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조와 절개의 시인- 조지훈
강진호 / 문학평론가
1.
영양으로 향하던 날 아침, 조간신문을 펴니 '「조지훈 전집」23년만에 출간'을 알리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우연의 일치라고는 하나, 그 날은 마침 조지훈의 생가를 찾아가는 날이었으므로 필자로선 그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번 전집은 1973년 일지사에서 펴낸 뒤 절판되었다가 후학들에 의해 정갈한 모습을 갖추어 23년 만에 세상에 다시 나온 것이었다. 지난 3월 「시」, 「시의 원리」, 「한국문화사 서설」, 「채근담」 등 4권이 먼저 나왔고, 그 나머지 「문학론」, 「수필의 미학」, 「지조론」, 「한국 민족운동사」, 「한국학 연구」가 나남 출판사에서 출간됨으로써 총 9권이 완간 되었다. 혹시 그를 「승무」의 시인, 청록파 중의 한사람쯤으로만 알고 있다가 이번에 나온 전집을 본 사람들은 눈이 둥그래졌을지도 모른다. 단순히 시의 영역에 한정되지 않고 문학이론과 한국 문화사, 민속학 등에 두루 발을 뻗치고 있는 그 지적 영역의 깊고 넓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홍일식, 최동호, 인권환, 이동환, 김인환, 홍기삼 등으로 구성된 편집위원들이 조지훈 전집 발간을 두고 '현대정신사의 지도를 완성하는데 기여'하는 일이라고 의의를 천명할 때, 그 '한국 정신사'라는 대목에 새삼 남다른 감이 드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조지훈의 고향인 영양은 이육사의 고향 안동과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안동에서 임하댐을 지나 가릿재 길을 타고 달리다 보면 영양읍에 당도할 수 있고 읍에서 7킬로미터쯤 더 달리면 도계와 가곡의 중간에 있는 주곡동에 이르게 된다. 영양은 현존 작가 이문열이 젊은 시절을 보냈던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일월면이지만 조금 밑으로 내려가면 「젊은 날의 초상」의 창작무대가 되었던 석보면의 장수재가 아직도 산골의 깊은 정취를 간직하고 동해로 뻗어 있다.
주곡동 마을 어귀에 이르면 250년 된 느티나무가 파수꾼처럼 서서 이곳을 찾아온 과객을 먼저 맞이한다. 때때로 승용차가 질주할 뿐 인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고요하고 한가로운 도로변에 늦가을의 나무와 숲과 맑은 하늘이 그림 속에서나 볼 수 있을 '시 마을'의 배경을 그려내고 있다. 이곳에서 시인 한 사람 나오지 않았다면 도리어 이상했을 거라는 생각조차 든다. 느티나무 안쪽 오솔길을 걸어 들면 조지훈 시비를 만날 수 있다.
검은 바탕에 펜으로 그어 놓은 듯 희미한 서체로 그의 시 「빛을 찾아가는 길」이 새겨져 있다. '사슴이랑 이리 함께 산길을 가며 / 바위틈에 어리우는 물을 마시면 / 살아 있는 즐거움의 저 언덕에서 / 아득히 풀피리도 들려 오누나……빛을 찾아가는 길의 나의 노래는 / 슬픈 구름 걷어 가는 바람이 되라……’ 널리 알려진 「승무」 대신에 이 시가 새겨져 의아했으나 시를 읽는 동안 이 시를 선택해서 시비에 옮긴이의 뜻이 헤아려지는 듯하다.
1981년에 장남 광렬씨의 설계로 세워졌다는 시비를 둘러선 숲 저 너머로 어슴푸레하게 펼쳐져 있는 마을이 주곡동이다.
주곡동이 영양 지역에서는 꽤 명망이 높다는 것을 이곳에 와서야 알 수 있었는데 그것은 택시기사가 "아, 한양 조씨들 일가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요?"하고 금방 알음을 해 온 것부터도 그렇다. 이곳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듯 마을 곳곳에는 오래된 기와집들이 즐비했다. 그 중 어떤 것이 시인의 종택인지를 헤아릴 수 없었는데 좀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니, 솟을대문을 앞세운 ꁁ자형의 고색 창연한 기와집 한 채가 눈에 들어 왔다. 뿌리깊은 양반 가의 종택이라는 것이 대뜸 느껴졌는데, 집 앞에는 '호은종택(壺隱宗宅)'이라는 문구를 새겨 넣은 바윗돌 하나가 세워져 있고 그 맞은 편에는 조지훈 생가임을 알리는 안내 표지판이 서 있다. 동네에서 만난 할머니는 이 집을 '조박사 집'이라고 일러주었다. 이 마을에서 나온 박사만 해도 20명이 넘는다고 하니 이 마을의 범상치 못함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주곡동이 그만큼 많은 학자들을 배출한 데에는 이곳에 처음 조씨 가문의 기반을 잡은 선조호은공 조전(趙佺)이래 대대로 학문적 기풍을 전수해 온 내력이 숨어 있었다. 조지훈 생가 문전에 있는 호은(壺隱)종택의 호은(壺隱)은 선조 조전의 호이다. 생가 옆에 호은정(壺隱亭)이라는 현판이 붙은 별채는 당시 이 지방의 유학을 상징하는 정신적, 학문적 산실이었다 한다. 지훈 역시 이런 분위기 속에서 성장했는데, 그가 보통학교에 들어가지 않고 가문에서 세운 월록 서당에서 서당식 교육을 받았던 것은 한학자인 조부 조인석이 일본식 현대교육을 받는 것을 반대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조인석은 지훈이 유교적 전통과 문벌을 계승해줄 것을 원했다고.
지훈에게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조부 조인석은 학문과 문장, 지조가 높은 성균관 유생출신으로 6·25의 와중에 희생된 인물이다. 증조부가 되는 조승기는 구한말 의병대장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한일합방의 소식을 듣고 자결했고, 지훈의 부친인 조헌영은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온 영문학도로서 유학시절부터 해방되기까지 이 호은정에서 청소년을 모아 신학문과 민족정신을 가르쳐 일인들로부터 고초를 당했던 인물이다. 조지훈이 향유(鄕儒)로서 융성한 문벌을 형성한 가문의 종택에서 성장했고, 민족정신과 청렴한 생활을 강조하는 가문의 전통에 많은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이는 유교적 휴머니즘의 색채를 보이는 지훈 시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가를 시사하는 자료이기도 하다.
대문이 활짝 열려 있고, 바깥쪽 행랑채와 사랑채 쪽은 비워져 있으나 안채에서는 누군가 살림을 사는 흔적이 완연한데도 아무리 불러도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집을 비우고 외출을 한 듯했다. 옆집에 사는, 조 시인과는 7촌간 된다는 조동훈씨 댁에 가서 물어보니, 그곳에서 사는 이모 씨라는 분은 인척은 아니고 대신 농사를 지어주며 집을 관리해 주는 사람이라고 했다.
잠시 마을에 머무는 동안 내가 마주친 이는 서너 분의 할머니들뿐이다. 제법 큰 마을인데도 괴괴한 정적만이 감돌았다. 수 백년 동안 융성했던 마을이었으나 시대의 변화 앞에서는 어쩔 수 없어, 고여 있는 듯 퇴락 한 모습을 면하지 못하고 있었다. 쓸쓸히 논길을 걸어 나오는데 조지훈 시 한 수가 머리 속을 스친다. '발 돋우고 눈 들어 아득한 연봉을 바라보나 / 이미 어진 선비의 그림자는 없어…… / 자주 고름에 소리 없이 맺히는 이슬방울……'(「별리」중에서)
2.
지훈 본명 조동탁. 사진으로 보는 그의 모습은 검은 테의 안경과 굳게 다문 다부진 입매가 전형적인 학자요, 고고한 선비다. 고대 교수로 20여 년 간 재직하면서 문학외적인 저술을 많이 남겨 놓았지만 일반에게 잘 알려진 면모는 그가 전통적 서정성을 현대시에 계승 발전시킨 대표적 시인이자,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를 이룬 3인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조지훈 시의 특질이라 할 수 있는 '동양적 자연관, 전통문화에 대한 애착과 향수, 민족정서의 형상화'는 오랜 문학적 방황을 거듭한 끝에 도달한 시 세계였다.
그의 문학적 체험은 9세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대 풍미하던 프로문학의 영향을 받아 처음으로 동요를 지어 본 것이 문학의 첫 경험이었다. 그는 당시 정규과정인 일제교육을 받지 않고 서당에서 한학, 조선어, 수신, 역사 등을 배우며 선비정신과 학자적 탐구정신을 습득해 나갔다. 그러나 일찍이 문학적 재질의 싹을 보였던 까닭에 지훈에게 한학을 가르치던 조부 조인석은 '너는 문인으로 나가라'고 말했다고 한다.
연보에 의하면 시를 본격적으로 습작하기 시작한 것은 16세부터이다.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는 어려서부터 시가(詩歌)를 들려주던 아버지와 큰 형 세림(본명 조동진)이었다. 자전적인 글 「나의 역정」을 통해 그는 자신의 세 살 위인 맏형 세림이 '문학의 싹을 길러준 사람'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지훈과 함께 주곡동 마을의 문집 「꽃 탑」을 펴내기도 하고 소년회를 조직하기도 한 세림은 지훈의 문학적 자질을 일깨워 주었으나 아깝게도 21세에 요절하였다. 이번에 나온 조지훈 전집은 요절시인 조세림이 남긴 「세림시집」 시편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조지훈이 주곡동 마을을 처음 벗어난 것은 17세 때, 서울로 올라온 그는 동향 시인인 오일도가 주재하던 '시원사(詩苑社)'에 머물면서 시 습작을 계속했고 20세가 되는 1939년에 혜화 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조지훈의 시를 연구한 서익환에 의하면, 조지훈은 36년에서 39년에 이르는 습작기의 시기에 시문학파의 영향을 받았으며, 또 한편으로는 와일드의 심미주의, 보들레르의 상징주의, 아방가르드, 쉬르, 포오멀, 다다 등에 경도함과 함께 도연명, 이백, 두보, 백낙천 같은 동양의 시인들도 두루 섭렵하는 등 동·서양에 걸친 방대한 독서체험을 가졌다. 이 시기에 창작된 시들은 심미주의 경향의 시, 모더니즘 경향의 시, 전통지향의 시들이 혼재되어 있는데 이러한 시적 혼돈은 유교가문에서 습득한 생래적인 민족주의적 정서와 문학적 체험 사이에서 비롯된 정신적, 사상적 갈등이라는 게 서익환의 지적이다. 심미적, 주지적 시풍의 영향권 아래 있었던 습작기의 이런 혼돈과 갈등은 지훈이 후에 자신 속에 내재된 근원적 세계를 깨우치는 과정을 통해 그만의 시적 자아를 획득해 나가게 된다.
혜화 전문학교의 입학은 지훈이 최초로 정규교육과정을 밟았다는 점, 이를 통해 유교적 인간관을 가진 그가 불교적인 정신세계와 조우하면서 정신 세계를 넓혀간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불교적, 선적 세계가 그의 시 세계에 본격적으로 스며드는 것이다. 그는 또한 서울에 체류하는 동안 '극예술연구회', '중앙무대', '낭만좌'와 '조선어학회'를 드나들며 수많은 선배 문인, 예술인, 학자들과도 교류한다. 이때 그가 만난 문인들이 한용운, 서정주, 김달진 등인데 이들로부터 '지절의 민족정신', '동양적인 체념과 생활이념', '순수 서정'의 시정신 등을 계승받는다. 한편으로는 니체, 쇠스토프, 메레주코프스키 등의 사상을 책을 통해 접한 것도 그의 시 세계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본다. 지훈은 1939년 「문장」에 「고풍의상」이, 그 다음해에 「봉황수」, 「향문」 등이 2차 추천됨으로써 시단에 등장하는데, 흥미로운 것은 지훈의 시를 추천해 준 사람이 정지용이라는 것. 정지용은 조지훈이 서구 취향의 시인보다는 '위축된 정신이나마 조선의 자연풍토와 조선인적 서정과 최후로 언어 문자를 고수하는' 전통지향의 시인이 될 것을 권고한 시인이다. 지훈이 시적 방향을 정하는데 그의 추천과 권고가 일정한 작용을 하였다는 것은 여러 문헌에서 지적된 바 있다.
지훈의 데뷔작 「고풍의상」은 조지훈이 '서구 시를 모방하던 그때까지의 습작을 탈각하고 자기자신의 시를 정립하려고 한 첫 작품'(「나의 역정」)이라고 밝힌 만큼 그의 시력에서 의미가 큰 작품이다.
하늘로 날을 듯이 길게 뽑은 부연끝 풍경이 운다.
처마끝 곱게 늘이운 주렴에 반월(半月)이 숨어
아른아른 봄밤이 두견이 소리처럼 깊어가는 밤
곱아라 고아와 진정 아름다운지고
파르란 구슬빛 바탕에
자지빛 호장을 받친 호장저고리
호장저고리 하얀 동정이 환하니 밝도소이다
-「고풍의상」 중 일부
봄밤과 처마의 곡선, 아름다운 전통 한옥을 배경으로 한 이 시는 '풍경 / 반월 / 주렴 / 두견' 등의 소재와 더불어 한복의 아름다운 색감과 곡선미, 또 그것을 입은 여인의 자태와 율동미가 어우러지면서 시적 심미감이 고조되며, 시인은 그 속에서 물아일체의 경지에 흠뻑 젖어 있음을 보여준다. '고아라 / 밝도소이다 / 흔들어지다'와 같이 어미 처리의 섬세함과 순수한 우리말에 대한 인식도 돋보인다. 일제의 침탈 속에서 역사와 전통, 나아가 민족언어마저 말살되어 가는 시대적 배경 속에서 왜 시인은 고전 의상에 애착을 보이고 그것에 찬탄과 탐미의 시선을 보내는가?
여기서 시인의 내면 속에 내재된 지향과 열망을 볼 수 있다. 즉, 「고풍의상」은 그 자체로서 '조선심(朝鮮心)'을 표현하고 있으며, 민족의식의 표상이라 할 수 있는 제재이다. 이 시는 옛것에 대한 회고와 애수에 머무르지 않고 고전의상의 재발견을 통해 역사와 민족이 살아 있음을 증거하고 싶어하는 시인의 열망과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정지용이 이 시에 대해 '고유한 하늘 바탕이나 고매한 자기 살결에 무시로 거래하는 일주운가와 같이 자연과 인공의 극치'라고 평하면서 '시단에 하나의 「신고전」을 소개'한다는 추천사를 쓴 점이 인상적이다. 정지용은 지훈 시가 앞으로 고전적인 작풍으로 나갈 것임을 예견하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추천작 「봉황수(鳳凰愁)」도 '사라져 가는 것, 퇴락 해 가는 것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통해 민족혼의 부활과 국권 회복의 꿈을 노래'한 작품이다.
그의 삶과 시에 가장 큰 분기점을 마련해 준 때가 있으니, 그것은 혜화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오대산 월정사에서 외전강사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때 그는 다른 자리를 마다하고 굳이 사찰의 강원을 택했다고 한다. 시인의 길에 들어선 그로선 자기 침잠에 몰두할만한 환경으로 산사를 택한 것이 아니었을까. 경(經)을 읽고 싶으면 경을 읽고, 시를 읽고 싶으면 시를 읽고, 예불을 하고 싶으면 예불을 하고, 술을 먹고 싶으면 술을 마실 수 있는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생활이 나중에 병을 얻어 산을 내려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월정사 시절에 얽힌 한 토막의 일화가 있다. 먹물 장삼 대신 흰 두루마기를 입고 긴 머리를 한 그의 모습은 오대산에 괴승이 나타났다는 소문으로 비화되어 강릉에서 신문기자가 취재하러 오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그는 학승들과 「시문선답」과 같은 대화를 하며 문학교육과 선미를 가르치고 배웠다 한다.
승 : '어디가 그대의 고향인가'
나 : '구름 좋고 달 밝은 곳 서역만리길'
(하략)
-「선문시답(禪問詩答)」중에서
산사생활을 통해 조지훈은 시선일여(詩禪一如)의 시정신을 깨우치게 되며 시인으로서의 확고한 작품세계를 굳히게 된다. 그가 궁극적으로 도달한 것은 동양적 자연의 세계였다. 그리고 그 자연은 불교와 선미가 용해된 자연이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대해서는 그도 다음과 같이 회고한 적이 있다.
절간생활은 나의 시를 또 한 번 변하게 하였다. 그것은 변이 된 생활의 쾌적미와 당시 내가 심취했던 시선일여의 경지 때문이었다. 일체의 정서와 주관을 배제하고 자연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고 관조하는 서경의 소곡조를 찾았다…… 감각과 예지 그대로의 결정으로서 정적을 생동태에서 파악하고 생동태를 정지태(靜止態)로 포착하는 기법을 애용하였다.
-「비승비속지탄」 중에서
「산방(山房)」, 「산1」, 「산2」, 「유곡(幽谷)」 등의 시편을 보면 당시 지훈의 눈에 비친 동양적 자연의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조부 밑에서 정통 한문 교육을 받고 성장한 만큼 지훈의 한시적 교양은 상당한 수준이었고 이번 전집에도 그가 번역한 한시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의 시는 한시적 교양과 선적 감각이 함께 어우러지는 특색을 보이는데 김재홍은 이 점을 들어 그의 시가 만해 시와 근친관계를 보인다고 본다. 한편으로는 자연표상을 통해 인생의 존재론적 의미를 탐구한다는 점에서 소월 시와 닿아 있으며 이 점에서 지훈 시가 서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전통 시를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
또 하나, 그의 초기 시 세계가 보여주는 특질은 '조화와 교감'의 미학이다. 「승무」에서 볼 수 있는 '진, 선, 미 합일의 미학', 「고사(古寺)」에서 볼 수 있는 '정적 미, 고취 미를 바탕으로 한 선감각과 화해의 미학'은 지훈에게 시와 선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어우러져 조화되면서 멋스러움으로 표출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자연의 세계에 머무르기엔 나라 안팎의 정세가 너무나 가파르게 전개되고 있었다. 당시는 '암흑기'라고 불리는 일제의 탄압이 가장 극악했던 시절이었다. 조지훈은 황국신민화 정책의 암울한 비보 속에서 어느 날 「문장」지 폐간호를 받는가 하면 월정사 서실 마저 수색 당하는 충격적인 일을 겪게 된다. 그는 통음의 시간을 보내다 졸도하는 일까지 있었다. 오대산에서 내려와 요양 차 서울에 상경한 이후 3년간은 방랑과 절망의 시기였다. 경주에 있는 목월을 만나러 가거나, 친구들을 방문하면서 암울한 마음을 달래던 그는 1943년 가을에 아예 주곡동으로 낙향해 버리고 만다. 대부분의 문인들이 '조선문인보국회'라는 친일문학 단체에 가담한 상황에서 그 역시 친일단체의 입회를 강요받았으나, 차라리 붓을 꺾는 쪽을 택했던 것이다. 나중에 「지조론」이라는 글을 쓸 만큼, 변절에 대해서 완곡한 입장을 가졌던 그가 불의에 순응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낙향 이후의 심경에 대해서는 「무국어(撫菊語)」라는 글을 통해 엿볼 수 있다.
하는 수 없이 낙향해 버리고 만 것이 어느덧 철 수가 바뀌었다. 날마다 산을 바라보고, 밤마다 물소리를 이웃하는 것밖에, 나는 책 한 권 바로 읽지 못하고 소란한 세상을 병든 몸으로 숨어서 살아간다. 친한 벗에게는 편지 한 장 오지 않고, 들리는 소문이란 쫓기는 백성의 울부짖음밖에 아무 것도 없었다. / 어쩌지 못할 설움 속에 그래도 울먹거리는 마음을 다소 가라앉히기는 노란 국화가 피면서부터였다……. 아아 국화가 나에게 한갓 슬픔을 더해준다 기로서니, 영혼과 육신이 함께 목마른 지금의 나에게 국화가 없으면 낙엽이 창살을 휘몰아치는 기나긴 가을밤을 어떻게 견디랴.
-「무국어」 중에서
3.
해방과 함께 그의 생애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된다. 그는 사회활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한편, 교육자로서의 새 삶을 시작하였다. 혜화 전문학교, 경기 여고, 서울여의대, 동국대학을 거쳐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부임하게 된다. 시인으로서 창작도 활발히 해 나갔다.
유치환, 김동리, 박두진, 서정주, 조연현 등과 함께 순수문학을 옹호하고 민족문단을 건설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그가 <청년문학가협회> 창립대회에서 발표한 「해방시단의 과제」는 그의 문학관을 드러내 주는 글이다. 「순수시의 지향」(47), 「정치주의 문학의 정체」(47),「고전주의의 현대적 의의」(49), 「현대문학의 고전적 의의」(49) 등 순수문학적인 관점의 글들이 이때 쓰여지게 되며 최초의 시인론인 「김영랑론」도 이 시기에 쓰여졌다. 해방 후 한국 현대시문학사에 기록될 만한 일이 1946년에 일어난다.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 세 사람의 시를 엮은 시집 「청록집」이 발간된 것이다. 어느 눈오는 날 밤에 성북동 지훈의 집에서 원고를 뽑았고 거기에 목월이 「청록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박두진이 근무하던 을유문화사에서 이를 시집으로 발간하였다. 이 세 사람은 모두 「문장」을 통해 등단한 시인이었고, 후일 청록집이 세 시인 모두의 시적 고향이 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자못 뜻깊은 일이었다. 지훈도 밝힌 바, 「청록집」은 암흑기 상황에서 발표할래야 발표할 수 없었던 시를 발표할 수 있게 된 해방의 감격과 혼란한 정치적 시류 속에서 시의 올바른 길을 제시하려는 의욕과 우리 시의 새로운 전개를 위한 교량으로서의 전통을 집성해 놓은 것이었다. 그것이 시사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가는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서 그들이 추구한 자연의 발견과 그 탐구의 노력은 그것 자체가 신선한 생동감을 던져준다'는 김재홍의 말에서도 알 수 있는 일이다.
50년대는 조지훈에게 가장 화려한 시절이었지만, 6·25전쟁으로 조부와 부친(납북된 후 소식이 끊김)과 어머니, 그리고 아우까지 잃는 불행한 가족 사와 함께 시작된 연대였다. 피난지에서도 종군 작가단을 결성하여 종군한 그는 강한 휴머니즘의 태도와 반공의식, 자유와 정의에 대한 강렬한 의지를 갖게 된다. 전쟁시의 명편 중의 하나로 꼽히는 「다부원(多富院)에서」를 보면 잔혹한 전쟁을 통해 허망한 인간 상실과 파멸의 현장을 본 그의 비관적인 심경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일찍이 한 가을 하늘 아래 목숨 받아
움직이던 生靈들이 이제
싸늘한 가을 바람에 오히려
긴 고등어 냄새로 썩고 있는 多富院
진실로 운명의 말미암음이 없고
그것을 또한 믿을 수가 없다면
이 가련한 주검에 무슨 안식이 있느냐
살아서 다시 보는 多富院은
죽은 자도 산 자도 다 함께
安住의 집이 없고 바람만 분다.
-「다부원」 중에서
이제 조지훈의 시 세계는 고전적인 정서와 시선일체의 초기 시 세계에서 해방 전후사와 전쟁, 그리고 4·19를 겪으며 점차 역사와 현실의 세계로 확대되어간다.
고난과 충격의 시기 속에서도 시 창작을 중단하지 않은 그는 1952년 첫 개인시집인 「풀잎단장」을 발간하고 이후, 「조지훈 시선」, 「역사 앞에서」 등을 펴내며 개인적으로는 가장 화려한 문단시절을 보내게 된다. 시뿐 아니라 비평활동도 활발하게 해나갔다. 특히 그가 쓴 「시의 원리」(53)는 현대시문학사상 최초의 정통 이론서로, 그의 문학활동 중 가장 중요한 업적으로 꼽히는 저서이다.
말년의 그는 「여운」(마지막 시집)의 발간 외에는 학문적 탐구와 저술 활동에 더 힘을 기울였다. 60년대에 그가 펼친 저술활동은 실로 화려한 것이었다. 주요 저서의 목록만 봐도 「한국현대시사의 쟁점」(60), 「한국문학의 전통」(63), 「한국현대시문학사」(64), 「한국문화사서설」(64), 「한국문화사대계」중 제1권 「민족 국가사」(64), 「신라가요연구논고」(64), 「한국민속학소사」(64), 「한국민족운동사」(63) 등 그 영역의 광활함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민속학에 대한 관심도 깊어 196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로 '무속전시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조지훈에 대한 연구는 대부분 시론에 집중되고 있고 전체적인 연구는 미흡한 편이다. 그 이유 중에는 그의 지적 편력이 이렇듯 방대한 탓도 있다. 그는 단순히 시인의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넓은 영역에서 정신적 탐구를 부단히 개척해 나간 문단과 학계의 거물이기에 그의 학문과 문학을 포괄하는 연구작업은 사실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시인, 지사, 국학자, 논객이라는 화려한 수식어가 붙는 그의 일생은 생각보다 짧았다. 기관지 확장 및 폐기종이라는 병을 얻어 아까운 생을 마감할 때가 1968년. 주곡동 생가에서 부친 조헌영과 박노미 사이에서 3남 1녀 중 두 번째 아들로 태어났을 때가 1920년이었으니 겨우 48년의 생애를 살다 간 것이다.
주곡동에 와서 한 가지 의아스러운 것은 이곳에 한국문인협회의 문학상징 동판조차 서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마을 어귀에 시비가 세워져 있고 집 앞에 생가를 알리는 표지가 있다고는 하나, 이 정도도 가족들이 사재를 털어 마련해 놓은 것임이 분명하다. 아까 지나왔던 마을 어귀에 '조지훈 시인의 고향'이라고 써 붙인 안내 표지판이라도 서 있다면 좋을 것이다. 행여 그곳을 우연히 지나가던 사람이 '이 아름다운 곳이 「승무」의 시인인 조지훈의 고향이었단 말이지'하고 새삼 다른 느낌을 가지고 이곳을 둘러볼 것이기 때문이다. 250년 생 느티나무가 있는 길의 안쪽에 조지훈 시비가 있다고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시비 안내표지도 없으니 말이다. 숲 속에 은폐된 산사처럼 시인의 마을도 사람들의 시야에서 한 걸음 비껴난 채 고적하기만 하다.
4.
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제1회 홍명희 문학제의 소식을 접하였다. 올해 초, 사랑채 하나만 남은 괴산의 초라한 고택을 보고 왔던 필자로선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제월리의 사랑채 앞마당에 사람들이 둘러서서 홍명희의 문학세계에 대한 안내자의 설명을 듣는 화면이 뉴스를 통해 나오기도 하고 최근엔 모 방송국을 통해 「임꺽정」이 대하드라마로 제작되어 방송되고 있으니, 서점에서 「임꺽정」에 머무르는 독자들의 시선이 남다를 것이라는 점, 아울러 작가 홍명희에 대한 관심이 제고될 것이라는 기대와 설렘이 없지 않은 것이다.
올해는 문학의 해이다. 한 해의 막바지에 이르른 시점에서 돌아보는 '문학의 해'를 바라보는 필자의 심정은 다소 착잡하다. 국가적인 문호가 우연히 들렀던 여관까지 명패를 붙이고, 그것을 지역의 영예로 간직하는 외국의 경우를 자꾸 들먹이는 것은 그만큼 우리 문화유산의 현주소가 초라하기 때문이 아닌가. 작가가 생전에 사용하던 온갖 자질구레한 유품까지 철저히 보전되고 국가적인 유적으로 관리되는 나라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게 방치된 작가가 많았음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본 현실이었다. 더욱이 채만식이나 염상섭 같은 작가의 경우도 변변한 기념관 하나, 제대로 된 표지판 하나 세워주지 못하고 있는 현실 앞에 서고 보면 민망함마저 없지 않다. 아직 우리 문화유산의 현주소는 '길 닦기' 조차 제대로 안되어 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과소한 평가일까.
영양 행을 마지막으로 생가탐방을 타이틀로 한 연재는 일단 막을 내리는 것이지만, 발길이 여기서 멈춰서는 안될 것이다. 문화유산 찾기는 유행 같은 일과성 바람이 아니다. 각지에 흩어진 은폐된 문학유산을 찾아 그 먼지를 닦아내고 그 터를 바로 세우고 사람들이 자꾸 찾아주어 길을 만들어 주는 것은 고인이 된 작가들 뒤에 남겨진 산 자의 몫이다. 문학을 사랑하고 작가를 아끼는 이들의 마음속에서 작가는 불멸한다. 보이지 않는 문화의 힘은 그 속에서 배양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