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프리즘

18세기 후반의 꼭두각시 놀음




서연호 / 고려대 교수

1.

소수의 지식인만이 한문을 도구로 해서 창작과 기록문화를 독점해 온 오랜 관습과 한계로 말미암아 우리 역사에서는 연극에 관한 자료를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대상이 꼭두각시놀이에 미치면 사정은 더욱 심하다. 과거의 연극사나 연희사 혹은 연극이론을 연구하는데 첫 번째 애로는 바로 이러한 자료의 부족이다. 그런데 이번에 조선시대 후기 문인인 강이천(姜溦天, 1768∼1801)의 문집「중암고(重菴稿)」에서 꼭두각시놀이에 관한 자료를 찾게 됨으로써, 우리 연극사 연구에 값진 자료 하나를 첨가하고자 한다.

강이천은 화가로 이름이 높은 강세황(姜世晃)의 손자로 태어났다. 12세 되던 해에 천재성이 알려져 궁중의 초대를 받아 시를 지어 올렸고, 정조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일찍이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이기설을 토대로 한 당시 일반적 학문성향을 탈피하여 고증학적인 연구를 통한 새로운 학리의 규명에 전념함으로써 주위의 관심을 이끌었다. 그러나 주문모(周文謨)와 접촉하여 천주교리를 배우며 민심을 혼란시킨다는 이유로 1797년 11월에 제주도에 유배되었고, 신유박해 때 투옥되어 순조 1년 주문모와 더불어 33세의 젊은 나이에 사형당하였다.

「중암고」에는 강이천이 10세 때(1778년)지었다고 하는 시「남성관희자(南城觀戱子)」가 실려 있다. 그가 남대문 밖에서 놀았던 연희패의 꼭두각시놀이와 탈춤을 보고 지은 것이다. 여기서는 이 장시 가운데서 지금까지 논의 된 바 없는 꼭두각시놀이 부분만을 분석하여 역사적인 맥락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는 나이 열 살에도 벌써 바깥출입을 않고 방안에서 공부에 열중하였다. 어느날 남문 밖의 집 근처에서 연희자들이 무대를 가설하고 논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책상머리에서 골머리를 썩히던 그는 호기심에서 놀이판으로 줄달음질친다. 놀이판 주변에는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구경꾼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그중에는 붉은 옷을 입은 궁중관리며 떡파는 백발노파도 보인다. 멀리서 보면 소나무 사이에 마치 과녁판 같은 것이 걸려 있는데, 그것이 무대로 사용하는 푸른 차일이었다. 차일 앞에서는 악사들이 여러 가지 악기를 요란하게 연주한다. 구경꾼들은 차일 앞에 마치 성을 쌓듯이 옹기종기 모여서 무대를 향해 시선을 집중시킨다.(原詩:「余年부터 月吐까지」참조) 그는 꼭두각시놀이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인형은 가는 손가락만 하고,

나무로 깎아서 오색을 입혔다.

인물을 바꾸어 번갈아 등장하니

어리둥절하여 셀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낯짝이 안반 같은 놈이 갑자기 나타나서

고함소리로 구경꾼들을 두렵게 하고,

머리를 흔들고 눈을 굴리는가 하면,

오른쪽을 바라보고 다시 왼쪽으로 돌아보기도 한다.

갑자기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사라지는데

노기를 띠어 사납게 보이기도 한다.

휘장이 휙 걷히더니

춤추는 소매자락 서로 어지럽게 돌아가는구나.

- 원시「인상(人像)부터 회호(回互)까지」

이상과 같은 내용은 빠른 속도로 변화무쌍하게 전개되는 인형놀이의 광경을 그대로 느끼게 해준다. 손에 끼고 노는 손인형들과 막대기를 잡고 놀리는 작은 막대기인형들은 오방색으로 울긋불긋하고, 그중에는 안반(떡판)같이 얼굴이 큰 박첨지 인형과 무섭게 생긴 홍동지 인형이 포함되어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무대 앞에 앉은 잽이들의 반주에 맞추어 인물들의 잦은 교체와 군무장면이 질펀하게 이루어졌음을 확연하게 떠올린다.

2.

그러나 다음과 같은 내용들은 현재 전승되고 있는 꼭두각시놀이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부분으로서 주목을 요한다.

홀연 자취도 없이 사라지며,

더벅머리 귀신 같은 얼굴이 나타나서

두 놈이 방망이 들고 치고받고,

잽싸게 뒷면서 잠시도 서 있지 못하네.

홀연 자취도 없이 사라지며,

도깨비 같은 얼굴이 나타나서 놀라게 한다.

사뿐사뿐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는데

얼굴을 구리빛이고 눈에는 도금을 했다.

홀연 자취도 없이 사라지며,

북방인같이 생긴 인물이 또 달려나와

칼을 뽑아 스스로 머리를 베어

땅바닥에 던지고 자빠진다.

홀연 자취도 없이 사라지며,

귀신 같은 얼굴이 아이를 안고 나와 젖을 먹이고,

어르다가 이내 찢어발겨서

까마귀와 솔개 밥이 되게 멀리 던져버리는 구나.

- 원시「홀연(忽然)부터 연부(鳶付)까지」

‘홀연 자취도 없이 사라지며(忽然去無犠)’라는 구절이 네 차례나 반복될 정도로 장면전환이 빈번하였음을 알게 한다. 인형사들의 조정기술은 매우 세련되고, 인형의 종류나 제작기능 역시 우수했던 것을 파악할 수 있다. 더벅머리 귀신 같이 생긴 두 인물이 막대기를 잡고 잽싸게 싸우는 광경은 꼭두각시를 사이에 두고 두 조리중이 다투는 현재의 모습을 연상시키나 형태가 같지 않다. 얼굴이 구리빛이고 눈가에 도금을 한 영험한 인물은 현재의 홍동지를 연상시키나 역시 형태가 같지 않다. 북방인(嫱人)같이 생긴 인물과 그의 자살, 모유를 먹이는 여인과 아이를 살해하는 그녀의 광폭한 행위는 무서운 자해이며 자포자기로서 상관성이 깊은 인물로 보이는데, 현존의 꼭두각시에는 없는 장면들이다.

처음 접하게 되는 이러한 장면의 해석이야말로 장차 우리 인형극 연구의 과제라고 할 만하다. 보다 심도 있는 연구는 차후로 미루고 우선 필자의 소견을 간략히 밝혀 두기로 한다.

첫째로, 이 인형극이 전승적인 꼭두각시놀이라는 근거는 무엇인가.「남성관희자」에서 다루고 있는 후반부의 탈춤도 같은 놀이패에 의해 공연되었고, 인형이 채색을 입힌 장두인형인데다 부채를 이용해서 등퇴장을 돕고 있는 점, 그리고 강이천이 관람을 하면서 언어소통에 관한 불편을 기록하지 않는 점을 증거로서 들 수 있다. 만약 이것이 중국인의 인형극이었다면, 반주음악의 이질감과 언어의 문제에 관한 다소의 지적이 나타났을 것이다.

둘째로, 막대기를 든 두 인물의 싸움은 현재와 같은 여색을 탐하기 위한 조리중들의 갈등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놀이 전체의 맥락으로 보아서는, 조리중의 갈등이기보다 서민을 핍박하는 관리측과 가난한 서민 혹은 천민 사이의 갈등으로 해석된다. 한 남성의 자살, 한 여인의 아기 살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체제와 환경에 대한 자포자기이자 저항적 표현이기 때문이다. 막대기라는 도구와 그것이 부딪치는 소리는 싸움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자 하는 인형극 특유의 발상으로서 주목된다.

셋째로, 구리빛 얼굴에 눈가에 도금을 한 인물의 존재가 과연 누구냐 하는 점이다. 고대의 가면인 신상(神像), 방상씨(方相氏), 신라의 오기면(五伎面), 고려의 나례면(儺禮面), 탈춤의 사자(獅子)와 같은 것은 신성과 벽사성과 위엄성을 갖추기 위해 눈가에 도금을 하고 있었다. 꼭두각시인형에서도 이러한 고대적 종교성과 주술성이 18세기 후반까지 전승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도금을 한 인물은‘노기를 띠어 사납게 보이는 인물’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로서는 홍동지 혹은 이시미와 같은 존재를 연상할 수도 있고, 아니면 이미 사라진 어떤 신성인형(神聖人形)이나 귀면인형(鬼面人形)을 가정할 수 있다.

넷째로, 북방인 같은 인물의 자살행위는 과연 인형극으로서 가능했을까 하는 점이다. 매우 이채롭고 파괴적이며, 아울러 고도의 기술적인 처리가 가능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런데 이 문제와 관련해서 참고가 되는 것은 20세기 초까지 서울 근교인 구파발에 전승되었던 꼭두각시인형놀이다. 1932년 6월에 현지조사를 한 일본인 미타무라는‘인형사 한성준은<평양감사의 장례식에 참가했던 홍동지 인형이 벌거벗은 몸으로 불경스런 짓을 했다고 해서 분노를 사게 되고, 사람들이 그를 잡아서 참수형에 처하는 의식을 실제로 보여주었다>고 증언했음 ’을 기록하였다.(서연호,「꼭두각시놀이」, 참조) 이같은 내용은 상호성격을 달리한다 하더라도 자살극의 가능성을 충분히 예상하게 한다.

다섯째로, 북방인과 꼭두각시놀이의 상관성이다. 강이천은 북방인을 달인(嫱人)이라 하였다. 중앙아시아의 타타르인 즉 달단인(嫱嫘人)을 지칭한다. 그 인형이 실제로 달인 자체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강이천의 눈에는 그런 북방인으로 보였다는 결과이다. 북방인들은 통일신라시대 이후 대거 한반도에 유입되었고, 그 일부가 생계를 위해 수척광대(水尺廣大) 혹은 백정광대(白丁廣大)라는 명칭으로 전국을 유랑하였다. 이런 유랑광대가 했던 꼭두각시놀이와 그들 자신을 극화한 달인인형의 존재를 작품을 통해 충분히 연상할 수 있다.

여섯째로, 북방인의 자살과 여인이 자기 아이를 살해하는 내용은 서로 상관성이 깊어 보인다. 가족을 보살필 수 없는 남편이 먼저 목숨을 끊고, 굶주림에 시달리던 여인이 아이에게 젖을 먹일 수 없게 되자 실성하여 그 아이를 찢어서 까마귀와 솔개에게 던져주는 참담한 모습인 것이다. 가족이 도저히 살아갈 수 없는 유랑광대의 삶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3.

고려인 이규보(1168∼1241)가 꼭두각시놀이를 보고 지은 시「부답병서(復答幷書)」에는‘단청을 모았다가는 순식간에 거두어 버리네’라는 구절이 있다. 현재 남사당의 꼭두각시놀이에 전승되는 절짓는 마지막 장면이 벌써 그 당시에 공연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앞서 강이천이 본 꼭두각시 놀이에는 단청(丹靑) 즉 건사장면(建寺場面)이 묘사되어 있지 않다. 그 장면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강이천이 그 놀이를 끝까지 관극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먼저 공연된 꼭두각시놀이뿐만 아니라, 동일한 공연장에서 이어서 공연된 탈춤까지 자세하게 묘사한 것으로 미루어 전부를 관극한 것이 분명하다.

'우리들이 친히 방문하여 보게 된 구파발의 인형은 마을의 공유물로 그 공연에 대하여 사람들은 익숙하다. 현재 인형사를 직업으로 하는 사람은 없고, 무엇인가 본업을 지닌 이외에 인형의 조정은 부업으로 하고 있다. 구파발의 패거리도 마을의 제례나 특별한 잔칫날에는 공연을 다니는 이외에 농한기를 이용하여 돌아다니며 공연한다. 그리고 이런 것은 비단 구파발에만 있는 일이 아니라 한다.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황해도의 각 지방에도 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조선 팔도 여러 곳에 인형놀이의 패거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형놀이의 흥행이 잘 안되고, 순회공연이 대체로 어려운 형편인데도 인형사는 아직 시골에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이상은 일본인 미타무라의 현지조사 기록이다. 앞서 강이천의 시와 미타무라의 기록을 통해서 볼 때, 현전하는 남사당의 꼭두각시놀이가 전승 인형극으로 유일한 계통이 아니라, 과거에는 다른 계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남사당 계통을 불교적인 구조라고 한다면, 강이천이 관극한 계통은 현실적인 비극구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앞에서 지적한 대로 강이천이 관극한 꼭두각시놀이는 인형극으로서의 예술성과 기능이 매우 뛰어났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인형의 종류가 다양하고, 하나하나 개성이 있으며, 내용이 풍부한데다가 연출기교가 우수하였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강이천이 묘사한 18세기 후반의 꼭두각시놀이와 그의 시는 이러한 여러 가지 사실로 인하여 연극사적인 가치와 의의가 있다.

한국의 꼭두각시놀이 연구와 관련하여 최근에 발표된 연구업적들을 여기서 간략히 소개해 보기로 한다. 단국대 연극학과 김청자 교수는「꼭두각시놀음 텍스트 연구 1」(한국연극학, 한국연극학회, 1997.2)을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꼭두각시놀음을 하던 연희자가 소속된 집단으로 추정된‘무자리’는 인도의 집시나 페니키아 종교집단의 성향과 유사성이 있고, 범지중해 문화인 우가리Ras Shamra-ougarit 신년제의의 시나리오인 바알Baal 서사시와 꼭각시놀음의 텍스트에는 동위적 이미지들이 어휘와 함께 남아 있다는 가설을 토대로 하여 새롭게 해석된 것이다. 예컨대 앞소리인‘떼루떼루 떼루다 데루야하’는 한 해의 풍요로운 삶을 기원하는 주술적 제의식인 청신(請神)거리로 보았다. 그것은 단순한 허사나 구음 이상의 의미로서, 신의 현현을 체험하려는 청신단계이며, 지중해와 인도의 고대제의에 관련시켜 본다면, 아마도 그 신은 황소였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런 해석방법으로 곡예장거리, 피조리거리, 영노거리, 꼭두각시거리 등을 차례로 분석하였다.

게이오대학의 노무라 교수는「고요신사 인형희의 연원」(한국문화, 토오쿄오 한국문화원,1997.1)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그는 이미「가면희와 방랑예인」(1985),「한국의 민속희」(1987),「무와 예능자의 아시아」(1995) 등을 통해서 한국연희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일본 학자이다. 이번 논문에서는 고요신사의 인형희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국의 꼭두각시놀이와 연원을 같이할 뿐만 아니라, 특히 한국 무당의 굿놀이에 나타나는 의식과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사실을 밝혀 놓았다.

타쿠쇼쿠대학의 무라카미교수는「꼭두각시놀이와 하찌만고효신사, 고요신사의 괴뢰희」(민족문화, 한성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97.1)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다. 꼭두각시놀이는 밤에 야외에다 화톳불을 놓고 그 불빛 속에서 벌어졌다. 사방에 기둥을 세워놓고 휘장을 둘러 만든 무대에서 인형꾼은 인형을 높이 쳐들고 인형을 놀린다. 이런 방식은 일본의 고효사나 고요사의 인형희도 마찬가지이다. 고효사의 해상신사는 오전 중에 하는데, 무대는 배 위에다 기둥을 세운 다음 그 사이에 어린 죽대를 꽂고 그 둘레를 막으로 쳐서 만든다. 오늘날 신사에서 무전(舞殿)을 막으로 치는 것은 그 옛날 무대가 배 위에 설치되었던 것을 상상하게 해준다. 일본의 사도섬에서는 이 무대를 고막이라고 하는데, 이는 매우 드문 일로 사도 이외에는 고효사, 고요사에서만이 찾아볼 수 있다.

꼭두각시인형의 구조와 조정방법은 손으로 놀리는 인형과 손가락으로 놀리는 인형으로 크게 나눌 수 있는데 이 역시 같다. 미타무라의 기록에 의하면, 꼭두각시인형의 구조는 8가지 형식이 있다. 이것은 인형이 고대에 전파되면서 여러 인형이 섞이게 되어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점차 발달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된 것인지는 분명하게 지적하지 아니하였다. 고효사와 고요사의 춤인형(細男舞)은 다리가 없는 막대인형으로 인형꾼들이 놀리기 쉽도록 하부가 가늘다. 양팔은 상하로 잘 움직이도록 어깨에 못으로 고정되어 있다. 끈이 붙어 있어 이 끈을 잡아당겨 팔을 조정한다. 씨름인형(神相撲)은 팔, 다리가 달려 있는 나체인형인데, 한쪽 다리만이 놀릴 수 있도록 되어 있고, 한쪽은 몸체와 딸려 있는데, 인형꾼이 잡기 좋도록 가늘게 만들어져 있다. 양팔과 한쪽 다리에 달려 있는 끈을 놀려 움직인다. 이것은 이들 신사에서만 볼 수 있는 것으로 옛 방식이다. 홍동지는 다리가 움직이지 않는 막대인형으로, 양팔이 못으로 고정되어 있고 끈으로 팔을 움직이는 것이 씨름인형과 같은 계열로 생각된다.

이들 신사에서는 징, 북, 피리를 쓰고 있다. 꼭두각시놀이도 장고, 북, 피리, 꽹과리 등을 상용하는데 이들 세 악기가 기본인 것은 동일하다. 한국의 가락은 3박자인데, 신사의 놀이도 3박자이다. 일본 현지 정착민과는 다른 가락인 삼도박자가 떠돌아다니던 인형사들의 가락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한·일 두 나라의 인형은 고대 신앙을 바탕으로 한 것임은 이미 밝혀졌다. 또 공연에 즈음하여 꼭두가시놀이에서는 간단한 고사를 지낸다. 고요사에서는 신사를 지내기 전날에 인형에 신이 내리도록 당궤(唐櫃)에 넣는다. 그리고 신체(神體)로써 인형희가 봉납되는 것이다. 이처럼 꼭두각시놀이와 일본 신사의 고대 인형희는 그 무대 형식, 인형조정방법, 음악, 신앙방법에 있어서 유사한 점이 많다는 것이 무라카미 교수의 해석이다.

앞에서 분석한 강이천의 시「남성관희자」에 나타난 18세기 후반의 꼭두각시놀이와 김청자, 노무라, 무라카미 세 교수의 논문은 한국 꼭두각시놀이 연구에 새로운 자료를 제공해 준다. 아울러 서로 상관성이 깊은 문제를 논의하고 있다는 점에서 연구의 새로운 지평이 열릴 것으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