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해 / 작품활동 하반기 결산 . 소설

'96년 하반기 소설에 대한 단상(斷想)





장영우 / 문학평론가


1.

언제부터인가 우리 소설 계에는 이른바 '엽편(葉篇)소설'이란 짧은 소설 양식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듯하다. 올해 몇몇 문예지에서 기획 또는 특집 형식으로 젊은 작가들의 '엽편 소설'을 게재한 것도 이러한 관심의 적극적인 반영이라고 생각된다. 200자 원고지로 적게는 4∼5매 많게는 30여 매 정도 분량의 짧은 소설이 세인의 주목을 받게된 것은 물론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흔히 '콩트(conte)'라 불리는 짤막한 이야기는 기상천외한 발상을 토대로 하여 기지(機智)와 재치, 그리고 독자의 예상을 여지없이 배반하는 극적 반전을 주된 기법으로 한다. 이처럼 별로 부담감을 느끼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콩트'는 월간 또는 격월간으로 발행되는 허다한 사보(私報)에 거의 빠지지 않고 실림으로서 우리주변에 폭넓은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으며, '콩트' 전문 작가라 불러도 좋을 만큼 그 부분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소설가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콩트'와 최근의 '엽편소설'이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그것들은 단편소설과 어떤 상관 관계를 유지하는가를 자세히 따져보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 글에서 본격적인 논의를 펼치기는 어렵지만, '콩트'가 단편 소설적 조건에 약간 미달되는 양태의 줄임에 반해 '엽편소설'이 훨씬 단편소설의 특징을 잘 구비한 양식으로 이해하는 어느 비평가의 견해는 그런 점에서 좀더 세심한 논의가 필요하리라 믿는다.

서사문학의 전통에서 짧은 허구적 이야기는 문학의 역사만큼이나 그 연조가 오래다. 말하자면 우리가 '엽편소설'이라 부르는 양식의 연원을 고대 신화나 설화에서 찾고자 하는 것도 그리 잘못된 일이 아닌 것이다. 고대 허구적 서사물이 기문일사(奇問逸事)를 주된 내용으로 다루되 긴밀한 구성과 통일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나 오늘날의 '엽편소설' 역시 그러한 특징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두 장르 사이의 연속성을 잘 드러내주는 보기가 된다. 그러니까 '엽편소설'은 어떤 의미에서 서사 장르의 원류 (서구의 경우는 로망스의 전통)에 가까운 양식이라 말할 수 있다.

많은 작가들이 다투어 장편소설을 발표하고 그것도 모자라 대하역사소설의 영역으로까지 관심을 확장해 나아가는 현하에 신기(新奇)와 우연의 세계를 손바닥만한 분량에 소화해야하는 '엽편소설'의 성행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에 대해 그 누구도 명확하게 단정짓기 곤란하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현상이 앞으로도 지속될 조짐을 보이고 '새로운 가능성으로 떠오르고 있다'면, 앞서 말한 것처럼 '엽편소설'의 장르적 특성과 의의에 대해 활발한 논의가 뒤따라야 할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일이다. 만약의 경우, 그러한 논의가 전개되기도 전에 '엽편소설'의 의미와 기능을 한갓 단편소설에 이르기 위한 전단계로서의 그것으로 판정시키려 한다면 '가능성'운운은 공소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게 될 터이다.

2.

1980년대 우리 문학의 주제는 '아비(父)부정'이란 말로 요약될 수 있을 만큼 철저하게 아버지의 존재를 폄하하였고 가치를 격하시켰다. 「편모슬하(偏母膝下)에서의 시 쓰기」란 평론제목이 암시하는 바와 같이, 1980년대 후반의 우리 문학은 아버지로 상징되는 기성세대의 비굴과 무능력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의 양상을 띠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비근한 예로 80년대 중·후반의 격렬했던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한 탓도 있겠지만, '아버지 세대가 한 일이 무엇인가. 그들은 우리에게 부끄러운 역사만을 물려주었을 뿐이다'고 목청을 높인 젊은이들에게 후레자식이라고 야단칠 의연한 어른의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오욕의 현대사를 마감하고 새로운 역사를 개척해 나갈 순결한 젊은이들이라고 추켜세웠던 것이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였던 것이다. 70, 80년대에 대학생을 자녀로 둔 아버지들은 일제 식민지 시대와 6·25를 몸소 겪은 세대들로서, 그들 자식의 말마따나 나라를 빼앗기고 한민족끼리 나라를 반으로 가른 채 피 흘리며 싸우기나 하는 등 자랑스럽게 내세울만한 일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지 모른다. 더욱이 해방 된 후에도 친일파 문제를 명쾌히 해결하지 못함으로써 독재와 부패의 온상을 마련한 것은 아버지 세대들이 전전으로 책임져야 할 한국 현대사의 종양이라 말할 수 있다. 요컨대 80년대 젊은 세대가 강력하게 제기했던 '아비 부정'이란 문학적 주제는 치욕의 과거사와 관련된 모든 기성세대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그런데 최근 매우 흥미로운 현상이 벌어지고 있어 우리의 주목을 끈다. 70, 80년대 학번들이 사회에 진출한지 2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아버지의 존재를 과거와 전혀 다른 시각으로 인식하려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의 원인을 이남희는 그의 자전적 소설「사십세」에서 '그렇다, 시간의 먼지는 모든 것을 덮어간다'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는데, 그것을 단순한 물리적 시간의 흐름에 따른 인식의 변화로 설명하기는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그들은 '자식을 키워봐야 부모 마음을 안다'라는 옛말이 함유하고 있는 진실성을 절감하면서 과거에 부정했던 아버지와 현재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닮았다는 사실을 깨닫고 비로소 아버지의 존재를 긍정하게 된 것이 아닐까. 사실 우리 문학에서 아버지가 가정사(家庭事)와는 상관없이 집밖을 떠돌거나 경제적으로 거의 무능한 존재로 그려져 왔던 점만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일제시대 문학에서 아버지의 부재는 국권 상실을 상징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고 그런 관점이 우리 문학을 해석하는데 키워드 역할을 했던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이와는 달리 80년대 문학에서의 아버지는 지양되고 극복되어야 할 과거의 잔재에 지나지 않았고 그 이상의 의미부여는 공허한 것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날 '아비부정'의 선두에 섰던 30, 40대 작가들이 아버지의 삶을 긍정하고 포용하려는 것은 중요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김인숙의「아버지의 얼굴」(「문학과 사회」가을호)과 최인석의 「혼돈을 향하여 한 걸음」(「문학동네」가을호), 이혜경의 「떠나가는 배」(「세계의 문학」가을호)등의 작품은 평생 집밖을 떠돌아다녔던 아버지와 이제 성인이 된 아들의 삶이 섬뜩할 만큼 닮았다는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아버지의 얼굴」의 화자가 어머니에게 들어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는 철두철미한 유랑자이고, 「혼돈을 향하여 한 걸음」의 아버지는 집에 돈만 있으면 들고 나가 돌아다니는 인물이고, 「떠나가는 배」의 아버지는 세상 어디에도 맘 붙이지 못한 채 허깨비처럼 살다 죽는 것으로 그려진다. 이들 작품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이 하나같이 가정에 충실하기보다 밖으로 나다니기 좋아하는 사람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여간 흥미로운 현상이 아니다. 말하자면 이들은 가족과의 불화나 갈등 때문이 아니라 '이 비루헌 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또는 역마살(驛馬攵)이 끼어 도저히 어쩔 수 없이 '길' 위를 떠도는 것이다. 하지만 이들 작품에서 작가의 관심은 아버지들의 방랑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 이제 장성한 아들이 아버지의 삶을 어떻게 긍정하게 되는가 하는 쪽으로 모아진다. 이를테면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형 밑에서 자란 「아버지의 얼굴」의 화자 '나'는 일상생활 곳곳에서 아버지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미국유학을 간 동생에게 '말발굽 소리가 들린다. 재서야'라며 자신에게도 아버지의 역마살이 유전적 형질로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리고 그것은 미국에서 별을 연구하는 동생의 학문적 관심에 대한 공감의 표시라 할 수 있다. 화자 아버지의 유랑 벽이나 재서의 '별' 찾기는 속악한 현실의 삶에서 탈출하려는 의지의 표상이라는 점에서 공통된다. 또「혼돈을 향하여 한 걸음」의 아버지가 소리꾼의 뒷바라지를 하고 그녀의 소리에서 극락을 체험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아버지의 얼굴」의 경우와 구별되지 않는다.

위 작품에서 가족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지극히 부정적이다. 이를테면「혼돈을 향하여 한 걸음」의 아버지는 가족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하는데 어머니는 집안의 돈을 싸들고 가출하여 현정순의 뒤를 돌보아주는 남편의 못된 버릇 때문에 그를 저주하고, 어려서부터 집밖으로 떠도는 아버지를 보고자란 아들 역시 아버지에 대해 각별한 정을 느끼지 않는다. 또 「떠나가는 배」의 어머니는 전처의 자식이 있는 홀아비에게 시집와 살다가 남편이 죽자 그의 유품에서 전처의 사진을 발견하고 자신이 평생 허깨비와 살았다고 푸념한다.

'늬 아버지가 그런 양반이었다. 집안 있고 배운 사림이라는 말에 시집이라고 와보니 다 큰 아이는 낯가리고 ,죽은 이와 금실이 얼마나 좋았는지 혼자 살겠다고 그때가지 그렇게 살았더라. 그런 걸 늬 할아버지가 어거지로 시킨 걸 모르고……낯익힐 만하니까 전쟁이 터지더니, 한자리에 있던 이들 다 죽었는데 혼자 살았다며 겅더리되어 들어선 날부터 세상 어디에도 맘 붙이지 못한 사람이 늬 아버지다. 아버진 허깨비였느니라. 늬들 보기엔 아버지가 나하고 살긴 산 건 같더냐 ?

-「떠나가는배」에서

아버지가 첫 아내와 사별하고 전쟁에서 전우를 잃었다고 삶의 방향성을 상실한 채 허깨비로 살았다는 어머니의 푸념은 외견상의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어머니는 허깨비 같은 아버지와 살면서 온갖 가정사를 혼자 힘으로 꾸려오면서 정작 남편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해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십구재를 치르기 위해 대현스님을 찾아가는 화자는 이복 형제 및 임신중인 아내와 자기의 관계가 과연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성찰하면서, 설사 가족이라 하더라도 각자의 삶이 따로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러한 자각의 밑바탕에는 가족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정신적 거리감을 솔직히 인정하는 한편 그 거리감을 단축시키거나 소멸해야 한다는 적극적 의지가 내재해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살부(殺父)' 충동은 서양문학에서 그리 낯선 모티브가 아니지만 80년대 우리 문학에서 그런 징후가 나타났다는 것은 큰 충격이었다. 전체적 폭력을 행사하는 아비에 대한 격렬한 부정은 기성세대의 카리스마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의미가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살부 충동으로까지 표현된 데 대해서는 우려의 시선으로 지켜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 우리 문학에서는 '아비 긍정'에 대한 작가적 관심이 점차 그 세력을 넒혀가고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몇 편의 작품으로 그 의미를 제대로 분석해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이와 같은 작가들의 관점의 변화가 어떤 양상으로 전개될 것인가를 주의 깊게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3.

여성 작가들의 왕성한 창작은 올 하반기에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특히 차현숙은 '나비(蝶)'와 관련된 제목의 작품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는데, 장편소설 {블루 버터플라이}(「소설과 사상」가을호)에서는 남성들의 폭력에 무방비 상태에 있던 여성들이 일상적 삶의 고통으로부터 일탈하고자 하는 욕망을 섬세하게 관찰하고 있다. 차현숙 소설의 여성인물들은 온갖 육체적. 정신적 질환을 앓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데, 이를테면 그들은 '편두통 약과 설사약과 위장약과 변비약, 신경안정제'에 의존하여 하루하루를 힘겹게 견디거나(「나비, 봄을 만나다.」), 지독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받는다({블루 버터플라이}). 아이를 잉태할 수 없는 자궁을 가진 여성, 공공연하게 외도를 하는 남편에게 폭력을 당하는 여성이 인습의 굴레에서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이 '나비'라는 객관적 상관물에 투사되어 있는 것이다.

"왜 하필 나비죠 ? 그리고 마지막에는 왜 텅 비어있죠 ?"

"왜 나비 서랍에는 아무 것도 없이 작은 글씨의 메모만 쓰여져 있던 거죠 ?"

그녀는 대답이 없다.

우리는 계속 같은 질문만을 했다.

결국 그녀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한번…….날고 싶어서요……모든 것에서 한번쯤은 놓여나고 싶었어요."

"그런데 왜 텅 비었죠?"

당신은 성 마르게 다그친다.

"……당신들은 이미 나비 서랍을 모두 열어 봤잖아요……아직도 모르겠어요?"

-차현숙, 「나비학개론」(「문학동네」겨울호)

차현숙은 이제까지 써온 '나비' 연작의 의미에 대해 무언가 해명을 하고 싶었는지 최근 「나비학개론」을 발표했다. 이 소설은 이혼(당)한 두 남자가 바게뜨로 아침식사를 하다가 '마치 이 세상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느리게 자기 리듬에 맞춰 걸어가는' 한 여자를 발견하고 그녀의 서랍을 뒤져 과거를 추적하는 독특한 서사 방식을 차용하고 있다. 불우한 가정에서 자라 열 아홉에 첫사랑을 실패한 뒤 결혼하고도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는 그녀는 일반적 도덕 관습의 잣대로 보면 타락한 여자라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작가는 그녀의 이탈의 욕망을 남성 중심적 가치 개념으로 해석하는 것을 완강히 거부한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나비처럼 떠도는 것은 다만 진실한 사랑을 찾기 위한 것이며, 그것이 우리 현실에서 결코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에 절망한 한 여성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할 뿐이다. 차현숙 소설에도 외도를 하는 남편과 아내 이야기가 많은 양을 차지하는데 이것 또한 남자가 외도를 하는데 여자라고 못할까보냐 라는 감정적 대응이 아니라 성의 구별 없이 참된 사랑을 찾아 해매지만 결국 서로에게 큰 상처만 안겨주는 현대인의 부박한 애정 세태를 문제삼고자 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똑같은 부엌, 똑같은 화장실, 똑같은 거실과 방……그리고 똑같이 부딪치는 아파트의 사람들'에서의 이탈을 꿈꾸는 '나비'의 욕망은 환상이라는 사실을 작가는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는 듯하다. 그의 장편소설의 제목이 세상에 존재하진 않고 단지 전설로만 구전 될 뿐인 '파란 나비(블루버터플라이)'로 설정된 것도 그러한 작가의 판단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몇몇 여성작가들이 유부남과 유부녀의 간통이라는 다소 진부한 이야기에 매력을 느끼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째서 그들은 사회적으로 용인 받지 못하는 남녀 관계를 통해 진실한 사랑을 운위하는 것일까. 그들을 끊임없이 자극하는 일탈 욕망의 정체는 자유 또는 사랑이란 관념으로 모두 설명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들을 깊이 생각하게 한다. 그와 함께 타자성(他者性)에 대한 올바른 인식 없이 모든 불행의 원인을 남편(또는 아내)에게 전가하려는 작중인물들의 이기적 욕망에 대한 해석도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