뷰 파인더를 통해 본 전통문양
유영대 / 고려대 교수
우리 어린 시절의 떡은 궁상과 함께 예술적 취향도 있다. 동생이 떡 먹는 것을 보고는 형이 해를 만들어 준다며 테두리를 한입 그득 베어먹는다. 그러고는 다시 반달을 만들어 준다면서 그 나머지 반을 먹어치운다. 이윽고 별을 만들어 준다면서 둘레를 다 입에 넣고 가운데만 조금 남겨준다. 그러면 동생은 울어 제키고……왜 울어 대냐고? 떡으로 예술품을 만들어 줬는데.
찹쌀가루를 시루에 쪄 떡판 위에 올려두고 여러 차례 떡메로 두드려서 찰지게 만든 뒤에, 떡살을 참기름을 두르고 절편을 찍어낸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 절편은 윤기가 흐르고 냄새마저도 고소하다. 맛깔스런 하얀 절편의 표면을 장식하던 문양이 생각나는가. 단순히 동그라미를 파 넣기도 하고, 국화꽃잎을 새기기도 했으며, 여러 개의 세모가 중첩된 추상적이면서도 조화스런 문양 때문에 떡 맛이 한결 풍성했었던 유년의 기억이 있다.
떡살의 기하학적 문양에는 삶의 여러 바쁘고 고달픈 국면과 함께, 쉬어갈 수 있는 여유로운 공간이 있다. 떡살에 문양을 새기는 여유를 우리 조상들은 가졌다.
역사가 씌어지기도 전인 오랜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흙으로 토기를 빚었다. 단순히 양식을 담는 용도 만으로의 그릇으로는 성에 차지 않자, 우리의 조상들은 그 그릇에 다채로운 무늬를 그려 넣기 시작했다. 밋밋한 밥그릇에다 밥을 퍼서 먹던 시절보다, 감촉도 좋고 보기에도 그럴 법한 무늬의 그릇으로 하는 만찬은, 우리 조상들의 식탁을 한결 넉넉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저녁 해거름 판에 선암사에 갔었다. 몇 구비를 돌아 들어간 이 절집의 왼켠에는 엄청나게 큰북이 있다. 마침 저녁예불 올리기 전이어서 법고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운판·목어·법고·종을 차례로 두드리면서 하루의 마무리를 하늘이며 바다며 땅에 고하는 이 장엄한 의식을 보면서, 나는 그때 법고를 두드리는 스님의 표정에 반했다. 눈망울에 초점이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한, 아무 생각도 없는 것 같기도 하면서 욕망으로 들 끊는 표정이기도 한, 그래서 모든 것을 초연한 것 같기도 하고 갈등에 몸부림하는 것 같은, 그이는 승려이면서도 속인이었고, 예술가가 아니면서도 스님도 아니었다.
수양의 도량인 절 집은 그 집치레가 화려하기 이를 데 없다. 단청이며 온갖 문양들은 화려하고도 현란하여 어찌 보면 수양의 문턱과는 거리가 있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목어의 현란한 단청에 쓰인 안료의 화려함이며, 종의 무늬, 법고의 테두리 장식들은 모두 중생에게로 향해 있는 것이다.
우리의 조상들이 창출한 문양은 구체적이고 즉물적인 것에서부터, 구체의 틀을 바닥에 깔면서 도출된 추상도 있어서 그 세계가 무한히 넓고도 아름답다. 우리 조상들이 만들어낸 이 문양들을 화려한 장식이다. 그러나 장식뿐일까. 오히려 우리 삶에 중요한 기능을 하는 것은 아닐까. 이 문양에 매달려, 문양을 찾고, 파인더 안에 가두고 문양의 기능을 찾으려는 사진예술가들을 만나보았다. 10년 이상 문양 사진을 찍어온 전문작가 가운데서 세 분을 만나 그분들의 삶의 이력과 작품세계를 알아보았다.
김대백
김대백 선생은 불교 건축과 문양을 주로 찍는 사진 작가 중에서 가장 나이가 드신 분이다. 우리말에 노익장이 있는데, 김대백 선생은 나이가 드실수록 더욱 젊어져서, 이번 취재 후 바로 중국에 다시 연구 차 갔다.
김대백 선생은 1929년 함경도 태생이다. 한신대학을 졸업했으며, 1950년대에 날리던 잡지 학원의 사진부장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사진학과가 있는 신구전문대와 서울예전에도 출강하였다. 사협에서 주는 가장 권위 있는 상인 사진문화상을 수상한 바 있다.
김대백 선생은 우리 문화의 가장 핵심인 문화재와 전통건축에 깊이 빠져 있다. 그 가운데서도 전통 문양의 세계는 그의 미의식과 합치하는 부분이 가장 많다고 한다. 그가 찍은 사진자료 「문화재도록」은 문화재관리국에서 나왔다. 그리고 「한국 무형문화재 대관」, 「중요 민속자료」 등의 작업을 통하여, 전통의 세계를 밝혀왔다. 중앙일보사에서 나오는 한국의 미 시리즈에 포함된 책 「사원건축」과 「궁실 건축」도 김 선생의 노고가 담겨있다. 그의 작품 「자경전의 십장생 굴뚝」은 우아함의 극치이다. 김 선생은 그가 가장 애정을 기울인 작업으로 서울대에서 정년 퇴임한 탈춤의 권위자 이두현 선생과 함께 편찬한 책 「한국가면 및 가면극」을 들었는데, 이 책은 지금까지도 그 권위가 인정된다.
김대백 선생의 작품은 자연스럽다. 장독대의 배열, 창문의 구성, 담장의 배치, 어느 것 하나도 인위적인 구석이라고는 없다. 김 선생은 자신의 사진작품이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자연이 그렇다고 말했다. 흙을 버무려 토담을 쌓고, 그 위에 기와를 얹어 다양한 무늬를 연출할 때, 소박하면서도 자연과의 조화를 생각할 뿐, 인위적으로 꾸민 흔적이 없다는 것이다.
김 선생이 전남 보성에 왕골로 짠 돗자리를 찍으러 간 적이 있었다. 작업을 하는 아주머니는 돗자리의 머리부분과 꽁지부분에 왕골을 끼워 넣는데, 그 작업과정에 일정한 원칙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색깔로 나타내는 효과가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고 하였다. 왕골 특유의 흰색과 푸른색이 섞여서 연출하는 무늬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이 아름다워 사진을 한참 찍은 다음에 왕골을 엮어 가는 방식에 어떤 원칙이 있느냐고 물어보니, 그 아주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한다고 대답했다. 얼핏 보아 원칙없이 하는 작업이 진정한 아름다움의 근원이라고 생각했다.
김대백 선생은 말한다. "우리 문양은 단순히 재주만은 아닌, 넉넉하고 여유로우면서 착한 마음씨에서만 가능한 선이고 색이다. 그런 것이 집중돼서 묘한 상승효과를 보여준다." 그는 왕골로 돗자리 짜는 아주머니의 세계를, 가장 자연스런 미의식을 사진으로 옮기고자 한다.
조문호
조문호 선생은 생생한 살아있는 사진을 찍는 분이다. 선생의 사진에는 갯벌에서 막 잡아 팔딱팔딱 뛰는 숭어와, 그것을 팔기 위하여 좌판을 펴고 쪼그리고 앉아 있는 주름 깊은 아낙의 거친 모습이 있다. 그런가 하면 화려한 절 집 처마의 단청이 있다.
조 선생은 1947년 생으로 경남 창녕에서 태어났으며 동아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다. 청년기까지 늘 바다를 끼고 살아왔기 때문에 바다가 주는 풍요로움에 젖어 있었다고 한다. 그는 월간 사진 편집장과, 사협에서 간행하는 잡지 월간 사진의 편집장을 거쳐, 지금은 삼성 카메라에 근무하고 있다. 사진과 함께 한 일생이라고 할 수 있다.
조 선생은 동아일보사 주최의 '동아미술제'의 사진 부문에서 대상을 받았으며, 한국방송공사에서 주최한 '아시안 게임 기록사진전'에서도 대상을 받았다.
조문호 선생의 원래관심 관심 분야는 사회 다큐멘터리였다. 앞서도 잠깐 언급한 바 있지만 리얼리즘 계열의 사진이 그의 전공분야라 할 수 있다. 1980년대 중반 프랑스문화원에서 전시한 「전농동 588번지」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사진의 주제는 서민·창녀·민주항쟁 등 민감한 우리의 현실이었다. 그가 기록한 사진을 보면 1980년대의 사회가 보인다. 그의 사진의 주제는 쓸쓸한 애정을 가지고 바라보는 그늘진 구석이었다.
조 선생이 그려내고자 하는 현실, 그가 그려내려는 장면, 좋은 사진을 위하여 피사체에 한 걸음 더 다가서다가 고생한 적도 많다고 한다. 실제로 피사체에 한 걸음 더 다가설 때에 라야 맘에 드는 작품이 되기 때문에,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고생을 많이 했다.
조 선생은 최근 코닥 포토살롱에서 「불교 상징전」을 열었다. 그는 기왕에 가졌던 사회에 대한 관심에다 보태어 우리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돌려보았다. 역사적인 것, 전통적인 것은 힘차게 움직이는 다이내믹은 없지만 세월이 담겨 그의 작품세계를 보완하는데 큰 힘이 되었으며, 그래서 더욱 그 세계에 깊이 경도되었다.
조 선생이 주로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불교 예술품들이다. 그는 단청의 무늬며, 종각에 새겨진 문양들, 돌에 새겨진 조각 그림들에 매료되어 온 절을 헤맨다. 그 절이 주는 평화와 깊이에 여러 번 놀랐다고 한다. 그는 원래 카톨릭 신자였다. 그러나 불교사진을 찍고 절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다보니, 불교가 가진 세계관에 매료되어 불교로 개종하였다.
조 선생은 말한다. "사진에서 테크닉은 중요하다. 거리도 중요하고, 빛의 방향도 고려의 대상이고, 구도 또한 염두에 둬야 한다. 그러나 일단 찍고자 하는 주제에 몰입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사진 찍는 테크닉이 문제가 아니라, 그 세계에 빠져들어야 한다.”
인철 스님
참선하는 스님의 모습은 경건하다. 큰스님의 죽비 치는 소리가 어디선가 들려온다면 그 자리는 숨도 들이쉬지 못할 것이다.
신성한 세계의 모습은 우리가 쉽게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그러한가?
인철 스님은 지금 봉원사에 살고 있다. 봉원사는 우리나라 불교예술의 본산지라 할 수 있다. '범패'며 '단청'의 원칙이 봉원사로부터 나온다. 봉원사에는 우리나라 무형문화재인 단청장 만봉 스님이 있으며, 이 때문에 인철 스님은 더욱 불교예술의 깊은 속내를 담은 사진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인철 스님은 서울에서 태어났으며, 일곱 살에 절에 들어갔다. 그의 득도식은 대동상고 1학년 때였으며, 대원불교대학을 마쳤다. 스님이 사진에 관심을 둔 것은 1970년 무렵 군복무를 정훈감실에서 하면서부터이다. 평소에 사진 찍는 것이 부러웠는데, 군대생활을 하면서 자연스레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서 관심을 가지고 사진을 찍게 되었다.
인철 스님은 주로 사찰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럭비·농구 등 스포츠 사진도 관심 있게 잘 찍는다. 단청 사진은 한없이 정적인 느낌을 주지만 스포츠 사진은 그 자체로 프레임 바깥으로 넘쳐나가려는 다이내믹이 좋다고 하였다. 인철 스님은 사진을 찍다가 다친 적이 많다고 말했다. 피사체에 너무 다가가다가 사고가 난적이 많다고 하였다. 카메라를 깨뜨린 적도 있고 렌즈가 물에 빠진 적이 부지기수라고 하였다.
인철 스님은 몇 해 전 국전에서 「참선」으로 우수상을 받았다. 1988년에는 아사히신문에서 주최한 사진전에서 「예불」로 큰상을 받게 되었다. 그의 사진 책으로는 1989년에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한 영산제의 도록 「영산제」가 있다. 이 책은 동국대학교의 홍윤식 교수가 해설을 붙인 것으로 불교의 의식인 영산제의 과정을 기록한 충실한 작업으로 정평이 나 있다. 스님의 작품이 봉원사에서 열린 '아시아 민속예술제 및 태국 풍물 사진전'에 전시되기도 하였으며, 올해 여의도에서 열린 '불교대전'에도 그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인철 스님은 말한다. "단청이며 문살 모양이 주는 평온함이 한없이 평화롭게 느껴진다. 사찰의 곳곳에 있는 봉황이며 연화문 등은 늘 마음을 고요하게 만든 힘이 있다. 또한 용문양은 힘차게 느껴진다. 지금 이 단청문양의 다소곳함이며, 용문양의 역동적인 것이 우리 문양의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