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중기획 / 문화의 세기, 미래의 문화. 21세기 삶의 질과 문화의 역할
경제적 풍요·사회적 평등·문화적 성숙이 행복한 삶의 조건
임희섭 / 고려대 교수, 사회학
삶의 질에 대한 관심과 논의
21세기는 이제 먼 장래가 아니라 바로 4년 후의 가까운 미래로 우리 앞에 다가 오고 있다. 그러나 만일 21세기가 단순히 1900년대가 끝나고 2000년대가 새로이 시작되는 연대기적인 전환에 불과한 것이라면, 우리는 21세기의 새해 첫날 아침에 새로운 달력을 거는 것만으로 담담하게 새로운 한 세기를 맞이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21세기의 지구촌이 20세기의 세계와는 질적으로 다른 삶의 환경이 될 것이라는 예상을 내놓고 있다. 그것은 20세기의 세계를 특징 지웠던 산업사회의 문명이 서서히 막을 내리면서 정보사회의 문명이 21세기에 본격적으로 전개되어 갈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문명사적 전환은 물로 20세기의 석양 무렵부터 이미 시작된 전지구적인 규모의 거시적 사회변동이다.
20세기 산업사회 문명은 기계의 발명으로 비롯된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시장기제에 의해 특징 지워지는 것이었다. 농업사회 문명단계에서의 자급자족 적인 농가경제는 산업사회의 단계에 와서는 대규모의 공장과 기업조직을 통해 대량생산되는 상품들의 대량소비경제로 이행하였으며, 이러한 산업화를 통해 대부분의 국가들은 경제의 성장과 발전을 추구해 왔다. 그 결과 성공적으로 산업화를 달성한 사회에서는 절대빈곤을 극복하고 어느 정도의 경제적인 풍요를 성취할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평등의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따라서 산업사회에서의 중심문제는 빈곤의 극복과 분배의 평등이라는 삶의 기회 life chance 에 관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산업사회 문명의 절정기라고 할 수 있는 20세기 중반부터 산업화와 경제발전에 성공한 국가에서는 점차로 '경제성장과 경제적 풍요가 인간의 행복을 증진시켜 줄 것' 이라는 종래의 가정에 대한 회의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경제의 성장과 발전에도 불구하고 빈곤의 문제와 불평등의 문제도 완전하게 해결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도시문제, 범죄문제 등의 사회문제가 더욱 심각해지고 소외문제와 환경문제가 새로운 사회문제로 부각되는 것을 보면서, 사회과학자들과 문명비판가들은 산업사회 문명의 강도 높은 위협들을 경고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같은 배경에서 1960년 무렵부터 삶의 질 quality of life 에 대한 관심과 논의가 서구학자들 사이에서 제기되었다. 경제발전만으로 인간의 행복이 성취될 수 없는 것이라면, 경제발전은 사회발전 및 문화발전과 균형을 이루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에서 삶의 질에 관한 논의와 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바우어 Bauer 등이 경제지표 economic indicators 에 대응하는 사회지표 social indicators 의 연구에 착수한 것도 바로 삶의 질의 중요성에 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실제로 바우어 등의 사회지표 조사연구는 1960년대 미국사회에서 지속적인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의 삶의 질에 관한 만족도는 오히려 낮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삶의 질에 대한 정책적 관심이 일게 된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였다. 1962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착수된 이후 3차에 걸친 5개년 계획이 추진되는 동안 한국경제는 연평균 10퍼센트에 가까운 고도성장을 계속하여, 60년대 초에 42퍼센트에 달하였던 절대빈곤 인구를 10퍼센트 정도로 낮추고 국민의 일반적인 생활수준을 크게 향상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후반에는 소득분배 구조가 악화되고 계층간, 산업간 격차가 벌어지는 등으로 국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이나 불평등의식이 점차로 증대되는 현상이 일어났다.
그와 같은 배경에서 정부는 1975년에 UN (1972년 UN 통계위원회 제17차 회의 결의)의 권고를 받아들여 사회지표의 개발에 착수하였고, 1978년에는 350개의 지표를 체계화하여 발표하였으며, 이를 토대로 경제기획원 조사통계국(현 통계청)에서는 1980년에 151개 지표를 가지고 처음으로 사회지표 조사를 시행하였다. 그후 정부는 매년 지표의 수를 늘려가면서 사회지표 조사를 시행해 오고 있다.
삶의 모든 영역에서 다차원적으로 결정되는 삶의 질
삶의 질에 대한 학문적, 정책적 관심은 '경제적 여건의 향상이 자동적으로 개인의 삶에 대한 만족을 증대시키지 않는다'는 인식에서 출발하여 국가정책의 목표로서의 경제지표를 보완할 사회지표운동으로 이어져 온 것은 사실이나, 초기의 삶의 질 연구는 전체국민 population at large을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빈곤층, 장애자, 노약자 등과 같은 특수한 인구층을 대상으로 하여, 그들의 삶의 질을 사회적 최소수준 social minimum 으로 끌어올리는 복지정책에 집중된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지표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삶의 질에 관한 정책적 관심의 대상은 전체 국민으로 확대되었고, 그 내용도 개인의 건강과 경제적 안정으로부터 자아실현, 가족생활, 직업활동, 공동체생활, 문화향수 등에 이르기까지 광범하게 확장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삶의 질의 개념은 학문적으로나 정책적으로나 '객관적인 삶의 조건에 대한 주관적인 만족의 상태'를 지칭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많은 학자들은 삶의 질이라는 말을 주관적 복지 subjective well-being, 생활만족 life satisfaction, 행복 happiness, 삶의 조건에 대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 감정 positive and negative affect 등과 거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 또한 개인들의 '객관적인 삶의 조건에 대한 주관적인 평가'로서의 삶의 질의 영역도 개인의 건강상태, 자아실현, 결혼적응, 가족관계, 직업만족, 가족의 재정상태, 지역사회생활, 종교생활, 여가생활, 문화생활 등 생활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즉 한 개인의 삶의 질은 경제적 조건이나 특정한 한두 가지의 조건에 의해 결정된 다기보다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개인이 처한 조건에 의해 다차원적으로 결정된다고 보는 것이다.
삶의 질을 구성하는 결정요인들은 생물학적, 심리적, 사회적, 문화적인 영역으로 묶어 볼 수 있다. 생물학적 차원에서는 무엇보다도 개인의 건강이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며, 심리학적 차원에서는 개인의 퍼스낼리티와 정신적인 건강과 정서적인 안정 등이 중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적인 차원에서는 가족, 공동체, 직업 등의 요인이 중요할 것이며, 문화적인 차원에서는 여가와 문화향수의 기회 등이 중요한 삶의 질의 요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첨단기술이 첨단문화를 부른다
사회학자나 인류학자들은 문화 culture를 인간이 집합적인 공동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유형화한 patternalized 생활양식의 복합체 complex whole 라고 정의한다. 이와 같은 넓은 의미의 문화 개념은 사실상 본능을 제외한 '인간이 후천적으로 학습하게 되는 모든 행동양식'을 포괄한다. 그러나 문화의 개념을 좀 더 협의로 정의한다면, 문화는 인간의 인식적 cognitive, 심미적 aesthetic, 평가적 evaluative 상징들의 복합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참된 것에 관한 지식과 아름다움에 대한 감정, 바르고 선한 것에 대한 행위규범 등을 포괄하는 상징 또는 가치의 체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상징과 가치의 체계는 사회마다 다를 수 있으며, 그와 같은 독자성과 개별성이 각 문화의 정체성 identity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문화는 모든 국민의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는 '실용적'인 지식과 기술, 예술, 규범으로서의 민속 folkways 으로부터 전문화된 지식, 예술, 이념, 도덕 등과 같은 이른바 고급문화 high culture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같은 문화는 인간이 참되고 아름답고 바르게 사는데 필요한 창조물들이며, 인간은 그와 같은 문화적 상징들을 자신의 삶을 위해 사용함으로 자신의 삶은 더욱 풍요롭고 인간답게 가꾸어 나아갈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20세기 산업사회 문명에서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쟁점은 삶의 기회 life chance를 어떻게 하면 모든 사람에게 공정하게 배분하느냐에 모아져 있었다. 그러나 이제 21세기 정보사회에서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관심은 사회학자 기든스 Giddens가 말한 것처럼 어떻게 하면 사람들의 생활양식 life style이 참되고 바르고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있는 가로 모아져 가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제 인간의 삶은 도구적 합리성에 기초한 경제화의 양식 economizing model을 넘어서서 문화적인 풍요와 다양성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보사회는 흔히 지식사회 knowledge society 라고도 불린다. 산업사회가 노동에 의해 자연자원을 가공해서 시장에서의 교환가치를 지니는 상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노동가치설'에 기초한 사회였다면, 정보사회는 지식과 정보와 같은 문화적 상품을 생산해서 판매하는 '지식가치설'에 기초하는 사회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정보사회에서는 농산물이나 공산품보다는 지식, 정보, 문화 등과 같은 상품이 보다 많은 부가가치를 생산하는 산업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수만 대의 자동차를 생산하고 수출해서 벌어들이는 수입보다, 미국의 한 영화회사가 「쥬라기공원」이라는 영화 한 편을 제작하고 판매해서 얻은 수익이 훨씬 더 많다는 사실이 이른바 지식산업이나 문화산업의 중요성을 잘 말해 준다.
윌리암스 williams 와 같은 문화비평가는 첨단기술 high tech이 고급문화 high culture를 촉진시킬 것인지 위축시킬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고 지나친 비관론이나 지나친 낙관론이 다같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한 바 있다. 비관론자들은 첨단기술이 문화의 상업화를 가속시켜 고급문화를 위축시킬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주장한다. 그러나 낙관론자들은 전자통신 기술의 발달이 문화의 매체를 다양화하고 문화의 수용자를 전세계로 확대시킴으로써 오히려 고급문화를 활성화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특히 「메가트렌드 megatrends」의 저자인 나이스 빗트 Naisbit는 '첨단기술 high tech이 첨단문화 high culture를 부른다'고 단정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컴퓨터나 멀티미디어와 같은 첨단 기술이 새로운 문화양식의 창조를 가능케 할 뿐 아니라 대중들의 문화적 욕구를 보다 충족시켜 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21세기는 삶의 양보다는 질을 추구하는 문명
20세기의 삶의 질은 경제적인 풍요에 사회적인 평등을 더한 것이었다면, 21세기의 삶의 질은 거기에 문화적인 풍요를 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객관적인 삶의 조건에 대한 주관적인 만족' 이라고 개념화되는 삶의 질은 결국 인간의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삶의 조건'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모든 국민이, 또는 모든 인류가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모든 개인들이 '쾌적한 자연환경' 속에서 '육체적, 정신적 건강'을 누리고 '자아실현을 통한 성취감'을 충족시키면서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가족관계가 화목한 가정생활'을 영위하는 가운데 '안전하고 공정하며 자율적으로 협동하며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 안에서 스스로 참되고 아름답고 바른 삶의 양식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추구함으로써 '문화적인 가치'를 향유하면서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은 삶의 조건은 물론 유토피아에서나 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인류의 역사는 인간이 자신의 삶의 조건을 끊임없이 개선하고 향상시켜 온 과정이기도 하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21세기의 새로운 문명은 삶의 양보다는 삶의 질을 추구하는 문명이 될 것이며, 삶의 기회보다는 삶의 양식이 더 중요해지고, 권력의 정치가 아닌 삶의 정치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사회가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사회에서는 경제적인 풍요와 사회적인 평등과 함께 문화적인 성숙이 행복한 삶의 조건이 될 것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