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 구조 개선해야 출판문화 꽃피워…
―출판 문화의 구조적 현실
김호운 / 계몽사 단행본사업본부장
■ 출판계에 남아 있는 '보릿고개'
그 나라의 문화 수준을 재는 척도로 출판 문화 현황과 독서량을 꼽는다. 출판이 그 나라 문화에 미치는 영향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문화 생산의 첨병인 출판계가 지금 최대 불황을 맞고 있다. 우리 나라 출판 문화가 흔들리고 있다.
활자와 종이가 발명되면서부터 인류 문화는 급속도로 발전해 왔다. 그런데 이로 인하여 사회가 발전하면 할수록 사람들이 종이와 활자를 멀리하는 특이한 현상이 생기고 있다. 어쩌면 출판 문화는 처음부터 이런 이율배반적인 환경 위에 존재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라디오도 구하기 힘든 시절에는 유일한 소일거리가 책 읽는 일이었다. 지금은 텔레비전, 컴퓨터 통신, 비디오 등, 책 말고도 즐거움을 찾을 데가 너무나 많다. 어쩌면 책은 이제 그런 즐거움의 대상에서 벗어나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보릿고개'라는 말이 국어 사전 속에 숨어 있는 단어가 되었다. 봄이 오면 산과 들에 아름다운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났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사람들은 '춘궁기'라 하여 물을 마시며 주린 배를 채우던 슬픈 시절이 우리에게 있었다. 더 늘일 수도 없는 한정된 땅 위에서 똑같은 방법으로 농사를 짓던 당시 사람들은 '보릿고개'를 피할 수 없는 숙명으로 여기며 연례 행사처럼 맞았다. 이제 그 지긋지긋하던 '보릿고개'가 사전 속에 죽어 있는 말이 되었다.
출판계에 그 '보릿고개'가 남아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매년 2, 3월이 되면 출판계는 비상이 걸린다. 신학기가 시작되고, 학습지를 판매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학습지를 생산하는 출판사가 아니면 이 기간에는 신간 생산을 자제하거나, 아예 중지하기도 한다. 서점들은 마치 성수기의 휴양지처럼 학습지 판매에 온힘을 쏟아 붓는다. 영세한 서점들은 이윤이 확실한 참고 도서 판매에 매달리게 되고, 상대적으로 일반 도서 판매는 저조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 나라 출판 종수의 대다수를 학습지가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넘쳐나는 출판 홍수 속에 독서량은 꼴찌에 맴도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며 명수필에 자주 이 말이 등장하고는 했다. 붉게 물든 단풍을 바라보며 사색하고, 책을 읽는 아름다운 모습을 말한 것이다. 이젠 이것도 옛말이 되어 버렸다. 가을이 되면 삼삼오오 짝을 이루어 산으로 들로 가느라고 책을 읽지 않는 계절이 된 것이다. 생활은 그만큼 풍요로워졌지만 정신은 찌들었다. '천고마비(天高馬肥)'가 아니라 천고인비(天高人肥)가 되어버린 것이다.
프로 스포츠도 독서 인구를 줄이는 요인은 되었다. 눈만 뜨면 프로 스포츠가 신문과 텔레비전 화면을 장식한다. 여기에다 사건 사고라도 터지는 날에는 엎어진 데 꼭지 누르는 격으로 출판사 매출고는 뚝 떨어진다.
■ 프로 스포츠, 사건 사고의 신문 보는 재미에 밀려난 출판물들
요즘이 바로 그런 때이다. 사람들은 신문 보는 재미가 소설 한 권 읽는 것보다 더 좋다고들 한다. 슬픈 일이다. 신문 보는 재미가 좋을수록 그만큼 출판사는 울상을 지어야 한다. 사건 사고가 터질 때마다 출판사 매출고는 하향곡선을 긋는다. 출판사 내막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정말 피부로 실감하는 일이다.
출판계의 보릿고개는 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출판계는 일년 내내 이런 악재들과 싸워야 한다. 이제 독서의 계절은 겨울이다. 날씨가 추워지면 밖에 나가기 귀찮아 책을 읽는지도 모른다. 그나마 겨울이 있다는 것은 출판계로서는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금년 봄에는 이런 악재들이 동시다발로 터졌다. '한보 사태'에서 불거터진 파동이 '김현철 문제'로 이어졌고, 이젠 정치권 전반의 문제로 비화되었다. 경제는 말할 수 없는 수렁 속을 헤매는데, 그것을 풀 해법은 보이지 않는다. 예년 같으면 4월 초순에 접어들면서 학습지 판매 경쟁이 수그러들고, 출판계에 평온이 찾아들었다. 그런데 4월 중순에 접어들고 있는데도, 아직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청문회가 4월 말일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출판계 여기저기에서 한숨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악재들을 극복하지 못하고 국내 단행본 출판사 가운데 가장 큰 K출판사가 부도를 냈다, 연이어 대형 총판들이 여기저기에서 부도를 내고 있다. 그나마 근근히 지탱하던 군소 출판사들은 이 틈바구니에서 목이 조이고 있는 것이다.
나라 전체가 경제 침체로 몸살을 앓고 있는 가운데 출판계가 유독 큰 타격을 입고 있다. 경제가 어려우면 제일 먼저 영향을 받는 것이 출판계이다. 사람들은 문화를 양념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게다가 어려우면 먼저 문화비 지출부터 줄인다.
그런 의미에서 출판계는 시도 때도 없이 부는 외풍을 제일 먼저 받는다.
문제는 출판계의 이런 현상이 외부적인 요인뿐만이 아니라는 데 있다. 출판계 내부의 구조적인 형상을 개선하지 않고는 이런 외풍 앞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다.
우리 나라 출판계의 유통 구조는 하나의 트리 tree로 형성되어 있다. 출판사와 총판(도매상) 서점이 하나의 트리를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이 나무가 뿌리를 튼튼하게 내리고 가지와 잎이 자라고 있다면 걱정할 게 없다. 그러나 출판계의 이 나무는 뿌리가 없는 조화(造花)이다. 총판은 이 조화의 줄기이고 출판사는 거기에 매달린 잎이다. 독자들은 그 조화의 그늘 아래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바람이 거세게 불면 이 나무가 흔들리고, 그러면 가지 끝에 붙어 있던 출판사들은 한꺼번에 휘청거린다. 이것이 우리 나라 출판 유통 구조이다. 문화를 생산하는 출판사들이 이 열악한 유통 구조 위에서 눈치를 보며 몸을 조여야 한다. 그 많은 출판사들이 난립해 있지만, 출판문화 수준이 여기에 따르지 못하는 것도 이런 열악한 유통 구조가 한 몫을 하고 있다. 가지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바람을 피해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많은 출판사들은 바람을 적게 받는 안전한 책들을 내기 위해 온갖 지혜를 짜내고 있다.
■ 출판 문화의 야누스
출판 문화는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 문화 생산과 이윤추구이다. 이 두 개의 얼굴은 서로 상반된 모습을 가지고 있다. 이 상반된 두 얼굴을 어떻게 균형 있게 유지시키느냐 하는 데 따라 출판 문화의 성패가 달려 있다. 정말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경영자와 편집 기획자의 안목이 다를 수밖에 없고, 이것 때문에 편집 기획단계에서는 늘 갈등이 내재하고 있다. 모두 경중을 따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가운데 먼저 신경 써야 할 부분이 이윤이다. 혹자는 이런 말을 하는 편집자의 자질을 의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거시적인 안목으로 보아야 한다. 출판사가 존재해야 양서든 불량서든 펴낼 수가 있다. 출판사를 살리는 편집자가 존재해야 양서도 생산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이런 거시적인 안목으로 한 회사의 장래를 걱정하는 편집자라면 불량서는 내지 않는다. 불량서로 돈을 번 출판사는 길게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이런 갈등을 극복하는 어려움을 어떤 사람들은 도박에 비유하기도 한다. 도박은 '패'를 뒤집어 보기 전에는 상황을 알 수가 없다. 그 미궁의 뚜껑을 여는 재미로 사람들은 도박을 한다. 출판 문화도 그와 비슷한 환경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비슷'하지만, 똑같지는 않다. 도박은 정말 운이 따라야 한다. 물론 도박에서도 기술이라는 것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패의 흐름을 경험과 논리적인 계산으로 미리 알아 맞추는 정도에 그친다. 같은 상대를 만나 철저하게 패를 노출시키지 않으면 절대로 유리, 불리가 있을 수 없다.
출판은 기획의 정확도에 따라 어느 정도 성공 확률을 점칠 수가 있다. 문화 생산의 이윤 추구의 척도를 재는 기획이다. 그 균형을 어떻게 맞추느냐에 따라 기획의 성공 여부가 달려 있다. 물론 그것은 '확률'이지 완벽한 자신은 아니다. 이 확률 때문에 사람들은 출판기획을 도박에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출판 기획의 확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앞서 언급한 그런 악재들이 다. 아무리 좋은 기획을 했다하더라도 이런 악재에 빠지면 속수무책이다. 출판 환경을 이루는 트리가 뿌리를 내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뿌리 깊은 나무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출판기획이 도박이라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는 이 트리 구조를 하루 속히 개선해야 한다. 그래야만 출판문화의 꽃을 피울 수 있다. 이것은 출판인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모두가 함께 풀어가야 할 숙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