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해 / 작품활동 하반기 결산 . 시

시의 미래, 위기 담론의 극복과 전망




강연호 / 시인

1.

글을 쓴다는 것, 작가가 시인이 된다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영상문화 시대에도 여전히 매혹적이고 신비적인 일처럼 보인다. 극히 일부의 성공을 제외하고 직업으로서의 문학가가 그렇게 환영받을 만한 세상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은 작가나 시인에 대해 어느 정도 이러한 선입견을 갖고 있는 게 사실이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의 시절의 한때, 문학 작품을 통해 세상과 삶의 비밀을 엿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던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문학에 대한 매혹과 신비는 물론 상당 부분 허상에 불과한 것이지만, 한편으로는 문학의 본질과 어느 정도는 관련된 속성이기도 하다. 문학은 꿈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을 제약하는 모든 속박과 억압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꾼다는 것, 그것이 비록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꿈꿀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따분하고 일상적인 삶을 풍요롭게 하기 때문이다.

글쓰기/읽기는 근본적으로 인간의 삶에 대한 지적 사유의 형상화 작업이다. 이러한 글쓰기/ 읽기를 근본으로 하는 문학은 결국 철학적이다. 인간이 글을 읽고 쓴다는 것은 대상을 인식하는 것이고, 그것은 존재의 의미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보다 나은 삶, 가치 있는 삶에 대한 기대와 추구는 어떤 사람도 포기할 수 없는 명제이고, 문학은 그 의미를 밝혀내고자 하는 작업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가볍고 제기 발랄한 글쓰기라 하더라도 거기에는 삶의 본질에 대한 탐구와 고뇌의 흔적이 담겨 있어야 한다. 재치나 유우머 같은 말놀이와 다른 차원에서 문학이 그 존재 가치를 획득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더구나 동양에서의 문학 전통은 상당 기간 심미적 측면보다는 도덕적, 실천적 측면이 강했던 게 사실이다.

그런데 90년대에 들어와 부쩍 문학의 위기, 몰락 혹은 죽음이라는 담론이 무성하다. 문학의 해로 지정되어 여러 기획과 사업이 베풀어졌던 1996년에도 이러한 담론은 여전히 유효한 것처럼 번져, 여러 문예지들이 앞다투어 그 징후에 대한 진단을 특집으로 꾸미기도 했다. 특히 소설에 비해 시의 위기나 몰락에 대한 진단이 구구한 편이다. 한 계간지에서 「누가 시를 죽였는가」라는 다소 섬뜩한 제목의 특집을 마련한 것(「문학동네」1996년 가을호 )은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 시의 위기나 몰락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들이 제시하는 몇 가지 근거는 첫째, 시의 시대로 불려졌던 80년대에 비해 작금에는 공통적으로 주목할 만한 시적 지향이 나타나지 못했다는 것, 둘째, 다소 편차는 있지만 시인들이 저마다 개인적 내면화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 셋째, 다양한 영상문화와 대중매체의 홍수 속에서 나름대로의 새로운 위상을 설정하지 못했다는 것 등이 꼽히고 있다.

물론 서구의 경우와 견준다면 우리만큼 시를 사랑하는 독자가 많은 나라도 없을 것이다. 매년 수많은 신진 시인들이 등단하고 있고, 그 보다 더 많은 시인 지망생들이 줄을 서고 있으며, 시집들은 대부분 재판이상의 판매량을 보이고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현상만을 주목하는 것은 천박한 자본의 논리와 상업주의에 의한 문학의 상품화를 더욱 조장할 뿐이다.

그렇지만 불거지고 있는 시의 위기나 몰락에 대한 진단들에 대해, 성급한 단정과 유행추수적 발언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도 문학의 속성상 급격한 사회 정치적 전환에 발빠르게 대응하기에는 성숙의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 내면화 못지 않게 복잡해지고 다양해진 시적 경향을 위축이나 몰락으로 단정지을 수 없다는 것 등이 그 근거로 제시되고 있다. 과연 90년대 들어 우리 시단은 문학적 관습이나 억압에서 상당 부분 자유로워졌고 양적 풍요와 다양성을 함께 누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확실히 지금 우리 시단에는 전통적 서정의 문법에서부터 포스터모던의 해체주의에 이르기까지 시 쓰기에 수많은 전략들이 명멸하고 있다. 그렇지만 언어 표현의 능숙한 솜씨와 화려한 수사만으로 제작되는 시는 한계가 있다. 반면에 실험을 위한 실험이나 깨뜨리기 위한 깨뜨림, 그리고 제사장이나 마녀가 되기 위한 위악적 포즈 등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물론 이 역시 재능은 재능이지만 재능을 뛰어넘어 삶의 대한 깊은 성찰까지 보여주는 것은 군소 시인이 아닌 뛰어난 시인의 몫이며, 그것은 동시에 눈밝은 독자의 요청이기도 하다. 가령 시의 위기나 몰락에 대한 풍문들이 어느 정도 근거 있는 것이라면, 이에 대한 짐 역시 시인들 스스로 업으로 짊어지고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1996년 하반기의 시 작품활동과 그 성과에 대해 성급하게 개관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더구나 90년대 들어 특히 다양하고 섬세한 층위를 형성하고 있는 시적 경향이나, 인접 예술과의 폭넓은 상호 교섭 문학적 관습의 파기와 소재의 확대 등을 고려하고 폭발적으로 늘어난 발표지면과 양적인 풍요 등까지 감안한다면, 그 증폭을 한꺼번에 아울러 가늠하는 작업은 상당히 어려워 보인다. 그럼에도 도식화나 단순화의 위험을 무릅쓴다면 요즈음 우리 시가 보여주고 있는 특징적 양상을 몇 가지로 규정해 볼 수 있다. 1996년 하반기에 발표된 작품들을 통해 살펴볼 때 그 양상은 세기말적 상상력의 확산, 신서정과 내면 탐구의 심화, 생태학적 상상력과 자연 친화, 인문학적 상상력과 정신주의, 전위적 실험성과 해체주의 등으로 거칠게나마 규정된다. 그리고 소설장르 속에서의 눈부신 활약에 비추어 덧붙인다면 이른바 패미니즘 시의 가능성도 부각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새로운 세기에 대한 예술적 전망이 불확실한 연대에서 미래의 출구를 찾지 못하는 불안감, 위기감 ,허무감 등이 퇴폐나 죽음 등이 미학과 결합하는, 이른바 세기말적 상상력이 하반기에 특히 폭넓게 확산되고 있다. 예술사적으로 볼 때 이른바 세기말주의는, 19세기 말 유럽을 풍미했던 퇴폐적 불안심리의 사조를 일컫지만 20세기의 끄트머리에서 그것은 다시 허무와 불안, 광기와 우울 등의 증후군으로 드러나고 있다. 기존의 가치 기준이 붕괴되고 방향 감각이 상실되어 어느 때보다 미래에 대한 예측과 전망이 불확실한 시대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상황을, 우리는 이런 증후군의 재연을 통해 거듭 확인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러한 세기말적 상상력의 확산은 자칫 불안과 허무의식을 부추기고 조장하는, 이른 바 환멸의 상투화를 초래할 우려도 제기되고 있는 형편이다.

90년대 이후 시단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양상의 하나로서 새로운 서정성의 심화와 내면화된 시 의식의 표출을 들 수 있다. 특정한 공통 이념의 추구나 보편적인 주제의식을 보여주었던 80년대와 달리, 특히 90년대 이후 등단한 신진시인들은 내성적 자기성찰과 고뇌를 담은 시편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시적 경향은 저마다 미묘한 편차가 있을 정도로 다양하지만 이른바 신서정이라고 명명되어 왔다. 이러한 시적 지향은 자본주의와 현대 문명의 병폐를 내적 고뇌와 성찰로서 극복하려 한다는 점에서 인정되고 있는데, 주로 도시적 정서를 풍부한 서정성과 안정된 시형식으로 형상화한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아쉬운 것은 당연하게도 첨단의 실험성과 전위 의식이며, 지난 시대의 연대성에 비해 지나치게 개인화 되고 있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생태학적 상상력과 자연 친화의 시편들도 주목할 만한 양상이다. 생태 파괴나 환경 문제 등은 이미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지만, 90년대 들어 이러한 시편의 확산은 자연과 공존 공멸의 운명을 지닌 인간의 자각을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한 자연생태계의 파괴는 결과적으로 인간 자신을 겨냥한 치명적 위협이 된다는 것을 이 시편들은 심각하게 제시해 준다.

따라서 이들의 자연시편들은 우리의 고전적 서정과 닿아 있으면서도 자연과의 무조건적인 합일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생태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다만 그 시편들이 아직은 다소 당위성의 차원에 머물러 있다는 아쉬움이 있다. 자연이 인간의 모든 미적 담론에서 기본적 바탕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무조건적인 외경이나 숭배라는 소박한 관념에 그칠 수도 있음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인문학적 상상력과 정신주의의 시편들을 특별히, 전위적 실험성과 해체주의라는 정반대의 경향과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작금의 이른바 정신주의 대 해체주의 논쟁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1996년 하반기의 시단을 뜨겁게 달군 이 쟁점은, 논쟁 부재의 침체기를 오래 겪어온 문단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은 화젯거리가 되었다는 점 외에도, 우리 시의 미적 가능성에 대한 상반된 입장을 첨예하게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논쟁은 「문학사상」10월 호에 월평을 맡은 최동호 교수가 이승훈 시인의 최근 시와 시론들에 대해 비판적 견해를 피력하면서 시작된다. 최동호 교수는 이 지면에서 이승훈 시인의 작품과 글들이 시 쓰기의 혼란을 야기 시키고 있으며, 시적인 것 자체를 부정함으로써 시적 진정성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비판한다, 이에 대해 이승훈 교수는 같은 잡지 11월 호에 장문의 즉각적인 반론을 제기하여, 항용 우리가 시적이라고 인정하는 것은 기존의 인습적인 문학 규범일 뿐이며, 새로운 시 쓰기는 이러한 규범을 부정함으로써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이러한 주장들은 간단히 말해서 정신주의 대 해체주의의 충돌이라는 성격을 띠고 있다. 계속해서 12월 호에는 이성선 시인과 박상배 시인의 글이 실리게 되는데, 이 글들은 각각 정신주의의 서정성과 해체주의의 자기 탐구를 옹호하는 입장을 명백하게 드러내어, 이 논쟁을 확전시키고 있다.

각각의 입장에는 나름대로 타당한 논리가 있고, 과정 역시 아직 진행 중이어서 그 귀결을 성급하게 속단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 쟁점은 우선 그 동안 우리 문단의 고질적 병폐 중의 하나였던 논쟁회피의 풍조를 벗어나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 아울러 90년대 들어 특히 우리시가 다원화되었다고는 하지만, 각각의 문학적 지향에 침잠하고 있을 뿐 다른 입장에 대해서는 그저 방관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오히려 섹티즘을 심화시켰던 데 비하면, 이러한 논쟁은 단순한 화젯거리를 넘어 발전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쟁점으로 더욱 부각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패미니즘 시학은 비단 여성 시인들에 의해 쓰여진 작품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각성과 여성 신분의 상승이 상당 부분 이루어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제도적, 관습적인 남성 우위의 권위와 억압이 팽배한 것도 사실이다, 여성성에 의한 시 쓰기의 입장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왜곡되고 억압되었던 의식으로부터의 탈출과 해방을 꾀한다는 점 때문이다. 여성성을 추구한 작품들의 상당수에서 오히려 더 위악적이고 도전적인 광기의 언어를 발견하게 되는 이유도 여기서 찾아볼 수 있다.

3.

이와 같이 대략적으로 살펴본 1996년 하반기 시단의 특징적 경향들은 물론 실제 작품 창작에 있어서 폭넓은 진폭을 형성하면서 겹쳐 나타나고 있다. 이 시기에 특히 주목할 만한 성과를 보여준 시인들로서 우리는 김춘수, 황동규, 오규원, 이시영, 이승훈, 정진규, 최동호, 김명인, 김혜순, 김정란, 고재종, 송재학, 이진명, 남진우, 이선영, 신현림, 서림, 황인숙, 박정대 등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문단의 원로에서 중견 및 신진 시인에 이르기까지 그 계층은 두텁지만, 짧은 지면을 통해 이들의 작품을 일일이 소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앞서 언급한 특징적 시적 경향을 바탕으로 하여 몇몇 대표적 성과들을 살펴보기로 한다.

황동규가 근자에 보여주고 있는 시편들은 대부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얻은 마음의 움직임을 포착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부유하는 그의 여행길처럼 자아의 내면 역시 한없이 가볍게 움직이고 있다. 그 존재의 가벼움은 그러나 가벼움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어느 한 순간 혹은 한 공간에서 삶의 한 고비가 매듭지어지듯 그 존재의 가벼움도 응축되는데, 황동규의 인문학적 상상력은 바로 이 순간을 시적으로 형상화한다.

언젠가 맘이 더 챙기지 않고 꺼내놓을 자리는

방파제 끝이 되리.

앞에 노는 섬도 없고

헤픈 구름장도 없는 곳.

오가는 배 두어 척 제 갈 데로 가고

물자욱만 잠시 눈 깜박이며 출렁이다 지워

지는 곳 (중략)

바다로 나가다 걸음을 멈춘 방파제.

환한 그 끝.

- 황동규「방파제 끝」(「현대문학」11월 호)

이 작품에서 화자는 마음을 챙길 자리와 꺼내놓을 자리를, 혹은 그 경계를 '바다로 나가다 걸음 멈춘 방파제'로 설정하고 있다. 챙길 자리와 꺼내놓을 자리는 물론 현실과 꿈, 일상과 초월, 현상과 본질 등의 다양한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환한 그 끝'의 경계에서 시인은 문득 존재가 현현되는 한 순간을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황동규의 경우처럼 오규원, 이시영, 최동호 등이 그려내고 있는 자연이나 사물의 모습도 고요하다. 이 시인들이 포착하는 정경은 움직임이 있으면서도 정적이 흐르는 여백의 미학을 보여준다. 오규원은 특히 「칸나」,「돌」,「나무」,「박새」등의 신작시편들에서, 자연의 대상을 그냥 있는 그대로 기교 없이 드러내는 듯한 포즈를 취하면서도 고도로 응축된 시적 표현들을 통해 언어와 세계의 일치를 지향하고 있다. 이러한 절제된 인식의 표현은 이시영의 「그늘」(「현대시」11월 호)와 같은 짧은 단시들이나, 최동호의 「빗자루를 들고 하늘을 쓸다」(「작가세계」가을호) 등을 통해서도 살펴볼 수 있는데 모두들 중견의 난숙한 역량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들이라고 하겠다.

아침 일찍부터 플라타너스 그늘에 모여 참새

처럼 지저귀던 아이들은 노란 버스를 타고

계성유치원으로 가고

나는 고개를 팍 꺾은 채 후진하여 회사로 간다.

가을이다

- 이시영 「그늘」(「현대시」11월 호)

이 작품에서 전반부는 평범한 진술을 보여주는 데 그치고 있지만, 마지막 행에서 일체의 수사를 생략함으로써 시적 긴장과 응축을 보여준다. 그야말로 무기교의 기교라는 진경을 통해 아이들의 동심과 화자의 현실 사이의 경계를 여실히 묘파해내고 있는 것이다.

한편 자연과의 교감을 통해 생태학적 상상력의 한 모습을 전형화 시키고 있는 시인으로서 고재종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의 자연시편들은 점점 척박해지는 농촌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땅에 붙박여 자연의 일부로서 함께 숨쉬며 살아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이윽고 바람결 푸르게 일자

냇둑의 미루나무 잎새 살랑거린다

억세게는 무성한 억새잎 스적인다

나 같은 건 마음뿌리까지 설레인다

그때마다 내 넋을 수시로 들고 나는

저 흔하고 수수하고 질긴 것들이여

- 고재종 「여름 다 저녁때의 냇둑 걷기」(「문학사상」10월 호)

여름의 저녁나절에 냇둑을 걷는 화자의 마음은 생명에 대한 외경으로 가득하다. 자연에 동화되어 자연의 일부로서 살기를 열망하는 시인의 마음은 마구 설레어 '내 넋을 수시로 들고 나는'지경에 까지 이른다. 여기서 인용하지는 않았지만 이 작품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그리움, 그리움, 그리움이여'라는 탄식의 되풀이는 자연 친화에 대한 시인의 열망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여성 시인들의 작품에서 여자의 말이나 혹은 여성적 이미지들을, 사회적 문화적 억압과 속박으로부터의 일탈을 꿈꾸는 자아로 읽는 것은 물론 일리 있는 시 읽기의 맥락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 뿐 일까. 김정란의 작품을 보자.

그녀들의 여리고 작은 몸에 대해서, 그녀들의 몸을 찢어발겨, 세계의 열두 구석에다 걸어 놓는, 잔인하고 아름다운, 세계와 무관한 곳에서 비밀스럽게 관계를 맺는, 가만히 제자리에 있는, 어리디어린, 위태한 순결한 힘에 대해서

- 김정란 「여자의 말」(「현대사」8월 호)

이 작품에서 '연두색 잎사귀'처럼 연약한 그것은 속박과 억압 속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위태한 순결의 힘'이다. 그러나 그들은 동시에 '세계와 무관한 곳에서 세계와 비밀스럽게 관계를 맺는'다. 그것은 여성성의 숙명에 대한 단순한 일탈을 넘어서, 세계의 결핍과 억압까지 껴안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다. 패미니즘 시들에서 특히 사회적 억압과 왜곡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과격하게 비틀리거나 착종된 언어 표현들을 종종 발견하게 되는데, 그 수준을 뛰어넘는 자각의 주체 역시 여성 자신이 되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김정란의 작품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

한편 젊은 시인들에게서 내적 고뇌와 우울의 편린을 발견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들의 서정은 전통적 서정의 문법과 닮았으면서도 내면적 삶의 황폐와 아픔을 드러내 준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신진 신인 박정대의 경우 그것은 황량한 세계에 노출된 자아의 병든 영혼과 외로움으로 묘사되고 있다.

당신은 무협지의 촉산객처럼

불빛의 거리를 날렵하게 떠다시나요

날렵하다는 것은 외로운 것이지요

아무리 빠른 검도 제 슬픔을 버리지 못해

중국산 항아리에서 이얼싼스 술을 익어가고

젊은 중국청년은 칼로 팔둑을 긋지요

폭력적인 아름다움이예요

- 박정대 「이가흔, 내 책상위의 타락천사」(「작가세계」가을호)

화자는 날렵한 세상의 속도감과 문명의 엑스타시를 외로움으로 진단한다. 문명의 범람과 대중매체의 홍수 속에서 '폭력적인 아름다움'을 느끼는 화자의 태도는 얼핏 타락과 허무처럼 보이지만, 그것을 통해 오히려 진지한 내적 고뇌와 치열한 대결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1996년 하반기에도 역시 수많은 시집들이 출간되어 양적인 풍요를 구가하였다. 양적인 풍요가 질적인 성과까지 보장하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시집 출간은 몇 년에 걸쳐 문예지에 산발적으로 발표했던 작품들을 한데 묶어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 시인의 시적 지향이나 모색을 뚜렷이 보여주면서 동시에 한 매듭을 짓는 역할을 시집출간이 담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기억할 만한 시집들을 들면 다음과 같다.

홍신선,「黃紗바람 속에서」(문학과지성사)

강은교,「어느 별에서 하루」(창작과비평사)

나태주,「풀잎 속 작은 길」(고려원)

강현국「견인차는 멀리 있다」(고려원)

이하석,「금요일엔 먼데를 본다」(문학과지성사)

백무산,「인간의 시간」(창작과비평사)

박주택,「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문학동네)

남진우,「죽은 자를 위한 기도」(문학과지성사)

신현림,「세기말 블루스」(창작과비평사)

함민복,「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창작과비평사)

윤의섭,「말괄량이 삐삐의 죽음」(문학과지성사)

이들 시집들에서 우리는 시인들마다의 치열한 시적 전략과 개성적인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다. 강은교의 시집에서 세상은 황폐하고 어둡지만 시인의 태도와 시선은 여전히 희망적이고 따뜻하다.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는 세상의 폭력 속에서 이러한 태도와 시선은 물론 상처 입기 십상일 것이다. 그러나 상처와 좌절 속에서도 이 시인의 아름다운 감수성을 지탱해주는 힘은 역시 여성성과 모성에 대한 믿음이다.

저물녁에 우리는 가장 다정해진다.

저물녁에 나뭇잎들은 가장 따뜻해지고

저물녁에 물위의 집들은 가장 따듯한 불을 켜기 시작한다

저물녘을 걷고 있는 이들이여

저물녘에는 그대의 어머니가 그대를 기다리리라

-강은교「저물녘의 노래」

강은교의 시편들에서 요즈음 유행하는 가학적인 언사와 비틀린 표현들은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그의 후배 시인 이진명의 경우가 그렇듯이 요란한 세상의 담론에서 떨어져 있으면서도 일정한 성취를 이룰 수 있다든 전범이 되고 있다.

훼손되지 않은 자연을 꿈꾸고 노래한다는 점에서 나태주와 이하석의 지향점은 같다고 할 수 있지만, 나태주가 전통적 자연 친화와 교감을 보여준다면 ,이하석은 인간과 문명에 의해 오염된 자연의 실상을 고발한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또한 자연의 끈질긴 생명력에 대한 믿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다시 공통된다.

젊은 시인 남진우와 신현림, 그리고 윤의섭의 시집들은 이른바 세기말적 상상력의 한 모습을 보여준다. 남진우는 죽음에 대한 친화를 통해 삶의 어두운 단면을 형상화하고 있으며, 신현림은 강렬한 주제 의식과 독설적 어법으로 광기와 우울의 세기말적 증상을 비판한다. 그리고 윤의섭은 고갈된 영혼과 육신을 유령처럼 끌고 다니는 실존의 고뇌를 그로테스크하게 형상화한다.

모든 죽음 위엔 나무가 자란다.

무성하게 묘지를 둘러싸고 잎 없는 가지를 펼치는 나무들

나무가 흘린 피가 다시 땅속으로 스며들어

그 밑에 누운 주검을 조용히 어루만지는 오월 아침

-남진우「공원 묘지」

젊은 시인들의 시집에서 허무와 불안, 광기와 우울 등의 이른바 세기말적 증후군이나 죽음의 그림자를 엿보게 되는 것이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이들이 보기에 우리들 인간의 삶을 극단적 개인주의와 퇴폐적 경향, 무분별한 향락주의 풍조의 만연 속에서 결코 낙관적이지 않다. 그것은 우리 시대의 천박한 욕망과 소비 중심의 문화풍토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며, 동시에 생명과 자연의 순환질서에 대한 의식의 역설적 촉구라고 할 수 있다.



4.

1996년 문학의 해가 저물면서 그 성과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관제적이었다는 한계의 지적도 있고, 본말이 전도되어 일회성의 행사나 세미나 등에 그치고 말았다는 비판도 있다. 무엇보다도 문학의 즐거움은 대중소비문화의 그것과는 다른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폭넓게 확산시키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기대가 큰 만큼 그 결과에 대한 미련도 많은 법이다. 그럼에도 그 의의를 무조건 평가 절하할 수만은 없다. 그저 지나가 버릴 일과성의 요식에 그치지 않도록 하는 과제는 문학인들 스스로 떠맡아야 한다.

상황의 변화와 영상 매체의 급속한 발달 등으로 인해, 시를 읽으면서 삶의 진정한 가치를 찾는 작업이 점점 비능률적이고 골치 아픈 일로 치부되고 있다는 우려의 소리가 많다. 후기 산업사회의 숨가쁜 일상 속에서 시는 과연 존재할 가치가 있는 장르인가. 일회적이고 소비적인 대중문화조차 제대로 향유하기 바쁜 시대에, 도대체 누가 한가롭게 밤하늘의 별들과 이름 없는 들꽃들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겠는가. 또한 도대체 누가 그 노래를 듣고 가슴 서늘해지는 시적 감동을 얻겠으며, 삶과 세계에 대한 진지한 질문에 동참하려 하겠는가. 그렇지만 시는 또한 마치 숨은 그림 찾기와 같은 속성을 지닌 장르이다. 쉽게 드러난 그림보다 잘 숨겨진 그림을 찾아냈을 때에 재미가 크듯이 시작품을 읽는 즐거움은 단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알 듯 모를 듯 숨겨진 의미를 마침내 파악했을 때 그 울림의 진폭은 더욱 커지고 반향도 오래 지속된다. 프랑스의 어느 현상학자가 표현한 것처럼 그때 우리는 존재의 전환을 이룩하게 되는 것이다. 시의 위기 담론이 무성하지만 그 만큼 위기의 시대를 넘어서려는 모색과 성찰 역시 두드러지게 요구된다. 우리가 처음 시를 읽었을 때의 신선한 떨림을 기억한다면, 모든 예술이 그렇듯이 시 역시 가야할 길은 아직 멀고 아득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