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리뷰 / 영화

웃음의 이면 속에 투영된 성, 정체성의 위기




송희복 / 영화평론가

남녀의 몸이 뒤바뀐 별난 이야기「체인지」

남녀의 몸이 뒤바뀌다니, 세상에 별난 일도 있다. 아무리 영화라지만 그렇게까지 환상을 극대화하여 관객들로 하여금 공소한 흥미의 세계로 인도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얘기의 발상과 전개가 기상천외에 근거하고 있는 만큼이나 영화「체인지」(감독:이진석)는 발랄하고 신선한 재미를 제공해주고 있다.

이 영화의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말썽꾸러기 남고생 강대호(정준 분)는 바닥을 헤매는 성적에다 화장실 벌청소를 도맡아놓고 하는 문제적인 학생이어도 장래에 기타 연주자로 성공하겠다는 멋있는 꿈을 키우고 있다. 새침떼기 여고생 고은비(김소연 분)는 예쁘고 공부도 잘하는 모범생이다. 그런데 어느 날 늦은 하교길에 갑작스레 쏟아지는 폭우와 알 수 없는 번개로 인해 두 사람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정신을 차리고 두 사람의 몸이 뒤바뀌게 된 것. 이때부터 두 사람은 서로 다른 환경과 상이한 인생과 타인의 운명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게 된다. 학교 생활에서나 가정 생활에 있어서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고 남의 삶을 대신 살아가야 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웃지 않고서는 배겨내지 못할 숱한 일들이 생겨나게 된다. 웃음을 엮어내는 조역으로는, 미술 선생님을 애틋이 짝사랑하는, 하지만 학생들에게 과격하고 난폭한, 그래서‘미친 개’로 통하는 학생주임(이경영 분)과, 시쳇말로 공주병에다 약간의 푼수끼로‘미친 개’와의 아슬아슬한 사랑의 줄다리기를 함으로써‘미친 개’를 더욱 미치게 만드는 미술 선생님(이승연 분) 등이 등장하고 있다. 대호가 은비로 변한 후부터 이상스레 사람됨이 달라진 은비를 걱정하는 은비 부모님은 이민을 결심하게 되고, 은비의 모습으로 된 대호는 학교에서 금지된 마지막 공연을 준비한다. 축제의 무드가 고조되면서 다시 이상한 번개와 돌풍이 휘몰아 내리친다. 이것으로 인해 두 사람의 몸은 자기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된다. 대신에, 학생주임은 미술선생님의 몸으로 체인지되고, 미술 선생님은 학생주임의 모습으로 변해 버린다.

착종의 시대에 불어오는 역복풍 현상

영화「체인지」는 해프닝과 해피엔딩으로 요약된다. 초자연적인 마법에 의한 성전환과 이 과정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해프닝. 남자의 몸이 된 은비는 아침마다 불끈불끈 솟아오르는 아랫도리에 경악해 한다. 반대로 여자로 바뀐 대호는 생리대 소동을 일으키며 아연실색한다.

이 영화는 성적인 에피소드와 담론으로 가득 차 있다. 색깔이 짙고 자극적인 농담도 품격이 있다. 우디알렌적인 유머 세계처럼의 진지함을 기대하기에는 비록 미달되는 수준이기는 하나 왁자지껄한 음담패설처럼 결코 통속적이지는 않다.

남녀의 몸이 서로 뒤바뀌는 상황의 설정이 미국·일본의 영화에도 있기 때문에 그것은 참신한 발상이라곤 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의 이야기 구성이 오늘날 왜 이렇게 관객들로 하여금 이목을 집중시키게 하는가 하는 사회문화적인 배경을 읽어내야 할 것 같다.

주지하듯이, 오늘날 불확정성 시대상황은 미래에 대한 불투명하고도 애매모호한 전망으로 인해 착종(錯綜)의 시대라고 말해지고 있다.「천년의 사랑」,「은행나무 침대」, 전생 신드롬 등등은 대중의 현실도피적 집단 심리를 신비주의의 형태로 반영하고 있거니와, 전세계적으로 서서히 유포되고 있는 성적 정체성의 혼란이 오늘날을 착종의 시대임을 가리키는 증좌가 된다.

얼마전 우리나라에 SF기법을 동원한 홍콩 무협영화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자신의 이름처럼 푸른 안개와도 같이 차디찬 표정으로 악을 징퇴하는 남장여인 임청하의 고혹적인 이미지가 뭇남성의 가슴을 통쾌하게 하기도 했고 설레게 하기도 했다. 반면, 첸 카이거의 중국적인 스타일로 된 예술영화「패왕별희」에서는 기구한 그리고 파란곡절의 운명을 안고 살아가다가 불행하게 파멸되어 가는 여장의 장국영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심금을 울리게 하면서 이채로운 비극적인 감정을 경험케 했다. 이 두 가지 사례를 가리켜 우리는 역복풍(逆服風 Cross-Dressing Boom) 현상이라고 이름해도 좋을 것이다. 중국인의 경우에는 희망과 암울한 미래의 교차, 한자문화권의 유교적인 질서와 서구 자본주의적인 냉혹한 시장논리가 화합을 이루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면에 모순과 상충을 일으키는 현실이 그 원인이 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나라도 본격적으로 남녀가 경쟁하는 시대에 들어선 것 같다. 각계각층에서 여성의 인간으로서의 인권이 높아져가고 있다. 각 분야에서의 여성의 역할과 활약이 두드러져 보인다. 의복이나 치장에 있어서 얼핏 보기에 남녀의 구분이 명백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 이제 남자는 남자다워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는 말은 구태의연하고 시대착오적인 말이 되어가고 있다. 전통적인 금녀의 학교인 사관학교에 여성 사관생도가 입교하고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다. 80년대적인 이데올로기가 와해된 빈터에 90년대적인 대중문화·시장경제의 열풍이 불어오는 바의 소산인 듯한 정신의 공동화, 가치관의 혼돈 및 부재 등도 역복풍의 한 원인이 되었던 것 같다

어디 중국과 한국뿐이랴.

성의 정체성을 상실한 경우는 동성애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90년대에 이르러 무수히 생산된 게이영화와 레즈비언영화도 오늘날이 착종과 혼돈의 시대임을 증언하고 있다.

근래에 출시된 세 편의 비디오를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은 한결 분명해진다. 왕가위 감독의「동사서독」은 양성적 이미지를 가진 두 겹의 존재로 등장하고 있는 임청하가 남녀 이정을 구분짓는 경계의 벽을 허물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에스키모 청년의 모습으로 행세하는 여성이 여성을 사랑하는「연어알」, 남장한 여성이 억압받는 민중의 편에서 중세의 마술사 행세를 하지만 변장을 풀고 현실로 돌아오면 권력자의 아들과 사랑을 나누는 이중생활을 다룬「매직 엑조티카」도 현실과 비현실, 남과 여 사이의 경계가 무너져 가는 오늘날 시대 상황에 대한 우화이기도 한 것이다.

영화「체인지」를 통해서도 우리는 이러한 문맥에서 시대사적인 의미를 읽어내야 한다. 그리고, 이 영화가 청소년 사이에 만연되고 있는 성의 정체성 상실 및 혼돈을 더욱 부추기고 있다는 점에서 엄격하게 비판되어야 한다.

내가 최근에 읽은 시사주간지「뉴스 플러스」(동아일보사, 1977.1.23)에 의하면, 청소년층 특히 여중고생 사이에 동성애 만화, 중성적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내용의 만화, 해적판 일본만화 등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한다. 이제 전통적인 순정만화-백마를 타고 온 청년과 아름다운 소녀간의 사랑과 같이 유형화된 얘기가 갖는 남녀의 전통적인 성역할이 파괴되어가고 있는 현상은 교육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하다. 그러나, 어쩌랴. 이것이 우리가 처해 있는 저간의 실정인 것을.

기대 갖게 하는 배우 김소연

「체인지」에는 우리 시대의 스타들이 대거 조역과 단역으로 등장하고 있다. 이 영화가 갖는 화젯거리는 뭐니뭐니해도 주인공 김소연이 처음으로 영화에 출연했다는 사실에 있을 것이다. 여고 1학년생 그녀는 그 동안 TV드라마에 출연하여 많은 이의 주목을 받았다. 성숙한 여인의 매력과 소녀의 청순한 용모가 절묘히 배합된 황금비례의 이미지는 요염함과 앙증스러움을 동시에 갖고 있는 야누스적인 표정에서 비롯되고 있다. 연기도 뛰어나다. 최근에 차세대의 명연기자가 될 홍경인·이정현이 등장한 6부작 미니시리즈「일곱 개의 숟가락」에서 가난한 청년을 사랑하는 부잣집 딸 역할을 잘 소화해냈다. 이번「체인지」에서도 두 겹의 연기 패턴을 적절히 수행했는데 특히 남자답게 연기하는 데 있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리라고 짐작된다. 이제 그녀는 잘 끼워진 첫 단추에 만족하지 않고‘천리길도 첫 걸음부터’라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에게도 김소연으로 인해 과거의 브룩 쉴즈처럼 여고생 슈퍼스타의 시대가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