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절적이고 파편화되어가는 현대 대중사회의 삶의 풍속도 반영
-최근 엽편소설의 경향과 관심
김종회 / 문학평론가
■다기한 요인들이 얼크러져 손잡은 문학적 상황
근래 우리 문학에는 엽편소설(葉磕小說)이란 용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소설의 분량에 따른 분류법으로 그 호칭이 구분되어야 할 터이다. 잎 엽자를 써서 그처럼 작은 공간에서 삶의 예각적인 단면을 보여준다는 뜻이므로 분량 자체가 극히 짧을 수밖에 없다.
작품의 분량에 따라 소설을 나누면 장편(掌篇), 단편, 중편, 장편, 대하소설 등의 세항이 발생하는데 엽편소설은 장편(掌篇) 곧 콩트보다 약간 더 길거나 비슷하면서, 성격상으로는 단편의 창작유형을 뒤따라간다. 그리하여 극명한 삶의 한 모습을 통해 보다 확장된 제유법적 의미만을 암시하는 것인데, 대체로 작가들이 가진 극적 사건구성의 관행을 따라 콩트와 같이 의외의 반전을 시도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엽편소설이 분량의 문제만으로 국한하여 호명되는 것은 아니다. 나뭇잎과 같은 협소한 공간이라는 데에는, 그렇게 밖에 표현할 수 없거나 그렇게 표현하는 것이 오히려 적절한 제재 및 소재를 끌어안은 소설이라는 의미가 숨어 있다.
이것은 현대 대중사회의 분절적이고 파편화 되어 가는 삶의 풍속도를 반영하면서, 소설적 진실이 더 이상 장황하게 설명되어질 수 없다는 창작심리학적 측면과 사태의 핵심을 짧은 문면으로 전달받는 것으로 족하다는 수용미학적 측면을 함께 포괄하고 있다. 요컨대 엽편소설이란 새로운 창작모형의 등장은 세기말의 시대적 상황과 소설의 표현논리 그리고 독자에의 수용이라는 다기한 요인들이 서로 얼크러져 손잡은 문학적 상황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 동안 우리 문단에서는 적잖은 엽편소설이 씌어졌고 또 소설집도 나온 바 있거니와, 여기에서는 앞서 언급한 엽편소설의 성격적 특성을 유념하면서 가장 최근에 발표된 엽편소설들을 개관해 보기로 한다. 대상작품으로는 '가장 최근'이라는 선택기준에 의거하여, 「문학사상」8월호에 실린 7편을 택하기로 하겠다.
■최근 엽편소설 7편
박완서의 「나의 웬수덩어리」는 현대문명의 가장 첨단적인 이기(利器)인 컴퓨터를 소재로 하였다. 손으로 글자를 써나가는 것으로 문학을 시작한 작가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소설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형편에 이르러서, 그 변환이 용이롭지 않을 때 컴퓨터를 응대하는 시선 및 심경을 담았다. 작가 자신이 화자인 이 소설의 이야기는, 컴퓨터를 고치러 온 청년의 거침없는 오해와 더불어 더욱 큰 진폭을 갖는다. 이 소설은 결국 시대를 앞서가는 문명과 그 문명을 문자언어로 기록하는 작가의 불협화를 솜씨 있게 드러내었다.
하재봉의 「태양보다, 낯선」은 역시 근자 하재봉의 관심이 도달해 있는 지점, 그러니까 현대사회와 젊은 세대의 삶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보다 주의를 요하는 관찰의 표적은 새로운 세대가 보여주는 삶의 양태라기보다는 그것을 소설의 표면으로 밀어 올리는 중층구조라 할 것이다. 하재봉은 동성연애자의 질투와 칼부림이라는 동일한 사건구조를 3중의 장치로 사용한다. 영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 그 영화의 모델인 원작자의 실제 이야기, 그리고 소설의 화자와 영화 배역들 사이의 이야기가 그것인데, 하재봉은 이 짧은 소설 가운데 이 복잡한 여러 구조적 얼개를 요령 있게 매설하면서 충동적이고 단세포적이며 불연속적인 동시대의 성격적 특성을 잘 갈무리하였다.
이 두 작품이 서로 방향은 다르지만 현대사회의 사실적인 속성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있는데 비해 김지원의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 원재길의 「밤거리를 떠도는 사내」, 이상희의 「열 이틀만의 죽음」은 사실과 환각의 접점을 이야기의 중심축으로 하고 있다. 김지원은 우렁색시의 설화를 소설의 들머리로 하여 등장인물들의 애절한 소망을, 원재길은 밤거리에서 택시 타는 일과 관련하여 섬뜩한 경험의 익명성을, 그리고 이상희는 영화「사랑과 영혼」을 패러디한 듯한 이야기로써 자기 일상에 충실했던 한 남자의 죽음 후 집착을 그렸다.
왜 환각이라는 문제가 이처럼 높은 빈도를 보이는 것이며, 엽편소설에서의 그 의미는 무엇일까? 환각은 구차한 사실적 진술을 순간적이고 요약적으로 집성한 수단이며, 그러기에 오늘날 우리의 복잡다단한 삶을 나뭇잎처럼 제한된 공간 위에서 설명하려 할 때 가장 효율적인 발화법일 수 있지 않을까?
남은 두 편, 이승우의 「불란서 요리사 김형배씨」와 송경아의 「메리 포핀스」는 우리 일상생활 속에서 마주친 진정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승우는 한 전문직업인의 극도로 인간적인 모습을 불시에 제시함으로써, 송경아는 어릴적 시점으로 되돌아간 화자의 식모누나에 대한 간절한 회상을 바탕으로, 잔잔한 감응력의 물살을 퍼뜨려 보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7편의 엽편소설 가운데는 다행히 수준 이하의 타작(馱作)이 없었다. 이들은 동시대 삶의 조건에 여러 가지 양태로 반응하면서 시대적 속성이 무엇인지, 그것을 어떻게 드러내는 것이 좋은지, 그러면서 우리의 심금을 건드릴 이야기 거리는 없는지를 질문하고 또 답변했다. 엽편소설의 양식에 의거해 있으므로 답변의 방식은 상징적이고 함축적이며 날카롭고 예민했다.
읽고 보니 아마도 그럴 것 같다. 엽편소설이 어떤 것이다라는 선입관을 가지고 이러한 소설들을 읽는 것보다는 읽은 연후에 엽편소설이란 아!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우치는 것이 훨씬 더 빠른 이해일 것 같다. 그럴만큼 좋은 엽편소설들이 많이 씌어지고 있다는 뜻이며, 우리는 앞으로 이 소설들이 이루어 나갈 새로운 서사장르의 구축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다.