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리뷰 / 미술

끈에 담아낸 전통

-이재복 작품전




서성록 / 미술평론가

끈의 상징적 의미

가끔 필자는 회화의 의미가 단지 '보이는 것'에만 국한된다면 얼마나 단조로울 것인가 생각해 본다. 여기서 보이는 것이란 일반적인 의미에서 작품이 지닌 형태, 재료, 기법 따위를 가리킨다. 시각예술이 원래의 속성상 이러한 요소에 의존할 수밖에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보이는 것 자체만을 전부로 인식할 경우 회화란 일개 물질 덩어리 내지 여러 인공품 중 하나로밖에 여기질 공산도 없지 않다. 그러나 회화를 물질 덩어리로 규정한다면 얼마나 허망한 일일까 ? 실제 차원 너머에 감추어진 실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그 수수께끼 같은 정체에 접근하는 일이야말로 회화를 감상할 때 놓쳐서는 안될 부분이 아닌가 싶다.

이재복의 경우, 감추어진 실체란 지극히 토속적이요, 우리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재료와 작품분위기에서 엿볼 수 있다. 그가 택하는 재료는 한결같이 재래적, 민속 생활적인 용구나 서지 같은 일상적인 문방용품으로 채워진다. 오랜 농경생활을 지속하면서 겨를 솎아내는 기구로 사용해왔던 키, 방사선 모양의 부채, 낡고 바랜 한지 등이 그의 화면 안에 등장하는 재료의 대강이다.

이러한 몇몇 전통적 재료는 새로운 기법의 도입으로 면모를 일신한다. 선택된 재료를 임의로 뜯어내고 붙이는 등 부분적으로 콜라주 기법을 도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와 함께 세우고 뉘이고 벽을 이용해 공간을 활용하는 등 설치 개념까지 손을 뻗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전통회화에서 보지 못한 것을 보여주고,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생각하며, 갖지 못한 것을 갖게 해주고 있는 셈이니, 그로 인해 충격파가 생기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의 작업이 기법 연마의 차원에만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니다. 기법의 차원에서만 보자면 그것은 이미 서구미술에서 우려먹을 대로 우려먹어 신물이 날 지경에 이른 진부한 방법론이다. 흥미롭게도 그의 화면에는 눈 여겨 볼만한 또 다른 담론 시스템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끈이다. 광목을 잘게 썰어 엮은 것,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올이 굵은 실 따위가 그것인데, 키를 동여매거나 아니면 서로 연결시켜 주는 것도 있고 어깨동무를 하듯 인접해 있는 부채끼리 팔짱을 끼고 있는 것, 어떤 것은 끝 자체가 기하학을 이뤄 하나의 독자적 형체를 구성하는 것도 볼 수 있다. 실상 작업에서 그러한 끈의 구사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 첫 전시를 갖던 1991년부터 지금까지 끈은 그의 작업을 형성하는 주요 인자로 애용되어 왔던 터이다. 당연히 우리의 관심은 그러한 끈이 지니는 성격은 무엇이고 또 어떤 연유에서 작품 속에 안착되고 있는지의 문제로 모아진다.

그가 왜 끈을 사용하는지에 관한 실마리를 찾고자 한다면, 일차적으로 작품 내 형식요건을 갖추기 위한 발상과 관련이 있지 않은가 추측해본다. 대개 그의 작품은 동일패턴 내지 동일 형체의 반복을 꾀하고 있으므로 각 부분별 통일성을 기하기 위해 끈을 사용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각 부분은 끈을 연결고리 삼아 전체로 종합되는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 설사 그렇다 해도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전통적인 제재와 끈의 상관관계가 충분히 해명되지 않는 문제가 그것이다. 오직 조형적인 문제로 끈을 도입했다면 굳이 부채, 키 그리고 한지 따위를 부착할 필요가 있었을까 의문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가 끈을 사용하는 데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다른 요인이 개입되어 있음을 분명하다.

두 번째로 추론해 볼 수 있는 것은 끈의 상징적 의미이다. 끈은 우리에게 각별한 의미로서 전래되어 왔다. 가령, 서낭당에 걸려 있는 끈이 선(善)과 악(惡), 성(聖)과 속(俗)을 구분하는 성스런 공간이라는 표식으로 사용되었다면 신생아가 태어났을 때 대문에 걸어놓았던 새끼줄은 아이에게 액운이 피해가라는 일종의 경고의미를 지녔고, 굿판을 벌일 때 사용된 끈은 '천상과 지상의 연결통로'라는 또 다른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이재복의 작업에서 찾아지는 끈은 생각건대 이 같은 풍속적 의미와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지 않은가 짐작한다.

자신의 작품에 '끈끈한 정과 애환, 그리고 한 같은 것'(작가의 말)을 담고자 했다는 말과 같이, 끈은 한국사람의 독특한 정서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으로 도입된 듯하다. 다투다가도 금새 친해지고 신명이 나면 쉽게 엑시타시에 빠지는 감성 중심적 생활양식은 굳건한 인습체계로서 전래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런 가운데 정 많고 동정심 많은 인정이 싹터 자리잡고 이와 별도로 구슬픈 판소리, 흥겨운 사물놀이 등 별도의 음악장르까지 출현시켰던 것이 아닐까 ?

'융합'과 '접합'의 의미로 사용되는 끈

실물로서의 끈은 실용적 기능에 구속되지만 실용적 기능에서 약간 비켜서서 볼 때 그것은 '융합'과 '접합'의 의미를 갖는다. 아닌게 아니라 끈은 무엇을 '매다'라는 의미와 더불어 '묶는다'는 의미를 함께 지닌다. 끈의 용도가 무엇을 묶을 때 아주 적절하게 이용되는 것처럼 여러 가지를 묶을 수 있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를 '꿰어주고' 원수처럼 지내는 사람들의 관계를 '넘어서는'게 바로 우리가 생각하는 끈의 의미라고 볼 때, 이재복이 도입한 끈의 성격은 비교적 명료해진다.

비록 그것이 화면에서 물체를 묶는 실제적 차원에 머물러 있기는 해도, 시야를 좀더 넓혀보면 새로운 의미차원으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근·현대화 과정에서 잊혀지거나 버려졌던 우리 고유의 샤머니즘에 대한 이해진작을 촉구하는 것일 수도 있고 물체를 의인화하여 서로 격리되고 파편화되어 있는 현대인의 삶을 유기적으로 상호 관련시키는 바람의 표시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며, 고통과 수난으로 점철되었던 암울했던 현대사를 환기시켜 덧없이 사라졌던 사람들의 넋을 달래거나 치유하는 한 방식으로서 해석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그에게 끈은 보다 심오한 의미 층과 접맥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약간 다른 얘기지만, 그의 화면에서 배어 나오는 오묘한 정취, 우리가 그것을 '아우라'라 부를 수 있다면, 그 '아우라'란 과거에 대한 눅눅한 향수와 함께 형태적 변주에 의해 이끌려나온 시각적 쾌감이라는 이중의미를 충족시키게 된다.

그러한 이중의미는 칙칙한 한지를 헤집고 나온 세월의 숨결과 마주칠 때 좀더 확연해진다. 그의 화면을 물들이고 있는 검은 색은 거무스레 그을려 있으면서도 모종의 비밀을 감싸쥐고 있는 듯, 신비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한지의 기표 속에 깃든 기의는 그 재료가 갖는 특수한 성질 때문에 단순한 재료 이상의 것과 연관된다. 재료 이상의 것, 그 답을 우리는 위에서 설명한 끈의 의미와 함께 퇴색한 한지가 안겨주는 푸근한 안도감 및 아련한 향수심에서 구하게된다. 점차 엷어 가는 전통,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젖줄과도 같이 소중한 전통의 넋과 얼을 찾으려는 갈구 및 염원 따위가 여지없이 표출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이재복은 우리의 전통을 아끼고 사랑하며 앞으로도 지켜가기를 바라는 지극히 현명한 사고의 소유자라 말할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