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 문화유산 알고 찾고 가꾸자 . 문화유산 바로 세우기
문화유산 바로 세우기와 민족정기
신찬균 / 세계일보 논설위원
올해는 '97문화유산의 해'다. 새삼스럽게 민족의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그 정신을 찾기 위해 마련한 해다. 그 표어를 '민족의 얼 문화유산 알고 찾고 가꾸자'와 '문화유산 사랑하여 민족문화 꽃피우자'로 정했다. 유네스코가 세계 문화유산으로 석굴암, 해인사 팔만대장경 판전, 종묘 등 세 건의 문화재를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한 뒤여서 우리 민족유산을 세계적으로 알리는 계기가 되고 있다.
사업 내용으로는 역사의 현장 재조명을 통해 국민들이 문화유산 가치를 알도록 했고 전통놀이나 민속문화를 발굴해서 잊혀져 가는 민족의 맥을 잇도록 했다. 특히 북한문화재, 그 가운데서도 북의 민속이나 놀이는 체제에 밀려 인멸됐으나 오히려 남에서는 보존 계승되고 있다. 실향민들에 의해 전승되고 문화재로 지정되어 뿌리뽑힌 민속예술이 낯선 땅에서 전승되고 있는 셈이다.
■ 문화유산 바로 세우기
불행하게도 우리 민족의 얼인 문화재 지정은 일제강점기의 '조선보물 고적명승 천연기념물 보존령'에 의해 시작했다. 일제가 경주, 개성 등에서 마구 캐낸 금관이나 고려청자를 처리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마련한 제도였다.
당시 일본에는 '국보보존법'이 있어서 그들의 유물은 평가이상으로 지정됐지만 우리 문화재는 겨우 보물로만 제한했고 그 이름조차도 왜곡 평가된 명칭을 새로 만들었다. 우리 문화가 그들보다 열등할 뿐만 아니라 식민지 합리화를 위장하기 위한 간교한 문화정책의 결과였다.
문화재위원회는 일제 강점기에 지정된 5백3건의 문화재를 찾게 하거나 등급을 조정키로 했다. 1997년 문화유산의 해를 앞두고 진행된 우리 문화재의 명예회복은 치욕의 역사를 상징했던 옛 총독부 건물의 철거와 함께 '문화유산 역사 바로 세우기'의 결실로 평가된다. 뒤늦게 이름을 찾은 문화재 가운데 일제가 방위에 따라 이름을 굳힌 남대문과 동대문이 있었고, 마치 물품창고처럼 비하시킨 '해인사 대장경 경판고'를 '경판전'으로 바꿨다. 또 수원성곽도'화성'으로 옛 이름을 찾게 됐다.
이번 재평가 작업은 일제에 의해 비뚤어진 우리 문화유산을 바로잡고 식민지사관을 청산하는데 그 의미가 있다. 일제가 깎아 내린 민족유산을 우리의 눈과 가치로 재평가하고 자리 매김을 다시 하는 일이야말로 민족자존의 절실한 과제이기 때문이다.
명칭이 변경되고 등급이 조정된 문화재 가운데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쌓은 사적 9호 울산학성 등 3개의 성도 포함돼 있다. 이 왜성들은 모두 사적에서 지방문화재로 격하되었고 명칭 뒤에 '왜성(倭城)이란 말이 붙게 했다. 다만 한 나라를 대표하는 국보 1호를 이름만 바꿔 유지한다는 비판도 있으나 그 번호는 서열을 의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앞으로 도 소중한 문화재가 나타나면 계속 다시 지정해야 하기 때문에 현재로는 큰 의미가 없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번 일제 지정문화재 재평가 작업은 유형문화재뿐만 아니라 무형문화재까지도 확대되기를 바란다. 예컨대 조선총독부가 1940년에 조사한 전국의 동제(洞祭)는 모두 5백5개에 이르렀으나 그 뒤 '미신(迷信)'이라는 이름으로 대부분 철거된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이전에 일제가 펴낸 조선어 사전에는 미신이라는 단어가 없었던 것으로 미뤄 일제는 고의적으로 전통문화를 말살시키기 위해 우리의 전통신앙을 열등한 것으로 평가한 것이다. 따라서 남산에서 선바위로 쫓겨난 조선조의 국사당(國死堂)의 복원문제도 검토되기를 바란다. 문화재란 눈에 보이는 건조물이나 고미술품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재는 그 민족의 상징이며 역사 속에서 살아 쉬는 조상의 얼이다. 억울하게 숨을 죽이던 우리 문화유산을 떳떳하게 되살리는 작업은 이 시대의 과제임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
■ 해외에 흩어진 한국문화재 현주소
신안(新案)유물이 일본 골동품 상점에 버젓이 진열되어 판매된 적이 있었다. 1983년 9월 20일, 도쿄의 긴자(銀座) 천정목의 뒷골목을 걷다가 진열장 창에 써놓은 '신안유적유물'이란 붓글씨를 발견했다.
이 지역은 고미술상들이 밀집된 고풍스러운 분위기를 지닌 곳이어서 동경을 찾는 애호가들은 꼭 한번씩 들르는 곳이다.
진열장에 세워둔 유물은 당시 국내 도록에도 소개되지 않은 청자양각문병과 청자항아리로 한 눈에 봐도 명품이었다. 높이 45센티미터에 달하는 청자양각꽃병은 꽃 모양을 밖으로 도드라지게 만든 송(宋)대 도자기로 값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그러나 상점 안에 진열된 청자는 1백80만 엔(당시 5백만 원 상당)을 호가하고 있었다.
주인은 구입 경위나 그 밖의 얘기에는 입을 다물었고 더구나 필자가 한국인임을 알고 몹시 경계하는 눈치였다. 공공연한 비밀이었지만 가게 진열장에 신안유물이라고 써놓고 판매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사실이 국내 신문에 보도되고 문공부의 조사단이 파견돼 그후 양성거래는 없어졌다. 험구가들은 일본으로 흘러간 신안유물의 숫자가 인양된 도지기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비아냥거렸다. 하나 그 말이 근거 없이 떠도는 말만은 아니라는 후문이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문화재는 일본인들에 의해 수없이 침탈되고 유출되었다. 그 숫자는 자그마치 10만점으로 추정된다. 멀리는 임진왜란에서부터 가까이는 일제 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일제는 우리의 문화유산을 수없이 가져간 것이다.
현재 일본이 가지고 있는 한국문화재는 얼마나 될까 ?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일본내의 한국문화재는 국보급의 불상만도 3백30점, 고미술자 자료 2백90여 점, 전적류 목록 8백 페이지에 이른다. 그밖에 더 정확한 숫자는 파악할 수가 없다. 대부분 도굴과 약탈에 의해서 일본으로 반출됐기 때문에 소유주들이 공개를 꺼리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에 따라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에 의해서 일본 정부 소유 문화재 1천 3백26점이 반환된 바 있다. 하나 일본 전체에 흩어진 한국문화재는 조사할 수조차 없다. 공·시립 박물관 등에 소장된 것은 소재가 드러나고 있지만 개인소장 문화재는 파악조차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무덤 속에 있는 고려 자기가 재산이 된다는 사실을 일러준 사람들은 일본인 호리꾼(호리는 도굴의 일본말)들이었다. 1905년을 전후해서 일제는 한반도에 물밀듯이 밀려와 닥치는 대로 고분을 파헤치고 고려자기를 약탈해갔다.
당시 일제의 만행은 '후손들이 펄펄 뛰는 가운데 총칼로 위협하고 무덤을 파서 고려자기를 꺼내갔다'(황수영,「일제의 한국문화재 침탈사」)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사회윤리관으로는 남의 무덤을 파는 일이 가장 못된 짓으로 여겨지던 때였다. '굴총(掘塚)할 놈'이라는 욕은 남의 무덤이나 파는 자라는 뜻이어서 사람으로서는 할 짓이 아니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한반도 침략의 원흉인 이토오 히로부미를 따라 한국에 왔던 변호사 미야키는 '전부터 나는 옛 도자기에 깊은 감동을 느꼈는데, 1906년 한국에 애써 가게 된 것은 실은 한국의 옛 도자기의 친밀감에 이끌린 때문이었다'고 회상한 적이 있다. 이토오는 한반도를 침략한 원흉이기도 하지만 고려청자를 꺼내기 위해 고려 고분을 파괴한 패륜아이기도 했다.
다시 변호사 미야키의 회상을 들어보면 '얼마든지 좋으니 고려자기를 가져 오라. 몽땅 사자'고 혈안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한꺼번에 수집 점씩 선물로 보냈기 때문에 한때는 서울 장안에 고려자기가 동이 난 적이 있었다. 이렇게 사들인 골동품들은 박물관에 팔아 횡재를 하기도 했다고 했다.
과거의 이왕가(李王家) 박물관 콜렉션의 고려자기 6천5백62점의 출토지 99퍼센트가 개성 부근의 고분에서 출토된 것이었다. 어느 날 이토오가 고려자기를 고종에게 구경시켜 주자 왕은 '이 물건은 어디서 나온 것인가. 이런 물건은 우리 나라에 없다'고 반문했다는 기록이 있다.
현재 일본에 있는 한국문화재를 보면 내각분고에 있는 조선전적 2백50여 종 (임란 때 반출)을 비롯해서 동경박물관 소장의 청자와 고고 자료 1천 점이 있다.
대학박물관 소장유물은 동경대(東京大)의 평양출토 유물 1백20점, 경도대(京都大)의 전적류 200여 점, 천리대(天理大)의「몽유도원도」등 1백여 점이 있다.
개인소장 한국문화재는 일일이 파악할 수 없지만 오쿠라 콜렉션과 아다카 콜렉션이 대표적이다. 1982년 동경박물관에 기증된 오쿠라 콜렉션은 도자기, 회화, 불상 등 1천여 점으로 한일회담 당시 한국 측이 반환을 요구할 만큼 문화재급 유물들이다. 오쿠라는 1903년 한국에 와서 닥치는 대로 한국문화재를 수집했던 인물이다. 특히 5백59점의 고고 자료는 학술적인 가치도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아다카 콜렉션도 오쿠라와 쌍벽을 이룬다. 오사카박물관에 기증된 유물 가운데는 5개의 금관을 비롯해서 삼국시대의 철제투구와 갑옷 등 국내에서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유물들이 있었다.
공공기관이 소장하고 있는 한국문화재들은 그나마 소재가 파악되고 연구자료로도 공개되지만 개인소장은 그나마도 어렵다. 1978년 10월 대화문화관의 고려 불화전에는 우리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불화들이 쏟아져 나왔다.
일본의 한국문화재는 1965년 한일협정에 의해 일본정부 소유 1천45백32점과 조선총독부가 동경으로 반출했던 창령고분 출토유물 1백6점이 반환된 적이 있다.
한편 현재 해외에 흩어진 우리 문화재는 17개국 6만4천8백 점으로 밝혀졌다. 국가별로는 일본이 2만9천8백 점으로 가장 많고 미국이 1만4천562점으로 그 다음이다. 영국은 7천198점이고 독일 5천246점 등 비교적 역사적으로 강대국이었던 나라에서 많이 소장하고 있다. 그밖에는 러시아 2천560점이고, 프랑스 1천518점, 덴마크 1천470점, 중국 1천434점, 오스트리아 679점, 체코 250점, 폴란드 135점, 헝가리 58점, 벨기에 56점, 스웨덴 48점, 네덜란드 8점, 스위스 1점, 캐나다 1점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환수된 문화재는 일본으로부터 받은 1천4백여 점을 비롯해서 일본, 미국, 프랑스, 뉴질랜드 등 4개국으로부터 총 3천5백14점을 되찾아 왔다. 여기엔 재작년 뉴질랜드 오클랜드박물관에 소장된 청자상감국문화유병 등 1백93점과 작년 미국 경매시장을 통해 국립박물관이 사들이 7점의 문화재도 포함돼 있다.
■ 떠도는 북(北)의 민속(民俗)
민속은 한 민족이 살아온 삶의 발자취다. 거기에는 놀이문화도 있고 즐거울 때나 슬플 때 함께 할 노래나 춤도 포함되어 있다. 흔히 민속문화의 형식이나 내용이 똑같을 때 민족의 동질성이란 말을 사용한다. 북한의 민속예술이 더러는 선을 보인 적도 있지만 원형보다는 변질되었고 또 본래의 모습을 지녔다 해도 드물다. 민족의 동질성을 찾는 작업은 똑같은 문화와 민속을 찾아 서로가 한 젖줄임을 확인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지난해 경기도 성남시에서 막을 내린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는 북녘의 민속으로 북청의 「토성관원놀이」,영변의「성화대제」,평안도의「서도소리 산타령」이 선보였다. 북에서는 이미 사라진 민속예술이 낯선 땅에서 뿌리박고 전승되고 있는 종목들이다. 고향에서 민속예술을 남으로 가져왔다가 계승한 1세대들은 대부분 유명을 달리하거나 연로해서 제대로 연희를 할 수가 없다.
다만 그 2세들이나 후계자들이 가본 적도 없는 북녘 고향의 민속예술을 이어가고 있다. 유형(有形)의 고향은 없지만 그 곳에서 농사지으며 즐겼던 무형(無形)의 민속은 오히려 남녘에서 더 잘 보존돼가고 있는 형편이다.
북에서도 봉산탈춤을 연희하고 해석하지만 그 방향은 전혀 다르다. 양반이나 노승같은 계층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확대해석하고 저항정신이나 혁명정신을 일으킬 수 있는 쪽으로만 초점을 돌린다. 재작년까지 출연한 북청(北靑) 민요인 「돈돌라리」는 수 백년 전부터 전해오는 민속놀이였으나 북에서는 체제 수호를 방편으로 변질시켰다.
금년에 나온 「토성 관원놀이」는 북한에서도 문화유산(평양사회과학원 고고민속학연구실)으로 소개됐고 고정옥의 「조선구전문학연구실」에도 조사 발표했다. 남에서 재현된 놀이는 북청 출신으로 고향에서 참여했던 실향민의 증언과 북한의 조사보고서를 종합한 것이다. 고로(古老)들의 증언으로는 8·15당시까지도 숙신(肅愼)의 도읍터로 알려진 토성에서 놀이가 계속됐다고 전한다.
북의 민요로 관중들의 심금을 울렸던 함북의「애원성(哀怨聲)」은 대회의 단골 종목으로 나오던 민속이었는데 수 년 전부터 출연을 하지 않는다. 농사지을 땅은 좁고 여진족과 싸움에 시달리는데 다가 사화담쟁의 재물로 유배당한 유랑민들이 많았던 함경도의 애환을 담은 노래다. '무산령 너머에 정든 안깐(부인) 두고 / 두만강 뗏목에 이 내 몸 실었네'로 끝나는 이 민요는 지금도 식량이 모자라 국경을 넘는 북한 주민의 고통을 대변해 주고 있다.
현재 이북 5도나 도민회, 군민회에 의해 보존되고 있는 전통예술은 함경도의 북청사자놀음, 황해도의 철산소놀이굿, 봉산탈춤, 강령탈춤, 평양 다리굿, 서도민요인 긴아리난봉가. 평북의 영변성황당굿이 있다.
그러나 원래 민속놀이나 예술놀이나 예술은 생활에서 발원하는 것이어서 환경이 바뀌고 현장이 소멸되면 밖으로 물리적인 제재가 없더라도 저절로 쇠퇴하기 마련이다. 분단 50년이 지나면서 실향민들의 고향에 대한 뿌리의식은 간절하지만 그들이 살아온 삶의 발자취인 민속은 대부분 소멸되어가고 있다. 분단 반세기의 역사는 민족문화의 이질화를 가져오면서 언어의 공통성도 무너지게 하지만 민족공동체인 삶의 모습마저도 변질시키고 있다. 북한과 같은 체제아래서 우리 조상들의 숨결이 생동하는 민족예술이 계승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통일후의 민족동질성을 찾기 해서라도 북의 민속은 통일정책으로 보호장치가 마련되어야 한다. 오히려 북에서 없어진 생활방식이나 민속예술을 우리가 찾아서 보존한 후 전수해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이다. 민속놀이의 의미는 겉으로는 단순한 유희로 보일지 몰라도 민속학에서는 부락의 단합을 뜻한다. 예컨대 장기, 화투는 여가를 즐기기 위한 수단의 행위로서 놀이라고 부르지만 탈놀이, 농악, 집단놀이는 공동집합체적인 의례나 행사도 포함된다. 즉 민중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된다. 민속예술을 보존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북의 민속예술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월남문하축제'를 마련하거나 경연대회에서는 경연이 아니라 시범 종목으로 참가하도록 해야한다. 대회가 37회를 거듭하는 동안 기실 북한의 무형문화재는 발굴에 매우 뒤졌다.
1세대들이 유명을 달리하고 기예기능이 단절될 위기에 있는 종목이 많다. 하물며 미처 발굴되지 않은 민속예술은 이미 소멸되었을 것이다. 남한 쪽의 민속예술과 똑같은 조건에서 경연을 시켜서는 북의 민속예술이 경쟁에서 살아 남을 수가 없다. 지정 무형문화재도 전승이 어려운데 실향민들 몇 사람이 모여서 고향의 민속을 전승한다고 해야 얼마 동안 유지가 되겠는가.
북한 무형문화재는 하루속히 조사되어 지정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후계자를 양성해야 한다. 지난 70년대 초 정부는 북한 유형문화재도 통일을 대비해서 민족문화재로 지정한 적이 있다. 그러나 사적이나 명승은 세월이 지나도 인멸될 우려가 없지만 민속예술 같은 무형문화재는 경우 실향민들에 의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1세대들이 작고하면 단절될 가능성이 짙다.
현장을 떠난 삶의 원형이 상실되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전통사회가 붕괴되고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수 백년을 지탱해온 민속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하물며 북의 민속이 원형대로 유지되기란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통일을 대비하기 위해서도 북한 무형문화재는 보호되어서 잃어버린 정신문화를 다시 찾아 어느 땐가 돌려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