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문예

셰익스피어의 전설, 글로브극장 재건기




장원재 / 런던대 로열헐러웨이컬리지 연극과 박사과정

영국에 오래 거주한 외국인들에게 영국인들의 민족적 특성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수집과 정리, 보존에 관한‘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열정’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다. 전시물의 양과 질이 세계 최고라는 대영박물관을 거론할 것도 없이, 유명한 작곡가나 화가의 숫자가 인접국에 비해 절대 열세인데도 불구하고 예술비평이 융성하는 것을 보면 나름대로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료의 수집과 정리, 분석과 비판을 기반으로 하는 예술비평이라는 개념 자체가 영국에서 배태되었다고 하는 편이 사실에 가깝다. 이방인의 눈으로 보자면 평범한 시민의 수집품이‘복싱 세계 타이틀매치 원판 테이프 2만 점’이라든가‘지난 70년 사이에 세계 각지에서 나온 전기기관차 모델의 전부’라든가 하는 따위, 나아가 생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수집가들의 세계가 있고 (30년대의 양철 맥주 광고판을 모으는 모임도 있다) 잡지발간, 정규모임 등을 통해서 정보를 교환하고 진지한 노력을 경주하는 일들이 예사로이 보이지 않는다. 확고한 의지를 가지고 어느 정도 시간투자를 할 수 있다면, 일차대전 직전에 나온 특정 회사의 상업광고 엽서 시리즈나 발간된지 100년이 조금 지난 스위스 관광안내 책자와 지도를 얼마든지 구할 수 있는 나라가 바로 영국이다.

이같은 고정관념의 연장선상에서 영국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은 셰익스피어의 유적이 어디에 있느냐고 묻는다. 셰익스피어의 고향인 스트래트포드-어폰-에이본Stratford-upon-Avon시를 방문하면 성당 안에 있는 셰익스피어의 무덤과 금속관에 음각된‘판단은 네스터와 같고 천재는 소크라테스와 같고…’로 시작되는 저 유명한 라틴어와 고대영어로 쓰여진 명문을 친견할 수 있다. 그의 생가와 처가, 의사와 약사를 겸했던 사위의 집도 방문 가능하다. 그러나 생활인 셰익스피어가 아닌 연극인 셰익스피어를 만나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곳곳에 산재한 오리지널 연극 프로그램이나 초간본 전집,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연중 무휴로 공연하는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 극장엘 가면 시공을 뛰어넘는 천재의 숨결을 호흡할 수는 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 자신의 손떼가 묻은‘바로 그 자리’에는 무엇이 남아 있는가? 무엇이 남아 있었는가?

철자법과는 다소 무관하게 읽어야 하는 지명이 많다.‘Leicester’는 레스터‘Knole’는 노르,‘Lewisham’은 루이샴으로 읽는다. 말보로 담배, 말보로 백작의 영국식 표기는‘Malborough’이다. 지역을 배회하고 있었다.

셰익스피어가 직접 활동하던 극장을 둘러보고 경의를 표하기 위해 대서양을 건넌 이 우크라이나계 유태인은, 사용을 중단한지 오래인 반쯤은 허물어진 양조장 한쪽 벽에 셰익스피어의 극장이 여기에 있었음을 전하는 까맣게 변색된 붙박이 동판 하나가‘극장 유적의 전부’라는 사실을 알고 아연해 한다. 연극예술이 서로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라고 믿었던, 자칭‘온건 좌파’였던 이 청년은, 불가능한 일에 꿈을 가지고 달려들 것을 결심한다. 셰익스피어의 극장을 삼백년 전의 모습 그대로, 그 자리에 다시 세우는 천로역정의 서막이다.

런던의 첫 상설공연장인‘극장 The theatre’이 세워진 1576년까지 영국의 극단들은 여관 마당(중정-전기가 발명되기 전의 건물들은 채광시간을 극대화하기 위해 ꁁ자형 구조로 지어졌다)을 빌어 가설무대를 세우고 공연을 했었다. 연극배우이자 목수이기도 했던‘극장’의 건물주 버베지는 상설 공연장의 필요를 정확히 예측하고 건립허가를 요청했으나, 시당국은 시계 안에 극장이 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시의 동북쪽 핀즈버리 필드에 세워진 이 공연장이 지리적인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흥행실적을 올리자 이듬해에 한 블록 남쪽에‘막극장’이 지어진다. 연이어 테임즈 강 남쪽둑에 장미극장, 백조극장 등이 들어선다. 당시 이 직역은 일종의 유흥가로,‘장미’는 몸파는 아가씨들을 빗대어 지은 이름이라고 한다.

셰익스피어(1563∼1616)가 연극 생활을 처음 시작한 곳은‘극장’으로 알려져 있다. 스트래트포드-어폰-에이본에 있는 그의 생가에 보존된 연극 포스터에는 크리스토퍼 말로우의「말타의 유태인」에 템버레인 역으로 출연한‘배우’셰익스피어의 이름이 보인다. 1590년을 전후해서는「베로나의 두 신사」,「말괄량이 길들이기」,「헨리 6세-제1,2,3부」등을 집필, 극작가로 명성을 날린다. 1593∼4년간 런던을 덮친 흑사병으로 극장이 임시 폐쇄되지만 극장 재개관 후 1597년까지「실수 연발」,「한 여름 밤의 꿈」,「베니스의 상인」등을 무대에 올리며 상당한 사회적 지위와 명성, 재산을 얻는다. 고향마을에‘새 집’이라고 명명한 저택을 구입한 것도 이 시기이다(이 저택은, 19세기 초반 수없이 찾아오는 관광객에게 질린 당시의 소유주에 의해 헐리고 만다. 현재는 이 터를 셰익스피어 재단에서 매입하여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1599년 제임스 버베지의 아들인 커스버트-동생 리처드의 매니저-와 리처드-「햄릿」,「오델로」, 「리어왕」등의 초대 주인공을 맡았던 전설적인 배우-형제는‘극장’의 목재를 뜯어다가 장미극장의 바로 아래에‘지구극장’을 세운다. 극장의 신축비용과 극단 운영비를 주주들이 갹출했는데, 셰익스피어는 당시 대주주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다. 당시의 극단은 8명 내지 10명의 연극인들이 공동으로 희곡을 구입하고 극장을 임차한 뒤 이익금을 분배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신인 배우들은‘주주 배우’밑에서 도제식의 수업을 받으며 연기를 익혔다. 셰익스피어는 자기의 극장이기도 한 이곳에서「뜻대로 하셔요」,「십이야」,「햄릿」,「끝이 좋으면 다 좋아」,「오델로」,「맥베드」,「리어왕」등의 주옥 같은 명편을 잇따라 발표하며 십여 년간 인생의 절정기를 구가한다. 1613년-셰익스피어가 고향으로 은퇴한 해이기도 하다- 지구극장은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인「헨리 8세」공연에 소도구로 쓰였던 횃불이 이엉 지붕에 옮겨 붙는 사고로 전소하였으며 이듬해 곧바로 재건축되었으나 청교도혁명 직후 올리버 크롬웰의 연극상연 금지조치에 따라 1644년 완전 철거되어 오늘날까지 잊혀진 전설로만 남아 있었다.

샘 워너메이커는 재원조달을 위해 각계각층의 인사들을 만나 기부금 모금을 역설하고 스스로 모금활동을 벌이는 한편 관할 구청의 관료주의와 싸우는 등 일인다역으로 동시다면기를 두어가면서 거대한 꿈을 실현시켰다. 1970년부터 생업을 작파하고 본격적으로 이 일에 매달린 그는 미국과 유럽일대를 돌며 셰익스피어와 관련된 세미나를 개최하고 각종 전시회를 기획, 극장 구조, 당시의 연극 공연과 관객 등의 제반 문제에 대한 고고학, 건축학, 사회학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일반인의 관심을 자아내는데 성공했다. 그의 성의에 감복한 학자들이 자원봉사로 참여, 완벽한 재구를 위한 튼튼한 학술적 토대를 제공했고 현 엘리자베스 여왕의 남편인 필립 공, 유력한 연극 프로듀서인 존 길거드, 연극배우이자 영화배우인 다이아나 리그, 봅 호스킨스 등은 재단에 참여, 기부금 모금에 동참했다. 샘 워너메이커 자신은 시골 각지로 순회 공연을 떠나는 이외에 불꽃놀이,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분장 페스티벌, 아동극 공연, 직장인들을 위한 점심시간 공연, 심지어는 술꾼들을 찾아다니는 술집 임시무대 공연 등을 조직, 각계각층의 관객들과 몸으로 부딪히며 이 일의 중요성을 알렸다. 이렇게 해서 모은 돈이 130억 원. 정부나 공식 기구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순전히 개인 모금으로 이만한 돈을 모았다는 사실은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2층 난간을 떠받치는 기둥에는 기부자들이 자신의 이름, 혹은 기념이 될만한 문구들을 새겨 넣었다. 한슨 그룹의 이름이 보이고,‘사랑하는 나의 아들과 딸을 위하여…’라는 한 개인 기부자의 서명도 보인다.

80년대 중반에는 선거로 집권한 중도좌파의 지역정부가 전임정부의 결정을 번복하고 옛 지구극장 일대를 택지로 개발하겠다고 발표, 워너메이커는 단기 필마로 지리한 법정투쟁을 벌인 끝에‘법정 밖 합의’라는 승리를 얻는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그를 따라다녔던‘허풍선이 미국인’이라는 조롱이 얼마나 그의 가슴을 아프게 파고들었을까.‘외국인’인 그가 몇몇 관료들에게 힘써 납득시키려 한 점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극장의 재건축이 그 일대를 새로운 관광명소로 만들 것이며, 관광수입으로 재개발 비용의 일부를 충당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지구극장의 재건축이 학술적으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셰익스피어 희곡의 여러 미스테리들을 실지로 규명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다는 점이다. 셰익스피어 당시의 극장 모습을 전해주는 자료라고는 건축업자나 소도구 납품업자의 설계명세서와 계약서, 사적인 편지나 수필에 보이는 단편적인 기술이 전부이다. 유일한 그림 자료로는 1596년 당시 런던을 여행중이던 네덜란드인 요하네스 데 위트가‘백조극장’의 내부를 스케치한 것이 있을 뿐이다(와세다 대학의 연극연구소가 바로 이 스케치를 본따 지은 건물이다). 피트라는 명칭의 중앙 노천 공간을 지붕이 있는 삼층 목조 건물이 둘러싸고 있다. 사각형 상자 모양의 무대는 바닥에서 한 계단 정도 높이이고 앞쪽으로 튀어나와 있다. 무대 둘레의 삼면 노천에는 입석 공간이 있고, 무대 후면에 여러 층의 건물 정면 모양이 꾸며져 있었다. 무대 양편의 문은 배우들의 등ㆍ퇴장 및 장치를 운반하는 문으로 쓰였을 것이다. 데 위트는 각 부분의 명칭을 기록해 놓았는데, 귀족석 My Lord's Room은 보이지 않는다. 학자들은 데 위트 자신이 무대 정면에 자리했었을 귀족석에 앉아 스케치를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현대의 학자들이 셰익스피어 당시의 연극공연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은 공연시간은 이른 오후에 시작하는 낮공연이었다는 것, 시각적 쾌락을 증폭시키기 위해 무대에 자주 등장하는 군중 장면에서 관객들에게 어느 편인지를 빨리 인식시키려는 현실적 필요에 의해 대단히 화려하고 현란한 색깔의 의상이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점, 마당 입석의 입장료가 쌌을 것이라는 점 - 몇몇 작가의 희곡 중에는‘마당 것들’운운하는, 다소 경멸의 뜻이 담긴 대사가 나온다 - 여배우 역할은 소년 배우가 대신했을 것이라는 점 등에 지나지 않는다. 이른바 안무대를 둘러싼 논쟁은, 그 존재 유무로부터 연극적 용도에 이르기까지 숱한 이설이 팽팽히 맞서며 결론이 나지 않은 상태이다. 셰익스피어 자신이 극장 구조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쓴 만큼, 그 빈번한 장면 전환을 어떻게 처리했을른지도 의문이다. 새 지구극장에서의 공연은 이러한 의문들에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해 줄 것이다. 이론상의 연구 및 도상연습과 실연을 통해 얻어지는 성과는 본질적으로 같을 수가 없는 것이다. 새 지구극장은 현대의 배우들에게, 연출가들에게, 학자들에게, 그리고 관객들에게 셰익스피어 희곡의 행간에서 350년을 묻혀 잠자던 수많은‘잊혀진 전설’들을 되돌려 줄 것이다.

당초의 예정대로라면, 1996년 여름에는 개막공연이‘새 지구극장’의 무대에 올라야 했다. 그러나 극장 관계자들의 말에 따르면, 모금의 부진과 인플레, 기타 여러 가지 사정이 겹쳐 1999년에야 정식 공연을 할 수 있으리라 한다. 현재는 극장내부를 견학하는 사전예약 현장학습 프로그램이 있으며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반 공개도 하고 있다. 여름 시즌에는 공사를 진행하는 한 켠에서‘임시 공연’을 가지기도 한다. 극장이 있던‘바로 그 자리’에서는 발굴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극장 재건축 사진 및 발굴유물 등을 전시하고 있기도 하다(재건축 및 발굴 유물에 관해서는 Andrew Gurr with John Orrell, Rebuilding Shakespeare's Globe, London, 1989라는 단행본이 출판되었다). 새 글로브 극장은 본디 위치에서 15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서 그 위용을 뽐내고 있다.

샘 워너메이커는 1993년 극장의 완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