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 리뷰 / 문학

문학은 작가의 상상력과 문체가 빚어내는 무척 복잡다단한 생명체




백승철 / 문학평론가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상상력과 세계관이다

1997년 5월 30일 작가 장정일은 징역 10월형을 받고 법정에서 구속되었다.

이로써 지난해 연말에 출간되었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로 제기된 파문은 일단 법적 매듭이 지어진 셈이다.

장정일은 지난 1987년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이며, 좋든 싫든 간에 문단에서 아주 독특한 개성을 가지고 있는 문인이다. 문단 측에서도 그의 문학세계에 대해 불만이 있는 사람이 있고, 또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더욱더 중요한 것은 그의 문학세계는 또 어떻게 변화의 모습을 보여줄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앞으로 다양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한 작가에게 법정구속이라는 무거운 형벌은 무척 가슴아픈 일이며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작가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이른바 장정일식의 작가론이다.

"작가란 바깥에서 사유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표현의 자유를 법과 정부에서 보상해 달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다. 만약 그들이 표현의 자유를 무한정으로 보장한다고 하더라도 나는 작가로서 그 속에 있는 금기를 찾아낼 것이다. 그럼으로써 바깥에서 사유하는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자 할 것이다."

장정일의 이 말은 자신의 속내를 잘 드러내고 있다. 한 작가가 탄생한다는 것은 일정한 형식의 시험을 거쳐 판검사가 되는 것과는 너무나 틀리다.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상상력과세계관이다. 작가가 획일화되어버린 나라, 예를 들어 북한의 김일성의 찬양문학 같은 경우에서 어떤 문학적인 향기를 맡을 수 있겠는가 ? 장정일이 이야기한 자유는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다양성이 존재하지 않는 문화는 부패한 정권보다 더 끔찍한 일이 될 것이다.

람세스 같은 왕일지라도 그의 취향이 소나무를 좋아한다고 해서 그 이외의 모든 나무들을 잘라버리라고 말한다면 그 나라의 산림은 어떻게 되겠는가 ? 지금 세간의 문제가 되고 있는 장정일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대한 사법부의 태도는 우리 사회와 문화의 간경화증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장정일을 재판하기 위해서는(그런 일이 가능한 것은 절대 아니지만)장정일 이상으로 문학적인 논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당연히 문학적인 토론이 처벌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더구나 이번 사건의 판결문을 보면 작품에 대한 문학적 접근을 통한 자세는커녕, 형사사건의 판결로서는 기초적 요건을 갖추지 못한데다 불성실하고 무례하기조차 해 민망스럽다. 작품에 문제가 있었다면 어느 부분이 왜 문제인지를 구체적으로 분석 제시되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판결문은 이른바 '야한 부분'만을 인용한 채 그냥 음란하다고만 했다. 인물의 성격, 행동간의 인과관계, 상황과 심리 등의 여러 조건을 분석해서 논리적으로 작품의 문제점을 이끌어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판결문은 이것을 도외시했다. 작가를 감옥에 가둘만한 외설이었다면 그 판결문 또한 문학적 상상력을 뛰어넘을 만한 논리성과 사회성을 보여주었어야 했다.

시인 남진우는 한 서평에서 이 소설의 외설에 대한 의견을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적나라한 성행위 장면이 많아서 외설로 보는 게 아니라,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 투명하게 드러나 있다는 점에서 외설로 본다' 장정일의 소설은 사법부에서 다룰 문제가 아니라 이러한 문학평론가나 시인 작가에 의해서 먼저 그리고 충분히 그 의미점을 찾아야 한다. 지면이 아까워 더 이상 거론하기도 싫은 청소년 운운하는 문제는 일말의 가치도 없다고 본다. 아직도 우리나라의 사법부는 국민을 보호받아야 할 나약한 청소년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그런데 요즘 청소년 범죄는 왜 이리 날이 갈수록 흉폭해지고 있는가 ?)

작가의 자유는 사회의 금기를 깨뜨릴 수 있는 힘이 있어야

문학과 문화를 일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은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인정하지 못하는 바보 같은 짓이다. 작가의 자유는 그 사회의 금기를 깨뜨릴 수 있는 힘이 있어야 한다. 이 글의 도입부에 인용한 장정일의 말은 단지 장정일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어떤 형태로는 모든 예술분야의 장인들은 그런 길을 걸어왔고 그 다양한 모습이 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숨구멍을 열어주는 것이다.

검찰이 단지 음란물이라고 단정한 이 소설은 어떤 소설인가 ?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은 이 소설의 전체적인 줄거리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제이'는 38세 유부남 조각가이고, '와이'는 여고생이다. 이들은 안동, 대구, 서울 등을 전전하며 다양한 성행위를 벌린다. 조각가의 소망은 성과 노동으로 구성되는 현대 사회에서 노동을 거부하고 성에 탐닉하면서 '자기 모멸'의 끝까지 나가는 것이다. '제이'가 자기 모멸의 늪에 빠진 이유는 대령 출신인 억압적인 아버지 때문이다(장정일 소설에서 아버지는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작품이 아버지의 재현이고, 아버지에 대한 고해 체계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와이'는 두 언니가 모두 강간 피해자라는 억압된 피해의식을 갖고 있다. 그녀는 누군가에게 강간당하기 전에 스스로 처녀성을 버리겠다고 작정한다. 그래서 그녀는 '제이'를 만나다. 그리고 그와 성행위를 시작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강간을 당하지 않은 '행복한 여자'이다. 한편 '우리'라는 동급생을 정신적 어머니로 삼고 있는 '와이'는 소설이 진행되면서 피해자에게 제이에 대한 가해자로 변화한다. '제이'는 파리의 아내에게로 돌아가고 그로부터 10년 후 '와이' 는 리우데자네이루의 섹스 클럽에서 일하고, '제이'는 서울에서 조각가로 정착한다.

이것이 이 소설의 전반적인 스토리이다.

작가에게 상상력의 자유를 빼앗는 것은 잔혹한 행위

작가는 이 소설을 쓰면서 자신의 심부를 들여다보는 것 같아 무척 괴로웠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의 소설 「내게 거짓말을 해봐」는 1990년부터 2년 터울로 발표했던 「아담이 눈뜰 때」,「너에게 나를 보낸다」「너희가 재즈를 믿느냐 ?」를 총결산하는 작품으로 지금까지 자신의 소설의 주제가 '자기 모멸'이었음을 분명히 밝히는 소설이라고 한다.

일정한 주제를 향해 외설의 형식을 빌린 소설들의 측면에서 보면 이 소설의 외설적인 면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에 국내에서도 번역 출간된 프랑스 작가이자 철학자인 조르쥬 바타이유의 소설을 만약 장정일 법정 판결문의 별지처럼 토막(?)내 놓으면 끔찍해서 읽기조차 두려울 것이다. 인간을 규정하는 단순한 육체적인 구성만을 보아도 성기를 비롯해 수천 개의 신체기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약 성기만을 뚝 잘라 놓고 '이게 인간이다' 라고 말한다면 과연 옳은 일인가 ? 문학은 작가의 상상력과 문제가 빚어내는 무척 복잡다단한 한 생명체이다. 그 생명체를 전체적으로 보는 것은 독자의 당연한 권리이다. 그것에 대해 다양한 의견은 독자의 취향이고 싫으면 안보고, 좋으면 보는 것이다.

장정일은 작가이다. 장정일은 이 사회에서 존경받는 대학교수도 아니고 출판사에 다니지도 않는다. 그는 오로지 글만을 써서 자신의 생계를 유지하는 전업작가이다. 작가에게 상상력의 자유를 빼앗는 일은 잔혹한 행위이다. 그리고 한 인간의 기본적인 생존수단을 빼앗는 아주 잔인한 행위이다.

재판부에서 말한 '보통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원색적이고 상스러운 표현' 운운은 장정일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 장정일은 '보통사람' 이 아니라 아주 독특한 재능을 지니고 있는 '작가'이다.

이 소설이 문학적으로 좋은 소설인가를 채 정리하기도 전에 이런 글을 써야 하는 필자의 마음은 초여름의 더위에도 불구하고 가슴 한 구석에서 찬바람이 불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