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 OECD 가입과 문화예술 시장 개방 2. 미술
미술시장 개방의 사주와 팔자
김영재 / C&I 아트웹사이드 기획위원
■ 개방이라면 무조건 걱정이란다.
'걱정도 팔자'라는 우리 속담이 있다. 걱정 안 해도 될 것을 공연히 걱정한다는 뜻이다. 미술시장이 전면 개방된다니까 많은 사람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그건 불필요한 걱정에 불과하다. '걱정도 팔자'라는 우리 속담이 생각난다. 1989년의 수입자유화 조치에 따라 골동품이 개방되었다. 1990년에는 조각·조상 등이, 1991년 1월부터는 회화·데생·파스텔화·판화 등이 수입된다. 아무나 외국 미술품을 들여올 수 있다. 외국 투자법인이 개방되는 외국의 예술품 및 골동품 소매업이 합법적으로 설칠 판이다.
그럼 개방 안 한다면 ? OECD에 가입하고서 시장 개방을 안 할 순 없는 노릇이다. 경제개발 협력기구 즉 OECD는 G7 등 세계 경제 강국들이 참여한다. 그만큼 영향력이 있다. 예술품 및 골동품 소매업은 OECD 회원국이 모두 개방한다. 한국이 개방 안 할 명분이 없다. 약체 한국은 봉이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럼 OECD에 가입 안 하면 되는가 그럼 언제 선진국이 되고…… 선진국 안되면 될 거 아닌가…… 참 말도 많다.
이렇게 종알거려 봤자 아무런 대안이 되지 않는다. 총체적인 난국이라는 오늘의 경제에 선진국의 문턱이라는 OECD는 짐이 되지 않느냐고 조심스레 입을 떼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한국 속담이 딱 들어맞는다. 걱정도 팔자.
■ 개방 체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OECD에 가입한 한국은 세계 29번째 회원국이다.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이다. 가입은 시장 개방의 확대를 전제로 한다. 금융시장이나 국내 산업의 경쟁력 확보가 시급한 시점이다. 선진 회원국과 유사한 교육이나 환경 등 여건을 개선해야 하는 과제도 안게 된다.
그러나 의무만 강조되면 누가 가입하겠는가 ? 국가적 신용도가 상승하고 다자간 투자협정 등 강력한 발언권을 얻게 되는 이점이 있다. 경제와 사회체제의 선진화를 기할 수 있다. 행정 규제가 완화되어 민간 경제가 살아난다.
그러나 그 거창한 이름에 비해 얻는 게 너무 적다. 우리가 선진국에 진입하기엔 아직 사회적 여건이 너무 약하기 때문이다. 우루과이라운드가 시행될 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치 이 나라가 송두리째 빚에 넘어갈 것처럼 할딱거렸다. 우리의 경제와 산업 체계를 바꾸어 선진국에 진입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라는 생각을 품은 사람은 나밖에 없나 보다.
영화 시장이 개방된다니 정력에 그만 이라는 뱀을 아까운 줄 모르고 극장에 풀어놓은 사람도 있다. 영세적인 영화 산업이 이제는 국제적 규모로 바뀌고 영화 문법도 세계화할 것이라는 기대도 나만 했나보다. 미술시장 개방 쇼크에 시큰둥한 사람 역시 나뿐인가 하고 생각한다.
영국의 산업 혁명은 농민 씨말리기부터 시작됐다. 런던으로 내몰린 유휴 노동력으로 산업혁명은 성공했다. 농민들이 이 글을 읽으면 내 전화통이 불이 나거나 우리 집 문짝이 박살이 날 수도 있겠지만 선진국이 되기 위한 농민 인구는 20퍼센트 이하일 필요가 있다. 우리의 농민인구는 늘상 50퍼센트를 웃돌다가 37퍼센트까지 줄었다는 통계를 오래 전에 본 적이 있다. 그럼 농자천하지대본은 무슨 얘기인가 ? 그건 농경시대의 이야기에 불과하다. 이제 정보화시대요, 문화전쟁시대이다. 기술 이전의 80퍼센트가 다국적 기업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다.
■ 문화는 숫자도 수량도 아니다
입으로는 그렇게 호언장담을 하면서 내심걱정이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위의 미풍양속이 이렇게 속절없이 무너지는구나 하고 억장이 무너지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우리의 신화와 원형과 민족정기조차 산업화와 정보 혁명에 휩쓸려 떠내려간다. 그러나 문화란 것이 원래 그런 것이다. 고인 문화는 썩는다. 유감스런 비유지만 문화의 창달과 경제발전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은 화재요, 전쟁이요, 그리고 국체의 변화다. 마음대로 전쟁과 화재를 일으킬 수 없고 나라를 팔아먹을 수 없을 때 문화전쟁은 필요악이 되기도 한다. 문화상품을 무기로 세계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다. 우선 옆 나라 일본부터 공략할까 ?
일본의 문화전쟁 준비는 가히 경이적이다. 동경의 긴자를 빼곡이 메운 화랑들, 3천 개가 넘는 것으로 추산되는 미술관, 박물관, 및 화랑들, 4천억 원 이상으로 추산되는 문화예술 지원기금 등의 수치를 들으면 현기증이 날 만하다. 여기에 한국의 예를 비교해 보면 아예 기절을 할 정도다. 그런데 정말 이러한 숫자가 대단한가.
문화예술은 인간이 하는 일이다. 당연한 이야기이다. 더욱이 대부분의 작업은 개인의 몫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조직과 기구와 금전이 하는 것으로 착각한다. 간단히 예를 들어보자. 1990년에 일본에서 한국 작가들과의 교류전을 제안한 적이 있다. 한국의 작가와 평론가 및 기자들이 대거 초청 받았다. 한국으로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기획이었다.
그 경비가 어디서 나왔을까 ? 궁금증은 팜플렛을 보면서 조금 풀렸다. 열대 여섯 후원자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 개똥인가, 도토리인가
참 부러운 일이었다. 한국에서의 후원은 흑백 논리가 따른다. 후원자를 물색할 때 한국에서는 복수 후원이 어렵다고 토로한다. 기업체에서 후원을 할 때 다른 기업이 동시에 이름이 올라가거나, 제안서가 동시에 들어갔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후원은 없었던 일로 백지화된다. 결국 기업체는 얼마를 제공하건 간에 독점적으로 후원하느냐, 않느냐를 결정한다.
그래서 한국의 작가들은 어렵다. 기업체를 뚫고 후원을 받아내는 것은 하늘에 별 따기이다. 수혜자를 많이 만들기 위해 연구 기금이나 지원금은 개인보다는 단체에게 주로 주어진다.
건축비에 따르는 1퍼센트 법안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사업은 돈 놓고 돈 먹기거나 정치판으로 귀착될 공산이 크다. 전문 브로커가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브로커는 중매인이다. 수수료가 따른다. 전문 브로커는 전문적으로 수수료를 챙기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결국 1퍼센트의 작가는 전문 브로커가 탐을 낼 만한 지명도와 정치적 수완이 있는 사람으로 한정된다. 정치란 이름 그대로 정치이다. 정치가나 관공서에 줄이 하나라도 더 굵고 많은 것을 잡는 작가가 '도리'를 한다. 도리란 일본식 표현인데 독점한다는 말이다.
결국 작가는 개밥에 도토리로 남는다. 도토리라, 개밥에 섞인들 좋은 일이 있으랴. 개가 삼키면 개똥밖에 더 되겠냐만은 따돌린다는 것은 결코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 그 풍토에서 자란 예술이 있다.
작가로서는 일본이 부럽기도 할 것이다. 평론가나 행정가들은 한국 작가에 대한 행정적 지원이 일본에 비해 너무나 떨어진다고 언성을 높일 것이다. 화랑이나 미술관에서는 지원은 없고 규제만 많다고 목청을 높일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은 좋은 나라이고 우리나라는 나쁜 나라인가. 어린이 만화영화와도 같은 편를 앞서가는 정책의 모든 것이 부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시 강조하건대 예술은 예술가가 하는 것이다. 문화예술은 개인이나 소수 정예부대에서 시작하여 피라미드처럼 저변으로 확대해 나가는 과정을 밟는다. 결국 문화 예술의 척도는 개인이 어느 정도 능력과 재능을 극대화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능력은 개발될 수 있다. 재능은 타고나는 것이지만 그것을 극대화하는 것은 사회환경과 여건이다. 국민성, 나아가 민족색이 개인 예술가의 능력과 재능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환경과 여건인가.
■ 민주적 예술이 예술을 척살한다.
다시 일본의 후원자를 생각해 보자. 열 다섯 명이 후원회를 조직한다고 치자. 세금감면혜택과 더불어 문화적 자긍심을 살려줄 수 있다. 작가를 물색한다. 서너 명이 물망에 오른다. 이 과정에서 후원자들의 의견이 충돌할 수도 있다. 구둣방 주인은 일본화한 인상파 작가를 고른다. 딸을 미술대학에 보낸 만두 가게 사장은 한사코 뉴욕에서 공부한 추상 작가를 고집한다. 만화책 출판사 사장은 색감이 좋은 디자이너를 후원하자고 설득한다. 나머지 조용한 후원자들은 굿만 본다. 누가 선택될 것인가. 일본풍의 온건한 화풍과 색감과 폐를 끼치지 않을 만한 조용한 터치가 선정된다. 민주적인 절차이다. 예술을 척살하는 민주주의다.
그래서 일본인은 '일본은 예술의 사막인가'라는 탄식을 내뱉는다. 서구 미술품 재고처리장이라는 자탄도 있다.
한국의 작가는 후원자가 없다. 한번 전시를 하고서 작품 한 점 팔지 못하면 빚을 갚을 때까지 라면으로 때워야 한다. 라면이다. 이 나라 사람들은 라면 몇 박스만 있으면 살아나갈 수 있다. 집세나 물가가 비싸다 해도 살인적인 일본에 비할 바 아니다. 어렵더라도 버티겠다면 버틸 수도 있는 것이 한국이다.
그래서 한국 작가의 작품은 저력이 있다. 후원을 얻겠다고 생각하면 힘들더라도 순차적으로 후원자를 물색할 수 있다. 굳이 열 다섯 명을 만족시킬 만한 민주적인 화풍을 개발하지 않아도 좋다. 재수가 좋으면 눈먼 이월금을 받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는 작가다'라고 버티면 어떤 형태건 작가로서 살아나갈 수 있다는 사실이다. 6·25때 피난지에서도 2백여 회 전시를 가진 한국작가 아닌가.
■ 비단은 꽃을 그리지 않아도 아름답다
금상첨화라, 한국 미술의 저력에 문화 행정적인 지원과 뒷받침이 있다면 어이 좋지 않으랴. 그러나 어떤 방식이 이상적인가에 대한 정답은 없다. 물량 공세냐 소수정예냐에 국운을 걸 이유는 없다. 모든 문화예술은 스스로의 길이 있는 법이다. 국가나 행정기관은 그 운행의 길을 막지만 않아도 후원이 된다.
문화체육부라는 기구의 성격에 대해 불평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무식한 것들, 어떻게 문화와 체육이 하나의 부서에서 논의될 수 있어 ?'하고 투정을 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체육기금에서 문화기금을 조성하는 것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수월하다는 점에 생각이 미치지는 않는다. 문화체육부에서 혹시 뜀박질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작가에게 표창장을 준 일이 있었던가. 왜 그런 욕을 먹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선무당 사람잡는다고 오히려 문화도 체육도 모르는 사람들이 문화 체육을 진흥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다.
국가적 행정과 후원은 규제가 아니라 범주의 설정이다. 발뻗기이다. 일본의 천황은 과거 일본도와 일장기가 휩쓸었던 지역을 순방한다. 이번에는 문화 사절이다. 우리 대통령은 안 하나 ? 물론 판본 민화 등을 선물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통령이 천황을 흉내낼 이유는 없다. 기능직과 명예직이 다르고 우리와 저들의 경제가 다르다. 우리 대통령은 경제인을 대동한다. 그게 왜 흠이 될까. 문화예술은 굳건한 경제의 바탕에서 개화되는 약하디 약한 식물과 같다.
■ 미술시장이나 주식시장이나
파리에서 열리는 피악(Fiac)에서 작년을 '한국의 해'로 정했다 세계 화랑의 눈길이 한국으로 쏠리고 있다. 해외에서 우리 문화재나 미술품이 고가에 팔리고 있다.
그럼 우리 문화예술이 얼마나 위대하길래하고 흡족해 하기는 아직 이르다. 세계인이 한국의 문화유산에 관심을 갖는 것은 투자 가치가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다. 훗날 막강한 경제력을 갖춘 한국은 해외의 문화유산을 사들일 것이다. 멀지 않은 장래에 지금의 투자는 이익을 안겨 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는 것이다. 주식시장이나 경매 회사 또는 국제적인 화랑인들 다르랴. 이 나라 화랑을 기웃거리는 것이 한국의 문화예술을 창달하기 위한 것이다……라고 말하려 하는가.
그렇더라도 많이만 사다오 하고 조르기에 우리의 문화유산은 많이 남아 있지 않다. 전란과 사회변혁과 무관심과 투기가 뒤엉켜 아예 간접 정보조차 남지 않은 경우가 태반이다. 역사와 문화를 정리할 자료조차 부족한 실정이 아닌가. 그래서 결국 예술 작품과 문화상품에 기대게 된다. 또 걱정이 쌓인다. 한국의 미술품은 너무 비싸지 않은가 ? 문화상품은 아예 볼 만한 것이 없고……
■ 재래 시장을 강타하는 외국체인점
한국인의 미술품은 김포공항을 나서면 부도수표라는 말이 한참 유행했었다. 국내에서는 외국과 동떨어진 유통구조를 형성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 유통 구조가 독과점이었다는 지적이었다. 작가가 작품 가격을 결정하거나 호당 가격제라는 미개한 관행에 분개하는 사람들도 많다. 몇몇 화랑의 주먹구구식 운영방식이 이 나라 일 천억 미술시장을 좌지우지했다고 개탄하기도 한다.
일년 365일 동안 일억 짜리 작품 천 점이 왔다갔다하면 그게 일 천억 시장이라는 것이다.
생각 나름이지만 우리나라에 호당 1억, 2억 호가하는 작가도 적지 않다. 10호면 10억이다. 시장이 개방되면 그림은 백 점으로 줄어든다. 시장이 개방되면 문제가 되는 부분이 바로 이 거품 작품들이다.
소더비는 물밑 작업을 거쳐 미술시장을 공략할 것이다. 부풀대로 부분 거품 가격, 감관적 관행적으로 감정되는 작품 체계, 주먹구구식의 운영 체계를 바탕으로 움직여 온 화랑가에 일대 공습이 예견된다. 그럼 어떻게 해야하나 ? 방법은 한 가지, 이른바 문화전쟁 속에서 살아남는 것이다.
■ 산불에는 맞불을 지른다.
사실 그 말이 맞다. 한국의 미술시장을 움직인 큰 나무들이 있다. 수양산 그늘에 강동팔백 리 간다고 그 그늘에서 오늘날 한국미술이 꼴을 갖춘 공로는 충분히 인정해야 한다. 또 하나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있다. 큰 나무 아래서 작은 나무가 자랄 수 없다는 것이다. 공존은 없다.
미술시장의 개방은 산불과 같다. 스스로 몸을 추스르거나 도망을 갈 수 있는 나무는 살아 남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산불을 지를 것인가. 그럴 필요는 없다. 이미 산불은 번지고 있다. 산불이 무서운 것은 불 스스로가 바람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크게 번진다. 누가 산불을 막느냐는 누가 산불에 대항할 맞불을 지르느냐와 같다.
미술시장 개방이 산불이라면 바람은 양도소득세, 금융실명제, 미술품 경매제도 등이 될 것이다. 불 맞고 바람맞은 화랑이 드리우는 그림자가 줄어들면 그 아래 풀도 나무도 살아난다. 언제 큰 나무가 있었느냐는 듯이 무성하게 자란다. 불탄 큰 나무는 풀과 작은 나무의 거름이 된다.
화랑이 맞불 지르듯 자구책으로 내세울 수 있는 것은 기존의 관행을 벗어 던지는 일이다. 문예진흥의 산파로서 일관된 화랑 체계를 수립하는 것은 공신력을 되살리는 방향이다. 작가와 대중과의 교감과 교류를 중매한다는 사명감의 회복이 무엇보다 필요할 것이다. 작가에 끌려오던 작품 가격 산정을 화랑이 자율적으로 조정할 필요가 있다. 나아가 화랑들 간의 공조 체계가 요구된다. 한 화랑이 매긴 가격이 전 화랑가에 통용될 수 있는 체계이다. 작가와 화랑간의 신용회복 문제 또한 만만찮다. 화랑이 마진이나 챙기는 '되놈'처럼 여겨지는 풍토 속에선 작가가 암거래에 눈을 돌릴 수도 있다.
이들이 국내에 산적했던 퇴영적 관행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한다면 본격적인 전속 작가제를 도입하고자 하는 흐름이나 화랑이 지켜보는 작가를 선정하여 뒷바라지를 하려는 움직임은 개방화 시대에 보다 적극적인 자구책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 불끄고 나서는 뭣하나
화랑간의 합병, 주식회사 형태로의 전환, 기업 참여에 의한 화랑 운영, 전문 분야와 장르에 따른 업무 다양화, 정보 전략화 등이 또한 화랑의 질적 향상을 위한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인터넷의 미술 사이트는 발등에 떨어진 화랑의 불을 어느 정도 반영한다. 많은 웹 회사들이 미술의 사이트를 개설한다. 작가들에게 웹사이트 유료 개설의 안내장을 보내기도 한다. 아직 인터넷에 올리는 것이 아니라 키우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웹 회사나 웹 프로모션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관계자는 많지 않다.
현재 활발한 활동을 보이고 있는 아트 컨설팅은 기존의 커미셔너나 큐레이터 등의 기능과 아트 이벤트 및 기획전의 역할 등을 대체하는 사업으로 각광받고 있다. 환경조형물 제작팀 및 전시 기획 전담 부서 설립 운영은 아트 컨설팅의 주요 수입원이기도 하지만 별도의 팀이 구성되기도 한다. 외국 화랑 제휴 등의 움직임은 조용하고 차분한 시장 구조의 재편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반증이다. 정치 작가들이 설치던 무대를 전문 정치꾼들이 잠식한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 시장 개방은 눈을 뜨게 한다
미술시장이 개방된다고 하여 당장 불이 떨어질 것이라고 보는 것은 섣부른 걱정이요, 호들갑에 불과하다. 소더비는 일본에서 10년을 버티다 철수했다. 그 경험으로 한국에서 10년간 물밑 작업을 해 왔다. 일본에서의 실패 이유는 일본인 특유의 민족 정서이다. 서구적인 시장판에 작품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던 문화적 폐쇄성이 제일 큰 문제점으로 떠올랐다 일본인 취향이라는 것도 있다. 인상파 주변을 맴도는 국민적 기호 역시 큰 장애물이었다.
미술시장이 개방된다고 해서 문제될 건 없다 외국의 화랑들이 한국 미술시장의 돈을 전부 긁어갈까 ? 한국의 화랑들이 외국 화랑의 판매대행업체로 전락할까 ? 이러한 문제는 하나도 문제가 될 까닭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미술시장은 시장의 논리를 따른다. 재래시장은 언젠가 도태한다. 그 시기를 결정하는 것은 사주팔자에 정해져 있다. 시장의 팔자다. 미술시장이 개방된다고 해서 걱정들 하는 것을 보고 '걱정도 팔자'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