 남한 사람들에 대한 인식이 더욱 나빠졌다고 했다.

중국 전체의 변화와 함께 연변의 내부변동은 피할 수 없는 대세라 해도 이 평화롭고 순박한 땅이 이렇게 험악하게 체질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은 실로 서글픈 일이었다. 그 원흉은 물론 '돈'이고, 돈의 이데올로기다. 물질적 변화라는 것이 꼭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어서 이렇게 한 사회를 무섭게 오염시키고 파괴해 나갈 수 있는 모양이다. 선조들이 강을 건너와 개척했던 희망의 땅, 북간도. 그러나 북간도의 오늘은 물질의 병균이 온몸으로 번져가고 있는 다소 병들고 황량한 몰골이었다.

3.

연길에서 30분쯤 달리면 예전에 가장 번성했다던 북간도의 중심, 용정 거리에 이른다. 안수길의 소설「북간도」에서 창윤이 처음 와 보고 '모든 것이 밝고 홍그럽고 아늑하기만'하다고 느꼈던 용정, 그러나 그 몇십년 후에 와 보니 그곳도 이제 과거의 영화는 간 곳 없이 쇠락한 변두리 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다. 눈에 띄는 것은 자전거들이 많다는 점인데 특히 삼륜차들이 시선을 끌었다. 일종의 시골 택시같은 것인데, 자전거에 사람이 마주앉을 수 있게 의자를 단 수레를 붙이고 페달을 밟으며 달리고 있었다. 옛날에 사람이 직접 끌고 다니던 인력거를 현대식으로 개조한 듯.

이곳은 일제 말기 가장 번성했던 조선족 도시였다. 당시 북간도에서 두 개의 구심을 이루었던 곳은 연길과 용정인데 한인들은 주로 용정에 몰려 살았다고 한다. 박경리「토지」의 배경이 되었던 곳도 이곳 용정이다. 원래 이곳은 인적없는 허허벌판이었고, 그 한가운데 물을 대기 위해 파놓은 용두레 우물이 있었다고 한다. 이 우물에서 '용두레 마을', 즉 '용정'이라는 지명이 생겨나게 된다. 선조들은 우물을 중심으로 집을 짓고 밭을 일구고 논을 풀고 하면서 이 땅을 개척하였다. 회령 지방의 상인들이 간도 방면의 곡식을 무역하기 위해 용정을 그 근거지로 삼으면서 차차 농촌을 겸한 상업지로 변모했고 간도는 당시 가장 번성한 도시가 되었던 것이다.

외지인들이 찾아오면 꼭 찾는 관광명소가 있으니, 하나는 용정의 시원지인 '용두레 우물터'이고 도 하나는 '용정 중학교'다. 내가 갔을 대도 관광 버스 두 대가 학교 운동장에 정차해 있었다.

정문 바로 오른쪽에 붉은색 벽돌로 쌓아 올린 건물이 있는데 이것이 옛 대성중학교 건물이다. 1948년에 은진, 대성 등 용정 내에 있던 사립학교 6개를 '용정중학교'라는 명칭으로 통합하여 오늘까지 그 맥을 이어 오고 있는데, 그 중 옛 건물을 기념관으로 개조하여 관광객들에게 개방하고 있었다. 기념관 입구에 놓인 윤동주의 시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2층으로 올라가니 학교와 관련된 각종 자료가 전시되어 있고 학교가 배출한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윤동주의 초상화도 그 가운데 큼지막하게 걸려 있었다. 복도 안쪽에 '윤동주 사상과 문학 연구회'라는 현판이 붙은 조그만 사무실이 눈에 띄어 들어가 보니, 창고만한 방인데 학생들이 발간하는 문예지 「별」과 윤동주 관련 자료가 한쪽 벽에 전시되어 있었다. 윤동주의 까마득한 어린 후배들은 그들이 존경해 마지 않는 문학 선배가 중학 시절 교내에서 만든 잡지의 맥을 아직도 이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윤동주 가문은 초창기에 이 북간도로 이민을 왔다. 증조부 윤재옥이 고향 함북 종성에서 북간도로 이주한 것은 1886년의 일. 그는 거의 비어 있는 북간도 자동땅에서 혼자 농토를 일구어 부농으로 성장하였다.

윤재옥씨가 함경도 땅을 떠나온 지 그 몇 년 후, 두만강변의 도시인 회령, 종성 등에 거주하던 학자들이 네 가문의 식솔 141명을 거느리고 일제히 고향을 떠나 두만강을 건너니 이때가 1899년 2월. 이들 네 학자는 문익환 목사의 고조부가 되는 문병규와 남도천, 김하규, 김약연으로 고향에서 각자 서재를 갖고 있었던 훈장들이었다. 이민단이 명동 마을을 이룬 그 다음 해에 윤동주의 증조부 윤씨가 자동땅에서 명동 마을로 이주해 왔고, 이주해온 지 10년만에 아들 윤영석이 처녀 김용과 결혼하여 아들을 낳으니 그가 바로 윤동주였다.

이민단은 청국인 대지주의 땅이었던 명동촌 일대를 돈을 주고 산 후 마을을 이루었는데, 당시 이들의 이민 목표는 척박하고 비싼 조선땅을 팔아 기름진 땅을 많이 사서 잘 살아 보자는 것, 또 집단으로 들어가 삶으로써 간도를 우리 땅으로 만들겠다는 것. 그리고 기울어가는 나라의 운명을 바로 세울 인재를 기른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들은 상당히 선각자적인 의식을 가지고 이민을 결행했던 것이다. 이들이 높은 교육열을 가지고 수많은 인재들을 양성해냈던 것은 모두 이같은 선각자적 의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의 명동학교는 초반기 간도교육의 중심지이자 독립운동가의 산실이었다. 윤동주도 이 명동소학교를 졸업했다. 1931년의 명동소학교 졸업식 사진을 보면 한복 두루마기 차림에 교모를 쓴 앳된 윤동주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윤동주와 명동소학교, 은진중학교, 평양숭실학교 등을 같이 다녔던 그의 오랜 친구 문익환이 그 앞줄에 앉은 모습도 눈에 띈다.

윤동주의 생가는 명동 마을 학교촌 입구에 있었다고 한다 윤동주의 동창인 김정우의 회고에 의하면 '가랑나무가 우거진 야산 기슭에 교회당이 있고 그 교회당 옆으로 두 채의 집이 있었는데 윤동주의 집은 그 중 큰 기와집이고 뒤에는 그리 크지 않는 과수원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뒷문으로 나가면 깊은 우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윤동주의 시「자화상」에 나오는 우물이 바로 이 고향집 뒤켠의 우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동주의 집 큰 대문을 나와 좌로 돌아 큰길로 향하면 동쪽 개바위 위로 우거진 가랑나무 숲이 있고 그 뒤에 교회당이 있었다고 하는데, 어린 시절 동주는 그 교회 종각의 십자가에 햇빛이 비우고 있는 광경을 보았을 것이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 지금 교회당 꼭대기 /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라고 시작되는 윤동주의 시 「십자가」는 아마 이 명동 마을의 교회당 십자가에서 그 이미지를 취한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은 상전벽해를 이루어 아름다웠던 명동 마을의 옛정취를 찾기는 힘들지만, 윤동주의 시적 감수성과 인격의 태반은 이곳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용정의 용문교 밑으로는 오늘도 해란강이 흐르고 있다. 해란강의 경개는 일송정에 올랐을 때야 온전히 눈에 들어온다. 360도 온통 너른 평원 가운데 봉우리가 하나가 신기하게 솟았는데, 그 꼭대기 큰 바위를 반석삼아 우뚝하게 솟아 있는 것이 일송정이다. '일송정 푸른 솔은 홀로 늙어 갔어도…'의 그 우뚝선 푸른 솔은 보이지 않고 대신 그 자리에는 낡은 정자 하나가 홀로 서 있다. 그곳에 서면, 해란강 하류 충적평야에 자리잡은 심장, 용정 시가지와 평원 한 가운데를 젖줄처럼 가로지르는 해란강의 선연한 줄기가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용문교 밑으로 흐르던 강은 미미한 범천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으나 일송정 꼭대기에서 내려다 본 그것은 천년 두고 흘러온 역사의 강처럼 유유하고 깊어 보이는 것이었다.

용정사람들의 마음에 해란강은 늘 어떤 꿈과 신비와 낭만의 심상으로서 흘러오지 않았을까. 간도 작가로 불리는 안수길은 '이 강변에서 유·소·청년 시절을 보냈거나 잠깐 다녀간 사람이거나 그들의 정신과 감정에 알지 못할 감회와 꿈을 심어주는 위대한 힘을'지니고 있었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해란강변을 거닐면서 문학동인회 '북향'을 만들 것을 구상했던 안수길, 친구와 함께 강물을 바라보면서 인생과 문학과 시를 논했던 윤동주, 그리고 수많은 애국지사·교육자·학자·정치가들, 이 강을 스쳐갔던 수많은 선구자들. 그들은 진정 어느 곳에 그 거친 꿈을 묻어 두고 있는지. 불멸의 가곡 「선구자」의 애절하고 비통한 노랫말과 함께 오늘도 해란강은 천년 두로 흐르며 향수를 자아낸다.

14세 되던 해, 늦가을에 윤동주는 해란강 가에 있는 이 마을로 이사를 왔고 미션계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했다. 그의 시력 중 맨 최초의 지점에 놓인 세 편의 시,「삶과 죽음」,「초 한 대」,「내일은 없다」가 이 은진중학 시절에 나왔다. 특히 1934년 12월 24일이라고 쓴 날짜까지 기록되어 있는 「초 한 대」라는 시는 뛰어난 완성도를 보여준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 그의 생명인 심지까지 //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 불살라 버린다…….' 윤석중의 동요와 동시를 좋아했던 이 어린 시인으로부터 어떻게 이런 싯구가 나올 수 있었을까. 마치 자신의 일생을 암시하는 듯한 무서움마저 느끼게 하는 시다.

여기에 시인의 꿈을 키워갔던 한 문학소년이 있다. 북간도에서 태어나 문학을 너무도 사랑한 나머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희전문 문과에 들어갔고 특히 시를 좋아하여 「정지용 시집」의 아름다운 싯귀들 밑에 밑줄을 쳐 놓고, 중학교 때부터 연도와 날짜를 꼬박꼬박 표기해 가며 습작에 습작을 거듭하던 한 무명의 문학청년.

일본에 유학을 갔던 그는 어느날 일본특고에 의해 '독립운동' 죄로 체포된다. 그리고 해방의 그날이 있기 바로 6개월 전인 1945년 2월에 그의 고향집에 비보가 전해진다. 일본 복강형무소에서 그가 새벽에 '외마디 비명이 높이 지르고 운명'하였다고. (당시 그 형무소는 수인들에게 이름을 알 수 없는 식염수 주사를 주기적으로 놓았다고 한다. 이를 근거로 송우혜는 그가 생체실험의 대상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때 그 청년의 나이 28세.

청년은 중학시절부터 문예잡지를 만들고, 조선일보 학생란에 작품을 발표하였으나 문단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무명 시인이었다. 그가 암흑기 한국 시사를 빛내는 불멸의 시인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기까지에는 여러 극적 변수가 한 편의 시처럼 함께 응축되어 있다. 만약 그의 고향이 북간도가 아닌 함경도 어디쯤이었다면 우리는 분단의 벽에 막혀 그를 찾을 수도 없었을 것이고, 그를 추억하는 발길을 용정중학으로 옮기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던 해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시집을 내려 했으나 암흑기의 정세로 무산되었다. 사라졌던 그의 시들이 유족과 친구와 후배들에 의해 다시 모아질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 어두웠던 시대 한 고결한 영혼이 남긴 아름답고도 진지한 내면의 독백을 들을 기회를 영영 놓치고 말았을 것이다. 또한 그의 시적 재능을 일찌감치 알고 있던 정지용이 '일제 헌병이 동지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 청년 시인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는 탄식을 들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사진으로 보는 윤동주는 얌전하고 여리디여린 용모다. 시로 볼 대 육사가 강철같은 남성상이라면 동주는 얌전하고 여리며 고뇌하는 지식인상이다. 육사는 시인이라기보다는 투사적 이미지가 더 강하다. 그는 독립운동 전선에 깊이 관여한 혁명가였으며 시는 그의 전의를 다지기 위한 정신적 무기였다. 윤동주의 경우는 어떤가. 우리는 윤동주를 통해서 아름답게 빚어진 부끄럼의 미학, 그 빛나는 정수를 보게 된다. 송우혜의 표현을 빈다면 윤동주 이전에 '이토록 자기의 전 존재를 던져서 사람의 삶이 업보처럼 지니기 마련인 근원적 부끄럼과 마주 선' 아름다운 존재는 없었다.

1941년 초에 쓰여진 「무서운 시간」이라는 시는 당시 그의 내면세계를 한 장의 사진처럼 보여준다.

그의 비극적인 죽음은 이미 이 「무서운 시간」에 미리 예비되어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한갓 시인 지망생에 불과했던 윤동주는 이 「무서운 시간」을 계기로 비로소 윤동주다운 음향과 빛깔과 성격을 가지게 된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이제 한국 시단은 몇 세대를 기다려 다음과 같은 불멸의 싯구 하나를 얻게 되니, 우리는 이렇듯 진실한 생을, 자신의 전 존재와 전 중량을 온전하게 건 정직함을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정직함이 일본 유학을 위해 불가피하게 자기 이름을 바꾸어야 했던, 창씨개명을 견딜 수 있었을까.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 이다지도 욕될까(……) 그때 그 젊은 나이게 /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하고 그는 「참회록」을 통해 그때의 참담함을 고백하며 몹시도 부끄럽고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시는 「제 2의 고향」같이 난해하다고 꼽히는 시 외에는 비교적 쉽게 쓰여져 있다. 그런데 문익환 목사가 생전에 남긴 증언에 의하면 윤동주는 대단한 독서가로 특히 키에르케고르에 관한 이해가 신학생이었던 그보다 훨씬 더 깊었다고 했다.

'그렇게 쉬지 않고 공부하고 넓게 읽는 그의 시가 어찌 그렇게 쉬웠느냐 하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는 것이 그의 말이고 보면 윤동주의 시가 깊은 고뇌와 사유를 거쳐 나온 가볍지 않은 시들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윤동주의 유고시 30여편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정지용의 발문과 함께 세상에 나온 것은 해방 된 지 3년만의 일이었다. 그제서야 사람들은 어두운 시대의 그늘을 십자가처럼 묵묵히 지고 걸어갔던 한 무명시인의 짧은 생애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지금까지 어쩌면 가장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받는 민족시인으로 우리의 가슴속에 불멸하고 있다.

그에 대한 학술논문만도 수백여 편. 윤동주와 일생을 같이 했고 같은 감옥에서 옥사한 그의 고종사촌 송몽규의 조카 송우혜가 윤동주에 대한 상세한 전기적 자료를 담은 「윤동주 평전」을 낸 것은 1988년의 일이다. 그리고 시인의 체취와 흔적을 찾는 발길이 옛북간도, 지금의 연변 용정땅에는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4.

윤동주의 묘소를 들르려 했으나, 비행기 시간에 좇기는 관계로 백두산으로 발길을 돌렸다. 안도현에 이르렀을 때 마을 어귀에 걸린 플랜카드의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장백산(중국인은 백두산을 장백산이라 부르며, 장백산의 가장 큰 봉우리를 백두산이라고 한다)을 가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것이로다'

등소평이 한 말이었다.

거의 평지에 가까운 산길을 몇시간 달렸다(실은 완만한 경사지를 4시간 이상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달려도 달려도 끝이 없을 것 같은 밀림인데 언제쯤인가 저만치 봉우리 하나가 솟아 있고 빌딩 높이의 흰 물줄기가 밑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장백폭포였다. 백두산 바로 밑에까지 온 것이다.

백두산은 우리 민족에게 신화적 심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영산이다. 우리는 백두산에 내려온 하느님의 아들 환웅과 웅녀가 결혼하여 낳은 단군왕검의 자손들, 그리고 그가 송화강 근처에 도읍을 정해 세운 고조선의 후예들 아닌가. 그래서인지 누군가는 백두산에 오를 때 목욕재계하고 올랐다는 얘기도 들었다.

해발 2천 미터가 넘는 산정에는 손을 내저으면 곧 닿을듯한 하늘과 구름이 미치도록 투명한데 사방엔 나무 하나 없고 바람은 세차다. 기묘한 모양의 암석들이 사방에 솟아 있는데, 꼭 산이 그 봉우리를 정교하게 쪼아내리다가 손으로 쓱 튐어내린 듯이 미끈하다. 계곡 한 구텅이엔 아직 얼음이 남아 있다 일년 열두 달 중 두어 달을 빼고는 사시사철 눈으로 덮여 있다는 이 영산. 분명 거기에 오른 사람들은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 이상하고도 신묘하며 신비로운 봉우리들, 동북아 지역에서 가장 높고 낙차가 제일 크다는 이 산을 앞에 두고 필히 넋을 잃고야 마는 것이다.

산봉우리 밑에 이르면 578미터의 가파른 등산로가 기다린다. 이 등산로는 천지까지 걸어올라갈 수 있는 대표적인 관광로로 856개의 계단을 끝까지 다 밟고 올라가야만 그 신성한 고지에 오를 수 있다.

나는 경사 45도의 그 길을 땀을 비질비질 흘리며 거의 기다시피 올랐다. 857개 계단을 오르는 일은 쉽지 않다. 중국 10대 명산 중의 하나로 꼽히기 때문에 전역에서 수많은 관광객이 몰려온다고 했다. 이미 수많은 관광객들이 그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계단을 겨우 100개쯤 오르고 그만 계단에 주저앉은 내 귓전에 들리는 구성진 소리.

"아이, 돈 팔아가지고(돈 써가면서) 이게 무슨 고생임둥."

"그라니까 여기 기관총을 놓고 조 밑에서 몰려오는 일본군 아새끼들 팡팡 다 쏴 갈개였다지 않슴둥." 휘딱 고개를 돌려보니 한복 차림의 두 조선 여인네, 북한 동포들도 도문 다리를 건너 이 길로 백두산 관광을 온다고 들었는데 그들은 분명 북한 동포였다.

이제 북한 동포와 남한 동포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그 아찔한 계단을 함께 오른다. 땀을 한됫박 흘리고 계단 끝에 올라서니 산정에 부는 바람이 땀에 젖은 등골에 찬물 끼얹어 주듯 시원하고 후련하게 느껴진다 곧이어 사람들은 조금 전 계단을 오른 고통을 한순간에 잊어버리는 축복의 순간을 맞이한다. 전설의 천지, 꿈에 그리던 천지의 장관이 발 밑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천지를 앞에 놓고 불현듯 눈앞이 흐린 것은 웬일인가. 내 나라 내 땅을 남의 땅에 와서 밟고 있다는 설움과 충격이 가슴 밑에 고여 있다가 이제야 솟구치는 것인지, 그 5분의 3은 북한 빵이되, 나머지 땅은 중국땅이 되어 신의 눈물처럼 고여 있는, 그 한없이 맑은 비취물의 기적을 앞에 놓고 하늘은 서럽도록 푸르기만 했다. 천지물 또한 서럽도록 맑다.

파라솔을 놓고 한복을 빌려주는 장사치들 앞에서 한복으로 갈아입은 조선족 처녀들. 천지를 배경으로 한복입은 그들의 자태를 카메라에 담으려는 사진사들의 몸놀림이 분한데 나는 천지 저 너머 바라보이는 북한의 하늘과 산맥을 그냥 말없이 우울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조금 전에 보고 온 윤동주 시인의 잔영과 북간도의 대륙을 말달렸을 독립군들과 그리고 수많은 선구자들의 흐린 초상이 천지의 맑은 물빛 위, 눈부시게 투명한 하늘 위로 파노라마처럼 스치고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