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전용관과 영상자료원
- 역사를 지키는 일은 현재의 보존과 미래의 보장
조희문 / 영화평론가
영상자료의 보존과 활용
비네가 신드롬. 우리말로는 초산증후군이라고 부른다. 필름이 산화하는 현상을 가리키는데, 쉽게 말하면 썩는다는 뜻이다. 영화필름은 물리적 재질만으로 보자면 온통 화학물질 그 자체다. 필름 베이스 자체가 화학물질인데다 그 위에 칠한 감광유제 역시 화학 물질이다. 온도나 습도 같은 주변 조건에 따라 얼마든지 성질이 변할 수 있다. 필름의 물리적 성질이 변한다는 것은 그것에 담겨있는 내용까지도 변한다는 뜻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은 우리나라에서는 유일하게 영화필름을 비롯한 각종 영상자료들을 수집, 보존하는 곳이다.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영상자료원이란 곳이 그런 일을 하는 곳이구나라고 생각할 것이고 조금 관심 있는 경우라면 그래도 이런저런 영화들을 모으고 있으니 다행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조금 더 내용을 아는 경우라면 영화자료 수집에 따른 예산, 인력, 시설과 기술이 너무도 부족하다는 사실을 안타까워 할 것이다. 체계적인 수집이 어려운 것은 물론 수집한 자료도 제대로 관리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필름은 5∼10℃의 온도와 55∼65퍼센트의 습도가 일정하게 유지되는 상태에서 관리되어야 하고, 그런 가운데서도 일정한 간격으로 바람을 쐬어 주고 씻어 주어야 한다. 안정적인 유지관리는 또 엄청난 인력과 기술 그리고 영화에 대한 이해와 사랑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우리나라 영화자료 수집과 보존, 더 나아가 활용에 관한 문제를 돌아보는 자리가 있었다. 한국 영화학회와 한국영화평론가협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한국영화 정책의 현안과 대안' 이라는 제목의 세미나(6. 14∼15, 아카데미하우스)에서 복환모 호남대 교수는 '필름 아카이브의 역할과 영상자료원의 발전 방안'이라는 발제문을 통해 영상자료 보존의 중요성과 우리의 실정을 요약했다.
미국이나 프랑스, 영국처럼 일찍 영화필름 보존에 관심을 가진 나라들의 전문가들이 모여서 결성한 것이 비영리 단체인 국제 필름아카이브연맹 FIFA. 1938년 6월, 미국 근대 미술관의 존 애버트, 독일제국 필름 앨 피프의 프랑크 헨젤, 영국영화협회의 오웬 본, 프랑스 시테마테크 프랑세스의 설립자인 앙리 랑글로아 등이 파리에서 결성했다. 영화필름 보존 운동을 국제적으로 펼쳐나가자는 다짐의 표현이었다. 현재는 65개국 108개의 필름 아카이브가 회원으로 가입하고 있으며 자료 보존과 활용에 따른 여러 가지 문제들을 교류하고 있다.
물론 우리나라도 회원국이기는 하다. 그러나 자료보존 업무 현실은 다른 나라들과 '대등한 교류'를 이야기하기에는 기구, 인력, 예산, 시설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러운 것이 없다. 1997년 4월말 현재 한국 영상자료원이 보유하고 있는 한국영화(극영화 기준)는 2,712편. 전체 제작편수 4,892편중 55.4퍼센트에 해당하는 정도다. 그러나 보유작품의 대체적인 시기는 1960년대 이후다. 영상자료원이 설립된 것이 1974년이었고 미미하게나마 그때부터 필름 수집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해방 이전의 일제시대에 만든 영화들은 「망루의 결사대」등을 비롯한 극히 일부의 작품들이 남아있을 뿐 「아리랑」이나 「임자 없는 나룻배」처럼 걸작 또는 명작으로 평가받는 영화들은 다시 볼 수 없는 상태다. 흔히 나운규를 초창기 한국영화의 개척자요 영웅처럼 이야기하지만 그가 만든 영화나 주연한 작품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아 그가 얼마나 뛰어난 영화인이었는지, 그의 영화들이 지금의 영화들과 비교해 어떻게 달랐는가를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나운규의 실종이며 한국영화 역사의 실종이다. 그런 상태에서 한국영화의 전통을 이야기하고 영화정신을 이야기하는 것은 실체가 없이 현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영화의 사회적, 문화적, 예술적 성취와 의미를 정립한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든다. 미국 영화가 전통에 바탕을 둔 여러 가지 표현기법을 개발해내고, 프랑스 영화계가 누벨바그 같은 새로운 사조를 찾아내 영화 역사를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지나간 역사를 동시대적 시각과 연결시키며 끊임없이 새로운 해석을 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영화 필름의 체계적인 수집과 보존이 만들어 낸 결과이기도 하다.
지난 1962년부터 시행해오던 영화법이 지난해 영화진흥법으로 대체되면서 영상자료 보존의 중요성이 반영되어 영상자료원의 법적 근거가 마련되기는 했지만 영상자료원의 실질적 위상이나 역할이 달라지기는 쉽지 않다. 영상자료의 수집과 활용에 대한 인식이 전제되지 않는 한 지속적이면서 전문적인 투자가 뒤따르기는 여전히 어렵기 때문이다. 현실적 여건이 어려운 가운데서 옛날 영화들은 오래 전에 유실돼 존재를 찾기 어렵고, 그나마 수집해 놓은 작품들조차 초산증후군으로 인해 훼손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면 영화필름 보존의 현재와 미래가 얼마나 불안 상태에 있는가를 새롭게 인식해야만 한다. 사라진 일제시대 영화들을 다시 보기 어렵듯 지금과 같은 상태라면 수집한 영화들조차 속수무책으로 사라지는 것을 쳐다보고만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날 세미나에서 발제자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현재 재단법인으로 운영되고 있는 영상자료원을 국립기관으로 승격시켜 기구와 인력, 예산을 운영하는 일에 독립성을 부여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당위성이 있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런 일도 영화정책을 다루는 정부의 정책자들이나 입법권을 가진 국회의원 등 정치인들이 영상자료의 보존과 활용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인식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문제다. 또한 그들이 자발적 인식은 아니라 하더라도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갖는가는 영화계 안팎에서 얼마나 많은 여론을 조성하는가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역사를 지키는 일은 현재를 보존하고 미래를 보장하는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한국영화를 보호하고 진흥하는 일의 중요한 부분이 아닐까.
한국영화 전용관
한국영화만을 전문으로 상영하는 전용관 하나가 생겼다. 서울에서 개봉관급 시설로 운영되던 허리우드극장이 3개 스크린을 가진 복합관으로 개수하면서 그중 하나를 한국영화만을 상영하는 극장으로 운영하기로 한 것. 한국영화 진흥을 위해서는 전용 상영관을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은 간헐적으로 나왔지만 기존 극장업체가 자발적으로 한국영화 전용관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끌만한 결정이라고 하기에 모자람이 없다. 6월 27일부터 다양한 기획을 통해 최신작은 물론 옛날 작품 중에서 화제작이나 문제작으로 평가받았던 영화들을 다시 상영하고 감독이나 장르 또는 시대별로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 영화들도 상영하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다.
극장 운영도 나름대로 수지를 맞추어야 하는 사업장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한국영화 전용관을 설치했다는 것은 한국영화의 수준과 상품성을 신뢰한다는 뜻이며 더불어 문화적 인식까지도 더해야 가능한 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중요한 결단을 내린 극장주에게 격려를 보내야 마땅하다.
사업주가 개척자적인 결심으로 한국영화 전용관을 설치했다면 그 다음 일은 관객이 적극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이런저런 자리에서는 한국영화를 살려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면서도 막상 한국영화를 보지 않거나 말로만 생색내는 것으로 그친다면 한국영화 전용관은 잠깐의 기사거리에 그치고 말 것이다.
오랫동안 한국영화는 외국영화(특히 미국이나 프랑스 같은)에 비해 형평 없는 수준인 것처럼 대접 받아왔지만 수입개방 이후 연간 4∼5백 편의 영화들이 쏟아지듯 들어오면서 '외국영화는 무조건 걸작' 이라는 막연한 신화는 깨졌다. 외국 영화 중에서 좋은 영화도 있지만 수준 낮은 저질 또한 부지기수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곧 한국영화에 대한 재평가로 환원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무턱댄 편견은 많이 줄어든 상태다. 결국 한국영화 전용관을 통해 한국영화를 상영하고 관람하는 과정을 통해 지나간 영화를 실제로 보면서 새로운 평가를 하고 최신작을 통해서는 이전과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면 한국영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는 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한국영화 전용관이 제대로 운영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