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가로서 투철하게 살고자 했던 미술계의 거인
-작고한 이일 교수의 초기 비평
서성록 / 미술평론가
■이일(李逸) 선생의 초기 비평의 관점
지난 1일 생을 마감하신 이일 선생의 타계로 우리 화단은 깊은 슬픔에 빠져들었다. 그 이유를 요약하면 크게 두 가지이리라. 하나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타계에 대한 충격 때문이겠고 다른 하나는 우리나라 현대미술을 뛰어난 예지력과 폭넓은 식견으로 높은 수준으로 올려놓은 거인(巨人)을 잃은 허탈감 때문이었으리라 본다. 그이 비평 자체가 현대미술에 대한 '산 증언(證言)'이었으리만치 생성과 정립을 경유한 우리 미술의 역정을 고스란히 간직함은 물론이요, 한 명의 비평가로서 자신의 시대를 '투철하게' 살고자 했던 인물이었다.
이 글은 우리 미술의 물줄기를 종래의 아카데미즘에서 추상미술, 그것도 한국적 미감으로 재해석된 패러다임으로 바꾸어 놓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일 선생의 초기 비평의 관점을 알아보기 위해 씌여졌다. 만일 그의 후기(後期) 비평이 한국적 자연관으로 풀어낸 현대미술의 해명으로 특징지어 질 수 있다면, 그의 초기(初期) 비평은 전위미술에 담긴 본성의 추출 및 그 본성을 얼마나 실질적으로 한국 미술에 접맥시킬 수 있는가 하는 타당성의 점검으로 요약될 수 있으리라 본다. 그리하여 후기 미술비평의 대상의 모노크롬에 맞추어졌다면, 전기 비평의 대상은 일부 예외가 있기는 하나(가령 기하학적 추상) 대체로 뜨거운 추상에 해당하는 앵포르멜과 실험성 강한 오브제 미술에 맞추어진다. 이 글에서는 그의 처녀작「현대미술의 궤적」(동화출판공사, 1974)에 수록된 평문을 중심으로 1965년에서 1972년에 이르는 초기 비평의 요지, 가령 추상과 전위 개념, 반예술, 프리미티브 따위를 검토하는 것으로 논의 범주를 제한하도록 하겠다.
이일 선생이 비평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1965년 이후부터였다. 현대미술에 관한 정통한 이론가가 없었을 뿐 아니라 '신미술'이라는 이름의 현대미술이 생성중에 있었던 무렵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한 젊고 유능한 지식인의 등장으로 우리 화단은 그 지형도가 뒤바뀌게 되었다. 특히 그의 야심에 찬 평문이 줄지어 발표되면서 대다수 화가들은 그의 글을 텍스트로 삼아 열심히 정독했고, 「전환의 윤리」(1970)를 표방한 그의 입김은 리트머스 종이처럼 우리 미술계에 삽시간에 번져나갔다.
■ 우리 화단에 던진 두 가지 화두
걸음마 수준의 우리 화단에 그가 던진 화두는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된다. 하나는 아카데미 미술의 청산이요, 다른 하나는 현대미술의 본연의 정신에 대한 자각이다.
1960년대 우리 미술은 말 그대로 '지리멸렬의 허우적거림'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모방을 일삼고 또는 자기를 상실한 혼미를 거듭하는 국전으로 상정되는 아카데미즘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을 뿐 아니라 현대미술이라 해도 그 전개과정에 있어 서구 미술에서 발견되는 역사적 필연성을 결핍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우리에게는 단 한 명의 쿠르베, 들라크로와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의 이념을 계승하고, 아니면 거기에 반발하는 후세대와의 아무런 능동적인 관련을 갖지 못했던 것이다. 과거와 관련되는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일제하에서 키워진 식민지 미술이었고 그것의 사회적 용인이었다. 그것은 일본과 유럽의 이중 식민지로 변질해 버린 기형에 다름 아니었으며 그 속에서는 단지 모방과 추종만이 무성히 번식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던 상황 속에서 이일 선생은 우리 미술의 '구세대와의 단절, 그리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자각, 새로운 각성'을 들고 나왔다. 일제하에서 육성된 미술가들의 정신적 고갈을 극복하지 않고는 새로운 비전은 결코 만들어질 수 없다고 판단하면서 그 결단을 촉구했던 것이다. 공교롭게도 때마침 성행하던 전후(戰後)의 뜨거운 추상은 그에게 새로운 비전을 향한 한가닥 희망을 안겨주었다.
'6·25 사변은 우리나라의 정신적 풍토를 기묘하게도 제2차 대전 후의 유럽의 그것에다 직결시키는 결과를 가져온 듯이 보인다. 어쩌면 그것은, 20대에서 전쟁을 가장 참혹하게 가장 절실하게 살아낸 우리의 젊은 세대와 2차 대전 후의 유럽의 폐허를 방황하는, 이른바 아프레게르라는 현대문명과 전쟁의 사생아들 사이에 맺어진 체험적인 공감에서 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와 동시에 우리의 현실을, 우리의 세계를, 그리고 우리의 생을 우리 자신의 눈으로 보고 느끼고 확인하기를 강요당했다. 그것은 일종의 '불신의 세대'였고, 급기야는 한가한 유산을 동댕이치고 세계의 흐름속에 뛰어들어 스스로를 연소시키는 세대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태세에서 오늘날 사십을 전후하는 당시의 젊은 세대는 추상미술을 맞아들였던 것이다.'
(「한국에 있어서의 추상미술 전후」, 1967)
젊은 시절의 전쟁의 화염 속에서 지낸 세대에 의해 생성된 추상미술을 우리는 흔히 '앵포르멜'이라 부른다. 이 앵포르멜에서 그는 '순수조형의 경향에 대한 인간의 격정', 그 '본능의 발로', 다시 말하면 '억압된 생명력의 폭발적 표출의 승리'를 발견하였다. 살인, 즉 전쟁의 참화가 빚어낸 이 새로운 추상은 그에게 '주머니 속에 미리 마련된 아무런 규약도 없이 미지의 세계로 뛰어든 전위미술가들처럼, 현실의 절실한 체험을 바탕에 깔고 있었다.
'전쟁의 상처를 청춘의 훈장처럼 달고 있는 젊은 세대는, 미처 아물지 않은 상처와 또 미처 휘어잡을 수 없는 미지의 심연 앞에서 몸부림치며, 오직 자신의 혼돈한 소리, 자신의 본능의 소리를 생생한 그대로 표출하는 길을 택했다. 의식적인 모든 정신 작위(作爲)의 허망함을 깨달은 앵포르멜은 회화부터 여하한 이미지마저도 축출하는 극한점에 달했고, 이글거리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충동 속에서 생을 확인하려 했다.'
(「한국에 있어서의 추상미술 전후」)
앵포르멜의 작가들이 엄연한 현실에 주목하면서 거기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했다면, 일본으로부터 전수된 아카데미즘 미술의 거점이었던 국전에 대해 그는 '도태당해야 할 암적인 존재'로 규정하면서 현대미술과 국전의 차이를 르 살롱과 비교해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어떠한 의미에서 현대미술은, 이른바 관전(官展) 르 살롱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했다. 이 관전이 한 사회에 군림할 때 새로운 선각자들은 순교자, 심지어는 저주받은 인간의 양상까지 띤다. 그러나 사회의 애원(愛願)을 온몸에 누리고 관공(官公)의 청탁을 도맡아 당대의 영광을 누린 관전 미술가의 그 누구의 이름이 오늘날 우리의 기억에 남아 있다는 말인가?'
(「국전의 어제와 오늘」, 1970)
■ 우리 미술의 바람직한 미적 모델은?
그렇다면 청년 이일이 우리 미술의 바람직한 미적 모델로 여기고 있었던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 실마리를 우리는 1969년에 발표된「전위미술론」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본다. 그에게 있어 참다운 전위란 반(反)아카데미즘으로부터 전거를 마련한다. 아카데미즘은 전통적인 또는 재래적인 예술관과 거기에서 파생된 기법 화풍의 모방이요, 한마디로 아무런 창의성이 없는 전통적 양식의 답습을 의미한다. 창조와는 아랑곳없이 수공적인 숙련과 기술의 완벽을 과시하는 단순한 '재생산'을 되풀이할 따름이다. 그럼에 반해 현대미술의 편력은 바로 이러한 정형화된 패턴에 대한 항거에서 출발한다. 그때 그때의 상황에 충실하여야 하며, 전적인 자유, 즉 '가장 자유로운 상태에 있어서의 창조의 의지'를 꽃피워낼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래야만 눈의 혁신, 감성의 혁신, 인식의 혁신을 성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전위적인 것이라 해도 완벽한 것일 수는 없다는 것을 주지시킨다. 예술이 어떤 강렬한 체험 내지 필요성이 수반되지 않을 때, 그것은 예술에 대한 끈질긴 '물음'이기 보다는 찰나적인 자기만족 또는 창조적 실체 없는 데몬스트레이션으로 전락하고 만다고 한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가 무목적적으로 되풀이될 때 예술은 스스로의 무덤 앞에 서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전위의 속성을 이일 선생은 한 다다이스트의 말을 빌어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실험적인 성격을 보존해야 하며 그 어떤 정의, 그 어떤 기존 방법, 그 어떤 반복도 저버린 끊임없는 극복의 예술이어야 한다. 그것이 시문학이든 회화이든, 예술은 항상 주어진 것의 청산이다. 그것은 움직임이요 미래이다. 그리하여 예술은 생활의 변화, 정신과 과학의 발견에 직접 참가하는 것이다.'
(루이 아라 공)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이일 선생의 글에서는 '참여'라는 말과 함께 '현실'이라는 용어가 곧잘 등장한다. 그의 글에서 발견되는 '참여'는 어떤 정치활동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문명에의 응시와 도전'이라는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현실이란 '삶' 또는 '모든 정신적, 물리적 여건'에 미술이 연루되는 것을 말한다. 요즘 말로 풀이하면 두 용어를 사용하여 '시대정신'에의 성실한 복무를 주문했던 것이 아닌가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참여와 현실의식 없는 미술은 비단 아카데미즘에서만 찾을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한 증후(症候)는 사이비 추상미술에도 마찬가지로 드러난다고 분석했다.
'우리나라에는 답습의 정신이라고나 할 기묘한 풍습이 베어 있는 것 같다. 쉽게 말하자면 선배들이 악전고투 끝에 확보한 터전에 냉큼 도사리고 앉아 주인인 척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그 하고많은 추상 아류들의 본성이 그것인 것이다.'
(「한국에 있어서의 추상미술 전후」)
시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따라서 새로이 이슈가 제기될 때마다 거기에 부화뇌동하는 전위 수용자들에 의해 조성되는 부동적(浮動的) 상태를 가리켜 이일 선생은 '거짓의 위기(危機)'라고 불렀다. 이러한 거짓의 위기가 만연할 때, 전위 수용자들은 만사를 제쳐놓고 새 물결에 뛰어들게 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거짓의 위기를 통해서는 결코 참된 위기의 소재(所在)를 밝힐 수 없다는 것이고 그 속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란 단지 '공백의 위기'뿐임을 환기시켰다. 그리고 이 공백의 위기를 메우는 것이 전위를 대할 때, 가장 중요한 당면 과제라고 덧붙였다.
'예술의 변혁은 예술이 현실에 대해서 제기하는 뭇 문제의 소재(所在)를 밝히는 데서 이루어진다. 또 진정한 문제의 확인은 현실적인 요청에 대한 분명한 자각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전위에서 전위에로 이어지는 미술의 탐구는 바로 그러한 요청에 자신을 던지는 일종의 도박이며 '자기의 존재 증명'인 것이다.'
(「전환의 윤리」, 1970)
이와 함께 그가 전위를 언급하면서 프리미티브(원초 또는 원시)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프리미티브란 그에게 있어 '현대 문명에 대한 비평'을 말한다. 따라서 그가 사용한 프리미티브란 말의 참뜻은 단순한 복고취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현대문명에 대한 도전이라는, 보다 적극적인 성격을 지닌다. 원시는 곧 '온갖 인습을 벗어난 자유인'을 일컫는 것이자 고갱에 있어서처럼 문명의 도피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현대 문명의 용인을 전제로 하면서 그것에의 적극적 참여를 말한다.
프리미티브는 현대미술의 가장 두드러진 성격 중 하나로 규정된다. 무너진 전통의 잿더미를 헤치고 전통이라는 고삐에서 풀려나 '영의 상태'에 진입한 현대미술을 '어떤 관념, 또는 의식작용에도 규제 받지 않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이며 직접적인 체험을 지향하는 예술이요, 붕괴하는 세계상속에서의 가장 원초적인 실재성의 확인이라는 절실한 현대인의 과제를 도맡고 있는 예술' (「현대의 미적 모험」, 1971)이라고 분석한 바 있다. 자유로운 생명의 표출과 과감한 조형적 모험과 실험을 꾀해왔지만, 그 안에 잠복되어 있는 의도, 그것은 다름 아니라 현대문명에서 전적으로 소외되어 버린 본연의 자연, 그 잃어버린 자연을 그 가장 본연의 모습으로, 그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로 되찾자는 '시원성'의 요청이며, 궁극적으로 이러한 원시의 탐구를 미술행위에만 적용하지 않고 그 의미를 좀더 넓혀 '인간정신의 영원한 회귀점'이라고 단언했다.
■ 프리미티브 강조와 연관된 '반예술'에의 심취
이같은 프리미티브의 강조는 20세기 초 기존 미술판을 뒤엎고 출현한 '반예술'에 대한 각별한 심취와 직접 관련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기는 이일 선생은 이 반예술을 '현대미술의 궤적'의 맨 첫 아티클로 놓았으리만치 비상한 관심을 가졌었다. 후기 비평에 있어 이일 선생의 관점이 약간 달라지긴 하나, 반예술은 그의 초기 비평을 장식하는 중심 카테고리로 등장한다.
두말할 것도 없이, 반예술이라 했을 때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창조 개념에 대한 재해석이다. 뒤샹이 물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제시하고, 앤디 와홀이 마릴린 몬로의 사진을 확대, 재생하고, 제스퍼 존스가 통조림통을 등신대로 주조하며 라우쉔버그가 데 쿠닝의 뎃상을 그 한쪽 면을 지워버린 후 자기의 서명을 달아 발표했을 때, 그러한 모방과 차용 행위가 일단 기존의 사물 내지는 작품에 대한 도전이요, 그들이 지니고 있던 가치체계를 뒤집어엎는 것으로 제시되었을 때, 그러한 행위는 비록 반예술 행위로 보일망정 엄연한 하나의 창조적 행위의 범주로 규정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창조적 행위란 '일단 제시된 작품은 하나의 구체적인 존재로서의 자기 자신 외의 아무 것도 아니며 자기 외의 그 어떤 것의 표현도 아니' (「전환의 윤리」)라는 특수한 관점에 기초한다. 이러한 '반예술'의 모험이 예술 자체의 해체를 의미하긴 해도 그럼으로써 스스로를 완전한 '영(零)의 지점'으로 환원시키게 되는데, 이 영의 지점에서 예술은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기에 앞서 우선 존재에 대한 하나의 의문으로써 세계 속에 자신을 구현시켜 보려는 의지, 요컨대 정당한 창조의 한 방식, 나아가 존재의 한 방식으로 자리매김된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반예술은 예술의 한 형식이기에 앞서 마치 '인생이 끝없이 이어지는 의문의 연속'이듯이, 그러한 인생에서 제기되는 의문을 밝히기 위한 가장 순수한 미적 형태이자 예술의 진정한 인스피레이션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프리미티브와 현대미술의 해후(邂逅), 거기서 그는 새로운 예술적 생명의 자양분을 발견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