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리뷰 / 무용

창작 춤의 확장이 부른 삼분법 소멸




김채현 / 한국예술종합학교교수

창작 춤이란 용어에 대하여

춤계에 창작 춤이라는 용어가 있고, 그 동안 이 용어에 준한 장르도 있었다. 일부의 예술 무용을 지칭하는 이 용어를 언뜻 들으면 다음과 같은 반응이 나오기 십상이다.

즉 예술이라면 창작되는 것인데 창작된 춤을 굳이 창작 춤이라 부를 필요가 있겠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창작 춤은 창작무용을 변개한 용어로서, 무용이 일본에서 창안된 용어라는 데 주목하여 춤을 정식 용어로 대체하는 1980년대 이후의 추세를 반영해서 만들어진 용어다.

이와 유사하게 창작극, 창작 곡이라는 용어가 연극계와 음악계에서 보인다. 이때의 창작은 아마 외국, 주로 서양에서 도입된 것과 국내인들에 의해 지어진 것을 서로 차별화하기 위한 의도를 띠는 것 같다. 말하자면 창작극은 주로 번역극에 맞서는 개념으로 쓰여져 왔을 것이고, 창작 곡은 전통음악이나 외래 음악에 맞서는 개념으로 짐작된다.

창작 춤은 창작되지 않은 춤에 맞서는 용어이다. 이때 창작은 거의 대부분 창작 주체가 한 개인이고 그 주체는 신원이 알려진 사람이다라는 요건을 전제로 한다. 이럴 경우 해외에서 건너온 춤 가령 「백조의 호수」 같은 것도 창작 춤에 속할 법하겠으나, 창작 춤의 개념적 영역은 일차적으로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지어진 춤으로서 그것도 구한말 이후에 발표된 무대 춤에 국한된다. 그러나 무대 춤 가운데 창작 춤은 한국무용 계열의 것을 지칭하는 용도로 쓰이지 현대무용과 발레 계열의 것은 창작 춤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저간의 동향이었다.

다시 말해 창작 춤은 우리의 전통 춤에 맞서는 개념으로 쓰여 왔었다. 그간 춤계에서는 창작 춤이라는 용어가 과연 용어로서 적절한지 왕왕 의문이 표해지곤 했다. 그래서 이제 와서는 창작 춤이라는 용어를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잘 사용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춤이 예술이라면, 그리고 춤이 명실상부하게 예술로 공인 받은 1980년대 이후 춤이 예술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것이 우습게 된 상황이라면 춤이면 춤이지 창작 춤이라고 말하는 것은 췌언에 불과하다는 논리가 설득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1월말 창작 춤의 전개 과정과 새 진로를 탐색한다는 취지의 심포지엄이 열려 창작 춤의 개념을 비롯하여 현안들을 이모저모 살필 기회가 있었다. 한국무용 계열의 단체 창무회가 단체 결성 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의 성격도 곁들인 이 심포지엄은 한국 창작 춤에 있어 역사적 전개와 미래상, 현안과 과제, 장르와 스타일 분류, 그리고 표현기법을 주제로 네 사람이 발제하고 약정 토론을 갖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단체 이름에서도 그런 취지가 강하게 풍기듯이 창무회는 창작무용의 개발에 주력하는 취지에서 결성되었고, 실제 작업 또한 그러하였다. 1990년대 들어 다소 약화되었지만 1980년대 말까지 창무회의 적극적인 활동에 힘입어 이상과 같은 창작무용의 개념은 우리 춤계에서 통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단체가 20주년을 맞아 그런 행사를 가진 것은 시의 적절한 기획으로 평가할 만하다.

우리 무용사에서 창작무용이라는 용어를 처음 쓴 인물은 최승희인 줄로 안다. 아시아바쿠 문하를 끝마치고 귀국하여 1930년 2월에 가진 자신의 첫 공연 무대를 '창작무용 공연회'라는 이름으로 가졌던 것이다. 이 당시의 창작무용은 전통무용에 맞서되 한국무용 계열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공연 무대에서 최승희는 한국무용 계열뿐만 아니라 현대무용 계열의 춤도 창작해서 선보였기 때문이다.

최승희류의 창작무용을 당시에는 신무용이라 불렀다. 창작무용이 한국무용 계열의 창작 춤을 지칭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신무용이 한국무용 계열의 창작 춤을 지칭하기 시작한 해방 이후의 일로 짐작되며,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그런 용도로 굳어진 것 같다. 전통무용도 아니고 현대무용과 발레도 아닌 한국무용 계열의 예술 무용이 창무회가 사용한 창작무용 개념이었던 것이다.

춤의 삼분법 와해는 시대적 추세

그런데 이번 20주년 기념 행사의 일환으로 열린 무대에서는 창무회의 몇 작품들과 1990년대 이후 우리 현대무용 몇 작품이 함께 올려져 창작 춤의 개념 영역이 굳이 한국무용 계열의 춤을 고수하기보다는 현대무용과 발레 등 창작된 모든 예술 무용으로 넓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창작 춤이라는 이름아래 한국무용과 현대무용이 의도적으로 나란히 전시되기는 이번이 처음인 것 같고, 이런 점에서 1930년 최승희가 한국무용과 현대무용을 가르지 않았던 관행을 다시 보는 듯 싶었다.

이 기념 무대에서 현대무용 계열과 창무회의 만남을 보면서 그것이 결코 우연한 현상이 아님을 느꼈다. 그리고 이 만남은 문화계 내에서 여간해서 잘 쓰이지 않고 근자에는 춤계에서도 잘 쓰이지 않는 창작……이라는 관형어가 앞으로는 더욱 잘 쓰이지 않을 것임을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다시 말해 1960년대에 완전히 굳어진 한국무용 ·현대무용·발레의 삼분법이 창작 현장에서 공감을 주지 못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상을 창작무용 용어의 운명에서도 재확인할 수 있다.

창작무용 용어의 쇠락하는 모습은 무엇보다도 한국무용 계열 안무가들의 창작 시야가 넓혀지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역으로 현대무용과 발레계열에서도 안무가들이 한국 고전 춤사위(와 그 모든 것)에도 자주 눈 돌릴 가능성도 시사하고 있다. 교육과 창작 현장에서 문화 배경의 차이를 논거로 삼아 한국무용·현대무용·발레의 삼분법에 준해 교육하고 창작해 온 역사는 한국에서 최소한 40년은 된다. 전문화된 교육의 취지에서 보자면 삼분법을 마냥 매도할 일은 아니라 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분법은 전공 영역 지상주의를 조장함으로써 특히 안무가들의 시각이 흐려지도록 만든 폐단이 컸었다.

이 폐단은 우선 안무 창작자들이 구사할 테크닉 즉 춤 매체의 범위가 협소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이 폐단은 안무 창작자들로 하여금 춤에 대해 좁은 시각을 갖도록 조장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즉 한국무용 계열의 창작자들은 현대적 춤 동향에 대해 둔감해지는 경향이 심하였고, 현대무용과 발레 계열의 창작가들은 한국적인 것을 형상화시켜 볼 만한 구체적 계기나 능력을 갖기 어려웠다. 특히 현대무용과 발레의 경우 토착화된 것만이 생명력이 있다는 흔한 지적에도 불구하고 토착화에 이르는 통로가 이미 춤을 배우는 교육 과정에서부터 차단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셈이다.

세계 무대뿐만 아니라 국내적으로도 현대성과 한국성이 강조되기는 춤이라 해서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삼분법이 강제한 관념의 벽은 그간 매우 높고 두꺼워서 단시일에 허물어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난 10여 년간 활발한 양상을 보여 온 공연 현장에서 삼분법의 세 장르 가운데 어느 하나로 분류할 수 없는 춤들이 다수 출현함으로써, 그리고 이런 춤들이 적어도 그 경향에서만은 비평가들의 지지를 받음으로써 창작 현장에서 삼분법의 강제력은 퍽 약화되었다. 그러나 교육 현장만큼은 삼분법을 굳게 고수하고 있다.

창작 현장에서 삼분법이 약화된 것은 결과적으로 비평가들의 지지가 가세했었다 고는 하지만 어느 누가 의도적으로 주창해서 될 일이라기보다는 특히 1980년대 말부터 한국무용 계열의 안무 창작자들이 부지불식간에 세 장르의 어느 하나에만 속하지 않을 작품들을 발표함으로써 일어난 현상이다. 그러므로 삼분법의 와해는 춤을 둘러싼 전반적인 시대 추세의 반영이었음에 틀림없고, 부수적으로는 주로 춤 매체(몸의 움직임)를 중심으로 표현 영역의 확대를 필요로 하던 한국무용 계열의 젊은 안무가들의 욕구가 작용하였다. 물론 이로 인해 한국무용이 가질 춤의 정신에서 혼란이 일어나고 창작 방법상 시행착오가 일어날 위험은 상존 하지만, 과도기적 현상이라 하겠다.

아무튼 1990년대 들어 창작 춤이라는 용어가 쓰여지지 않아도 의사소통에 무리가 없게 된 이유는 창작 춤의 개념이 한국무용 계열뿐만 아니라 현대무용과 발레 계열의 창작물도 지칭하는 식으로 개념의 폭이 넓혀졌기 때문이다. 이에 호응이나 하듯이 삼분법적 분류 관행이 뒷걸음을 치기 시작하였다. 용어로서는 가능하긴 하겠지만 교육과 창작 현장에서 삼분법은 한마디로 시대에 역행하는 분류법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는 중이다.

혹자는 1990년대 중반이 창작 춤의 역사에서 제2기라고 명명하는데, 구태여 그럴 필요가 있을지 의문스럽다. 창작 춤이라는 용어가 호소력을 잃어 가는 상황에서 오히려 창작 춤이라는 용어로 묶을만한 한 시기가 끝나가고 새로운 용어를 필요로 하는 시대가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창작 춤과 삼분법처럼 용어 즉 말의 위력은 대단하다. 잘 쓰면 약이요, 못쓰면 독이 된다. 1990년대 후반기는 예술 춤의 진로를 적절히 표현하는 새 말을 생각해 낼 때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