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그림자의 멋진 대비, 아름다운 색채로 조화된 유려한 영상
이승구 / 중앙대 영화과 교수
우리 영화 80년 사상 가장 뛰어난 작품을 한 편 고르라 할 때 아무 망설임 없이 선뜻 지목할 작품으로 배용균 감독의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들 수 있다. 물론 일제 치하에서 만든 나운규 감독의 민족영화 「아리랑」이 전설처럼 구전되어 오고는 있지만, 이제까지 작품이 전해지지를 않아 직접 감상의 기회가 없었으므로 구체적인 언급에서 제외됨은 물론 불행한 일이다.
1989년 5월 제42회 깐느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부문 및 황금카메라 상 후보작으로 선정되면서 비로소 우리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같은 해 8월에 열린 제42회 르크르노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획득하면서 우리 영화계에 놀라움과 충격을 안겨 주었다. 배용균이라는 감독이 이제까지 영화계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라는 점도 그러하였거니와 그가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교수라는 점, 그리고 영화의 제작 방식에 있어서도 일반적인 영화 제작의 특성인 집단 작업을 철저히 배격하고 연출, 촬영, 편집, 각본, 미술 등 모든 분야를 자신이 개인작업으로 직접 이루어내었다는 점도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빛과 그림자의 멋진 대비와 아름다운 색채로 조화된 유려한 영상과 최소한의 대사로 농축된 이 작품은 끝없는 고행과 수행으로 속세와 동떨어진 낡은 절간에서 오로지 득도의 길을 추구하는 노승 혜곡 스님과 혜곡 스님이 주워다 기른 동자승 해진이 함께 기거하는 낡은 절에 속세화의 인연을 끊고 자유로운 영혼에로의 진리를 갈망하는 기봉 스님이 찾아옴으로써 시작된다. 불문에 귀의하여 득도의 길로 들어섰다고는 하지만 속세에서 어렵게 살아가는 눈 먼 어머니와 여동생을 남겨둔 기봉 스님으로서는 인륜과 혈육의 정으로 얽혀진 속세와의 인연을 단호하게 끊어버린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상과의 인연이 이미 다한 노승 혜곡 스님은 스스로의 운명을 의식하고, 기봉 스님은 끊지 못한 사바세계와의 끈질긴 인연으로 고뇌한다. 장난기 어린 돌팔매질로 나르는 새를 다치게 한 동자승 해진은 끝내 죽어버린 새에 대한 죄책감으로 마음을 조인다. 결국 노승 혜곡 스님은 열반하고, 기봉 스님은 혜곡 스님의 다비장을 혼자 치르고 동자승 해진에게 절을 맡긴 후 다시 먼 구도의 길을 떠난다. 이상은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의 간략한 스토리이다. 그러나 이 스토리는 이 영화가 가지는 표면상의 형식적 구조일 뿐이지 이 작품을 끌고 가는 중요한 요소는 절대 아니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제목이 시사하듯이 영화는 불교의 선 사상을 근간으로 우주에 대한 존재론적 통찰의 과정을 참선을 하듯 시종일관 진지한 자세로 그리고 있으며 혜곡, 해진 기봉의 세 사람이 던지는 선문답을 통하여 인간이란 무엇이며 삶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과 깨우침을 얻기 위해 고행하고 번뇌하고 갈등하는 구도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엄밀히 보아 이 작품에는 혜곡, 기봉, 해진이라는 인물은 존재하나 주인공은 아니다. 이들은 이 작품상에 나타나는 모든 사물들, 즉 물, 바위, 바람, 하늘, 구름, 불, 나무, 새, 소, 고양이 등의 모든 자연환경이나 동식물들과 마찬가지로 작품 속에서의 조그만 한 역할을 담당할 뿐이다. 즉 이 영화에서 보여지는 모든 물상과 인물들이 생성하는 각각의 시각적 상황들이 영상으로 구성되어 이 작품을 끌고 가는 주요 캐릭터로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위에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세 사람이 엮어가는 이야기 자체는 역시 중요한 것이 아니며, 대자연의 섭리 속에 자연스럽게 조화되는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흔히들 이 영화를 난해하고 지리한 작품이라고 평한다. 그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보아왔던 대부분의 영화들이 우리들을 그러한 영화에 만족하도록 길들였으며, 단 시각적 즐거움이나 한때의 쾌락을 위한 단순 오락물로서 기능하도록 우리들의 정신세계를 황폐화시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이해하고 진실된 영화적 재미를 느끼기 위해서는 상당한 영화보기의 훈련과 사고하는 명상하는 진지한 자세의 인내가 필요하다. 이 영화에 있어서 한 장면 한 장면에 나타나는 영상들은-그것이 나무나 새처럼 말을 하지 못한다 해도-모두가 진지한 내용의 대사를 무언중에 영화를 감상하는 사람들에게 던지고 있다. 화두로 대치되는 짧은 한 마디 물음은 우리가 평생을 숙고해야 할 깊은 의미를 지니고, 외양간을 떠나 헤매는 한 마리 소는 인간을 계도하는 부처의 자비로움으로 표현된다. 창공을 나는 한 마리 새로 무한한 영혼의 자유스러움을 말하고 화롯불의 열기에 하얀 김처럼 피어올라 허공으로 흩어지는 물의 형상은 비가 되어 다시 돌아옴으로써 물문에서의 윤회사상을 무의식중에 터득케 한다. 고요한 물의 이미지는 더없이 평온한 심리적 상태의 세계를 뜻하고 거세게 흐르는 격류는 번민과 고뇌에 가득찬 구도승의 심리를 나타낸다. 서서히 시작하는 기봉 스님의 번뇌는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하는 소의 모습으로 상징되고 번뇌의 절정이 이르러서는 소의 움직임도 격렬해진다. 마침내 소가 고삐를 끊고 외양간을 박차고 산속으로 탈출하자 기봉 스님의 마음도 평온을 되찾는다.
이와 같이 영화의 영상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결코 어려운 것은 아니며 영상을 보고 느낀 바를 솔직하게 인식하고 다시 한 번 정리해 봄으로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기존의 대부분 영화들이 관객이 생각해야 할 부분까지를 친절하게 설명을 해버린다거나, 아예 생각할 여지마저 고려하지 않은데 반해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은 무한한 사고와 상상력을 요구하는 영화이다. 보는 사람에 따라서 각자가 느끼는 상황이 서로 조금씩 다를수도 있지만 결코 이것을 겁낼 필요는 없다. 영화보기를 전문적으로 하는 평론가들도 각각의 개성에 따라 느끼는 바가 달라질 수 있으며, 그렇다고 해서 어느 누구의 느낌이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이라는 이 영화의 제목에서 묻고 있는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은 없다. 그것은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지는 드넓은 하늘을 활기차게 날아오르는 한 마리 새의 영상으로 표현될 수도 있으며, 구도를 위해 머나먼 길을 떠나는 기봉 스님의 뒷모습과 그를 뒤따르는 한 마리의 소로 구성된 영상이 주는 느낌으로 대치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이 영화는 인간이 인간 스스로 얽어매어 놓은 굴레 속에서 자유롭게 벗어나고자 하는 해탈의 추구와 구도의 과정을 사실주의적 아름다운 영상으로 그려낸 뛰어난 명작이다.
작품 속의 곳곳에서 불쑥불쑥 던져지는 화두는 바로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진실된 의미인지도 모른다. '산천초목 삼라만상, 여기와 저기가 한 울타리 속인데 가는 것이 오는 것이고 오는 것이 가는 것이다. 바람은 어김없이 동서남북으로 불지 않느냐? 육신이 흩어져서 지석화풍으로 돌아가니 짓물러진 상처의 피고름은 밤하늘의 이슬이 되어 내리리라.' '사대삭신 육천 마디의 인연줄이 뿔뿔이 풀어헤쳐져서, 이 몸은 흙과 물과 바람으로 허공 중에 흩어지니, 나의 주인공은 끝내 어디를 가는고?' '천지간에 나는 끝내 없고, 천지가 내 아님이 또한 없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