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주체성 확립과 세계화의 계기로…
박종국 /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회장
세종대왕이 즉위한 때는 여말 선초 겨레의 간난(艱難)한 역사를 승계한지 불과 27년째 되는 해인지라 대내외적으로 나라의 안정이 완전히 이룩되지 못한 때였다. 세종대왕은 약관이 겨우 지난 22세의 젊은 나이에 임금이 되시어 재위 서른두 해 동안 내정과 외치, 예악(禮樂)과 문장(文章)의 정리 및 창제, 겨레 문화의 창달에 있어 찬란한 위업을 남기셨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훈민정음 곧 한글의 창제, 반포는, 겨레문화는 물론 세계 전인류 문화에 있어서 획기적인 업적이라 하겠다. 우리가 이같은 대왕의 위업에 대하여 찬양하고, 흠모함은 물론이지만, 그 배후에 정초(定礎)한 세종대왕의 위대한 정신과 인격 및 이념을 이해하고 그를 본받아 실천하는데 노력하는 것이 더욱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세종대왕의 정신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애민정신, 자주정신, 과학정신이 그것이다.
첫째 애민정신은 인간 존중의 철학이자 인도주의 정신이다. 세종대왕은 훈민정음 서문에서,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 한자와는 서로 잘 통하지 아니하므로 어리석은 백성들이 하고자 하는 말이 있어도 그 뜻을 표현해 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므로 내가 이를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드니 온 백성이 쉽게 익혀서 언어 문자 생활을 편하게 함에 있다'라고 하였다. 이 뜻은 일반적으로 임금이 백성을 사랑한다는 그러한 과거 봉건군주들의 애민이 아닌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남다른 성현의 덕성과 인격을 아울러 갖춘 인간 세종대왕이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며 그야말로 몸소 실천하는 방법으로 사람을 사랑하신 대왕의 인간성의 노출인 것이다.
조선조 건국이 배불 숭유의 정책으로 도학(道學)이 그 주류를 이룬다 하겠지만, 세종대왕은 경서와 사서 등 그 당시 어떤 서적도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유교 일색의 벽유(僻儒)가 아니라, 유교의 진수와 정화를 깊이 체득하고 이해하였음은 물론, 불교나 도교에 있어서도 깊은 이해와 통찰을 지니고 있었다. 그 고차원적인 훈민정음 제자 원리를 본다든가 월인천강지곡의 수준 높은 경지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그 누구도 따를 수 없다고 하겠거니와, 거센 유자(儒者)들의 반대에도 백성들이 생각을 펴지 못함을 어여삐여겨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고 하셨으니 일반 서민을 긍휼히 여기는 애민 정신이 어떠하였는가를 잘 알 수 있는 것이며, 한글을 펴기 위해 훌륭한 보급책을 세웠으니, 당시 백성들의 의식과 감성을 살핌이 얼마나 세심하였는지를 엿볼수 있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통치의 최고 목표를 생민의 안정에 두었는데, 이는 인정(仁政)을 실천하고자 하는 것이다. 인간 존중이나 애민사상이 관념으로서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실제의 정치에 반영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왕은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정신적으로도 푸지고 물질적으로도 푸짐해야 했으니, 정신적·인간학적 진리 추구의 방향과 구체적 현실의 경제 생활을 주안으로 하는 언어 문자 정책과 농업 정책 및 국민 보건 위생을 고려하는 의약 정책이나 환과고독(鰥寡孤獨), 폐질자, 천민등을 위하고 민의를 수렴하는 사회 정책등, 그 어느 한 면도 소홀히 하지 않고 용의주도하게 완급을 따져서 정책에 반영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인권을 옹호하며, 노비·천민이라 할지라도 삶의 권리를 누리게 한다든지 죄수라 할지라도 남형(濫刑), 사형(死刑), 태형(笞刑)을 금하고, 사형 죄수에 대하여는 삼복제(三覆制)를 실시한 것 등은 기본적 인권을 보장하려는 현대 근대 정신의 선구일 뿐만 아니라, 인류사에 빛나는 대선각자라 하겠다.
둘째, 자주정신은 주체 자주정신이다. 세종대왕의 정치철학은 주체에서 우러난 자주정신이다. 대왕은 훈민정음 서문에서나 자신이 누구라는 것을 분명히 깨우쳐 주고 있다. 대왕은 내정에 있어 경제·정치·사회·문화·예술·과학 등에 이르기 까지 인습적 교조주의(敎條主義)가 아니라 주체적으로 정확하고 철저하게 연구 시행하여 영구 불멸의 정신문화와 물질문화를 진흥하였다. 외치에 있어서도 명나라와의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는 한편, 영토를 확장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였으니, 북으로 육진(六鎭)·사군(四郡)을 두고 국경을 확정하였으며, 남으로 대마도를 정벌 계림부에 예속시켰다. 왜구에게는 군사적 강경책을 쓰면서도, 때로 회유책을 쓰기도 하였는데 삼포(三浦)를 개항함으로써 나라의 안전을 도모코자 한 것이었다. 이같이 대왕은 문무를 겸비하여 현실적 정책에 만전을 기하였다.
세종대왕의 정책 결정의 원칙을 말하면, 앞선 내용에서도 나타나듯이 안민(安民)과 보국(輔國)을 주축으로 하였는데, 실천 방법에 있어서도 두 가지 원칙을 고려하였으니, 실리(實利)추구와 정의 구현이었다. 세종대왕은 실리가 된다고 하여 정의를 망각하지 않았으며, 정의를 숭상한다 하여 공허하게 맹목적으로 실리를 저버리지도 않았다. 이 양자가 원만하게 마땅함을 얻고, 중용을 이룰 때에 가장 진선, 진미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두만강의 국경을 용성(龍城)으로 후퇴하려 할 때, 대왕은 조종(祖宗)의 국토를 척지촌토(尺地寸土)라도 버릴 수 없는 것이 조상의 뜻을 이어 술책을 잘하는 대의(大義)요, 장강(長江)의 험지를 이용하는 것이 대리(大利)라고 하여, 이(利)와 의(義)를 겸전하려는 것이 그 요령이라 하였다. 그러나 대왕은 스스로의 자품이 명민하고 영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단독으로 하지 않고 여론을 중시하고 군신이 합력하여 진리와 인도를 추구하였던 것이다. 세종대왕의 정치 원리는 고루하고 보수적이고 복고적인 인습적 유자(儒者)가 아니고 적극적이고 진취적이며,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개혁의 혁신 정책을 세워 실천하신 어른이었다.
특히 진실하고 공정한 세종대왕의 자세는 감탄하고 머리숙여질 뿐이다. 부왕의 실록인 태종실록을 춘추관에서 거의 이루었을 때, 세종대왕이 이를 보고자 하므로, 맹사성(孟思誠)은 "성상께서 보신다 하더라도 고칠 것이 없고, 만들기 전에 보았다는 말만 들을 것이오니, 보시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라고 하매, 대왕은 그 말을 옳게 여겨 보지 않았다 하니, 대왕의 그 정대함이 어떠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또 대왕은 경연에서 말씀하기를 "사관(史官)이 집필할 때 임금의 착한 것은 기록하고, 착하지 않은 것은 기록하지 않는 일은 옳지 않은 일이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 심법(心法)의 정대함은 나라와 겨레의 복이 되는 말씀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세종대왕은 의약을 중국에서 사다 쓰고 우리 약재를 무시하는 폐단을 없애고 향약의 개발을 위하여 전국 팔도의 토질에 맞는 약재를 재배하여 쓰도록 함과 아울러 의서를 찬술 보급시키고, 아악을 정리하고 악기를 우리 재료와 우리 기술로 만들어 쓰게 함과 아울러 동양 최초의 유량악보인 정간보(井間譜)를 창안하였으며, 도량형을 고정하여 과학적인 생활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셋째 과학정신은 창조적 과학정신이다. 이 정신은 앞에서 말한 정신들 속에도 함께 맞물려 있는 정신이니, 우리문화유산이 고여 있는 문화가 아닌 창조하는 문화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산업, 과학기술 및 정보화 시대에 있어 사고의 합리적 정신을 훈련하여 과학화하고 인권 평등을 전제로 한 민주화 운동이 근대 정신의 요체라 한다면, 세종대왕은 인권존중과 합리적 사유를 실제로 실천한 근대정신의 선구라고 아니할 수 없다.
세종대왕은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조금도 쉬지 않고 독실히 공부에만 열중하였던 분으로서, 임금이 되자 제일먼저 시행했던 것은 인재 양성이다. 우수한 학식과 풍부한 정치 경험을 겸비한 높은 벼슬아치들과 세자 때의 빈객(賓客) 중에서 많은 수의 경연관(經筵官)을 임명하여 경연(經筵)을 즉시 열게 했으며, 여기에 이어 집현전(集賢殿)을 부활 개편 강화하여 우수한 학자들과 장차 유망한 젊은 학자들을 정선(精選)하여 오로지 학문연구에만 전심 전력하게 하여 높은 수준의 학문 경지에 이른 우수한 학자들을 양성하는 한편, 그들도 모두 경연관이 되게 하여 학문을 강론(講論)하게 하였다. 한편 학풍(學風)을 일으켜 학식을 높이기 위한 정책을 세워 주자소(鑄字所)로 하여금 각 분야의 많은 서책을 인쇄하여 보급하려 하였다. 그러나 즉위 당시 인쇄술로는 시정 목표를 성취시키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그리하여 대왕은 먼저 인쇄법의 개혁이 시급함을 깨닫고 몸소 주자소를 방문 의견을 제시하는 등 여러 방법으로 연구시켜 활자와 조판법을 개혁함으로써 국가 생활에 필요한 많은 저술을 편찬, 발간하게 되었다. 주자법과 조판법을 익혀 숙련된 장인(匠人)들의 기술은 정교한 천문관측기(天文觀測器)과 자격루(自擊漏)를 성공리에 완성시키게 했고, 이러한 기술 발전의 과정에서 경험한 결과는 조지소(造紙所)의 성공과 새로운 인쇄법(印刷法)을 발명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농업의 과학화를 위해 수차(水車)도 발명하려고 했는데, 신하들이나 장인들이 그 발명이 어렵다고 하자, 세종대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중국이나 왜국(倭國)에까지 모두 수차의 이익을 받는데 어찌 우리나라에서만 행하지 못한단 말인가. 나는 반드시 이 일을 성공시키겠다" 하시면서 "사람들이 반드시 성공시켜 보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전심전력한다면 반드시 성공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꼭 이 일을 맡을 만한 사람을 골라 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현대 과학자들이 자연 정복을 위해 미지의 현상(現象)과 기술을 개척하려는 도전의지와 완전 일치함을 찾아볼 수 있다. 이는 당시 대왕께서 인쇄법 등의 개발에서 시작된 많은 과학적 경험 속에서 얻은 결론을 한 마디로 정리한 것으로서, 이미 훌륭한 과학자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음을 입증해 준다.
또 세계 최초인 측우기(測雨器) 발명에서도 그 경위를 살펴보면, 옛날에는 임금에게 강우량(降雨量)의 보고를, 막연히 비가 홍수나게 많이 왔다든가 흡족하게 왔다든가 조금 왔다는 등의 추상적인 보고를 하고 있었던 것을, 대왕은 빗물이 땅속에 스며든 깊이의 척촌수(尺寸數)로써 계량적(計量的)인 보고를 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땅 속의 건습차(乾濕差)로 정확을 기하기 힘들게 되자 지하로 들어간 빗물의 척촌수를 지상에 빗물을 고이게 하여 그 고인 물의 척촌수로 방법을 바꾸게 된 것이 측우기의 발명이며, 고인 물 중에 얼마가 땅속에 들어가고 얼마가 흘러내렸는가의 다소를 계량하기 위한 방법이 수위계(水位計) 곧 수표(水標)의 발명이었다. 따라서 강우량을 계량하여 보고하게 한 대왕의 생각이 이러한 대발명으로 유도(誘導)되었음을 알 수 있다.
새로운 무기(武器)개발에도 심혈을 기울였는데, 화포(火砲)의 사정거리를 크게 늘리며 적중률을 높이기 위한 연구는 군기감(軍器監)에 명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게 되자, 세종대왕이 몸소 참여하여 그 방안을 신하들과 함께 연구하였다. 그 연구 결과 천자화포, 지자화포, 화자화포, 가자화포, 세화포 등의 사정거리가 배 이상으로 늘어남은 물론 적중률도 월등히 높아졌다.
세종대왕은 학문과 경연(經筵) 및 윤대(輪對)를 통해서 얻어진 광범위한 실학적(實學的) 지식을 가지고, 시정목표를 달성시키려는 집념을 굽히지 않았으니 몸소 문제 해결에 참여하여 전심전력하는 과정에서 많은 문제 해결을 보게 되었다. 그러한 연구와 경험의 축적은 새로운 문제 해결에 고도의 과학적 방법을 대입할 수 있었고 그러한 창안은 매우 예리했으니 악기의 소리를 들어 아주 작은 오차도 찾아낼 정도였다. 이것이 바로 세종대왕께서 찬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과학적 탐구정신이며, 발명의 원천이었다고 생각된다.
세종대왕의 애민정신인 민본정신은 오늘날 도의의식이 타락하고 신의가 없어진 산업 기술 정보화 사회에 있어서 본받아야 할 정신이며, 그 대왕의 자주정신과 과학정신인 개척적 창의성은 현대 정보화 사회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문화의식이라 하겠다. 이러한 정신은 세종대왕 자신의 인간성에서 노출되는 주체적 창의정신(創意精神)인 것이다. 어느 계층을 막론하고 종교적 교리나 인습적 교조를 떠나서 순수한 인간성의 계발을 통한 상호 신뢰와 협조의 공동체 의식을 환기하는 것은 반목과 갈등의 현대사회의 병리를 치유하는 바른 길이라 할 것이다.
우리 반만년 역사에 세종대왕과 같은 위대한 성군이 계셨다는 것은 우리 겨레의 참다운 영광이요, 영구한 자랑이 아닐수 없다. 그 대왕의 뚜렷한 국가관과 그 위대한 정신과 업적, 그리고 고매한 인격 등은 모두 단군 성조 이래 겨레의 이상 '밝은 누리'의 실현에 영구불멸의 거울인 것이다.
현대에 사는 우리 온 국민은 세종대왕의 위대한 정신과 업적을 현대적으로 이해하고, 과학 문화발전에 새로운 방법과 노력을 한층 더해 나가야 비로소 세종대왕 탄신 600돌 기념의 의의가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종대왕 탄신 600돌을 맞는 의의는 아주 큰 것이다. 국제화, 세계화, 정보화 사회로 진입되어 있는 요즘이야말로 우리는 주체적인 겨레의식과 문화의식을 갖고 우리 문화를 지키고, 분별없는 외래문화의 모방 행위를 배척하여 확고한 겨레문화를 꽃피우고 튼튼한 문화의 주체성을 확립함은 물론 우리 문화를 세계속에 심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아무쪼록 온 겨레는 각자 분기하여 이 세종대왕 탄신 600돌 기념사업에 일치 협력함으로써 '민본 과학문화가 앞서는 사회'를 만드는 데 성과를 거두도록 하기에 최선의 정력을 아끼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