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의 대중화노력과 활발했던 공연무대들
김채현 / 무용평론가
장기공연을 시도한 서울발레시어터
연초부터 문화복지 개념이 정책 방안으로 제시되고 연중 광고와 다이어트를 비롯 몸의 감성미가 자주 거론된 1996년도에는 여가문화의 확산과 맞물리면서 볼룸댄스 교습이 사교춤의 일환으로서 당당한 화젯거리로 대두되고 댄스뮤직 또한 익숙한 현상이 되었다. 이를테면 춤의 대중화 선상에서 논의됨직한 사회추세가 예년에 비해 더 뚜렷해졌던 해가 1996년도였는데 해외에서 불어온 마카레나 바람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와 같은 추세들이 1996년도의 춤 계 내에서 논의된 바가 드물었던 사실은 춤 계가 여전히 극장무대의 고급 예술을 고수하고 춤 계의 분포도 역시 극장 무대를 중심으로 형성되는 경향을 반영한 셈이다. 4월의 매주 말마다 국립극장 야외놀이마당에서 열린 가족 단위 춤판은 예외로 보인다. 그러므로 1996년도의 춤 계에서 춤의 대중화 내지 활성화는 여전히 극장식 예술 춤의 테두리 내에서 모색되었는데 그 한계는 이른바 대중화를 내건 장기공연에서 나타났다.
1996년도 춤 계에서 줄곧 화제에 오른 것은 장기공연을 시도한 서울발레시어터의 활동이었다. 서울발레시어터는 서울 동숭동의 두레예술문화회관에서 3월 16일∼4월 14일 한 달간 「상하이의 별」, 「카페에서」, 「재회」등의 레퍼토리를 제임스 전의 안무로 올렸다. 몇 해 동안의 장기 흥행이 희귀하지 않은 연극계에 비해 춤의 수명은 길어야 5회 안팎의 공연에 그치기 때문에 몇 해 전 최데레사가 현대무용에서 3주간의 길이로 시도한 바처럼 서울발레시어터는 화제 이상의 주목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쉬운 소재에 재미와 관능미를 가미한 탓이었는지 서울발레시어터의 공연은 관객의 취향과 합세하는 공감대를 형성한 듯했고, 발레의 고답성과 거리를 둔 춤 관념을 대중화 차원에서 환기하는 효과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수지타산의 면에서 흡족하지 않은 최종 명세서는 춤의 자립책이 지속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과제임을 알려준 한편, 장기공연에 따른 흥행 전략이 자칫 선정성과 춤의 질적 하락이라는 함정에 노출되기 쉽다는 지적도 있다.
서울무용제의 세계화를 향한 서울국제무용제로의 변신
1996년도 춤 계에서 또 하나 주시 받는 것은 서울무용제가 서울국제무용제로 탈바꿈한 사실이었다. 세계화의 방향으로 유도하는 내외의 기운에 화답한 결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에 서울국제무용제의 탄생은 춤 계 내부의 결단보다 정책적 고려에 더 영향을 받은 조치라 하겠다. 특히 서울국제무용제의 탄생과 관련하여 춤 계 내부에 공론화과정이 드물었던 점이 이를 깊이 반증한다.
아무튼 서울국제무용제를 계기로 서울무용제가 어떤 형태로든 변신을 기할 것이라는 일말의 기대도 없지 않았다. 그것은 서울무용제의 위상 저하를 우려하는 여론이 거듭되었던 데서도 짐작될 만하다. 그래서 서울무용제 주최측인 한국무용협회는 1995년에 서울무용제 발전 연구위를 구성하여 무용제의 활성화 방안을 도모하였는데 이 와중에 서울국제무용제로의 재편 방향도 아울러 결정되었던 것이다.
1996년도의 서울국제무용제는 해외 초빙 4단체, 경연참가 10단체 외에 자유참가 4단체 등 모두 20단체가 참가하여 겉모습에서 국제적 행사에 근접하는 동시에 전보다 커진 규모를 보여주었다. 결과에 있어 서울국제무용제는 저조한 참가 신청률과 미약한 실험성으로 인해 예년과 대동소이한 편이어서 서울국제무용제라는 새 타이틀을 갖는데 만족해야 했었다. 물론 자유 참가작 제도를 병설하고 관객 동원율이 이전보다 나아진 점을 소득으로 칠지 모르겠으나 자유 참가작 역시 별 관심을 끌지 못했고 관객 또한 중고교의 청소년 관객이 적지 않았다는 반론을 고려해야 한다.
국제무용제 방향을 바꾼 터라 1996년 서울국제무용제는 프랑스의 라피노 무용단과 호주의 리 워렌 무용단 그리고 중국 상하이의 말리화 예술단이 내한하였다. 이별에 대한 경배 의식처럼 보인 라피노 무용단의 「아듀」는 기하학적 무대 구성과 조명 디자인이 인상적 여운을 남긴 반면 내용전달이 심도 깊지 못해 미리부터 전해진 명성에 비해 아쉬움을 남겼다. 「아듀」와 유사하게 매끈한 구성을 느끼게 한 리 워렌 무용단의 「유혹」과 「미끼」에서도 공감대가 얕아서 두 무용단의 초청을 계기로 기대했던 서울 '국제' 무용제의 새로운 면모를 살려지지 않았다. 말리화 예술단의 경우 노래·연주·춤의 종합 공연물을 내놓아 창작제전인 서울국제무용제의 성격과 심한 불균형을 보였을 뿐이다.
국제적 성격의 창작제전이기 위해 초청한 개별단체들이 덜 만족스러웠다 하더라도 이들 단체보다 더 관심을 모은 듯싶은 다국적 창작공연마저 범작에 그쳐 서울 '국제' 무용제는 이름과 내용이 일치하지 않게 되었다. 일회적이나마 프랑스와 한국의 두 안무자가 호주, 스위스, 중국, 한국의 춤꾼들을 기용해서 창작했다 해서 다국적 창작 공연이라 이름 붙여진 「시나위2000」은 인류 내지 인간의 보편적 고향을 찾아가는 여정을 모색하였는데, 두 안무자가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눠 맡았다. 단적으로 이 공연은 동작 활용에서 전반부와 후반부 사이에 현격한 차이를 보여 생경한 느낌만 남겨 놓았다.
서울국제무용제가 1996년도부터 대번에 '국제'를 올려 세우기는 저간의 추이에 비추어 어려울 것임을 모르는 바 아니다. 따라서 여느 해처럼 '무용제'로서의 충실성 여부에 초점을 모으는 것이 자연스러울 터이나, 구태의연한 춤 경향이 주도하는 가운데 실험성이 미진해서 무용제의 새로움은 기대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다만 홍승엽이 안무한 「파란 옷을 입은 원숭이」에서 무용 콩트라는 새로운 장르 개념이 표방된 사실을 1996년도 서울국제무용제의 소득으로 받아들일 만한데 이 작품은 제한된 동작언어 때문에 춤적 감성에 호소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윤미라의 「단장」은 장치 및 의상을 통해 보여준 한국 궁정의 장중 단아한 아치를 오히려 격한 춤사위와 섞음으로써 풀고 어르는 한국 춤 정서를 살리지 못했으며, 강미리의 경우에도 느긋함과 완만성의 깊이로써 풀고자 한 생명의 춤 미학보다 강하게 붉은 색의 대형 둥근 바닥 장치가 두드러져 실험은 시도에 그쳤다. 김은이와 김용철처럼 일부 작품에서 동작 사위의 개발에 착안하여 변모를 꾀한 사례가 없지 않았다 해도 전체적으로 볼 때 서울국제무용제의 명실상부한 변신은 차후의 과제로 미루어졌다.
서울무용제가 서울국제무용제로 개명한 것처럼 해외 춤의 한국 유입은 90년대 중반 춤 계의 흔한 현상이 되었고 1996년도에는 한결 잦아졌다. 국제 춤 사회에서 한국의 지위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통계치가 있지는 않지만, 이와 같은 잦은 유입 즉 내한공연에 힘입어 한국의 지위가 상승하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춤의 국내외 교류가 일상적 관행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는 그렇게 짐작할 만한 근거가 약해진다. 아무튼 잦은 내한공연이 한국으로 하여금 국제 춤 사회에 진입하도록 만든 효과가 있었는지, 1996년도에 내한한 해외 단체 가운데 일부는 해당 국의 한국 춤 시장 진출을 겨냥한 정책적 고려에 의해 내한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6년도에 공연된 대표적인 작품들
1996년도에 내한한 해외단체 중에서 미국 조프리 발레단과 프랑스 프렐조카주 무용단이 비중 있게 받아들여졌다. 조프리 발레단의 「빌보드」는 록 발레의 효시로 꼽힌다. 고전 발레 개념에 머문 국내 춤 시장에서 6월에 「빌보드」가 관심을 모았던 사실은 고전 풍에서 록 풍으로 흘러가는 전체 동향을 반영한 것일 터이지만, 관능미에 힘입은 바 크다는 이유에서 내한 공연의 의의를 낮추어 보는 시각도 있었다. 그러나 이 발레단이 「빌보드」와 함께 소개한 「라운드 오브 에인절스」등 몇몇 레퍼토리가 절제된 짜임새로 높은 완성도를 보여줌으로써 관능에서만 이 발레단의 내한 의의를 평가할 수 없고, 도리어 고전 발레에 의존하는 국내 춤 개념이 동요하고 있다는 점을 시사하였다. 9월에 내한한 ABT의 「지젤」,「백조의 호수」에 대해 등장 춤꾼들의 낮은 지명도 탓도 있겠지만 관객호응도가 높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서 찾아진다.
이에 비해 10월에 내한한 프렐조카주의 공연작 세 편 가운데 「장미의 정령」은 말 그대로 에로티시즘에 기댄 로맨틱한 우아한 미가 돋보였고 「퍼레이드」와 「결혼식」의 내휘두르는 듯한 동작 조형은 현대 발레의 특징을 우리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데 안성맞춤이었다. 6월 리틀엔젤스 회관에서 열린 발레 갈라 공연에서 강수진이 내한하여 인기를 모은 것은 내한이라는 사실 자체보다 강수진이라는 개인에의 관심이 표출된 것으로 보여 발레 개념이 동요하는 와중에서도 이제는 스타에 대한 갈증이 외국인이 아닌 국내 출신의 스타에로 옮겨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페라의 「유령」(3월), 「레 미제라블」(7월)의 두 뮤지컬이 1996년 한 해에 거푸 서울에서 열린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비록 「레 미제라블」이 음악 뮤지컬이긴 하나 뮤지컬 본고장인 미국에서 오래 정평을 얻고 있는 작품들이 같은 해에 나란히 내한한 이면에는 국내에서 뮤지컬에 대한 호기심이 증폭하는 상황이 자리잡고 있었던 때문에 고급예술 그리고 춤의 대중화에 대해 암시하는 바 컸다. 더욱이 「레 미제라블」은 1개월간 장기공연 되었는데 그만큼 한국 뮤지컬 시장의 잠재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6월에 열린 죽산국제예술제에서는 에이코와 고마가 작품 「윈드」로써 초여름의 밤을 장식하였다. 올해로 두 번째이긴 해도 죽산국제예술제는 주로 해외의 전위적인 중견 무용가를 초빙하는 관례를 거듭하여 그 이름을 다지는 저력을 보였다. 9월에 근 열흘동안 열린 창무국제예술제가 올해에는 아프리카 공연예술을 주제로 내걸어 아프리카 연행예술에 대한 호기심을 달래주었다. 이집트, 아이보리 코스트, 잠비아 등지의 4단체가 참여한 이 제전은 규모보다 서유럽과 미국 또는 일본에 치중하는 일반 국제 교류와는 다른 개성 있는 기획으로 평가된다.
8월 초순 부산에서 열린 국제 해변무용제는 소규모이긴 하나 부산의 해양문화 입지조건을 살린 춤제전이었고 엇비슷한 시기에 ADF행사가 부산에서 열렸다. 1994년도의 광주 국제발레페스티벌에서 그런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여 1996년 부산에서 뚜렷해진 지방에서의 자생적인 국제 무용제는 우리 춤 계가 전반적으로 점차 세계 춤 계에 편입되는 추세가 강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국제 교류 혹은 내한 공연이 여느 해보다 잦아진 사실은 조만간 그것이 일반적 행사로 굳어질 것임을 시사하였고, 따라서 1996년도에는 국제 춤 사회에 대한 정보를 신속 정확히 전달하는 대응책이 시급해졌으나 구체적인 움직임은 없었다.
1996년 춤 계의 창작 동향은 대작은 드문 반면 30대가 주도하는 형국이었다. 이른바 세대교체가 완연할 만큼 30대의 활동은 뚜렷했다. 서울발레시어터 역시 30대의 집단이다. 부산시립무용단의 이노연은 다소 예외적인 40대로서 10월에 「심청이」를 내놓아 저력을 보여주었다. 고전 「심청이」의 줄거리를 재해석하기보다는 충실히 쫓으면서 바라 춤, 다듬이질 춤 등등 매우 다양한 춤들을 군데군데 삽입하여 마치 발레의 디베르티스망을 보는 즐거움을 선사한 「심청이」는 고전의 극장춤화 작업에서 시금석이 될 만하다.
5월의 국제현대무용제는 다수의 소품으로 구성되는 중에 안나 소콜로우 무용단을 초빙하여 관심에 답하였다. 그리고 4월의 민족춤제전은 30대가 주축이 되어 환경을 공동 주제로 조명하였는데 여기서 파노라마적 구성을 취한 곽선영의 「침묵의 소리」는 가능성을 과시하였으며 한국무용 사위의 신속하면서도 낮추어선 동작들로 정갈한 꾸밈새를 보인 김미선의 「 메트로폴리스」와 덧뵈기 춤 전통을 충성하게 내비친 이영희의 「검은 바다를 위한 풀이」가 주목을 끌었다. 그 외에 4월에 황미숙은 「선각」으로 나혜석·김일엽·윤심덕을 주제로 신여성 선각자들의 삶을 현대무용 사위로 차근차근 소화해 보였고, 6월에 김승근은 전쟁의 피폐상을 고발한 「전쟁」을 발표하였으나 아쉽게도 에로티시즘 논란만 부각되었다. 뉴욕에서 활동하는 안성수가 9월에 발표한 「퀸」등 4소품에서는 움직임과 계산된 무대 처리가 어울린 작법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5월에는 이정희가 국토순례 춤판인 「봄날 문밖에서의 춤」을 제주도-민통선 사이 각지에서 가져 통일염원을 다졌다. 9월에 손인영은 뉴욕과 워싱턴에서 강강술래로써 다국적 춤꾼들의 공연을 펼쳤다.
1996년도에는 대한무용학회장을 역임한 무용학자이자 최승희의 시동생인 안제승이 타계하였고, 3월에는 춤 비로는 국내 최초로 조택원의 춤 비가 제막되었다. 4월에 현장평론가 김영태는 6순을 기념하여 「풍경을 춤출 수 있을까」를 출판하였다. 그리고 9월에 「무용예술」이 격월간에서 월간으로 전환하여 춤 언론의 정론을 기대케 하였으며, 3월에 국립무용원이 개원하여 무용교육의 새 장이 마련될 것임을 예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