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활 속의 열린 예술공간 토탈술관
이선실 / 방송작가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비전을 제시하는 말 중, 최근 가장 흔한 것은 '열린'이라는 수식어가 아닐까 싶다. 열린 사회, 열린 교육, 열린 공간…… 그만큼 지금까지의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닫혀 있었다는 의미일까? 이런 사회 현상은 문화에 대해서도 예외는 아니다. 어차피 문화라는 것이 사회를 떠나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니 만큼, 열린 문화를 지향하는 사회 분위기는 당연한 시대적 욕구일지도 모른다. 최근 예술계에서는 이러한 사회적 상황을 인식하고, 예술과 관객의 거리를 좁히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토탈미술관 역시 예술 전반에 대한 '넓고 깊은 소통의 장'이라는 취지 하에 탄생한 종합 문화 공간이다. 토탈미술관은 1984년 10월 국내에서는 최초의 야외조각공원 형태로 탄생했다. 토탈미술관의 탄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회사격인 '토탈 디자인'의 창립 이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토탈 디자인'은 오늘날의 디자인이 지닌 문제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했다. 그 동안의 디자인은 합리성을 추구하다 보니 너무 전문화되어 왔고, 생활의 전체를 생각하는 태도를 소홀히 해 왔다. 그런 디자인은 기능만을 중시해 인간이 향유하고 있으면서도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부작용을 필연적으로 내포할 수밖에 없었다. '토탈 디자인'은 기존의 디자인을 지양하고 인간에게 유기적으로 조화하는 디자인을 창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출발했으며, 이런 목적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모든 디자인의 근원인 순수 미술에까지 토탈 total의 개념을 확장시켜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토탈미술관의 전신인 장흥의 야외조각공원이다.
조각은 그 입체적 역동성으로 인해 닫힌 공간보다는 열린 공간에서 시각적 잠재력이 나타나는 예술이다. 이런 점에서 토탈미술관이 제시한 야외라는 공간은 최상의 전시장이 되어 주었다. 이후 야외조각공원은 점차적으로 미술관에 필요한 부대 시설을 갖추게 된다. 6천여 평에 이르는 조각공원과 3백여 평의 실내 전시장을 갖춘 돌담으로 둘러싸인 전시장, 그리고 2백여 평의 원형 공연장과 소극장이 마련되면서, 명실상부한 종합문화공간으로 탄생한다.
장흥 토탈미술관은 예술성 높은 회화, 조각 등의 미술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으며, 실내 전시장을 중심으로 기획전을 개최하고, 특히 미술인들의 창작 의욕과 실험 정신을 고취시키고자 토탈 미술상을 제정해 시행하고 있다. 또한 원형 공연장에서는 연극, 무용, 퍼포먼스, 재즈, 마당놀이 등 문화 전반에 걸친 행사를 진행하고, 오픈 테라스에서는 전시회 외에 일반인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각종 이벤트를 개최함으로써 일반인들이 미술에 보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런가 하면 작가에 대한 지원도 아끼지 않는다. 지난 1991년부터 시행된 '토탈 미술상'은 미술관의 수입을 미술계에 환원하는 대표적인 사업이다. 35세 이상의 중진 작가들을 대상으로 하는 '토탈 미술상'은 그 동안의 미술관의 입장 수입을 기금으로 출발했다. 기존 공모전 형식의 여타 미술상들이 신인의 발굴과 작가 등용문이라는 의미와 성격을 지닌 것에 비해, 이 상은 자기 작품의 색깔과 조형 세계가 분명하고 앞으로의 활동이 기대되는 작가들을 지원함으로써 한국 미술계의 활력소 구실을 해 왔다.
야외조각공원으로 출발한 '토탈미술관'은 대자연의 목가적 풍경 속에서 일반인에게는 미술 문화를 향유할 수 있는 교육과 휴식의 장으로, 작가들에게는 의욕적인 창작 열기를 담아 내는 문화 공간으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그러나 토탈미술관 측은 야외 미술관이 지니고 있는 시간과 장소의 한계를 인식할 수밖에 없었다. 주변이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유흥객들이 늘어나자 보다 심도 있는 예술을 위한 새로운 공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이에 따라 1992년 봄, 서울의 북한산 자락에 다시 토탈미술관 분관을 개관한다.
서울의 토탈미술관은 평창동의 주택가에 위치하고 있다. 서울의 유명 화랑가나 문화거리와는 다소 먼 장소 선정에서, 예술과 일반인이 더욱 가까워지도록 고심한 흔적이 엿보인다.
평창동 토탈미술관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다. 그러나 경사가 심한 대지의 특성을 십분 이용한 건축물은 서울의 새로운 명소로 떠오르고 있다. 몇 개의 공간들이 제 몫을 다하며 하나의 개성 있는 건축물을 연출하고 있는데, 둥그런 원통을 이용한 통로라든지, 개성 있는 계단의 배치 등은 건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찌 보면 예술적 공간으로는 어울리지 않는 서울의 주택가에 이런 건축물을 세운다라는 것 자체가 도시와 예술을 보다 가까이 접근시키려는 의도가 아닐까?
평창동 토탈미술관의 구성은 장흥 미술관과 큰 차이는 없다. 2개의 전시실과 자료실, 게스트 룸, 야외 극장, 음악 감상실 등 문화 전반에 관한 부대 시설을 골고루 갖추었다. 연간 전시회는 평창동 토탈미술관이 4∼5회 정도로, 장흥의 한 달 단위에 비해 횟수는 적은 편이다.
공식적인 것은 아니지만 굳이 두 미술관의 차별성을 찾는다면 전시회의 경우 평창동은 중견 이상의 작가를 위주로 하면서 전문성을 강조하고, 장흥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실험적인 젊은 작가의 작품을 많이 다룬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구분은 구태의연한 이분법적 발상일 뿐이다. 두 곳 다 예술 작품을 전시하고 공연한다는 점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미술관이 일반적인 화랑과 다른 점은 학술적인 연구를 위해 소장품을 보관, 관리한다는 점이다. 토탈미술관도 많은 분야의 소장품을 가지고 있어 특별한 기획전이 없어도 연중 무휴(장흥의 경우)로 소장품을 전시하고 있다. 한편 토탈미술관이 다른 미술관과 특화 되는 것은 미술이 아닌 타 예술 장르의 보급에도 앞장서고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토탈미술관이 취급하는 대표적인 장르는 음악인데, 음악 연주회는 지난 1992년 이후 꾸준히 계속되어 왔다. 야외 극장에서 공연되는 음악회의 프로그램을 보면, 창을 비롯한 전통 음악에서 존 케이지의 현대음악에 이르기까지 전 장르를 망라한다. 또 문학과 음악의 만남, 패션쇼 같은 이벤트 행사도 열리고 있어 그야말로 종합예술 공간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하지만 토탈미술관의 토탈이라는 명칭은 미술관(이럴 경우에는 예술관이라는 명칭이 더욱 어울리겠지만)이 단순히 백화점 식으로 여러 장르의 예술을 나열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토탈이라는 이름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은 오랜 세월 개별적인 장르로 인식되어 온 예술들 사이에 의사 소통의 장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토탈미술관은 개관 때부터 전혀 다른 분야로 취급되고 있는 미술 전시회와 음악회, 이벤트들을 하나로 묶는 작업을 계속해 왔다. 전시회의 오프닝을 음악회로 장식하는가 하면, 한국 바그너 협회의 '작은 음악회'는 매달 정기 프로그램의 하나로 열리고 있다. 이런 미술관에서의 콘서트는 우리에게는 낯선 경험이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갤러리 콘서트가 이미 보편적이다.
예술 사조에서, 음악의 첨단 사조는 미술에 비해 10∼20년 정도 뒤져 있다고 한다. 따라서 미술관들은 예술의 사조를 제일 먼저 수용한다는 입장에서 다양한 갤러리 콘서트를 마련하고 있다.
외국의 경우와 반드시 같을 수는 없겠지만. 토탈미술관의 음악회도 음악과 미술의 단순한 접목만은 아니다. 오히려 동시대의 다양한 예술 현상을 통찰해 볼 수 있는 색다른 기회의 제공으로 느껴진다. 그 동안 토탈미술관의 음악회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현대 미술 쪽을 주로 다루는 미술관의 성격에 맞게 현대 음악들이 많이 다루어졌다. 작년에 있었던 미국의 현대음악을 주제로 한 '현대음악 주간 행사'(1996. 6. 1)가 대표적인 예……
그러나 미술관 측이 반드시 현대음악만을 고집하는 것은 아니다. '가야금을 위한 음악'(1996. 4. 26), '안숙선 창'(1997. 5. 9)과 같은 우리 전통 음악부터 문학과 음악이라는 주제로 열린 '백병동과 김영태의 밤'(1996. 10. 10)처럼 실험적인 무대들도 마련되고 있다.
토탈미술관의 예술과 관객의 의사 소통 역시 예술과 예술 사이의 소통처럼 여러 형태로 다양하게 실행되고 있다. 예술과 관객의 간격은 우선, 관객이 예술의 언어에 익숙하지 못한 데서 틈이 생겨난다. 이런 간격을 줄이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교육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최근 권위 있는 미술관과 문화 센터들이 미술에 관심 있는 이들을 위해 앞다투어 교육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예술 프로그램들은 전문가를 위한 강좌이거나 취미반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전문적이고 심도 있는 예술 강좌는 부족한 형편. 토탈미술관은 벌써부터 이 분야에 관심을 기울여 '토탈미술관 아카데미'를 운영하고 있다. 60명 정원의 1년 과정으로 구성되어 있는 '토탈미술관 아카데미'는 올해로 벌써 5기를 맞아 일반인을 위한 예술 교육 프로그램으로 자리를 잡았다. '현대 미술사', '현대미술의 거장들', '음악사', '음악의 거장들', '건축의 이해' 등 5개의 강좌가 마련되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면서도 예술에 대한 질적 이해를 높이려는 수준 높은 강의를 단계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이밖에도 미술관 내부 시설로는 자료실과 음악 감상실이 있다. 영상 자료를 볼 수 있는 자료실, 오디오 광으로도 알려져 있는 아나운서 황인용씨가 직접 운영하는 음악 감상실 '카메레타 '…… 일반인에게는 문턱이 높게만 느껴지던 미술관에 대한 인식을 불식시키고 대중적인 접근을 시도하려고 노력하는 부분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이건 간에 문화가 없는 인간의 삶은 생각할 수 없다. 알프레드 스미드의 정의에 따르면 문화는 우리가 배우고 공유하는 부호 code이다. 즉, 모든 문화 활동은 학습을 통하고 공유에 의해서만 습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커뮤니케이션을 전제로 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술 역시 문화 활동의 한 분야라는 점에서 사회적 관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다. 작품은 사회의 반영이며, 관객의 감상을 통해 재생산된다는 점에서 끝없이 사회와 의사 소통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의 역할이 인간의 삶을 풍부하게 하는 것이라면, 현대와 같이 각박한 사회일수록 예술은 더욱 필요한 것이 아닐까? 예술과 현대인 사이에 잃어 버린 의사 소통의 창구를 찾는 노력…… 토탈미술관의 이런 노력이 있어 아직까지 삶 속의 예술이 가능하며, 예술을 향유하는 우리의 삶이 윤택한 것인지도 모른다.
토탈미술관을 알리는 팜플렛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도심을 떠나 하루에 얼마쯤은 자신을 돌아보고 넓고 깊은 예술 속에서 잠시 머리 식힐 수 있는 곳, 어느 곳에도 치우치지 않고 그저 한가로운 명상의 마음으로 되돌아가고 싶을 때 찾아갈 수 있는 곳, 토탈미술관이 지향하는 것은 바로 그런 생활 속의 열린 예술 공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