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담론과 우리 소설의 새 진로
임헌영 / 문학평론가
■ 성담론에 대한 법률적 제재와 비평가들의 창작 자유 옹호
온통 성담론(性談論)으로 문단이 그득하다. 권위있는 문예지들이 장정일 사건을 계기로 아예 특집으로 이 문제를 제기하는가 하면 소설조차 성문제를 노골적으로 다룬 작품들로 메우고 있다. 문학지만이 아니라 모든 매체들이 성의 상품화 경쟁 대열에 끼어들어 바야흐로 한국은 성문화예술의 세계화를 촉진하고 있음을 실감케 해주고 있다.
마광수 사건 때만 해도 지식인들이 눈치를 봐가며 외설작품을 옹호할 것인가, 비판하느냐, 아니면 작품은 비판하되 작가의 구속은 반대하느냐는 등등으로 고민하는 척이라도 했었는데 이번 장정일 사건에서는 그런 망설임조차 찾아볼 수 없다. 진보라면 진보다. 법정 문제화가 안되었다면 아마 장정일의「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하여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려는 평론가들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문학예술이 법률적인 제재를 받는다는 사회적 쟁점 앞에서 비평가들은 창작의 자유를 옹호할 수밖에 없는데, 그게 자칫 오늘의 우리 문학의 활로가 섹스밖에 없는 것으로 비치지는 않을지 자못 조바심 난다.
"이봐, 지금 서?"
사내는 또 물어왔다. 서다니……추워 미칠 지경인데.
"응? 스냐고오."
"당최 추워서요."
한창훈<1996년 겨울>
김승옥의「서울 1964 겨울」을 염두에 두고 읽노라면 이 작품의 첫 대목이 무엇을 시사하는지는 쉽게 짐작될 것이다. 시간적으로 32년의 상거-꼭 한 세대의 격차를 두고 한창훈은 서울이 아닌 어느 지방 소도시의 겨울 풍경을 '이본 동시상영 극장'에 앉은 세 사내를 빌어 상징화한다. 화자인 '나' 는 작가이고, 사내는 '인근 공단에 잡부로 다닌다고 했고 청년은 삼수생이라고 했다.' 화면은 친구 마누라를 핥는 장면으로 꽉 차다가 점점 에로티시즘을 진하게 만들어 가는데 정작 '녀석은 이제 여자 배 위에 올라 방아질을 시작했다'는 신에 이르자 '이런 씨팔놈들'이라고 사내가 욕을 해댄다. '그토록 중요한 부분을 끝내 보여주지 않는 놈들, 인생의 전부를 섹스라고 믿지 않을 것 같기는 하지만, 대신 여자를 가지지 못하는 놈들에게 우선 되는대로 팔아먹어 푼돈이라도 쥐어보자는 의도만은 분명한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나 조감독이나 촬영 감독이나 기타 등등의 놈들이 아닌, 올바른 국민정서와 청소년의 건강한 의식함양이란 쉰내 나는 문구만으로 평생을 밥 빨아먹고 살 게 뻔한 공연윤리심사위원들에게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게 그 한마디 말 외에 무엇이 있겠는가.'
세 사내가 지닌 불신의 극치다. 그들이 보고자하는 것은 '대음순 소음순' 따위가 아니라 '그저 그 터럭이 대가리에 난 터럭하고 색깔이 같은가 다른가나 한 번 보자는 것'으로, '흔한 게 털인데 말입죠. 안 그렇습니까? 사람 몸에서 가장 흔한 게 털 아닙니까?' '그런데 그 흔한 것 하나 마음놓고 못 본단 말이죠'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본다. 이 털 못 보는 불만이 무엇을 상징하는지는 독자에 따라 다를 것이나 의미를 이 소설에서는 '양반들 털옷 입고 앉아서 먹는 고기반찬에 이밥, 누워서 기생 계집종과 그 짓 할 시간과 돈 벌어주고 저는 정작 솟아나는 정력 풀 길 없어 장기나 시름으로 달래야 하는 머슴들의 심정'으로 풀이한다. 1990년대 후반기 한국 한 지방도시를 견본으로 삼아 그곳의 서민대중들의 삶의 즐거움이 무엇인가를 추적한 이「1996 겨울」은 30여년 전 서울의 겨울과 마찬가지로 역시 물질적 풍요와 빈곤의 격차는 존재하여 이들로 하여금 '스면 뭣 해. 스지도 않지만'이란 말이 함축하듯이 가난이 성적 향락을 차단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셋 중 유일하게 장가간 공단의 잡부 사내는 '반평생을 한이불 속에서 뒹굴고 살았는데 말이야. 이상하게 집에 가서 마누라를 보면 뭔가 주눅이 든단 말이야. 이게 되지가 않아. 참'이라고 하소연하며, 그 에로 영화를 '사실 스는가 안 스는가 보려고 가봤어'라고 실토한다.
남들이 정력제로 체력을 단련하는 동안에 이 잡역부는 기껏 외설 영화에 자신의 삶의 즐거움의 운명을 걸었다가 실없게 되는데, 참담해진 이 셋은 아래와 같은 대화를 나누다.
"어디 불난 데 없나?"(중략)
"좋지. 불구경."
"요전에 우리 집 앞 카센터에 불이 나 몽땅 탔어요."
"그래, 사람도 죽었나?"
"사람은 없었는데 하여간 집은 몽땅 타버렸어요."
"그거 재밌었겠다."
아마 사람이 죽었다고 했대도 '재밌었겠다'는 대꾸는 변하지 않았을 것이란 유추는 가능하며, 이 대목이야말로 후기 산업사회가 지닌 인간 소외와 그로 말미암은 비윤리적인 섹스의 범람과 그 비윤리성 때문에 소외현상은 더욱 골이 깊어지게 됨을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비윤리적인 섹스가 인간 소외를 가속화시킨다는 사실을 차현숙은 「유리구두」에서 형상화시켜 주고 있다. 방송프로듀서 남편과 10년의 결혼 생활로 기다림에 지친 지연은 누구와의 어떤 중요한 일에도 기다림 그 자체를 기피하게 된다. 남편이 다른 여인과의 결합을 위하여 이혼을 요구하는 상태에서 지연은 바람피운 아내를 가진 남자와 밀회를 지속한다. 그 남자를 기다리는 결박함 속에서도 지연은 약속 시간이 지나면 일 분도 더 기다려 주지 않겠다고 결심하는데, 이것은 그녀가 결혼 생활 중 남편을 기다리다 빚어진 상처 탓이다.
■ 우리 소설 섹솔로지화로 전락하고 말 것인가
약속 시간보다 두 시간이나 먼저 나와 앉아 무료를 달래는 지연의 처지에서 '놓치기 아까운' 남자조차도 단 일분도 더 기다리지 않겠다고 결의를 굳히는 것은 이미 사랑이란 이름으로 행해지는 모든 행위조차도 소외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치유제가 되지 못한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다. 곧 놓치기 아까운 남자이긴 하나 지연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삶을 궤도수정을 할 정도는 아님을 시사하는 대목이며, 이는 곧 인간 각자가 지닌 자신의 몫으로서의 소외의식을 극복할 수 있는 사랑법은 그 흔한 사랑의 과포화 상태 속에서도 찾을 수 없다는 역설과도 통한다. 이 점이 곧 오늘의 문학을 외설로 이끌어 가는 요인이 된다. 비윤리적인 사랑에 대한 반작용으로 가속화가 붙게 된 에로스적인 사랑은 그 쾌락의 절정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의 삶의 궤도 수정에는 이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설사 지연의 요구대로 남자 쪽에서 이혼하여 둘이 재결합을 한대도 여전히 풀리지 않을 미진한 사랑으로 남을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으며, 이는 찰나적인 에로스의 정열로 현대인을 이끌어 갈 뿐이라는 진단서를 작성케 만든다.
모든 것을 바쳤던 남편에 대한 헌신의 미련 때문에 이혼 요구를 거절해 오던 지연은 남편의 여인을 만나 그녀로부터 '전 오직 그만을 원해요'라는 호소를 듣고는 이혼해 주기로 결심하지만 자신의 애인 남자에게는 도리어 바람난 아내를 용서해 주라고 간청하는데, 그러면서도 그녀는 '격렬한 몸짓으로 나(지연)에게 파고드는 그의 허리를 나는 튼튼한 두 다리로 감싼다.'
흔한 소재에 되풀이되어 온 사건 전개법인데도 구태여 거론하는 것은 차현숙이 차세대의 작가로 왜 이런 문제를 제기했을까란 점을 되짚어볼 필요 때문이다. 차현숙은 최근 작품집「나비, 봄을 만나다」를 냈는데, '작가의 말'에서 '나는 결혼한 여성의 존재가 어떻게 정립되어야 하는가 하는데 내 관심이 있다. 그들의 존재양식을 소설 속에서 세우고 싶다'고 하는데, 이것은 곧 '결혼제도와 가족제도 속에서 숨 막혀하는 여성과 남성의 이야기를 좀 더 써볼 작정이다'는 말로 풀이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외양은 근본적으로 '나는 외롭고 또 외로웠다. 내가 인생을 그르친다면 이 지독한 외로움 때문이리라'는 작가 자신의 내면적인 영혼의 고투가 맞물려 돌아가면서 여성문제가 부각된 것이다. 이 작품집의 여러 단편 중「나비의 꿈」,「1995년 X나비」,「봄을 만나다」,「X나비학 개론」,「X삼십삼세」,「X서른의 강」 등이「유리구두」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의 연속에 있음을 느끼게 한다.
지면관계로 오수연의「남산에 갔다왔지」를 자세히 다루지 못해 유감인데, 이 작품은 위의 두 소설과는 다른 측면으로 현대인의 에로스화 경향을 파헤쳐 주고 있다.
우리 소설은 이제 이처럼 에로스, 아니 점잖게 에로스가 아니라 아예 섹솔로지화에로 전락하고 말 것인가. 그게 비록 인간소외가 빚어낸 보편적인 현상이라 할지라도 문학이 다룰만한 인간의 삶의 양상이 고작 이래야만 할까. 긍정적인 요인을 지닌 한창훈이나 차현숙의 작품 같은 흐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근본적으로는 섹솔로지에 대한 탐닉이 우리 문학의 진로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굳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