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료 책정의 기준확립이 시급하다
김윤철 / 연극평론가
높은 입장료는 관객의 발길을 끊게 만든다
해마다 두 차례씩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연극을 보는 관객들의 입장료를 일부 지원해 준다.
좌석당 5천 원 정도를 지원해 주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것이 관객확보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한 것 같다. 사랑의 연극잔치가 열리는 5, 6월이나 서울연극제가 열리는 9, 10월의 기간 중에는 공연장이 제법 관객들로 흥청거림을 두고 하는 말이다. 연극이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광고 등 요즘 각광을 받고 있는 영상드라마의 원형임을 감안하면 드라마예술 전체의 발전을 위해서 정부가 기왕에 문예진흥원을 통해서 가난한 연극을 지원해 주기로 작정한 바에야 예산을 최소 3배정도 늘려서 연중무휴의 지원제도로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문제를 생각해 보면 연극인 스스로도 정부의 지원과 관계없이 관객의 층을 두텁게 만들기 위한 대안을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정부가 지원해 주는 기간 동안에 연극관객이 확실히 증가한다는 사실은 연극을 공급하는 쪽에서의 입장료 책정이 수요자의 능력을 넘어서는 범위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반증하기 때문이다. 사실 요즘 웬만한 연극을 보려면 1만 5천 원에서 2만 원, 또는 그 이상의 입장료를 내야하고 또 스타성의 배우가 출연하는 연극은 좌석의 위치에 따라 최고 5만 원을 받는 경우도 있다. 브로드웨이 연극 입장료와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 미국과 우리나라의 개인당 국민소득이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마당에 이는 우리의 연극입장료가 상대적으로 비싸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가뜩이나 우리의 사회생활 구조가 고급 공연예술을 정기적으로 즐길 수 있을 만큼 안정돼 있지도 못한 판에 높은 연극입장료는 많은 잠재관객들의 발길을 아예 끊게 만드는 주요 원인이 된다. 요컨대 입장료를 낮추지 않으면 안 된다. 솔직히 말해서 1만 5천 원 안팎의 입장료를 내고 일반 대중들이 연극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만족을 다른 문화활동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만족과 비교할 때 과연 연극 쪽에 유리한 판정을 내릴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물론 수요가 적으니까 공급의 가격이 높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도 일리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그러한 주장을 수용한다면 연극입장료는 계속 올라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연극보기를 감당할 수 있는 관객이 심히 축소되어서 연극이 결국엔 대중을 외면할 수밖에 없는 최악의 경우가 불 보듯 뻔하게 예측된다. 연극입장료가 해마다 일반물가 못지 않게 급상승하고 있는 지금이 연극계가 대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해서 마련해야 할 가장 늦은 시간이다. 이미 우리는 더 이상 늦추기 힘든 시점에 와 있다. 연극이 대중의 수용미학이나 생활문화의 변화로부터 생존상의 위협을 당하고 있는 마당에 경제적인 부담까지 일반에게 강요한다면 우리의 사랑하는 연극예술은 벌써 코앞에 다가온 21세기를 견뎌내기 힘들 것이다.
입장료에 관한 새로운 시도들
연극계가 마련할 수 있는 대안이라는 것이 결국은 입장료를 낮추는 데 있음은 적어도 나한테는 자명하다. 물론 예술적 완성도를 높여서 관객이 비싼 입장료를 마다하지 않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이겠지만 우리의 연극이 그 수준까지 이르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기 때문에 장기적 안목에서 그런 방향으로 노력하되 단기적으로는 박리다매(薄利多賣)의 전략으로 연극소비자들을 유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최근 우리 연극계의 주변 부에서 입장료에 관한 한 대단히 흥미로운 시도들이 세 건 있었다. 하나는 극단 봉원패가 시도한 입장료 후불제이고 다른 하나는 극단 은행나무극장의 입장료 선별할인제다. 나머지 하나는 극단 떼아뜨로 노리의 무료공연이다. 극단 봉원패는 박구흥이 쓰고 김태수가 연출한 「슬픈 조용팔의 마지막 노래」를 샘터 파랑새극장에서 공연하면서 관객들이 연극을 보고 난 뒤 만족의 정도에 따라 스스로 정한 입장료를 내도록 하는 후불제를 도입했다. 나는 이 연극을 보지 않았기 때문에 연극적 성과를 논할 입장은 아니다.
그렇지만 연극의 불황이 오죽하면 이런 제도를 마련했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느껴지기도 하고, 또 달리 생각해 보면 극단이 관객들의 양식을 믿고 스스로의 예술성이나 오락성을 확신하기에 그러지 않았겠나 여겨지기도 한다. 결과가 어떻게 집계될지 자못 궁금하다. 그러나 왠지 이번의 정책은 연극인 스스로 자존심을 팽개친 충동적 결정같이 느껴진다. 합리적인 시장경제보다는 한탕주의적 도박적 정서경제가 판치는 사회에서, 더구나 예술을 하기에 너무나 척박한 문화토양을 갖고 있는 나라에서, 그 가운데서도 연극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아직도 낮은 환경에서 이러한 입장료 후불제가 선용될 수 있을지 심히 의심스럽기도 하거니와 기왕에 어렵게 연극을 하는 입장에서 좀더 당당하게 스스로의 예술적 완성도를 기준해서 적정한 관람료를 책정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작년 말부터 올 4월까지 무려 5개월간 「마로윗츠 햄릿」을 공연하면서 관객들과 비평계로부터 높이 평가를 받았던 극단 은행나무극장이 단편희곡찾기2라는 기획물로 임규 작·이기도 연출의 「메뚜기 한 마리 쇼윈도에 부딪쳐 마네킨을 웃겼네」와 이주영 작·윤우영 연출의 「노인과 도배장이」등 두 편의 단막극들을 모아 발효했는데 「메뚜기」에서는 식당 주방에서 일하는 밑바닥 인생들의 희극적인 풍경들이 초점 없이 산만하게 처리되었고 연기자들의 성격 창조는 다소 상투적으로 과장되었다.
「노인」의 경우는 자식들로부터 버림받은 노인과 직장에서 쫓겨난 도배장이로 나선 젊은이 사이의 대리 부자관계를 그린 극인데, 젊은이가 노인의 이야기를 유도해 내는 단순히 듣는 입장만 강조되고 스스로 독자적인 존재이유를 충분하게 갖추지 못해 극의 구조가 허약해 보였다. 그러나 연출자 윤우영의 깔끔한 극진행과 이영석, 엄효섭의 진실감 있는 성격 창조는 공연의 무게를 더해 주었다. 입장료와 관련해서 이 극단은 이번부터 분명한 기준을 적용하고 있는데, 연기경력 10년 이상의 배우들이 중심이 된 공연은 1만원 이상, 그 이하의 신인들이 주로 참여하는 공연은 입장료를 8천 원으로 묶는다는 것이다. 극단의 연혁과 아무 상관없이, 또 참여하는 예술가들의 경력이나 예술적 능력과 무관하게 마치 자존심 경쟁을 하듯 연극 입장료가 책정된 것이 저간의 사정임을 감안하면, 그래서 유치한 신생극단이나 관록 있는 극단의 입장료가 비슷하게 정해지는 것이 우리 연극계의 불가사의한 관행이라면, 이번 극단 은행나무극장이 입장료 산정의 기준을 비록 거칠게나마 정한 것은 합리적 경제개념이 한국 연극계에도 도입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해 우리에게 신선한 충격을 준다.
동국대 출신의 러시아 유학파들로 구성된 극단 떼아뜨르 노리가 창단 공연으로 마련한 「결혼전야」(전훈 작, 연출)는 기지촌 여인들의 맑은 사랑과 우정이라는 다소 식상한 소재를 다루고 있는데, 이항나, 정재은, 우현주 등 세 여배우가 인물의 성격을 창조하는 수준에 이르지는 못했어도 배우 자신을 드러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글쓰기와 상투성을 다소 극복해 주었다. 이 신생극단이 무료로 창단공연을 마련한 기획적 의도는 우선 극단의 인지도를 빠른 시일 안에 높이자는 것일 터이고 그런 전략은 적중해서 공연마다 만원을 이룩했다. 장차 공연할 레퍼토리에도 몇 차례 무료공연이 계획되어 있는데, 무료공연을 통해서 극단의 예술적 능력에 대한 신용을 축적해 나간다면, 그리고 다른 공연들에 합당한 입장료를 책정한다면, 관객확보라는 큰 목표를 달성하는 데 상당한 효력을 발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
합리적으로 입장료를 정하거나 기존 입장료의 거품을 제거하는 일은 한국연극계가 조속히 해결해야 할 당면한 과제 가운데 하나라는 인식이 위의 세 극단을 출발점으로 해서 넓게 확산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