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매체 시대의 인문학
- 창간되는 인문학 잡지들
강진호 / 문학평론가, 「작가연구」편집위원
■인문학의 '부활'을 외치는 목소리들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새로 발간된 책은 약 1억 5천 8백만 권이었는데, 그 중 가장 많이 발행된 분야는 '만화'였다고 한다.
문학이 발행 종수 면에서 전체의 13.7퍼센트였다면 만화는 17.3퍼센트였고, 발행부수 면에서는 문학이 6.8퍼센트, 만화는 10.2퍼센트였다. 발행종수나 부수에서 만화는 문학, 아동, 학습 참고서까지 제끼고 당다히 1위를 차지했다. 참고로 '철학'은 약 3백만 부가 발행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서 출판 관계자는 다음과 같이 분석한 바 있다.
사람들은 책보다 만화를 더 좋아한다! 이것은 통계로도 입증된다. 출판계가 이러한 대중들의 기호를 놓칠 리 없다. 자본주의 시장경제 속에서 살아 남으려면 돈 안되는 쪽보다 돈되는 쪽으로 나가려는 것이 자연스런 생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대 사회의 흐름이라는 것이 관계자의 분석이다. 여기서 최근에 창간된「현대사상」(1997년 봄)과「신인문」(1997년 여름),「세계 사상」(1997년 여름)을 '만화' 옆에 놔 보기로 한다. 게임이 안된다.
그러면 그것을 창간한 사람들은 정신나간 사람인가? 아닐 것이다. 그들도 뭔가 근거가 있기 때문에 여기에 뛰어들었을 것이다. 출판사의 입장에서 밑지는 장사는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지사다. 그런 계산을 못하고 무모하게 일을 벌렸다가는 창간호가 곧 종간호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내 기억이 틀리지 않는다면 1990년대 초반부터 누가 먼저 나팔을 불어댔는지 모르겠지만 여러 매체들을 통해서 인문학의 죽음이 장송곡처럼 흘러 나왔다. '인문학'은 이미 초상을 치뤘고 공공연히 '저자의 죽음'이 논의되었으며 문학은 사양길로 가고 있었다. 문자세대는 영상세대의 기세에 밀려 문화의 최전선에서 완전 퇴장당하는 듯 보였다.
그런데 바야흐로 패자부활전의 시대가 온 것인가? 요즘 들려오는 소리는 오기에 찬 '전진가'처럼 들린다. '언제 문학이 위기가 아닌 적이 있었던가? '책의 운명은 불멸이다'라고 조심스레 운을 떼더니, 이제는 '누가 감히 문학의 죽음을 운운하는가?' ('인간은 원래 문학적 DNA를 지닌 존재인데 누가 그것을 제거할 수 있으며 감히 죽음을 말하는가? '라고 영문학자 도정일은 절규하기도 했다)라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의 재기전(再起戰)'이라고 할 만한 징후들은 여기저기서 목격된다. 「신인문」의 등장도 그 현상 중의 하나라고 보면 어떨까. 내 귀에 그것은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면, 그동안의 흐트러진 대오를 정비하고 이제 저널리즘적 반격의 포문을 열어가겠다는 진군 나팔소리로 들리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렇듯 만화와 영화가 판을 치는 시대에 '인문학'의 부활을 외치는 목소리가 희미하지만 뚜렷하게 들려오는가. 그 배경은 과연 무엇인가.
■출판계에 이는 인문학의 열풍
작년에 총체적 불황 속에서 허덕였던 출판계에 눈에 띄는 이상 조류가 있었으니 그것은 '인문학 열풍'이었다. 1996년 출판 통계에 의하면 작년에는 고고학, 문화 인류학, 역사학 분야의 인문 교양서가 비교적 많이 팔렸다. 이런 현상을 감지한 출판 관계자들에 의해 1996년은 '인문 교양서 부흥의 원년'이라고 까지 불리워졌다.
그들은 독자들의 인문적 관심을 폭발시킨 책의 선두주자로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꼽는다. 그 책은 현재 2백만 부 가까이 팔렸다고 한다. 가히 기록적인 수치인 셈이다. 또 한 사람이 있다. 일본의 역사 저술가 시오노 나나미. 그련가 쓴 「로마인 이야기」는 40만부 이상이 나갔다. 김정현의 「아버지」보다는 덜 팔렸지만 작년 한해 동안 가장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20'명단 안에 들어있다. 그밖에「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신의 지문」같은 책이 독서 시장의 흐름을 주도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 하나는 만화에 빨려드는 독자와 「로마인 이야기」에 매혹되는 독자는 차별성이 있다는 것, 좀 어려운 책이라도 그것을 읽어 볼 시간과 끈기를 가진, 가시화된 독자층이 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또 출협의 한 관계자의 말을 들어보자.
결국 '인문(학)'은 부흥할 것인가? 만화와 영화와의 경쟁에 밀려 무대 뒤편으로 결국 퇴장하고 말것인가의 여부는 사상적 공허함에 허덕이고 있을 잠재된 독자층, 즉 앞에서 지적한 '그들'의 향배에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을 해 본다. '인문'을 시장에 내어놓겠다고 결단을 내린 출판사도 그것을 계산하지 않았을까.
물론 아직「현대사상」을 비롯한 인문서적의 성패를 가늠할 시점이 아니므로 뭐라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여하튼 이러한 현상의 추후 향배를 계속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