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리뷰 / 연극

봄날의 누항, 그리고 '유리동물원'

-환퍼포먼스의 「유리동물원」




이상우 / 영남대 교수, 연극평론가

■ 연극계의 악화 속에서 발견된 양화의 한 사례

최근 대학로의 풍경을 본 적이 있는가.

마로니에가 있는 아름다운 봄날의 거리 풍경을 떠올린다면, 아쉽게도 그것은 필자의 논점과는 거리가 멀다. 필자가 본 대학로의 풍경이란 불행하게도 '삐끼'의 요란한 연극 상(商)행위로 추잡해진 누항(陋巷)의 풍경을 말한다. 연극 게시판 주변에서 이제 한가롭게 포스터를 구경하며 볼 만한 공연을 고르기는 난망한 일이다. 그만큼 잠재적 관객층의 소매를 거칠게 끌어당기는 연극 상행위는 갈수록 극성스러워지고 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것일까. 삐끼의 호객 소리가 요란해지면 질수록 좋은 연극이 차지하는 지반도 왜소해 보인다. 어차피 연극 관객의 수효는 어느 정도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연극 극장가의 악화를 구축하려면 관객을 흡입할 수 있는 양화가 자꾸 쏟아져 나와야 한다.

필자는 환퍼포먼스의 「유리동물원」(테네시 월리엄즈 원작/황동근 연출/ 동숭아트센타 동숭홀/1997. 2. 7∼3. 2)에서 연극계의 악화에 대항할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춘 양화의 한 사례를 발견한다. 요즈음 대학로의 세태 속에서「유리동물원」이 많은 관객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이다. 그만큼 관객은 완성도 높은 정통 연극에 허기증을 느끼고 있다. 물론「유리동물원」에 대한 관심의 이면에는 윤여정, 송승환, 이찬우라는 유명 배우들을 내세운 스타 시스템의 배경도 작용하고 있기는 하다. 어쨌거나 우리가「유리동물원」을 평가하는 것은 발군의 배우들을 활용하여 짜임새 있는 연극으로 끌어올린 연극적 창조력에 있다고 봐야 옳을 것이다.

환퍼포먼스가「유리동물원」이라는 레퍼토리를 선택한 것은 이 시대의 우리 사회에서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다이 하드, 젖소 부인, TV드라마 애인, 뮤지컬, 벗기기 연극이 횡행하는 문화적 풍토에서 테네시 윌리엄즈의「유리동물원」은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까. 먼지 쌓인 현대의 고전이거나 기껏해야 젊은 시절 대학극의 쓸쓸한 추억거리 정도에 불과하지 않을까. 이제는 사람들이 그것이 좋은 연극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황에서「유리동물원」을 과감하게 끄집어 내온 환퍼포먼스의 선택은 그 자체만으로도 가상한 것이다. 물론 그것이 상당 부분 스타 시스템에 기대고 있다고 해도, 고전이라 할 만한 연극을 끄집어내서 묵은 먼지를 털어 내고 말끔히 단장해서 대학로의 극장가에 안착시킨 공로는 인정을 받아야 할 부분이다.

「유리동물원」은 1944년 미국 시카고에서 초연한 이래 열화와 같은 관객의 호응을 얻은 바 있는 테네시 윌리엄즈의 출세작이다. 작품의 배경은 스페인 내전이 있었고 경제 공황이 서민의 가계를 옥죄던 1930년대 세인트루이스의 어느 빈민층 아파트의 내부이다. 사실적으로 묘사된 이 아파트 내부에는 윙필드가의 세 식구, 즉 어머니 아만다(윤여정 역)와 그녀의 두 자식들 톰(송승환 역)과 로라(김호정 역)가 살고 있으며, 이들에 관한 극적 줄거리는 가출한 톰의 기억에 의해 재생된다. 이러한 구조 때문에 테네시 윌리엄즈는 이 연극을 '추억의 연극'이라고 명명한다. 아파트 내부와 바깥 세계를 연결해 주는 비상구의 난간에서 톰이 한 몸에 조명을 받으며 과거를 회상할 때 극의 전반을 지배하는 사실주의적 흐름은 일순 차단되고 비사실주의적 요소가 그 지배적 분위기 속으로 잠시 틈입해 들어온다.

작가는 톰의 비사실적인 회상 장면을 삽입함으로써, '사실주의는 그 자체로서는 결코 충분하지 않으며 항상 교묘하게 비사실적이어야 한다'는 연극적 원리를 적용하고 있다. 이 장면에서 톰의 서사는 서사극 해설자의 그것과 흡사하기도 한데, 이는 극의 긴장감을 불어넣는 역할을 한다. 여기서 송승환은 입과 몸에 철저히 녹아든 서사로써 이 회상 장면을 성공적으로 처리하는데, 필자가 보기에 이는 가히 이 연극의 백미라고 할 만하다.

30년대 미국 중서부 하층민의 생활 풍경을 묘사한 무대(무대 디자인 이태섭)는 후면 무대가 너무 깊어서 하층민의 집치고는 관객을 압도할 만큼 지나치게 웅장하다는 느낌을 준다. 때문에 이 극에서 무대 한 구석에 놓여있는, 이 극의 표제이기도 하며 중요한 상징적 기표로 작용하는, 로라의 유리동물원이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인다. 그리고 또 하나의 상징 기표(아버지의 부재), 무대 후면 벽에 걸린 윙필드의 사진이 눈에 잘 띠지 않는 것도 지나치게 넓은 실내 구조의 설정이 빚어낸 오류로 보인다.

그러나 무대 양 날개 쪽의 허물어진 벽면 처리, 차갑고 우울한 실내의 색감,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나는 철제 비상구의 고안, 그리고 여기에 대비되는 바깥 세계인 술집의 현란한 간판 디자인, 윙필드 집의 후면에 솟은 하층민의 고층 아파트들을 스카이라인을 강조하여 설정한 점 등은 무대 디자이너의 뛰어난 감각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대체로 이태섭의 무대는 30년대 경제 공황기 미국 중서부 도시의 하층민 생활 풍경을 묘사하는 것으로서 큰 손색이 없었다고 보인다.

■ 아름다운 무대와 깔끔한 연출, 걸출한 연기력

이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윙필드가의 세 사람의 암울한 운명에 관한 이야기가 이 극의 줄거리이다. 이들이 놓여있는 생활 현실은 무대가 한눈에 보여주듯 남루하다. 무책임하게 집을 나가버린 가장을 대신해서 톰이 구두 공장에 나가 혼자 번 돈으로 세 식구의 생계가 겨우 유지되는 삶이 그들의 현실이다. 그러나 이 남루한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그들이 갖는 환상은 각기 그 형태가 다르다. 아만다의 환상은 과거 화려했던 처녀 시절의 남부(블루 마운틴)를 회상하는 것이다. 수많은 신사들의 방문을 받던 아름다운 처녀 시절의 남부는 그녀에게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 환상이다. 로라의 환상은 그녀가 수집한 유리동물들로 채워진 유리동물원의 세계에 있다. 소아마비로 심한 콤플렉스를 겪고 자폐증세에 빠져 있는 로라에게 있어서 유리동물원은 그녀만의 유일한 세계이다. 빛을 받으면 황홀하게 반짝이는 유리동물원의 환상에서 그녀는 구원을 얻는다. 톰은 영화관에서 환상을 얻으며 산다. 그는 노동에 지친 가난한 현실을 밤늦게까지 술집과 영화관을 쏘다니며 달래고 있다. 그가 영화의 환상에 빠져 있는 것은 그것이 곧 모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같은 현실에 놓여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서로 다른 환상을 가졌기 때문에 서로 갈등한다. 로라의 실업, 학교 포기로 인한 아만다의 성마름, 사생활에 대한 아만다의 간섭으로 신경질적인 톰의 반응, 그리고 모자 사이에 몰이해로 비롯되는 언쟁 등 이들 간의 운명적 갈등은 신사(짐: 이찬우 역)의 방문이 이루어지기 직전까지 지속된다. 신사의 방문은 이들이 환상 세계, 즉 유리동물원의 갇힌 세계에서 열린 현실로 빠져 나올 수 있게 되는 한 가닥의 서광이기도 하다. 이는 아만다에게는 딸을 통해 남부 환상의 대리만족 효과를 줄 수 있으며 로라에게는 유리동물원의 자폐적 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이지만, 짐이 자신이 이미 약혼했음을 밝히자 이들은 다시 환상 세계 속에 유폐되고 만다. 다만, 톰만이 자기 아버지처럼 집을 나와 모험 세계를 찾아 떠남으로써 자신의 환상을 현실로 이룬다. 그러나 그가 찾는 세계는 아득히 멀기만 하다.

「유리동물원」이 무대에서 펼쳐 보여주는 극세계는 그 이야기만으로도 매우 감명이 깊다. 더욱이 환퍼포먼스의「유리동물원」은 이 감동적인 이야기를 아름다운 무대와 깔끔한 연출, 걸출한 연기력으로써 무대 위에 훌륭하게 재현해 냈다. 그러나 지적할 점도 많다. 황동근의 연출에서는 유리동물원의 소품이 왜소해 보이는 것만큼이나 이 연극의 상징 기표로서의 '유리동물원'의 의미도 왜소해진 것은 아니가 하는 점, 그것은 이 연극을 로라보다는 톰의 연극으로 이끌어갔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점을 지적할 수 있을 것 같다. 로라가 왜소해지니까 유리동물원이 왜소해지는 것이고, 결국 이 연극 전체의 의미 약화를 가져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연기의 문제로서, 같은 TV 연기자이지만 송승환은 연기의 섬세한 면과 활력적인 면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는 데 비해 윤여정의 연기는 활력 적이 것처럼 보일 때 그것은 연극 연기의 활력이라기보다는 TV 연기에서의 떠들썩함으로 비추어진다. 이찬우의 연기는 번역극에서 신사 역으로는 더 없는 적역인데, 최근 들어서 연기의 성숙함이 엿보이는 것 같다. 두 명의 걸출한 연기자 사이에서 무대 연기자로서의 자존심을 지켜주었다고 보인다.

이 윙필드가 세 식구들의 운명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테네시 윌리엄즈는 꿈과 모험을 잃어버리고 절망하는 자기 시대의 젊은이들에 관해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연 우리 시대의 잃어버린 꿈과 절망까지도 이「유리동물원」속에서 위무 받을 수 있는 것일까. 누누이 강조되는 상투적인 이야기이지만, 지금 이곳에서 환퍼포먼스의「유리동물원」이 봉착해 있는 고민은 여기에 있다. 결국 이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유리동물원」은 어제나 한 때의 아름다운 추억거리를 쫓는 문청(文靑)들만의 잔칫상으로 끝나버릴 우려가 있다. 그리고 이내 잊혀지고 다시 먼지 쌓인 고전들의 서가 속으로 보내질 것이다. 언젠가 누가 이 연극을 생각해 내고 거기에서 다시 꺼내 줄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