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탐방 / 공간시낭송회

살아있는 詩의 현장 공간시낭독회




김상영 / 소설가

문학은 그 표현 양식에 있어서 전적으로 활자매체에 의존하는 예술이다. 그런데 시(詩)에 있어서 만큼은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시란 무엇인가. 그것은 곧 노래이다. 노래는 소리로서 전달되며 소리는 활자 이전에도 존재해왔다. 시적 감동은 반드시 활자매체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바꿔 말하면 문자와 소리, 이 모두를 매개로 하여 표현, 전달 될 수 있는 것이다.

소리로서 전달되는 시를 통해서도 그 의미와 울림을 읽을 수 있다. 더불어서 시란 소리내어 읽는 사람의 느낌에 따라 색다른 감동을 얻을 수도 있다. 그것이 곧 시낭송의 매력일 수 있고, 시를 읽는 작업을 '읊는다'고 말하는 까닭이기도 할 터이다.

활자매체에만 의존하지 않고 시청각적 기능을 다하며 현실의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문학행위의 대표적 예로 시낭송을 들 수 있다.

70년대 명동이나 종로 거리엔 시낭송의 낭만이 있었다. 찻집에서 시를 읊는 시인들이 있었고, 그 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청중들이 있었다.

현존하는 국내 시 낭송회 모임 가운데 가장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모임으로는 단연 공간시낭독회를 꼽을 수 있다. 1979년 4월 시인 구상과 박희진, 성찬경씨에 의해 발족된 공간시낭송회는 지난 2월 26일 문예진흥원 강당에서 시낭독회 200회째를 기념하는 행사를 가졌다.

매월 마지막 수요일 '공간사랑'에서 시작된 정기 시낭독회를 72회째인 1986년 6월부터 현재의 바탕골예술관으로 장소를 옮긴 뒤 빠짐없이 개최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시의 축전'으로 펼쳐진 이번 행사는 문덕수 문예진흥원장의 축사에 이어 이 모임의 산파역인 구상 상임시인과 고창수 김광림 김남조 김종길 김종해 김춘수 김후란 박제천 이근배 정진규 조병화 허영자 홍윤숙 황금찬 시인 등의 자작시 낭송 및 명예시인 김수남씨의 특별낭송과 이준아씨의 시조창이 곁들여진 특별공연으로 다채롭게 진행되었다.

공간사랑에서 시작된 초창기 시낭독회에는 평균 1백여 명의 청중이 몰렸지만 바탕골예술관으로 옮긴 뒤 많아야 50∼60명, 적을 땐 20명 정도에 불과하던 청중이 이 날은 150여 명으로 비교적 성황을 이루었다. 갈수록 시의 독자가 줄어들고 여타 시낭독 모임이 이래저래 모습을 감추는 근래의 사회현실에서, 이 날 구상 시인은 이렇게 행사 취지를 설명하였다.

'첫째 음성을 통하여 시가 지니는 아름다움을 좀더 입체적으로 드러내자는 것이요, 둘째는 시를 생활화하자는 것이요, 셋째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말의 정화운동에 이바지하자는 것입니다.'

공간시낭송회 창립과 관계된 재미있는 일화 하나가 있다.

1970년대 초반 미국 하와이대학에 재직하고 있던 구상 시인은 어느 여름방학에 지금은 고인이 된 아내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여행길에 올랐다. 마침 여행 안내를 자청한 미국인 제자의 주선으로 골든 게이트 부근 예술가촌 카페에서 그는 희한한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3, 40대쯤 되어 보이는 젊은이들이 시낭독이라는 걸 하고 있는데, 그 동작이며 모습들이 하나같이 자유분방하고 제각각인 것이었다. 어떤 이는 옛 음유시인처럼 객석을 누비며 시를 읊기도 하고, 어떤 이는 자기가 읊은 시를 한 대목 한 대목 해석까지 곁들이는가 하면 반주에 맞춰 시를 읊는 낭송가도 간혹 있었다. 물론 우리네처럼 단정하게 시만 읊고 퇴장하는 이도 있었다고 한다.

난생 처음 카페라는 공간에서 시를 읊는 이국의 젊은이들을 본 순가 그는 몹시 강한 느낌을 받았는데, 속으로 훗날 귀국해서 우리나라에도 그런 시낭독 모임을 소개해 보리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70년대 중반 귀국하여 당시 퇴계로의 명소로 통하던 한 맥주홀에 들르게 되었다. 손님들이 맥주를 마시며 상설악단의 연주와 독창을 즐길 수 있는 그 업소에서 우연히 지휘자와 동석하게 된 구상 시인이 한 마디 했다. 연주도 좋고 독창도 좋지만 막간에 시낭송도 곁들여진다면 보다 좋지 않겠느냐는 게 그의 제안이었다. 그 제안이 곧바로 받아들여져 지휘자와 일행의 박수속에 구상 시인은 무대에 올랐고, 물론 취중이었다. 그는 송강 정철의 '권주가'를 즉석에서 읊었고, 내친김에 자작시 한 편을 암송하였다.

암송이 끝나자 청중들의 반응이 좋았고, 구상 시인은 매주 시를 낭송하기로 약속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세 번째 시낭송이 있던 날이라고 한다.

구상 시인이 한창 시를 읊고 있는데 손님석에서 일대 몸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사연인즉 구상 시인의 수양아들이란 이가 먼데서 소식을 듣고 시낭송을 들으러 왔다가 옆좌석의 취객이 떠드는 소리를 듣고 시비가 붙은 것이었다. 시낭송 경청을 방해한다 하여 술손님을 면박준 것이 발단이 되어 시비가 붙고 몸싸움까지 일어난 것이었다. 서로 악의없이 한 일이었으니 나중에 사건은 원만히 해결되었지만, 그 날 난처한 지경에 빠졌던 시인은 한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시낭송은 술자리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후 시인은 맥주홀에서의 낭송을 중지하게 되었는데, 그 맥주홀이 훗날 많은 연극인의 산실이기도 했던 카페 떼아뜨르였다. 이러한 사건들을 뒤로하고 1978년말 어느 중진 예술가들 모임에서 건축가 고 김수근씨를 만나 건 뜻밖의 행운이었다고 한다. 우연히 시인의 옆자리에 앉게 된 김수근씨가 공간예술관 건립 계획을 이야기하며 정기적인 문학행사를 맡아보도록 권유한 것이었다. 구상 시인의 표현을 빌자면, '한마디로 불감청이언정 고소원'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1979년 4월 말 최초의 정기시낭독 모임인 공간시낭독회가 생겨난 것이다.

초창기 1년 10회였던 행사를 현재의 바탕골예술관으로 장소를 옮긴 후에는 연 12회로 행사를 연장하였다. 한 달에 한번씩 빠짐없이 개최되는 시낭독회의 청중은 대략 30∼50명 정도, 매회 1인당 1,000원의 입장료를 받아 단체를 운영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이고, 그나마 행사 팜플렛을 제작하고 나면 초청시인에게 사례도 제대로 못해 주는 아쉬움이 남는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단체를 이끌어 나가는 데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는 것은 한푼의 대관료도 받지 않고 바탕골소극장을 이용하도록 배려해 준 박의순 관장의 문화사랑 정신이라고 한다.

올 4월부터는 실험시인을 초청하여 청중들에게 보다 다양한 시세계를 제시할 예정이며, 즉석에서 청중들의 시를 심사하여 시상하거나, 잡지사 추천을 의뢰하는 일도 계획중에 있다.

흔히 비디오시대라 일컬어지는 최근의 사회변화로 말미암아 독서인구가 크게 감소하고, 시낭송회도 예전보다는 적잖이 줄어든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이와 함께 시낭송회의 행사 내용도 많은 부분 변모된 양상을 보인다. 시에 집중하고 시가 주가 되는 전통적인 시낭독회보다는 여러 가지 시청각적 부대행사들을 첨부한 것이 적지 않은 실정이다.

공간시낭송회는 이러한 시대 변화에 쉽사리 자리를 내어주지는 않을 계획이다. 앞으로도 전통적인 시낭송회 본연의 모습을 지켜가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시낭송회의 기본 줄기인 시를 주축으로 한 행사로 진행해 나갈 고집을 가지고 있다. 다만 다른 문화예술을 접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클래식 음악이나 국악, 주로 대금, 바이올린 등 연주 감상 시간을 시낭송회 사이에 5분 정도 편성하여 공연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심지어 현란한 대중음악, 음향효과를 비롯한 부대행사가 정작 시를 압도하는 듯한 다소 현대적인고 발랄한(?) 요즘의 시낭송회와 다른 문학 본령의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공간시낭송회는 보는 눈에 따라서는 고지식한 시낭송회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고지식함이 진정 시의 바탕 위에서 지켜지는 고지식함이기에 더욱 돋보이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