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투성과 실험성의 경계
-젊은 춤꾼 '97
김채현 / 한국예술종합학교교수
■ 춤계에 활력 불어넣는 치유 차원의 기획
「젊은 춤꾼 '97」이 2월 하순부터 2주간 창무 포스트극장에서 열렸다. 열두 명의 창작자가 장르 구분 없이 참가한 이 춤판은 주로 30대 안팎의 신진 춤꾼들로 구성되어, 근자의 춤전 구성 경향을 대변하고 있었다. 이 춤판에서 일정이 겹치는 등의 사정으로 말미암아 관람하지 못한 초두의 네 작품을 제외한 여덟 작품을 중심으로 생각해 본다.
이 춤판 기획진은 우리 춤계가 침체되어 있음을 간파하고, 그 치유책으로서 철저한 매니지먼트 시스템과 토탈 아트 디렉팅의 도입을 들고 있다. 바꿔 말하면 일회성의 소모적 행사에 그치기 일쑤인 춤 계에 활력을 불어넣자면 그런 치유책이 필요하다는 전제를 달고서「젊은 춤꾼 '97」이 기획되었다는 뜻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번 춤판에서 젊음은 무엇보다도 젊음 특유의 빛깔을 드러내는데 퍽 미온적이었다. 일상사에서도 그렇지만, 더욱이 예술에서 젊음과 늙음의 구분을 연령의 많고 적음에 기준을 두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다. 「젊은 춤꾼 '97」에 30대 안팎의, 그리고 춤계에 잘 알려지지 않았거나 창작 경험이 적은 이른바 신진 창작자들이 참가한 것은 자연 연령과 경력을 젊음의 기준으로 삼았음을 짐작케 한다. 이와 같은 선정 내용이 비록 오류는 없다 할 테지만, 의도를 갖고 선정하는 춤판의 기준으로서는 미흡하다고 하겠다.
이번 춤판이 장르를 무시하고 젊음을 중심으로 열릴 터였던 데 비해, 사실상 젊음은 통상적인 의미를 맴돌았다. 즉 창작자들의 경력이나 자연 연령에 내포된 젊음이 작품의 질적인 차원에 대해 호조건으로 작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문제점은 주최측의 기획 의도나 참가자들의 일천한 경력보다 오히려 작품 자체에 내재되어 있었던 편이 더 강하였다고 생각되는데, 그것은 한마디로 실험적인 또는 참신한 자세로 불릴 만한 특이점이 미약한 때문이었다.
「젊은 춤꾼'97」을 보면서 자주 나타나는 한 가지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다. 작품마다 전개에서 서론-본론-결론 또는 전반부 후반부로 나누어 작품을 구성하는 방식을 취한다는 사실이다. 이 구성 방식을 따른 작품들은 대부분 토막지워져 있어서 작품들의 호흡은 무척 짧아 보였다. 이를테면 설정한 주제를 붙잡고 줄기차게 전개하는 끈질김 내지 지구력이 감지되는 춤판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토막식 구성은 비단「젊은 춤꾼'97」에서만 드러난 관행이 아니라 춤 작품들이 흔히 취하는 작법이라 하겠으며 올 봄의 여러 춤판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 바이기도 하므로, 유독 이 춤판을 겨냥하는 화살촉으로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실험성은 최선의 의미에서 일반적 관행을 비켜가는 생산적 능력이고 차선의 의미에서는 일반적 관행에 참신한 기운을 부여하는 생산적 능력을 뜻한다는 사실에 비추어, 이번 춤판에서 토막식 구성은 그동안의 상투성을 재연하고 있었다.
■ 상투성 벗어난 춤판 위해 해소되어야 할 취약점
그 상투성이란 가령 서론-본론-결론이 어제-오늘-내일 식으로 각기 다른 내용과 형식으로 흘러감으로써 서론에서 제기된 문제 의식이 되풀이 강조되고 반성되는 경우가 희소하다는 것이고, 설령 되풀이된다고 하더라도 강조하고 반성하는 강도는 엷다는 현상으로 정리될 수 있다. 그러므로 작품이 제시하려는 윤곽은 있으되 속알맹이는 설익게 되는 폐단이 거듭되어 왔다고 생각된다.
실험성을 추구한다고 해서 그간의 모든 방법을 타기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실험성만이 작품을 평가하는 잣대는 아니다. 다만 젊은 춤꾼들이므로 실험성에 근접하고 근접해야 하는 현실성과 당위성은 높아지는 법이다. 기존의 방법을 답습하면서 그 폐단까지 답습하기 때문에 상투적이라고 비판받는 것이라면, 젊음의 다이내믹은 기대할 수 없다.
「젊은 춤꾼'97」전에서 드러나는 이상과 같은 취약점이 어디서 기인하는지 속사정은 접어 두고 크게 두 갈래로 추론될 수 있다. 먼저 참가 춤꾼들에게 주어진 창작 일정이 넉넉하였는지 물어볼 수 있고, 또 하나는 참가 춤꾼들이 이 춤판에 참가하는 동기는 무엇이었는지 물을 수 있다. 이는 모두 주최측이 재고할 점이라 하겠으며, 상투성을 벗어나는 춤판이 되려면 이런 취약점의 해소가 선결 요건으로 보인다.
「젊은 춤꾼'97」에서 정형수의 춤을 오랜만에 보았다. 윤동주를 추모한 발레에서 주역을 맡은 정형수를 본 것은 1995년도였다. 그는 성실한 춤꾼이고 단아한 이미지를 가졌다. 이번에 단테「신곡」가운데「연옥」제30곡을 헌정하였다. 사랑의 맑은 모습은 천사들의 그것이었고 베아트리체에 대한 그것이었다. 전반부에서 환기되는 사랑의 맑음은 종반부에서 재확인된다. 빠르게 펼쳐지는 가벼운 도약들은 그 사랑을 청순한 유희로 느끼게 한다.
연한 오렌지색 얇은 치마의 나풀거림 속에서 사랑은 천상의 선물로 춤추었다. 그러나 사랑이 설레임만 열어둔다면 사랑의 존재론은 무척 빈약할 것이다. 고뇌와 슬픔을 겪지 않은 사랑이 불꽃으로 피어날까. 이를 염두에 둔 듯한 작품의 중반부는 유감스럽게도 그 앞뒤에 비해 밀도가 얕았으며, 천사들의 해맑은 유희는 차원을 달리 하는 승화로 연결되지 않았다.
이번 춤판에서 안정준은「연옥」제33곡을 헌정 하였다. 두 창작자가 같은 날 동일 원작을 나누어 해부해 본 것은 관심을 끌 만한 착상이다. 정형수와는 다르게 안정준은 원죄의식을 그려내었다. 속도에서도 앞의 작품이 빠르게 전개되었다면 안정준의 그것은 매우 느리다. 색감도 밝음에 비해 어둠이 주조를 이룬다. 시종일관 사과가 씹히거나 바닥에 나뒹굴어 원죄는 분명하게 암시된다. 선명한 창작 의도에도 불구하고 형식이 전달하는 맛이 그렇지 않은 것은「연옥」제33곡을 해석함에 있어 폭이 지나치게 넓었던 탓이라 생각된다.
이번 춤판에서 손민정의「하고 싶은 이야기」,「호수 근처」는 산조의 재현 차원을 넘어서는 창작의도가 필요하였다. 강철 도르래를 동원해서 터뜨릴 듯 싶었던 이순의「뛰는 사물」에서 육신의 뒤틀어짐은 매우 포괄적인 해석망을 가능케 한다. 욕망으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전면적이다. 완력이 불거지는 몸의 흐느낌은 도르래에 매달려지는 파국으로 종료된다. 중반부에 끼여든 여성 2인무는 반대로 부드러움 일색이다. 여러 차례 동원된 대조법이 육신의 사물성을 부각하는 쪽으로 전신하기 위해서는 작품의 분할에 따른 급격한 소재 전환을 막을 필요가 있었다.
■ 도전의 저력을 느끼게 하는 「슈가+슈가」
「춤」에서 이혜경은 오감의 마비와 소외를 인과관계로 본다. 「춤」이 난전의 분위기에서 제각각 노는 삶을 파헤치는 문제의 설정 방식은「뛰는 사물」의 그것과 유사하고 젊은 춤꾼의 새로운 기류를 조망하게 한다. 마비와 소외의 증후군이 심도가 얕았다면 방법론의 과도한 등장에서 기인할 것이므로, 설정된 문제를 강화하는 점증법을 참고할 만하다.
이와 유사한 지적은 비슷한 맥락에서 이화석의「물 위의 나무」, 박선욱의「이레이저에게」에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박선욱의 작품에서 오방 방위에 기초한 조화의식에서 받은 착상을 완결되지 않은 이유는 오히려 방법론의 간결성에서 찾아질 법한데, 그 간결성은 네 방위의 춤에 저마다의 개성을 보장하지 않을 정도로 흡사했다는 점으로 요약된다. 「물 위의 나무」에서 주축이 되는 나무의 성격은 모호하다. 두 작품에서 부각된 부드러움은 미적 특성만큼 의미가 살려지지 않았다.
「슈가+슈가」는 이번 춤판에서 아마 가장 적극적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젊은 춤꾼'97의 대미는 박나훈과 전인정의「슈가+슈가」가 장식했다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이 작품이 게릴라적 파격의 정신으로 일관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근거는 넓다. 즉 그것은 쇼걸의 춤에 못지 않은 재미와 열기를 춤이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 쇼걸의 춤을 무시하기 시작하여 급기야 정규 무대 춤 메소드를 매우 좁게 해석하는 춤 발상이 파기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교체되는 여덟 가지 장면들은 힙합으로부터 현대무용 메소드까지 고루 담아 차례로 선보이며, 살풀이와 달리기도 패러디로 처리된다.
젊은 창작의 기백을 토한「슈가+슈가」가 단편성의 연결에 기대어 완성도는 높지 않고 또 연결을 요하는 규모의 작품에서 앞으로 어떻게 귀결될지 지켜보아야 할 점은 있다. 그러나 토막 속에서 일이관지하는 발언과 춤언어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저력을 느끼게 하고, 그것은 도전의 저력이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